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1900년, 여기 사람이 있다
이승원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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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The Future"

작품을 읽는 내내 1980년대 중반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전체적으로는 웃긴다고 해야 할지 아님 애처롭다고 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의

웃음과 애환 그리고 슬픔을 느낀 그런 작품이었는데 한마디로 웃펐다.

 

근대화 초기에 발간되었던 신문의 시사만평에서 작품의 소재를 가져 왔다고 하는데,

현대의 신문도 그러하지만 시사만평이라는 것이 당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와 민중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속살을 가감 없이 펼치는 장으로서 - 당시는 언론의

통제가 없었나 보다 - 아무래도 당시의 사회상을 세밀히 알 수 있는 최고의 증거 자료라는

생각이 들어 작품의 소재 발굴이라는 점에서는 선택을 아주 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 시사만평은 19096월에 창간된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

실렸었다고 한다.

 

작품을 통해 느낀 단 하나의 명제를 이야기해 보라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권력자 주변의 측근비리 이야기, 경성 고아원 사건(고아를 이용한 비리), 도박(로또, 바다

이야기) 이야기와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민족의 역사적 악순환은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며, 내일도 여전히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그저

가슴만 답답한 시간이었다.

우선 작품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기본정보가 있어야 하겠다.

 

고종은 아관파천(1897) 이후 환구단(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곳)을 세우고 왕에서 황제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변화를 꾀하는 데,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닌 세계관의 변화이자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에 걸맞는 국민 계몽도 시급한 문제로 판단하여 일부 선각자들은 매체를 통한 계몽

특히 독립신문등과 같은 매체들을 활용해 연일 진정한 대한제국이 되려면 모든 국민이

깨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개화계몽 사업에 매진하게 되는데 근대화 프로젝트의 당위성

을 저잣거리 인민에게 널리 알리는 소셜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서구식 교육 방법이 도입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설, 웅변, 강연 및 토론 등이었다.

근대화 초기만해도 이런 것은 낯선 볼거리만 제공했지 그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던 시기

였으나 훗날 연설과 강연회가 인기를 끌면서 유료화를 해도 방청객 수는 1천여 명을 넘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하며 1910년에 원각사에서 대규모 유료 강연회가 열릴 예정이기도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개최가 강제 무산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일부 부정관료와 결탁을 하면서 대한 제국의 정국은 꼬여만 간다.

마침내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인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데 이는 요새말로 일종의 촛불 시위'였던 것인데 이를 거꾸로 이용해 버린

친일파에 의해 만민공동회는 흐지부지 되고 정국이 친일파로 넘어가는 결정적 단초가 되고

만다.

 

본격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요새 정치, 경제적으로 문제되고 있는 집단이 있는데

그 집단들도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OOO을 바라보는 저잣거리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자기반성

보고서를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정신을 못차리겠지만....

아무튼 개화기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내용에 대해 언급한 말도 안 되는 사연을 살펴보면

 

[무당과 점쟁이]

- 혼란의 시기에 궁궐에 진출한 진령군(무녀)으로 인해 희대의 사기꾼 이유인이라는 작자까지

  설치면서 무당과 점쟁이가 국가의 주요 보직에 임명되는데 당시 임명된 ,차관급 인사 중

  8명이, 군수급 인사 중 18명이 무당과 점쟁이 출신이었다고 할 정도로 무속인의 진출이 심각해

  이 문제를 공진회가 지적하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자 고종은 오히려 이들 편에 서서 공진회

  회원들을 박해까지 했다고 한다.

- 무녀인 진령군은 명성왕후를 등에 업고, 수련(무녀)은 고종과 명성왕후에 빙의하여 권세를

  얻으려 했으나 고종이 퇴위되어 힘을 잃게 되자 또 다른 방법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신주로

  모셔 권력을 탐하다 일제치하가 되면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 1909년은 전국적으로 전염병(콜레라)이 창궐해 종교의 힘이 평소보다 더 강력하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성 병]

- 대한제국 시기에 원각사, 연흥사 등과 같은 근대식 연극장이 세워졌는데 이는 계몽 지식인들이

  문명 개화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든 이유는

  새로운 볼거리나 공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닌 서구 문명의 활동 사진을 볼 수 있는 공간

  이라는 것과 그 곳에서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구습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이성과의 만남을

  가져도 별 문제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공연보다 잿밥에만 관심을 갖는 장소로 인식되면서 성매매 종사자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게 되면서 성병이 확산되었다고 한다.

 

[통변(통역)]

- 대한제국 시대에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통역의 희소성이 높아지면서 정동대감이라는 김홍륙이

  라는 자에 의해 농단 당한다.

  김홍륙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러시아어를 원어민 가깝게 익힌 인물로 운명적

  으로 고종과 만나며 국정 전반을 러시아 공사 배배르를 등에 업고 농단한다.

  당시 러시아어와 일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권력을 좌우하는 무기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헌병 보조원, 정탐꾼, 통변은 대한 제국을 좀 먹고 인민의 생활을 뜯어먹는 세 마귀라고

  불리웠는데 그 중 통변의 횡포가 가장 심했으며 당시의 신문 사설도 그들의 무지 막지한

  횡포를 이야기 했다고 한다.

  김홍륙의 권력 농단이 심해지자 고종은 김홍륙을 태형에 처하고 흑산도로 귀양을 보내지만

  김홍륙은 자신의 심복인 공흥식을 동원해 고종을 독살하려다 실패하여 처형된다.

 

[만민공동회]

- 쇠약해져가는 대한제국을 새롭게 재건하려는 서민들의 꿈과 희망의 총집합체가 바로 만민

  공동회였다. 만민공동회 결과 정부와 만민공동회 측은 의회를 개하고 자주적 국정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이에 불안을 느낀 친러 보수파가 기득권 보호를 위해 흑색선전을 벌이게

  되는데,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의회를 설립하고 대통령으로 박정양을 부통령으로

  윤치호를 세워 공화정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황제는 분개해 곧장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황국협회 보부상들을

  용역 깡패로 동원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철저히 탄압해 수포로 돌린다.

 

[도박, 부정축재]

- 대한제국 시대의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한 이지용은 화투대신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도박에 빠졌다고 한다.

  이지용외에도 이완용, 이용규, 박의병 등은 집을 돌아가며 국사는 제쳐두고 애첩들과 함께

  큰 판돈을 걸고 도박에 빠졌었다고 한다.

- 여흥 민씨 척족인 민영휘(본명 민영준)는 황실내탕금은 물론 직위도 뇌물로 부여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러 당시 중국에 수 천만원의 예금은 물론 자산만 현재 가치로 1조 원대에 이르렀다

  고 한다

- 한성미술품제조공장 대표이사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이봉래라는 자를 임명하였는데 그는

  을사 오적 송병준과 짜고 황실 문화재를 몰래 내돌려 팔아먹은 파렴치한 놈이며 황실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 이용익은 대표적인 탐관오리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인민의 고혈을

  짜냈음은 물론 황실 재산을 관리하고 황실을 위한 세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혹독한 세금을

  징수해 자신의 배를 불렸다고 한다.

 

[생계형 일제 협력자들]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서 나인영(나철)과 오기호는 을사오적 암살단을 결성해 활동에

  들어간다. 이때 '망보는' 임무를 서창보라는 인물에게 맡기는 데 서청보가 구속이 되어 겁을

  먹고 을사오적 암살단에 대한 비밀을 실토한다.

  1년의 구속생활 중 친일 조직인 일진회의 논리에 감화 받은 서창보는 열렬한 한일합방 추종자

  로 변질되어 황국협회 회원이되어 만민공동회를 탄압하기까지 한다.

  그는 일진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으며 철저한 친일로 돌아선다. 나중에는 일본 내각과 통감부에

  직접 편지를 써서 꼭 한일합방을 이뤄달라고 청원을 할 정도였다. 서창보의 이런 행동이

  소문나자 시민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은 다반사였는데 그가 맞은 이유 중 또 한 가지는 편지좀

  그만 쓰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 여러 친일단체가 있었지만 이용구의 일진회와 이완용의 국민연설회가 그 중 가장 막강했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가 견제하는 단체였다. 그 이유는 일진회가 한일합방 청원서를 통감부에

  먼저 제출해 선수를 빼앗겼다고 느낀 이완용이 이인직을 앞세워 국민연설회를 만들어 일제

  협력 서열 제1위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개 소탕작전]

- 광견병에 대한 문제로 일어난 일로 생각되는 데 개 소탕 작전이 박중양이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후견인이자 양아버지로 두고 활동했다고 한다.

  , 당시 개를 기르는 사람은 개의 모양, 색깔, 종류 등과 주인의 성명, 거주지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경찰서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고 사람이 호패를 차듯 개 역시 개 목걸이를 차도록

  했는데 그런 표식이 없으면 바로 도살해 버렸다고 한다.

  지위와 체면을 중시한 고위 관료들은 개목걸이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 것을 여간 찝찝하고

  불쾌한 일이었는데 을사오적이나 탐관오리의 개들이 지나가면 그 개 주인의 이름을 개 뒤에

  붙여서 조롱하고는 했다고 한다.

 

[박람회]

- 1903년 오사카 내국권업박람회에는 학술인류관이라는 것이 설치 되었는데 이는 식민지관

  으로서 한국인을 비롯한 32명의 이민족을 전시하기도 했다.

- 1907년 도쿄 박람회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일제는 조선인이 야만의 표본으로 조선

  여인을 내세우려 했으나 정부가 나서서 이를 무산시킨 사실도 있다

- 1907년 경성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해에는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의 강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전국 의병 봉기 등 비상시국으로 일본은 불안한 시국을 잠재울 방안으로 박람회라는

  이벤트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건들과 작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연계해 보면 비슷해도

아주 비슷한 사건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니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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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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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탄생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는데 작품은 그 중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에서 결정적인 지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판단되는 르크레티우스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작품의 발견과 전파를 통해 파급된 영향에 대한 것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 작품의 부제목인 책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미미한 수준에서 취급된다 -

 

작품을 읽고 독후감내지는 서평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작품의 중심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해당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작품을 읽는 내내 저자가 저쪽

동쪽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쪽 서북쪽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등과 같은 기본적인 방향성을

모르고 덤벼들어 상당히 곤혹스러웠음을 고백한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 일부 언급되고 있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언급할 때 나의 철학적 수준이라는

게 거의 초등학생 수준에 가까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온 몸으로 저자가 펼치는 주의 주장을

해석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스스로의 모습에 크나큰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기에 작품 읽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나마 작품 후반부에 문제의 작품요약분이 나와 있어 어느 정도 감을 가지고

독서에 임했으나 작품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솔직히 한계가 있었고, 답답했다.

참고로 나는 이제까지 르네상스와 관련된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해 그나마 작품에서 특정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관련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나타나도 당황하지 않고 해당 내용과 상황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그것이

작품을 읽는 내게 조금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문제의 작가 '르크레티우스'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자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그것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
'

이라는 문구 이 문구말고도 그런 내용이 곳곳에 숨어 있다 -를 앞에 두고는 왜 이런 문장이

나왔을까를 놓고 고민할 때는 심히 마음이 복잡했고 마음이 심란했다.

그 아쉬움은 책을 덮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작품에서 중언 부언되는 부분을 수직적, 수평적으로 연계시켜 해석하기에는 나의 지적 수준의

한계로 인해 심도 있는 사유나 분석보다는 작품을 읽으며 주요 부분의 앞뒤를 나름대로 엮어서

지적 수준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라도 하라고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작품을 읽기는 읽었으나 뭔가를 남기지 못하면 나의 존재 가치가, 지적

수준의 초라함을 인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 주인공인 책 사냥꾼 '포조'는 교황의 비서로 활동하다 종교적인 사건으로 인해 교황이 실각하며

  비서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책 사냥꾼'으로 활동하게 된다.

  (직업은 요리사, 세탁소, 장의업자 등이 있을 터인데 하고 많은 직업 중 그가 왜 책에 집착했는

   지는 뚜렷이 나와 있지를 않아 독자적으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작품 중간에 포조에게 있어

   고대 세계의 유물을 발굴하는 것은 삶의 최고 목적이었고, 세상에 대한 환멸과 냉소적인

   웃음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신조였다는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관점일

   뿐 그가 본격적인 책 사냥꾼이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오래된 유서 깊은 수도원 등을 찾아다니며 '양피지''파피루스' 등에 기록된 여러

  고문서를 발굴하는데, 수도원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문맹률이 70%에 달하고 있어 책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곳이 수도원일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도원이 글을 읽을 수 있고 책에 관심을 가진 집단이라는 것은 수도원의 회칙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6세기에 작성된 '성 베네닉투스'의 수도원 회칙에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성 베테딕투스는 무엇보다도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독서로 인해서 어떤 토론이나 논쟁도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선의의 질문

  이라고 해도 질문은 토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며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종교의 교리가

  의문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 책 사냥꾼 포조는 교황의 비서까지 지냈음에도 불굴하고 당시의 수도사들을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책 없이 게으른 쓸모없는 인간들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고 수도사가

  하는 수련이라는 것이 몽땅 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후원자인 '니콜라 니콜리'에게 쓴 편지에서 포조는

  "나는 성직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좋은 품성과 훌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사제의 길을 택한 후에 탐욕스럽고 나태해지며 방탕하게 타락하는 것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수도원을 드나들고 교황의 비서까지 역임했음에도 끝내 종교에

  귀의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하며 그렇게 된 배경에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교황청

  사무국은 위험천만한 곳으로 악명이 높았고 끝내는 '부잘레(Bugiale)'

  , ‘거짓말 공작소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또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도원은 믿는 자들의 모임이나 종교인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범죄자들의 작업장이고, 교황청 사무국은 인류의 사악함이 빨려 들어오는

  하수구'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 당시 사회 분위기상 종교를 갖지 않고 사회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교황의 비서로서 활동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여 끝내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이 시대를 살면서 교회 세습과 목회자의 행동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인해 손가락질 받고 있는

  많은 부도덕한 종교인들은 정말 이 대목을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 포조가 출세해 보겠다고 결심하며 발을 들여놓은 도시는 피렌체였으며 그가 출세의 도구로

  이용했던 것은 손글씨였다. 그는 당시 카롤링거 왕조풍의 필기체를 변형시켜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전역을 뒤흔든 강력한 문화적 흐름에 대한 창의적 반응의 하나였다.

  그의 글씨체는 '레테라 안티카(lettera antica), 즉 고대의 글씨체라 불렀다.

  포조에게 있어 고대 세계의 유물을 발굴하는 것은 삶의 최고 목적이었고, 세상에 대한 환멸과

  냉소적인 웃음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신조였다.

 

- 수도사들은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양피지에 적힌 오래된 글을 지워버렸다. 옛글을 지운 자리에

  수도사들은 필사하라고 지시받은 것을 다시 옮겨 적었을 것이다.

  '키케로''국가론'은 본래 4세기에 필사되었던 것을 지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시편에

  대한 묵상을 다시 필사한 7세기의 필사본 아래에서 여전히 읽을 수 있어서 발굴된 글이다.

    

- '루크레티우스'란 누구인가?

  성 히에로니무스가 작성한 초기 기독교 연대기 기원전 94년 항목에 시인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탄생, 그는 사랑의 미약 때문에 정신이 나갔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글을 썼고

  일부 작품들은 키케로에 의해 개작되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 로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리스 문명의 이기는 ''이었다.

  기원전 167, 로마 장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를 패망시키고 많은 전쟁

  전리품을 갖고 돌아와 전부 국고에 귀속시켰으나 개인적으로 챙긴 것은 사로잡은 군주 소유의

  도서관 장서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후 아밀리우스의 뒤를 따라 부유한 로마인들 사이에 큰 개인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 점차 유행처럼 번졌다고 하며 기원전 40년에는 로마의 첫 공공도서관이

  '아시니우스 폴리오'에 의해 건립되었고 4세기 무렵까지 로마에 총 28개의 공공도서관이

  생겨났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집에 조상의 가면을 보관하는데 특별히 기념할만한 행사가

  있을 경우 그 가면을 직접 쓰기도 했다고 한다. 도서관의 조각상 역시 죽은 자의 영혼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표시로서, 책을 통해서 독자가 떠올릴 수 있는 죽은 자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에피쿠로스 사상의 핵심은 지금껏 존재해온 모든 것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은 파괴할 수

  없는 입자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으며 그 수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보이지 않는 '입자들을 가리켜 더 이상 나누어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원자(atom)'라고 불렀다.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립하는 주장들은 하나같이 금욕적인 자기부정, 자기희생, 심지어 자기

  혐오의 형태를 수반했다. 또한 신이 이 우주의 창조자도 파괴자도 아니며 아마 자신의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유대의 전통을 버린 자들을 가리켜 아피코로스(apikoros), 즉 에피쿠로스 학파라

  불렀다.

 

-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책들 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극히 드물다.

  헤르쿨라네움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과 이집트 옥시린쿠스의에서 발굴한

  파편들이 지금까지 실물로 전해지는 고대 책의 전부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헌은 모두 원본이 저술된 시대와 장소,

  문화와는 동떨어진 후대에 만들어진 사본이다.

 

- 책들이 물리적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대부분 기후해충탓이었다.

  책벌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책장에 삼나무 기름을 바르는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었는데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책을 계속해서 읽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또 읽다가 닳으면 더 많은 사본을 만드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로마에서는 리브라이(libraii)’라는 복제 기술자와 스크리바이(scribae)’라는 필사가로 분화가

  일어났으며 부유한 로마인들은 친구들에게서 빌려온 책을 필사하기 위해 개인 사서와 서기를

  고용하는 일이 흔했다.

 

- 고대의 최대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어스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과학자와 시인을 비롯한 각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고 전성기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최소 50만권 이상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물관(museum)은 유물의 수집과 전시가 아니라 인간의 창조력에 의한 성취를 상징하는

  9명의 무사(mousa) 여신들에게 헌정된 일종의 신전이었다.

 

- ‘페트라르카는 평생 동안 열성적으로 진지하게 영적 성찰을 했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그는 파괴적인 무관심 속에 부서지고 사라져가는 고대 이교 문명이 남긴 문물의 표현력

  아름다움, 도전 정신을 거의 선교사 같은 열정으로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고대 문헌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집착은 후대에 부분적으로

  관습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력한 새로운 교육 커리큘럼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른바 인문학(studia humanitatis)' ,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이들 언어로 된 문헌의 습득을

  강조하고 수사학에 초점을 맞춘 학문이 탄생한 것이다.

 

- 페트라르카와 같은 열정을 지닌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총리인 '콜루치오

  살루타티'였다.

  그 역시 페트라르카와 같이 파묻혀 있는 사라진 과거에서 응축된 힘을 느꼈고, 고대 문화의

  흔적을 찾기 위한 학문적인 연구를 했다. 그와 같은 열정을 가진 인물이 또 있었으니 그는

  '니콜로 니콜리'였다.

  니콜리는 인문주의자 스승인 살루타티나 친구들 이상으로 고대 로마의 유산에 빠져 있었으며

  고대 유물을 예술품으로서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최초의 유럽인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니콜리가 고대 조각상보다 더 열광한 것은 이었다.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소제목 없이 6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다양한 주제가 얽혀 있다, 강렬한 서정적 아름다움의 순간, 종교에 관한 철학적 명상, 쾌락,

  죽음, 물질계, 인간 사회의 발전, 성의 위험과 즐거움 그리고 질병의 본질등에 관한 복잡한

  이론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는데 15세기에 만들어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필사본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50권이 넘는데 활자 인쇄술이 상용화되자 인쇄본의 서문에는

  보통 경고문과 함께 인쇄업자의 종교적 신념과 책의 내용은 무관하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 신의 섭리와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두 개의 기둥으로 유토피아의

  저자 '토모스 모어''포조'에 의해 100여 년 전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발견된 이래 가장

  일관되고 지적으로 이 시를 수용했으나 동시에 시의 기둥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세심하게 그

  핵심을 제거한 셈이다.

  모어는 자신이 쓴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우연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은 체포해서

  노예로 만들었다.

 

-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처음 발표된 이래 무신론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시가 주장하는 주요 내용은 정통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혐오스러움 그 자체로 생각

  하기에는 신들이 정말로 인간의 운명에 신경을 쓰나 그들이 바치는 여러 종교 제의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천박한 신성모독이었다. 그의 주장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진다

  2) 물질을 구성하는 기초 입자인 '사물의 씨앗들'은 영원하다

  3) 기본이 되는 입자들은 그 수는 무한하나 형태와 크기에는 제한이 있다

  4) 모든 입자는 무한한 진공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5)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6) 사물은 일탈의 결과로 태어난다

  7)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8) 자연은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9)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10)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11) 인간사회는 평화롭고 풍부하던 황금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원시의

      전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12) 영혼은 죽는다

 13) 사후세계는 없다

 14)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15)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16) 종교는 일관되게 잔인하다

 17) 천사니 악마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은 없다

 18)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19)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20)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 '조르다노 브루노'가 출현하여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대해 '그의 지각과 이성의 빛은 저 진실의

  회랑의 문을 열어젖히게 했다. 이제 지극히 성실한 탐구라는 열쇠로 그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해

  졌으니 그는 덮이고 가려져 있던 자연을 드러내 보이는 한편, 두더지에게는 눈을, 눈먼 자에게

  는 빛을 주었으며....복잡한 속내를 감히 표현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벙어리의 혀를 풀어

  주었다'등으로 그의 시를 옹호하다 화형당한다.

 

-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세상에 발을 들여놓자 인간의 경험을 환상적으로 그려낸 시인의 글귀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강력한 힘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집단과 직간접적으로 접촉이 있던 예술가들에 의해서 루쿠레티우스의

  사상은 통제하기 힘든 형태로 변환되었다.

  특히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마찬가지로 사후세계에 대한 악몽을 통해서 도덕성을 강제하려

  는 태도를 경멸했다. 또한 그에게 종교의 공포에 대항하고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 집중

  하며 종교적 광신주의를 경멸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몽테뉴에게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고 쾌락과 함께하는 삶을 살며 존엄 속에서

  죽음을 맞도록 이끌어주는 가장 확실한 지침서였다.

 

  고대의 철학적 사색은 현대 원자론은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들이 나올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토머스 제퍼슨도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통해서 세상은 오직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자연일

  뿐이라는 신념을 확고히 했으며 특히 무지와 공포가 인간 존재의 필수 불가결한 구성요소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는데 도음을 받았다.

      

 

   [책에서 얻은 지식]

- 수도사들이 필사하던 작업 공간을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 했다.

  

- 고대의 책은 대부분 두루마리 형태로 오늘날에도 유대인은 예배를 드릴 때 고대부터 이어진

  두루마리 형태의 '토라(Torah)'를 사용한다. 그러나 4세기경 기독교인은 새로운 형태인

  코덱스(codex)라는 책자 형태로 돌아서게 된다.

  

- 최고급 양피지는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벨룸(vellum)이라 불렀다.

  

- '다시 긁어낸'이라는 의미의 단어는 '팔림프세스트'라고 부른다.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책 한 권을 일컬을 때 흔희 스이는 '볼륨(volume, 약어 vol.)은 원가 말려 있거나 감겨있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 '볼루멘(volumen)에서 나왔다.

  

- 고대에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말려 있는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막대를 움빌리쿠스(umbilicus)라고 불렀으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을 '움빌리쿠스까지

  펼친다'라고 말했다

  

- 이교도라는 단어는 4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어원적으로는 '농민(peasant)'관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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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답하다 - 사마천의 인간 탐구
김영수 지음 / 알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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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9

 

[사마천(司馬遷]은 기원전 145년 사람으로 조상 대대로 사관(士官)을 가업으로 해 온 사마 씨

(司馬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관인 아버지 '사마 담'으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20대 초반

에는 전 중국을 돌며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이 때의 경험이 '사기'라는 역작을 만드는 풍부한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후세의 학자들은 분석

하고 있다.

한참 활동하던 시기인 49세 때, 흉노에게 패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한 무제의 심기를 거슬러

남성의 상징인 성기를 절단 당하는 최악의 치욕인 '궁형'을 받게 된다. 목숨만 붙어 있을 뿐

인격과 명예로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사마 천은 궁형의 치욕을 딛고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한다.

사기史記130526,500자에 이르는 방대한 통사이자 사마천이 상고 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을 갈무리한 세계사이다. 또 당시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역사 기술 방법

, 연대기, 연표, 인물, 주제별 논문을 종합한 중국 정사 서술의 표준인 '기전체(紀傳)'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집필한 사기史記는 단순히 왕과 권력자들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저잣거리

인심에서부터 광대, 동성애자, 자객, 장사꾼에 이르는 온갖 인간 군상들을 그려 낸 문학적 성과도

대단한 작품이며 살아 있는 역사 교과였던 것이다. 아무튼 굉장한 작품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다 읽고 작품이 던져 주는 메시지를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저자께서 드문드문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씩 추천한 것을 읽고 [사기]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인양 독후감을 정리

하려 하니 참으로 가소롭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고 코끼리가 어떻다고 이야기한

것과도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답답하고 힘들다.

[사기]속에 그려지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인물이 있다.

저자께서도 서평 아닌 서평에서 말씀하시고 있듯이 작품이 전해주고자 한 '난세(亂世)()'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이 점은 나도 동의한다)

첫째는 "개혁에 성공한 나라는 살아남았고, 개혁에 실패한 나라는 사라졌다"

둘째는 "인재의 발굴, 양성, 활용"에 관한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 사마천의 [사기]는 여러 인물과 사건 사고 분석을 통해 변화 및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품을 읽으며 위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면 있을 수 있는 [사기]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 꼭 짚고 넘어 가고 싶은 인물이 있어 여기에 다시 한 번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 인물들은 '제 환공' 시절에 활동했던 '환관 3인 방'에 관한 내용이다.

내가 이들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오늘을 사는 직장 곳곳에 이런 이들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조직과 구성원을 힘들게 하고 나아가서는 회사를 도탄에 빠트리는 모습을 종종 보기

때문이다.

춘추오패 중의 하나였던 제 환공의 충실한 신하 '관중'은 제 환공에게 총애하는 환관 무리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다. 그가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하였던 환관 3인은 

  

"역아, 수조, 개방

    

이라는 인간들로서, 제 환공은 혜안과 능력으로 국가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한 시대를 호령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충신과 간신을 분별치 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3인 방이 제 환공의 마음에 들기 위해 행했던 기기묘묘한 행동을 살펴 보면,

  

우선 [역아]는 요리사로 제 환공의 애첩 장위희가 이유도 없이 음식을 잘 먹지 못하자 별미

요리를 진상하여 애첩의 입맛이 돌게 하였는데, 애첩이 역아라는 요리사가 해 준 음식을 먹고

일어섰다는 이야기를 제 환공이 듣고 역아를 불러 자신이 이 세상에서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이

'사람 음식'이라는 헛소리에 필이 꽂혀 자신의 삼 개월된 아들을 삶아서 진상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고,

'수조'라는 인물은 권력자 측근으로 들어가기 위해 남성의 상징인 생식기를 잘라 스스로 환관이

된 인물이며,

'개방'은 오로지 나라와 왕만을 위한 충성심에 개인적인 일 특히 가정까지도 포기해 가면서 집과

가정을 완전히 내 팽개친 그런 인물이었다.

 

이런 삼인의 환관들을 곁에서 지켜보던 '관중'은 제 환공에게 말도 안 되는 방법과 이유로

요리사와 환관이 된 이들이 권력을 잡을 경우 어떤 짓을 할지를 모르니 이들을 멀리 할 것을

간곡히 간청하나, 제 환공은 이를 무시하고 끝내 이들을 곁에 두었다가 말년에는 이들에 의해

궁궐 내에 유폐되다 시피하여 갇혀 지내다 굶어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

이들은 끝내 제 환공의 죽음도 알리지 않다가 시체가 썩으면서 냄새와 벌레가 궁궐에 꼬이면서

제 환공이 죽은 게 들통나게 된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제 환공의 우매한 판단이 스스로를 옮아 매는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을 [사기]라는 작품은

이야기해 주고 있다.

나는 이들 삼 인 방을 보면서(작품에서는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조직

(회사) 내에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없는지 혹여나 내가 욕을 하며 있지만 그런 인간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 해 보게 된다. 사람의 일이라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지금은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어느 순간 나 역시 망각의 동물인지라 어느 위치, 높은 자리에

오르는 순간 눈이 헷가닥 뒤집혀 작품 속 환관들처럼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무튼 부단히 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내가 욕했던 그런 인간이 되지 않기를 스스로 다짐하는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둘째고 내가 그런 자리에나 오를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사기]라는 작품 전체를 다 읽을 수도 있겠으나 - 아무 것도 안 하고 생업을 포기하고 작품

읽기에 몰두한다면 -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그 방대한 작품을 무슨 전문 연구가도

아니고......

아무튼 시간을 내서 전체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기본에 관한 것''대인 관계''인화'관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면 꼭 섭렵해 볼 것을 다짐해 본다.

 

작품을 통해 본 지식들

- 사기는 130, 글자 수는 526,500자에 이르고 이를 세분하면 본기(本紀), (), (),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런 역사서 체제를 기전체(紀傳體)라고 부른다.

  · 본기(本紀)는 황제에 관한 기록, · ()는 연표

  · ()는 국가제도와 문물에 관한 전문적인 논문 · 세가(世家)는 황제를 보필했던 인물

  · 열전(列傳)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 관한 기록이다.

- ()자에 나무 목()자를 붙이면 억울할 왕자가 된다.

  무엇인가 잘못 적용시켰다고 할 때 이 글자를 씁니다.

- '사마천'은 죄인으로 죽었기 때문에 후손들은 자신의 성을 변신시켜 존재해 왔는데 '()'자에

  작대기를 하나만 그으면 '()'씨가 되고, ()자에 이수 변()하나만 붙이면 '()'씨가

  되어 오늘날 이 두 성은 사마천의 후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주나라 포왕이 '포사'에 빠져 나라가 망하는 데 여기서부터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 춘추오패라 함은 제나라 환공, ()나라 문공. ()나라 목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합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 제 환공의 인사정책을 잘 설명해 주는 단어가 '정료지광(庭療之光)'으로 이는 인재를 끌어

  들이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 즉 궁정 뜰에 횃불을 환히 밝히고 24시간 개방했다는 이야기다.

- 춘추시대의 정치와 외교를 아우르는 명분은 '존왕양이'로서 이는 주나라의 천자를 떠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 진 문공과 개자추로 인해 '단오'라는 날이 생겼다.

- ‘오자서의 일가를 무참히 짓밟은 초나라 평왕 시절의 '비무기'는 증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사건을 획책한 희대의 간신이다,

- ()나라 헌공이 괵나라를 정벌하러 갈 때 우나라에게 길을 내어 달라고 한다.(가도벌괵)

  그러나 우나라 대부 '백리해'는 이를 결사코 반대한다. 그런 '백리해'초나라에 포로로 잡혀

  가는 데, 진나라 목공이 '공손지'라는 참모의 건의를 받아 들여 숫양 가죽 5장과 교환하여 그를

  진나라로 데려 오면서 번성기를 누린다.

- 초나라 장왕은 말을 무척 좋아했다 그로 인해 많은 문제가 있었다.

- 중국의 식객 문화는 문인을 시스템적으로 양성하는 데 일조를 하였는데, 전국 시대의 4대 식객

  은 맹상군, 평원군, 위공자, 충신공이다.

- 기원전 522년 오자서가 오나라로 망명한 기원전 473년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햇수로 50년을

  이 기간을 오월춘추의 역사라 한다.

- 진시황릉은 평지에다 흙을 날라 봉분을 쌓았다. 진시황릉 이전의 제후나 주나라 왕은 평지에

  묻었다. ,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진시황 때부터 봉분을 만들었는데 평지에 흙을

  쌓아 산처럼 만들었는데 이를 '이릉위산(以陵爲山)'이라 한다.

- 진승은 중국 최초의 농민 봉기군 수령으로 진나라가 멸망하는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

  그가 한 말 중 명언 "황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이다

- '사기'에는 동중서에 관한 이야기가 한 줄도 실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몸 보신에만

  급급해 인격적으로 높이 칠 것이 없으며 문장 또한 황제에게 아부하는 가식 투성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 정나라의 '자산'이라는 대부는 공자보다 30년 연상으로 공자가 존경하던 인물이다.

  그는 세발 달린 솥인 정()에 제정한 법을 새겨 주조했으며 이것을 관청 문 앞에 세우고 누구나

  법을 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하며 왕족 집안 출신으로 개혁 정치를 밀어 부쳤다고 하며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여론과도 소통의 길을 열어 두었던 열린 가슴의 정치인이었다

- 외거불피구 내거불피친(外擧不避仇 內擧不避親) 이라는 말이 있는 데 이는 외부에 있는 사람을

  추천하되 원수라 해서 피하지 말고 친한 내부의 인사를 추천하되 친척이라고 해서 피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인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말이다. (진나라 도공 때 '기해'라는 사람의 말)

- ()란 옛날 군대가 보통 하루에 행군하는 거리인 30리를 말한다.

- '운명(運命)'은 움직일 운()자를 쓰는 운명이기에 즉, 바꿀 수가 '있는'것이나 본디 '(宿)'자를

  쓰는 숙명(宿命)은 바꿀 수가 없다.

- 중국은 동서로는 시차가 4시간, 남북으로 기온차가 70도 정도 난다.

  1년을 살려거든 곡식을 심고, 10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고, 100년을 살려거든 덕행을 베풀라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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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 지음, 허형은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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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5

 

우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저자에 대한 연구부터 하고자 한다.

저자 '칼 포퍼(Popper, Karl Raimund, 1902 ~ 94)는 영국의 대표 철학자로 오스트리아 빈 출생.

유태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3살 때 사회주의 경향의 책들을 읽으며 좌경화하고 이에 따른

단체활동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수학문에 대해 매료되면서 그는 '과학 방법론'에 심취해 1918년부터 빈 대학에서

1925년부터는 철학, 수학, 물리학·심리학 등을 배우고, 1928년 철학 박사 학위 취득. 유대계로서

38년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에 망명했다가 1946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대학

강사 및 교수를 지냈고, 65년 기사 작위(爵位)를 받았다. 런던경제대학 등에서는 과학 방법론을

강의했다.

그의 최초의 저서 탐구의 논리(1934)는 그의 과학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작으로 그는

여기에서 과학(지식)은 합리적인 가설의 제기와 그 반증(비판)을 통하여 시행 착오적(試行錯誤的)으로 성장한다는 '비판적 합리주의'의 인식론을 제창, 그 창시자가 됨.

그 후 그의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사회과학론, 역사론, 인간론 등을 전개하였고 실수로부터

배움으로써 진리에 접근한다는 생각은 현대의 지적(知的) 세계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 자유사회의 철학과 그 논적(論敵), 추측과 반박, 객관적 지식등의 저서가 있다.

그의 사회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전체주의와의 끈질긴 싸움'이다.

포퍼는 하나같이 그 분야 최고의 지성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으며 논쟁으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그에 필적할 만한 인물은 독일 사회철학자 하버마스정도일 뿐이다.

50년대 중반에는 논리실증주의의 지도적인 철학자 루돌프 카르납과 겨뤘다. 이 논쟁 과정에서

포퍼는 귀납주의를 내세우는 카르납에 맞서 '반증가능성'이라는 의미의 새로운 척도를 제시했다.

작품은 읽었지만 도저히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결국 나의 머리는 이런 철학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

된다. 작품을 읽는 일련의 과정이 그리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반대로 책을 손에서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여러 요인도 있었다그것은 저자가 독백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는 철학 공부를 택하지 않았는데 내가 나의 것으로 간주한 '문제들'이 철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나를 이끌었다

 

는 문구를 읽는 순간 뭔가 모를 이상한 그 무엇이 내 안에서 용솟음쳐 올라왔었다.

한마디로 작품을 '오기'로 끝까지 읽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선으로 물러난 김인식 한화 감독이 예전에 스탠딩 삼진을 먹고 벤치로 들어오는

선수들에게 "사람이 사람이 던지는 공도 못 쳐"라고 일갈하였듯이, 철학자도 같은 사람인데

사람이 사람이 사고한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을까 하는 '오기' 아닌 '오기'가 발동해서 끝까지

읽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유와 민주화 그리고 과학 등과 같은 소제목에 따른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두루 다루고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과거를 이해해야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타이틀 속에 언급하고 계신

[겸손]에 대한 부분과

 

[비폭력의 미덕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 최대의 악은 비정함이라는 것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는 대목은 나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했던 대목이었다고 생각한다.

철학 성인께서 하신 말씀을 읽으며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잊고 살았던 부분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며, 이런 작품과 같이 개인적 깊은 성찰을 요구하거나, 스스로 느끼게

하는 어려운 부분을 접하게 되면 '내가 이 고생을 왜 사서하지' '이게 무슨 생고생이냐' 식으로

이런 인문학 서적을 회피하려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책을 완독하고 나서 항시 드는 생각은

'나를 다시 한 번 돌아 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생각이 들어 기분은 일단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우상인 '스티브 잡스''소크라테스'와 점심이라도 한 번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한 그 깊은 이유까지는 몰라도 그 기분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작품에서 언급하신 철학자의 말씀

- 국가별 가치체계의 차이는 아마도 교육체계의 차이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

- 철학자라면 자신이 시대정신에 편승해 자신의 지적 독립성을 흔들리게 만들지 않았는지 끊임

  없이 자성하면서 확인해야 한다고 믿는다.

 

- 철학은 그 시대의 '판관'이어야 한다. 철학이 시대 정신의 '표현자'가 되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휴고 폰 호프만스탈

 

- 이성이나 합리주의를 논할 때는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수와 오류에 대한 타인의 비판을

  통해 그리고 나아가 자기비판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자기 생각에 대한 남의 비판을 쾌히 받아 들이고 남의 생각을 신중히 비판함으로써 타인에게서

  기꺼이 배울 의향이 있어야 한다.

- 칸트가 이야기한 '인간적 인격체의 가치'는 모든 인간 그리고 그 사람의 신념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모든 합리주의자는 누구도 철학을 가르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철학적

  사색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칸트의 지론에 동조해야 한다.

- 그리스에서 발생한 자연철학 중 '이오니아학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

  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그리스 철학이 부활한 이래 유럽 학문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 칸트가 '자유'에 대해 제시한 해답은, '인간의 공존에 필요한 정도까지만 개인의 자유를 제한

  하며 그 제한은 모든 시민에게 최대한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 국민의 다수가 원할 때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도록 정치 제도가 갖춰져

  있다면 그 국가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다.

-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잘 풀리느냐 하는 것은 대체로 운이나 복의 문제며, 비교적 작은

  부분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성실성 같은 여러 가지 미덕에 의해 좌우된다.

- 우리가 정치적 자유를 갈구하는 이유는, 더 쉬운 삶을 소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 자체가

  물질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궁극적 가치를 갖기 때문이어야 한다.

- 모든 생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다.

  모든 생물은, 실력이 좋건, 형편없건 또 성공하건 못하건 간에,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발명가 겸 전문가들이다.

- 누구든 자신의 이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의 목숨 밖에 없다.

- 냉소주의자들은 역사에서 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주로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해 왔다고

  주장한다.

- 전제정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잃게 하여 우리의 인간다움을 박탈한다.

- 냉소주의적 역사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을 곧바로 계승한 이론인 듯하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해석 역시 민족주의 혹은 인종주의적 역사관의 몰락 후 대유행한 이론이었다.

- 마르크스적 사관은 유물사관 혹은 역사적 유물론이라고도 하는데, 사상의 기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철학으로 거슬러 간다. 역사를 민족간의 투쟁이 아닌 계급투쟁으로 보는 헤겔

  역사관을 재해석한 것으로, 목표는 단 하나 사회주의(혹은 공산주의)가 역사적 당위성에 의해

  승리해야 한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 미래에 관해서 라면, 우리는 예언을 구하지 말고 도덕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행동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이데올로기라는 색안경을 버리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러시아에서의 마르크시즘의 승리와 더불어 공산당이 전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선전과

  조직화에 쏟아 부은 엄청난 노력은 급기야 서방 국가들에서 저마다 좌파와 우파세력이

  극명하게 양분되도록 만들었다.

- 마르크시즘은 마르크시즘 때문에 죽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시즘의 파워는 마르크시즘

  사상의 공허함 때문에 죽었다.

- 마르크시즘 이론 혹은 마르크스 사상에서 가장 설득력을 갖는 측면은, 그것이 절대적인 과학적

  확실성을 가지고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역사 이론'이라는 주장이다.

- 위대한 과학자 중 '졸리오 - 퀴리 부부', 퀴리 부부의 딸인 '이렌과 남편 프레데릭은 죽을 때까지

  철저한 공산당원이었다.

- 진정한 과학은 대개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하는 발견들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확고한 사실들'이 아니라 '불확실한 가설들'로 이루어진 것이 진정한 과학이다.

  따라서 연구자는 때로 자신의 지적 책임을 시험대에 올리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 마르크스가 사용한 의미로의 '자본주의'는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위 '궁핍화 법칙'같은 내재적 성향을 가진 사회나 자본가 독재가 조종하는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머리 속에서 꾸며 낸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체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 평화와 문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민족자결의 원칙'의 실행 불가능성과 잔인성을

  전 세계가 깨닫도록 노력해야 한다. 민족자결 주의는 이미 잔학하기 이를 데 없는 소수민족

  테러리즘으로 전락했다.

- '학습'이란 실패한 해법이나 이미 제거한 해법들을 점점 대상에서 제외시키다 나중에는 '대충'

  떠올려 볼 정도가 되어 결국 성공한 해법이 거의 유일한 고려 대상으로 남게 되는 것을 뜻함.

- 나의 생각을 말로 구성한다는 것은 나의 성격, 나의 기대치, 그리고 어쩌면 나의 두려움까지도

  다른 이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내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 아인슈타인과 아메바의 차이?

  둘 다 시행착오 방법을 사용하는데, 아메바는 오류를 싫어할 수 밖에 없다.

  오류가 제거 되면서 함께 사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오직 실수를 통해서

  만 학습할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새로운 시행으로 새로운 오류를 포착하고 그 오류를 이론

  에서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메바는 할 수 없으나 아인슈타인은 가능한 그 단계는

  바로 비판적인 자세, 그것도 자기 비판적인 자세이다.

  비판적 접근법은 인간의 언어가 낳은 산물 가운데서 최고의 미덕이다.

- 현대의 과학적 접근법을 근대과학 이전의 접근법과 구분해 주는 것이 '반증의 시도'라는 .

- 과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는 비판적 접근이다.

  의식적 비판 태도는 제거 과정에서 그리고 비판과 반증 시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 실재론적 세계관은 진리에 대한 근접성과 함께 끊임없이 관념화하는 성질을 띠는 과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 진리가 무슨 뜻인지는 누구나 안다. 진리는 이야기하는 대상에 대한 실재를 담은 진술이다.

- 과학은 문제에서 출발한다. 과학은 대담하고 창의적인 여러 가설을 통해 그 문제들을 해결

  하려고 시도한다. 가치 있고 검증 가능한 가설들이 수많은 오류를 탐색한다.

  우리는 오류를 찾아내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과학은 이런 것이다. 엄격한 오류 수정

  시스템아래 놓이는 대담하며 종종 무책임할 정도로 무모한 아이디어들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과학이다.

- 인간의 언어를 포함한 모든 동물의 언어는 인간과 동물에게 내재된 여러 가지 욕구가 존재한다

  는 것을 전제로 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은 유전적으로 선험적인 지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모든 후험적

  지식은 우리가 선험적으로 발명한 것들로부터 선택된 것들이다.

  칸트 철학에서 선험적 지식이란 감각기관의 관찰에 앞서 습득되는 지식을 뜻하며, 후험적

  지식이란 감각기관을 통한 관찰 이후에 습득되는 지식을 뜻한다.

-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가설적이다. 또한 일부는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환경에 대한

  적응이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예행과 불가피한 착오 그리고 오류 제거의 결과다.

- 생물학적 관점에서 동물 및 인간의 지식은 대대 무의식적인 기대들, 혹은 잠재적 기대들로

  이루어져 있다.

- 인간이 파벌을 형성하고 시류를 좇으려는 비겁함은 우리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잠재적으로

  알고 있기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 신들은 확실한 지식을 가졌지만 인간은 다만 의견을 가질 뿐이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사상을 정확하고 건전한 관점으로 최초로 바꾸어 놓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우리 인간도 확실한,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검증된 지식에

  이르는 수단으로 '귀납법'을 들고 나왔다.

- 생물 혹은 유기 생명체의 진화는 곧 '화학적 경로들의 총체'의 진화라는 사실을 최초로 꿰뚫어

  본 학자는 벨기에의 생화학자 '마르셀 플로킨'이다.

- 모든 이론은 그것이 과학이론이든 다른 이론이든 시행이고 발명이다.

- 자기 비판적 태도와 객관적 진리.

  이 두 가치는 인간 정신의 산물인 언어와 함께 우리 세상에 등장했다.

  언어는 우리가 세운 이론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게 해 주고, 그 이론들을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 또는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외부의 세계에 속하는 대상으로 볼 수 있게 해 준다.

- 케플러도 오류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의 실수에서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고, 하나의 자아이며, 물리적 법칙들에 제한을 받는 육체에 묶인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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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생관 최북
임영태 지음 / 문이당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 7

  

호생관(豪生館)은 중인 출신 그것도 예술을 하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직업 귀천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던 시절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후대로까지 전해지에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작품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단서 조항을 엮어서 작가만의 상상의 나래로

펼쳐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호생관(豪生館)이란 붓으로 먹고 산다는 뜻이다.

[호생관 최 북]은 무주가 낳은 조선시대 화가, 문예 부흥기인 영, 정조 시대의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등 시, , 화에 능한 실학자들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주인공이다.

화풍은 겸재 정선의 영향을 받았으며, 걸작으로 꼽히는 '추경산수도'를 비롯 수각산수도',

'한강조어도' 등이 있다고 한다.

작품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양반이 찾아와 그림을 그려 달라고 채근하자 그림 그릴 기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촉하는 양반 앞에서 스스로 눈을 찔러 애꾸눈을 만들었다던가, 치열한 투전

판에서 사기치는 투전꾼을 목격하고 죽도록 얻어 터지면서도 항복을 받아 내는 에피소드는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그가 평소에 보여준 결과를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느낌은

드나 전해지는 이야기가 뚜렷이 없어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이야기해 그는 느긋하고 유연한 필묵가로 알려진 그림솜씨와는 달리 성질은 괴팍하였다고

하며 오기와 고집, 자만으로 똘똘 뭉친데다 남한테 좀처럼 굽히지 않는 뻣뻣한 성격의 소유자

였다고 한다. 특히, 기행과 주벽이 남달라 심지어 '미치광이'라는 평까지 있는데, 살아생전 자신의

그림을 한 점 밖에 팔지 못하고 궁벽한 생활 속에서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른 '빈센트 반 고흐'

비견된다 할 것이다.

 

최북은 집안 대대로 산원(궁궐의 회계)출신인 아버지 '최상여' 밑에서 출생한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이 못 이룬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자 이를 말리려 하나 그림에 대한 아들의

열정을 이해하고 오히려 아들의 후원자가 된다. 궁궐의 부정 문제로 아버지 최상여가 관직을

나와 부승지 집 청지기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운명적인 만남인 부승지의 딸 '이담'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최북'의 그림에 대한 범상치 않은 재능을 알아본 '이담'은 최북을 겸재에게 소개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그림 실력을 더욱 연마해 나가게

된다.

그러다 부승지(이현조)가 모반에 휩쓸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데 자신의 딸과 최북과의 관계를

눈치챈 부승지는 자신의 위기를 직감하고 '계회도'라는 그림과 함께 딸을 부탁한 직후, 가문은

몰락하게 되며 그의 딸 이담은 관비로 전락한다.

부승지가 최북에게 넘긴 '계회도'는 모반을 모의할 당시의 모습을 사실처럼 그린 그림으로 훗날

모반에 참여했다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병조 판서를 통해 그림의 존재를 갖고 부승지의 딸

'이담'을 구하지만 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양반을 겁박했다는 누명을 쓰고 오히려 옥에

갇힌다.

최북으로부터 그림을 넘겨받은 '이담'은 협상을 통해 자신의 집안을 구하고 최북도 나올

있도록 조치를 취하나, 최북은 자신의 사랑인 '이담'이 자신보다 집안의 구명 운동에 더 힘을

쓰고 있음에 실망하고 여인 곁을 떠난다.

그것도 잠시,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전해들은 최북은

후회를 하고 '이담'과의 사람을 이어 가려 하나 병색이 깊어진 '이담'과의 연은 오래가지를 못하고

만다.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오해와 그로 인해 길게 가지 못한 사랑에 대해 후회를

하며 거의 기인의 생활을 하게 된다. 주막에 기거하면서 돈이 있으면 그림 대신 술잔을 잡았으며

또 돈이 없으면 술 값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 온 양반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자 아직은 그릴 기분이 아니니

다음에 오라고 해도 계속 그림을 재촉하자 스스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작품을 통해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동양화를 보는 안목을 약간 다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보면

최북의 여인 부승지의 딸 이담의 소개로 겸재 선생을 만나 그 분과 교류가 있던 관아재 조영석,

사천 이병연, 심사정, 신광수 등과 교류를 하게 되는 데, 어느 날 그림 한 점을 들고 찾아 온

사람에게 그림(일로연과도)에 대한 평을 부탁하자 그 그림을 평하며 한 이야기이다.

 

그림은 가을 색이 짙은 호수가를 거니는 백로 두 마리를 그리고 있었다.

도화란 눈을 즐겁게 하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그를 통해 주고받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

 도화란 독화(讀話), 읽고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백로가 있는 그림을 일로연과도라 하는데 '일로'하 함은 백로가 한 마리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백로 한 마리의 일로(一鷺)는 길 로()자를 쓴 일로(一路)이기도 합니다. 발음은 같으면서 뜻은

 다른 동음이자(同音異字) 방법을 통해 그림에 의미를 평하는 것 인바, 이 경우 '일로'란 과거에

 응시하러 떠나는 길을 뜻합니다.

 그러면 '연과'란 무엇입니까? 열매인 연과(蓮菓)이면서 연속으로 급제하는 연과(連科)이기도

 합니다. , '연로연과'란 한 걸음에 향시와 전시 모두 급제하라는 말이고, 과거를 보러 떠나는

 사람에게 백로 그림을 선물하는 게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백로가 두 마리면 어찌 됩니까.

 굳이 이름을 붙이면 '이로연과도'가 되겠는데, 단번에 급제하라는 뜻은 사라지면서 대신 계절의

 이치에 맞지 않음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로 평을 하고 있는 대목과 또 다른 사례를 들면

 

예전에 어느 화인이 뱃사공을 그리면서 임금만이 입을 수 있는 붉은 옷을 사공에게 입혔다가

 참수를 당했습니다. 쏘가리를 그릴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쏘가리도 두 마리를 그리게 되면

 쏘가리(鱖漁, 궐어)''자는 '대궐의 궐'자와 음이 같아 만약 쏘가리가 한 마리면 '대궐에

 들어가 큰 벼슬을 지내라'는 축원의 뜻이 됩니다만 두 마리가 되면 대궐이 둘이요 임금도 둘인

 것이니 모반의 뜻을 담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사례만 들어도 - 실제 호생관 최북이 말했는지 모르겠으나 - 우리가 간혹 밋밋하게

마주치게 되는 우리의 동양화를 우습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깊은 공부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 대목이었다.

어쨌든 호생관 최북 선생은 못다 이룬 사랑을 그림에 쏟아 부었던 그런 안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 비친 순 우리말

 

- 서름하게 : 1.남과 가깝지 못하고 사이가 조금 서먹하다.

                2.사물 따위에 익숙하지 못하고 서툴다 

- 허청한 :이렇다 할 이유나 근거가 없이 함부로 

- 청처짐하다 : 1.아래쪽으로 좀 처진 듯하다.

                   2.동작이나 상태가 바싹 조이는 맛이 없이 조금 느슨하다.

- 중지막 (평복 차림) : 예전에,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가 소창옷 위에 덧입던 웃으로 넓은 소매에

                            길이는 길고, 앞은 두 자락, 뒤는 한 자락이며 옆은 무가 없이 터져 있다 

- 잣바듬하다 : 작은 물체 따위가 밖으로 약간 벋은 듯하다

- 나볏이 (목례를 보냈다) : 몸가짐이나 행동이 반듯하고 의젓하다.

- 방각본 소설 : 필사본으로 전하여 오던 것을 영리를 목적으로 판각(版刻)하여 출판한 고전 소설.

- 서그럽게(웃고만) : 마음이 너그럽고 서글서글하다.

- 핍진하다 : 1. 재물이나 정력 따위가 모두 없어지다.

                2. 실물과 아주 비슷하다.

                3.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 애오라지 : 겨우, '오로지'의 강조말   

- 투미한 인간 : 1.어리석고 둔하다.

                    2.[북한어]욕심 사납고 심술궂거나 무뚝뚝하고 인정미가 없다

                    3.[북한어]목소리가 거칠거나 똘똘하지 못하다.

- 여항 거리 : 여염(閭閻)과 같은 말로,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

- 서분하게 : 서운하다(마음에 모자라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이 있다)의 방언

- 경수소 : 조선 시대에, 중요한 길목에 설치하여 순라군(巡邏軍)들이 밤에 지키도록 한 군대의

             초소. 과거에 통행금지를 어긴 행인을 가두던 곳()

- 명사도 : 명부전에 걸리는 불화 중의 하나로 흔히 지옥도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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