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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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근대가 탄생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는데 작품은 그 중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에서 결정적인 지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판단되는 르크레티우스저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작품의 발견과 전파를 통해 파급된 영향에 대한 것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 작품의 부제목인 책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미미한 수준에서 취급된다 -

 

작품을 읽고 독후감내지는 서평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작품의 중심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해당 작품을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작품을 읽는 내내 저자가 저쪽

동쪽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쪽 서북쪽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등과 같은 기본적인 방향성을

모르고 덤벼들어 상당히 곤혹스러웠음을 고백한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 일부 언급되고 있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언급할 때 나의 철학적 수준이라는

게 거의 초등학생 수준에 가까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온 몸으로 저자가 펼치는 주의 주장을

해석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스스로의 모습에 크나큰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기에 작품 읽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나마 작품 후반부에 문제의 작품요약분이 나와 있어 어느 정도 감을 가지고

독서에 임했으나 작품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솔직히 한계가 있었고, 답답했다.

참고로 나는 이제까지 르네상스와 관련된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해 그나마 작품에서 특정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관련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나타나도 당황하지 않고 해당 내용과 상황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그것이

작품을 읽는 내게 조금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작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문제의 작가 '르크레티우스'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자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그것은 인생을 즐기지 못한 채 불완전하게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
'

이라는 문구 이 문구말고도 그런 내용이 곳곳에 숨어 있다 -를 앞에 두고는 왜 이런 문장이

나왔을까를 놓고 고민할 때는 심히 마음이 복잡했고 마음이 심란했다.

그 아쉬움은 책을 덮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작품에서 중언 부언되는 부분을 수직적, 수평적으로 연계시켜 해석하기에는 나의 지적 수준의

한계로 인해 심도 있는 사유나 분석보다는 작품을 읽으며 주요 부분의 앞뒤를 나름대로 엮어서

지적 수준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라도 하라고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작품을 읽기는 읽었으나 뭔가를 남기지 못하면 나의 존재 가치가, 지적

수준의 초라함을 인정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리하고 싶었다.

 

- 주인공인 책 사냥꾼 '포조'는 교황의 비서로 활동하다 종교적인 사건으로 인해 교황이 실각하며

  비서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 '책 사냥꾼'으로 활동하게 된다.

  (직업은 요리사, 세탁소, 장의업자 등이 있을 터인데 하고 많은 직업 중 그가 왜 책에 집착했는

   지는 뚜렷이 나와 있지를 않아 독자적으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작품 중간에 포조에게 있어

   고대 세계의 유물을 발굴하는 것은 삶의 최고 목적이었고, 세상에 대한 환멸과 냉소적인

   웃음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신조였다는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관점일

   뿐 그가 본격적인 책 사냥꾼이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오래된 유서 깊은 수도원 등을 찾아다니며 '양피지''파피루스' 등에 기록된 여러

  고문서를 발굴하는데, 수도원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문맹률이 70%에 달하고 있어 책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곳이 수도원일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도원이 글을 읽을 수 있고 책에 관심을 가진 집단이라는 것은 수도원의 회칙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6세기에 작성된 '성 베네닉투스'의 수도원 회칙에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성 베테딕투스는 무엇보다도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독서로 인해서 어떤 토론이나 논쟁도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선의의 질문

  이라고 해도 질문은 토론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며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은 종교의 교리가

  의문과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 책 사냥꾼 포조는 교황의 비서까지 지냈음에도 불굴하고 당시의 수도사들을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무지할 뿐만 아니라 대책 없이 게으른 쓸모없는 인간들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고 수도사가

  하는 수련이라는 것이 몽땅 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의 후원자인 '니콜라 니콜리'에게 쓴 편지에서 포조는

  "나는 성직에는 나서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좋은 품성과 훌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사제의 길을 택한 후에 탐욕스럽고 나태해지며 방탕하게 타락하는 것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수도원을 드나들고 교황의 비서까지 역임했음에도 끝내 종교에

  귀의하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하며 그렇게 된 배경에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교황청

  사무국은 위험천만한 곳으로 악명이 높았고 끝내는 '부잘레(Bugiale)'

  , ‘거짓말 공작소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또다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도원은 믿는 자들의 모임이나 종교인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범죄자들의 작업장이고, 교황청 사무국은 인류의 사악함이 빨려 들어오는

  하수구'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 당시 사회 분위기상 종교를 갖지 않고 사회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것도 교황의 비서로서 활동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여 끝내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이 시대를 살면서 교회 세습과 목회자의 행동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인해 손가락질 받고 있는

  많은 부도덕한 종교인들은 정말 이 대목을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 포조가 출세해 보겠다고 결심하며 발을 들여놓은 도시는 피렌체였으며 그가 출세의 도구로

  이용했던 것은 손글씨였다. 그는 당시 카롤링거 왕조풍의 필기체를 변형시켜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전역을 뒤흔든 강력한 문화적 흐름에 대한 창의적 반응의 하나였다.

  그의 글씨체는 '레테라 안티카(lettera antica), 즉 고대의 글씨체라 불렀다.

  포조에게 있어 고대 세계의 유물을 발굴하는 것은 삶의 최고 목적이었고, 세상에 대한 환멸과

  냉소적인 웃음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한 신조였다.

 

- 수도사들은 여러 도구를 이용하여 양피지에 적힌 오래된 글을 지워버렸다. 옛글을 지운 자리에

  수도사들은 필사하라고 지시받은 것을 다시 옮겨 적었을 것이다.

  '키케로''국가론'은 본래 4세기에 필사되었던 것을 지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시편에

  대한 묵상을 다시 필사한 7세기의 필사본 아래에서 여전히 읽을 수 있어서 발굴된 글이다.

    

- '루크레티우스'란 누구인가?

  성 히에로니무스가 작성한 초기 기독교 연대기 기원전 94년 항목에 시인 티투스 루크레티우스

  탄생, 그는 사랑의 미약 때문에 정신이 나갔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글을 썼고

  일부 작품들은 키케로에 의해 개작되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4'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 로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리스 문명의 이기는 ''이었다.

  기원전 167, 로마 장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를 패망시키고 많은 전쟁

  전리품을 갖고 돌아와 전부 국고에 귀속시켰으나 개인적으로 챙긴 것은 사로잡은 군주 소유의

  도서관 장서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후 아밀리우스의 뒤를 따라 부유한 로마인들 사이에 큰 개인 도서관을 세우는

  것이 점차 유행처럼 번졌다고 하며 기원전 40년에는 로마의 첫 공공도서관이

  '아시니우스 폴리오'에 의해 건립되었고 4세기 무렵까지 로마에 총 28개의 공공도서관이

  생겨났다고 한다.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집에 조상의 가면을 보관하는데 특별히 기념할만한 행사가

  있을 경우 그 가면을 직접 쓰기도 했다고 한다. 도서관의 조각상 역시 죽은 자의 영혼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표시로서, 책을 통해서 독자가 떠올릴 수 있는 죽은 자의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에피쿠로스 사상의 핵심은 지금껏 존재해온 모든 것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은 파괴할 수

  없는 입자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으며 그 수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이다.

  그리스인은 보이지 않는 '입자들을 가리켜 더 이상 나누어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원자(atom)'라고 불렀다.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립하는 주장들은 하나같이 금욕적인 자기부정, 자기희생, 심지어 자기

  혐오의 형태를 수반했다. 또한 신이 이 우주의 창조자도 파괴자도 아니며 아마 자신의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유대의 전통을 버린 자들을 가리켜 아피코로스(apikoros), 즉 에피쿠로스 학파라

  불렀다.

 

-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책들 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극히 드물다.

  헤르쿨라네움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들과 이집트 옥시린쿠스의에서 발굴한

  파편들이 지금까지 실물로 전해지는 고대 책의 전부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헌은 모두 원본이 저술된 시대와 장소,

  문화와는 동떨어진 후대에 만들어진 사본이다.

 

- 책들이 물리적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대부분 기후해충탓이었다.

  책벌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책장에 삼나무 기름을 바르는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었는데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책을 계속해서 읽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또 읽다가 닳으면 더 많은 사본을 만드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로마에서는 리브라이(libraii)’라는 복제 기술자와 스크리바이(scribae)’라는 필사가로 분화가

  일어났으며 부유한 로마인들은 친구들에게서 빌려온 책을 필사하기 위해 개인 사서와 서기를

  고용하는 일이 흔했다.

 

- 고대의 최대 도서관은 프톨레마이어스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과학자와 시인을 비롯한 각 분야의 선도적인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고 전성기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최소 50만권 이상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물관(museum)은 유물의 수집과 전시가 아니라 인간의 창조력에 의한 성취를 상징하는

  9명의 무사(mousa) 여신들에게 헌정된 일종의 신전이었다.

 

- ‘페트라르카는 평생 동안 열성적으로 진지하게 영적 성찰을 했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그는 파괴적인 무관심 속에 부서지고 사라져가는 고대 이교 문명이 남긴 문물의 표현력

  아름다움, 도전 정신을 거의 선교사 같은 열정으로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고대 문헌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집착은 후대에 부분적으로

  관습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력한 새로운 교육 커리큘럼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른바 인문학(studia humanitatis)' ,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이들 언어로 된 문헌의 습득을

  강조하고 수사학에 초점을 맞춘 학문이 탄생한 것이다.

 

- 페트라르카와 같은 열정을 지닌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피렌체 공화국의 총리인 '콜루치오

  살루타티'였다.

  그 역시 페트라르카와 같이 파묻혀 있는 사라진 과거에서 응축된 힘을 느꼈고, 고대 문화의

  흔적을 찾기 위한 학문적인 연구를 했다. 그와 같은 열정을 가진 인물이 또 있었으니 그는

  '니콜로 니콜리'였다.

  니콜리는 인문주의자 스승인 살루타티나 친구들 이상으로 고대 로마의 유산에 빠져 있었으며

  고대 유물을 예술품으로서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최초의 유럽인 중 한 명이었다.

  특히 니콜리가 고대 조각상보다 더 열광한 것은 이었다.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소제목 없이 6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다양한 주제가 얽혀 있다, 강렬한 서정적 아름다움의 순간, 종교에 관한 철학적 명상, 쾌락,

  죽음, 물질계, 인간 사회의 발전, 성의 위험과 즐거움 그리고 질병의 본질등에 관한 복잡한

  이론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는데 15세기에 만들어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필사본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50권이 넘는데 활자 인쇄술이 상용화되자 인쇄본의 서문에는

  보통 경고문과 함께 인쇄업자의 종교적 신념과 책의 내용은 무관하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 신의 섭리와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두 개의 기둥으로 유토피아의

  저자 '토모스 모어''포조'에 의해 100여 년 전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발견된 이래 가장

  일관되고 지적으로 이 시를 수용했으나 동시에 시의 기둥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세심하게 그

  핵심을 제거한 셈이다.

  모어는 자신이 쓴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우연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은 체포해서

  노예로 만들었다.

 

-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처음 발표된 이래 무신론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시가 주장하는 주요 내용은 정통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혐오스러움 그 자체로 생각

  하기에는 신들이 정말로 인간의 운명에 신경을 쓰나 그들이 바치는 여러 종교 제의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상상하는 것은 천박한 신성모독이었다. 그의 주장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진다

  2) 물질을 구성하는 기초 입자인 '사물의 씨앗들'은 영원하다

  3) 기본이 되는 입자들은 그 수는 무한하나 형태와 크기에는 제한이 있다

  4) 모든 입자는 무한한 진공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5)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6) 사물은 일탈의 결과로 태어난다

  7)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8) 자연은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9)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10)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11) 인간사회는 평화롭고 풍부하던 황금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원시의

      전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12) 영혼은 죽는다

 13) 사후세계는 없다

 14)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15)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16) 종교는 일관되게 잔인하다

 17) 천사니 악마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은 없다

 18)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19)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20)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 '조르다노 브루노'가 출현하여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대해 '그의 지각과 이성의 빛은 저 진실의

  회랑의 문을 열어젖히게 했다. 이제 지극히 성실한 탐구라는 열쇠로 그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해

  졌으니 그는 덮이고 가려져 있던 자연을 드러내 보이는 한편, 두더지에게는 눈을, 눈먼 자에게

  는 빛을 주었으며....복잡한 속내를 감히 표현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벙어리의 혀를 풀어

  주었다'등으로 그의 시를 옹호하다 화형당한다.

 

-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세상에 발을 들여놓자 인간의 경험을 환상적으로 그려낸 시인의 글귀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강력한 힘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집단과 직간접적으로 접촉이 있던 예술가들에 의해서 루쿠레티우스의

  사상은 통제하기 힘든 형태로 변환되었다.

  특히 몽테뉴는 루크레티우스와 마찬가지로 사후세계에 대한 악몽을 통해서 도덕성을 강제하려

  는 태도를 경멸했다. 또한 그에게 종교의 공포에 대항하고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 집중

  하며 종교적 광신주의를 경멸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몽테뉴에게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고 쾌락과 함께하는 삶을 살며 존엄 속에서

  죽음을 맞도록 이끌어주는 가장 확실한 지침서였다.

 

  고대의 철학적 사색은 현대 원자론은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들이 나올 수 있는 무대를 제공했다.

  토머스 제퍼슨도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통해서 세상은 오직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자연일

  뿐이라는 신념을 확고히 했으며 특히 무지와 공포가 인간 존재의 필수 불가결한 구성요소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는데 도음을 받았다.

      

 

   [책에서 얻은 지식]

- 수도사들이 필사하던 작업 공간을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이라 했다.

  

- 고대의 책은 대부분 두루마리 형태로 오늘날에도 유대인은 예배를 드릴 때 고대부터 이어진

  두루마리 형태의 '토라(Torah)'를 사용한다. 그러나 4세기경 기독교인은 새로운 형태인

  코덱스(codex)라는 책자 형태로 돌아서게 된다.

  

- 최고급 양피지는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벨룸(vellum)이라 불렀다.

  

- '다시 긁어낸'이라는 의미의 단어는 '팔림프세스트'라고 부른다.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 책 한 권을 일컬을 때 흔희 스이는 '볼륨(volume, 약어 vol.)은 원가 말려 있거나 감겨있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 '볼루멘(volumen)에서 나왔다.

  

- 고대에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말려 있는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막대를 움빌리쿠스(umbilicus)라고 불렀으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을 '움빌리쿠스까지

  펼친다'라고 말했다

  

- 이교도라는 단어는 4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어원적으로는 '농민(peasant)'관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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