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시네마 한국시나리오걸작선 84
유미리 지음, 우병길 각색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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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3

 

가족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만들어낸 여러 발명품 중 가장 위대한 것 한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함께 '가족'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들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단어인 '사랑''가족'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에 대한 중요성은

나를 비롯한 누구라도 아무리 강조한다 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누구라도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랑''가족'이라는 단어가 갖는 중요성을 나의 가정에 대비해 살펴보면,

얼마 전까지 나는 위에서 언급한 단어 중 '가족'이라는 단어가 내게 어떤 의미와 뜻으로

위치를 갖는지 그리 크게 고민하며 생각해 본적이 없었고 또 그럴 필요성 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단어와 ''를 분리해서는 나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

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단어는 나의 생활 자체였기 때문이다.

-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몇 해 전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수개월 동안 고민과

번민 속에서 나의 아내와 장시간에 걸친 대화와 토론 끝에 '사랑' = '희생'이라는 명제를

얻어냈는데, 이 개념은 아내와 나 사이에서만 오고가는 개념이다. -

 

작품을 읽으며 또 이러한 단어들이 나의 형제들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살펴

보았는데, 우리 형제들은 각자가 물질적으로는 풍족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으나

나름대로의 가정적 안정과 행복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 불리웠던 IMF가 우리 형제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형제 중

어려움에 처한 경우가 있었는데 형제들이 똘똘 뭉쳐 이를 헤쳐나간 적이 있는데,

이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어서 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우리 가정과 형제의 가정사를 돌이켜 보면서 '가족'이 주는 의미와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보는 것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독자로서의 선결과제라고 생각한다.

 

먼저 '가족'을 생각하기 전에 '가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가정(家庭)'은 말 그대로 '집의 정원, 뜨락'이다. 그렇다면 그런 뜨락에 꽃과 향기로

가득차고 벌과 나비가 한가로이 날고 이름 모를 풀 벌레들이 울고, 새들이 청아한

음성으로 노래하는 정원이라면 또 덧붙여서 그곳에 작은 연못이라도 하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반면에 그런 뜨락이 쓰레기와 오물, 집동사니로 뒤덮혀 언제, 어디서, 무슨 벌레나 이름

모를 동물이 튀어나와 우리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할 정도의 환경을 지닌 곳이라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겠는가?

 

인간이 인간스러울 수 있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중 하나가 바로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사랑'을 근본으로 하는 따뜻한 '가족애'가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이런 결론을 근거로 '유미리'씨의 글을 읽다 보면 도처에 '가족'간의 사랑에 굉장히

목말라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작품을 읽은 나에게 작품을 평해달라고 하면 '글쎄'라고 밖에는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작품을 읽으며 작가인 유미리라는 작가가 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책 출판 기념회와 독자 사인회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일본의 유명 문학상을 수상해서인지 아니면 호스테스 출신에서 작가로서 입신양명한

인물이라 얼굴을 보러 왔는지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전에 이 작품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작품을 읽은 후 독자 사인회에 가라고 하였으면

대부분의 우리나라 독자들은 그 작가에게 사인을 받으러 가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그만큼 기대를 져 버린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인 유미리씨는 우리나라 사인회에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조국에 이렇게 가족관계가 무너진 가정이 많은가?‘

 

하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도저히 난해하다 못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작품인지 또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가

뇌리에서 맴도는 그런 작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 대한 독서계의 비평이

그리 많이 실리지 않은 것만 보아도 이 책이 던져주는 시사성 내지는 사회성이 영

결여된 그저 그런 범작(凡作) 수준이었다고 나는 평하고 싶다. 아주 냉혹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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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과 권력 - 달력을 둘러싼 과학과 권력의 이중주
이정모 지음 / 부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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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달력과 관련된 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요즈음의 아이들도 그러하듯이 나도 내 생일을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생일이 되면 부모님께서 선물 혹은 용돈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고는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대부분의 생일 선물은 대개

짜장면이나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국으로 때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주민등록번호에 기재되어 있는 앞의 여섯 자리가 생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내 주민번호를 보면서 생일을 10월로

기억하고 항시 9월이 오면 어서 빨리 10월이 오기를 학수고대 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느닺없이 어머님께서 9월 어느 날 아침에 미역국과 함께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내게 짜장면을 사 주시는 것이었다. 상당히 놀라기도 하고 내 생일 날짜가 바뀌었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짜장면의 달콤함에 넘어가 생일이 바뀌었는지에 대한 상황 파악

없이 일단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된다.

그렇게 생일을 보내고 어느날 조용한 시간에 내 생일이 왜 바뀌었는지에 대해 부모님께

여쭤보니 양력음력에 대한 용어를 곁들여 가며 나의 진짜 생일은 음력 8월의

어느 날이라는 아주 생소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나는 내 생일에 대한 비밀을 알아낸

기쁨에 양력과 음력의 차이에 대한 상황은 쏙 빼 놓은 채 오로지 8월의 어느 날만

그 다음해에 손꼽아 기다렸다.

이듬해, 8월의 그 어느 날을 손꼽아 기다려 온 나는 부모님이 말씀하신 날 부근에서

나를 위한 어떤 행사나 혹시 부모님이 용돈을 주지 않으시나 하고 기다렸으나 아무 변화

없이 조용히 넘어가는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나름 항의를 해 보기도 했지만 부모님은 아직 내가 기다리던 그 날이 아니라는 답변만

돌아 왔다. 그런 저런 시름 속에 나의 생일은 언제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중 추석이 다가

왔는데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 바로 내가 기다리던 그 날이라고 하면서 내가 학수

고대하던 나의 생일 선물을 손에 쥐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 날은 바로 음력 812일이었던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특정일을 놓고 음력양력으로 인해 사소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

상황이 권력을 지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를 추측해 보면 가히 아찔하다는 말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솔직히 서민들에게 있어 한 달이 360일이면 어떠하고 400일이면 어떠하겠는가 당장의

불편이 없는 이상 서민은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그만이지 하루를 몇 시간으로 할지

일주일을 며칠로 할지가 그리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와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일주일을 10일 단위로 변경하려다가 휴일이

줄어 들었다는 이유로 민중들이 개혁방안을 거부해 운영되지 못한 사실은 있다)

하지만 권력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요새도 권력이 바뀌는 시기만 되면 레임덕 현상이니 뭐니 말들이 많은 세상인데 과거

속 인류의 조상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뒤에 다시 언급을 하겠지만 로마의 율리우스는 당시 사정이 그러했다고는 하나 자신의

집정관 임기를 3달이나 연장해 445일을 1년으로 운영한 적도 있다고 하니 서민들과

권력자들이 바라보는 달력에 대한 중요성은 큰 차이가 있었지 않은가 생각하는 바이다.

 

인류 초기에는 아마도 일년 내내 그 모습을 거의 일정하게 유지하는 태양도 중요했으나

수시 각각으로 모양을 변화시킨 에 상당히 의존하는 삶을 살아 왔다고 한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자연환경에 의존적 삶이 강했던 일반 민중들은 농사를

짓고, 수확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여러 가지로 연구하다 달의 효용성을 간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러한 민중들을 통치하는 권력자들에게는 의 변화로부터 자신의 통치기반에

필요한 주술적 의미를 추출해 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례를 주관하는 제관들은 이런 달의 변화를 최대한 활용해 자신의 입지를 크게

다졌을 것으로 작품은 분석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이 개화되면서 자연에 의존하던 인간들이, 자연을 지배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

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에 관한 사항이었다.

따라서 로마시대 이후 유럽의 정신세계를 리드하는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일보다

여타 종교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부활에 의미를 두고 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로 인식하였던 것 같다.

바로 이 과정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현대의 달력이 탄생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전 과정 저자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 에 대한 이야기를 과학 발달사처럼

풀어나가고 있는데 달력의 여러 숨겨진 이야기, 날자와 관련된 각국의 모습, 왜 갑자기

인류 역사에서 10일이 하루 아침에 왕창 사라져 버렸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읽어두면 여러 가지 가십거리로서 대화의 주제로 많은 활용이 가능할 것이니 대화와

이야기 주제를 발굴한다는 의미에서 독자들께서는 한 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율리우스력의 기원]

실제로 BC 46년 폼페이우스를 무찌르고 귀환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관리들이

자신들의 임기를 늘리고 징수를 늘리기 위해 한 해를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등의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 달력 체계의 완성으로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는데 그 자신도 역시 전쟁터에서 돌아 온 직후 자신의 임기를 임의로

3달이나 연장을 해서 그 해의 1년이 445일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듯 달력의 일정 기준이 모호하던 시절에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조세를 증대시키기 위해 임의로 달력을 적용하고는 했다고 한다. 이런 모순점을 개혁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카이사르는 모든 옛 달력을 폐지하고 칙령을 반포하여 자신의

달력을 공식화하는데 기원전 45111일을 율리우스 달력의 기원으로 삼는다.

당시 발표한 달력과 관련된 개혁안

  1) 1년을 365일과 4분의 1(365,25)로 삼았는데 이것은 현대 달력보다 약 1114초가

      것으로 1500년 뒤에 이를 보정하기 위해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유럽에서는 158210

      5일부터 1014일까지 역사에서 살아진다., 날짜를 보정한 것이다.

  2) 4년마다 하루를 추가하는 윤년을 두어 366일이 되게 하였다.

  3) 로마원년부터 사용되어 오던 1355일을 365일로 바꾸면서 늘어난 10일을 열 두 달

      안에 다시 배치 한 것이다.

여기에도 재미난 일화가 전해지는데 카이사르의 달력 개혁을 치하하기 위해 달력 속

특정 달인 7월의 원래 이름인 퀸틸리스대신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JULIUS)'로 개칭하였는데,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티누스황제가 전임자가 만든

달력을 보완하면서 8월의 원래 이름인 섹스틸리스라는 이름 대신 아우구스투스

(AUGUSTUS)로 바꾸었는데, 율리우스는 큰 달(31)인데 자신의 달이 작은달(30)

것이 불만이어서 29일이던 2월에서 하루를 옮겨와 자신도 큰 달(31)로 만들었다.

참고로 이집트가 1년을 360일로 정해 운영하면서 실제 일수와 계절이 맞지 않는 것을

별자리를 이용해 정확한 일정을 예측한 제사장들이 악용했다고 한다.

 

[이집트 달력의 기원]

현대 달력의 기원은 태양력을 쓰는 이집트로 보는 게 정설이라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이 범람하는 주기가 365일 걸린다는 것을 관측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365일을 같은 조각으로 나누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투리를 떼어내고 1년을 그냥

360일로 정하여 운영한다.(* 원을 360도롤 정의한 것의 유래다) 하지만 떼어낸 5일로 별도의 13월을 만들어 이를 에파고메네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축제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로 정했다고 한다.(오리시스, 호루스, 세트, 이시스, 네프티스) 1년을 360일로 운영하던

이집트는 세월이 흐르며 현실과 맞지 않음을 간파하여 때 마케도니아에서 비롯된 외래

왕조이며 달력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3가 이집트 왕위에

오르면서 달력을 개혁하는데 매년 마지막 달인 에파고메네4년마다 한 번씩은 5일이

아니라 6(윤년)이 되도록 하여 운영하였으나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프톨레마이어스에 의해 제창되었던 달력은 자취를 감추고 이집트 원래의 달력으로 회귀.

그 후 카이사르가 달력을 개혁할 때 바로 프톨레마이어스 이론을 받아 들여 달력을 완성

하였다고 한다.

 

태양은 1년 내내 그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인류는 시시각각 변하는 달의

모양을 기준으로 달력을 만들어 사용했다. , 달은 태양과는 달리 눈에 쉽게 보이고

그 변화도 명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더 큰 이유는 태음력을 사용하면 365일을 주기로하는 태양력보다 354일의 주기를 갖는

태음력을 사용하면 약 2.75년이 지나면 한 달치 세금을 더 거둬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부활절과 춘분의 연관성]

오늘날의 달력은 예수의 부활절을 지정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기독교 문화의 산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 교회들이 율리우스 달력의 확산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초대 기독교 교회는 카이사르 율리우스 달력 외에는 그리스도 이후의 세기를 셀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지 못했다. 초대 교회에서는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을 부활절로

삼았다.

그 후 초대 교회의 철 종교회의가 325년 지금의 터키에서 열렸는데, 여기서 부활절을

봄의 첫 만월 후(즉 춘분 뒤 첫 보름달이 뜬 뒤에 오는) 첫 번째 일요일로 정했는데

이때부터 부활절은 보통 322일에서 426일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6세기경 교황이 또다시 부활절을 계산하기 위해 디오니시우스라는 인물을 통해 작업을

추진하나 별 소득이 없었고, 1414년 부활절 문제를 다시 논의하기 위해 종교회의가

열렸지만 여기서도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하고 만다.

 

사람들은 춘분 때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고 있는 분위기여서 그래서 이 때에 새해를

축하하는 축제를 벌이고는 하였는데 새로이 중세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된 기독교

문화 속에 살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같은 의미였던

것이었다. 부활절의 시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교회의 많은 축일들이 이 부활절을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력의 사용과 10일의 오차]

율리우스력은 사소한 부정확성을 가지고 태어난 달력이다.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1년은

365.25일인데 사실은 지구가 태양을 365.2422일만에 한 바퀴를 돈다는 사실을 당시에

알고 있었다.

, 0.0078일 시간으로 이야기하면 1114초 또는 674초의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당시에는 그 차이가 미미해 별다른 조치를 취할 이유가 없었으나 16세기로 들어서면서

 오차가 10일에 이르게 되어 로마 교회는 달력을 변경하게 된다.

그 결과 1582105일부터 1014일까지의 역사가 사라지게 된 것이며 이런 수정된

날짜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 받아 들이게 되는데 예로서 프랑스에서는 1582129일에서

바로 20일로 넘어갔으며 네덜란드의 경우는 그 해 1221일 다음날이 158311일이

되었다고 하며 우리는 1896년에 받아 들였다고 한다.

 

율리우스력의 오차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천문학자를 동원

하여 정확한 부활절을 찾아 내기 위해 춘분점을 기준으로 달력을 개혁하게 되면서 역사에

10일이라는 시간이 사라지게 된다. 교황은 다음과 같은 칙서를 발표한다.

1) 계절과 달력을 다시 일치시키기 위하여 10일을 없앤다.

2) 개선된 윤년 규칙을 도입하는데 율리우스력에서 시행된 4년마다의 윤년은 그대로

   두는데, 100년으로 나눠지는 해에는 윤년이 없도록 하지만 400년으로 나누어지는 해에는

   다시 윤년을 둔다. 이로써 달력과 지구 공전과의 오차발생을 지연될 수 있다

3) , 요일을 그대로 진행한다. , 1582104일 목요일 다음날은 1015금요일로

    한다.

4) ‘춘분 후 만월 다음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삼는다

 

개신교 지역에서는 율리우스력의 오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달력인 그레고리력을

수용하지를 않게 되자 지역별로 두 개의 달력이 동시에 사용되어 일상 생활과 특히 국제

무역에서 대혼란이 생기게 되면서 지역별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단절되는 현상이 나타

나기도 하였으나 19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변경된 그레고리력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중국은 1912, 러시아는 1919, 터키는 1927년에 도입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받아 들였는데, 1872122일 다음날이

바로 187311일이 되어 기네스 북에 역사상 가장 짧은 달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혁명과 달력]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량형의 통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력을 안정화시키는데 필수적인 조건은 도량형의 정비였다.

1. 프랑스 혁명

- 1789년 프랑스 혁명가들은 미터법을 제정, 오늘날 전 세계에 통용되게 했다.

- 교회의 의례를 따르지 않으려 1주일을 혁명적으로 7일 단위에서 10일 단위로 변경해

   짧게 운영하였으나 일반 대중들이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것에서 9일 일하고 쉬는

   , 1년에 휴일이 52일에서 36일로 줄어들자 거세게 반발해 무위로 돌아갔다.

 

2. 이탈리아 파쇼 달력

-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도 자신만의 달력을 갖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정권을 잡은 해를

   파쇼 원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워지도록 했으나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을 뿐 그의

   권력이 무너지자 해당 용어는 없어지고 말았다.

 

3. 소비에트의 달력 개혁

- 1917년 볼세비키 혁명 후 레닌은 율리우스력을 폐지하고 서방과 같이 그레고리력을

   도입하여 서방 세계와의 조화를 꾀한다.

    하지만 1929년에 과격한 달력 개혁이 진행되었는데 개혁의 핵심은 값비싼 공장의 기계

    를 7일마다 하루씩 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토요일과 일요일을 폐지하고

    공식 공휴일은 국가가 지정한 5일간(레닌 서거일, 10월 혁명 기념일 등)쉬게 하는

    것을 개혁의 기본 방침으로 세웠다.

    따라서1 주일을 색깔을 넣은 5일 단위로 편성하고 전 노동자를 5가지 색깔로 구분한 뒤

    해당 색깔이 되는 근로자만 쉬게 하였다.

    그렇게 하면 각 직장 노동자 중 20%는 쉬었지만 공장은 나머지 80%의 노동자에 의해

    쉬지 않고 가동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가족 및 사회 구성원간의 유대성

    을 깨는 문제를 발생시켜 다시 이를 6일 단위로 1 주일을 재편성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의

    문제가 발생되자 1940년대에 다시 7일 주일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고대 문화권의 달력들]

1. 수메르 달력

- 기원전 약 5 천년 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주변에서 태동된 수메르 문명은 2 천년 경

   바빌로니아에 흡수되기 까지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그들은 달을 숭배했으며 거의 모양이 변하지 않는 태양 대신에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달을 기준으로 달력(360)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60진법과 맥주 그리고 바퀴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2. 바빌로니아 달력

- 바빌로니아 인들은 한 달의 길이가 29.53일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12달을 교대로

   29일과 30일로 정하였고 태양년과의 차이가 나는 11일을 윤달을 두어 보정하였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유대 달력의 모범이 된다.

   또 바빌로니아인들은 1주일을 7일로 도입하여 운영하였다고 한다.

   오랜 시간 달과 해의 움직임을 관찰해 온 바빌로니아의 제관들은 기원전 5세기경

   마침내 해와 달이 19년을 주기로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서 유대

   달력이 파생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된다.

 

3. 모슬렘 달력

- 모슬렘 달력은 622716일 금요일을 기원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모슬렘 달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달력은 종교와 명절에 관련되어서 사용될 ,

   관청과 일상 생활에서는 서양의 그레고리우스 달력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천문 역법 역사]

- 조선 천문학은 세종대왕의 지시로 정흠지와 정인지가 칠정산 내, 편을 만들면서

   천문학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는 개국한지 30여년 밖에 안 된 조선 왕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천문 역법의 정비가

   시급했던 결과인데, 역법에 칠정산(七政算이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칠정(七政)'

   일곱 가지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 , 화성, 수성, 목성, 금성과 토성을 의미

   하는 것으로 즉, 오늘날의 일곱 요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정치란 바로 하늘의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하는 일이고 따라서 하늘의 별들이

   세상의 정치 현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천체를 의미하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 당초 우리나라는 1442년까지 제대로 된 천문 계산을 하지 못해 중국의 것을 빌려 사용

   했으나 여러 문제로 인해 오류가 항시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당시 역법은 권력 유지를 위한 중요한 기반이었기 때문에 역법을 연구하고

   역서를 제작하여 반포하는 일은 황제의 고유한 임무로 생각해 함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 세종 당시 발간된 칠정산에서는 1년을 365.2425일로 1달을 29.530593으로 정하고 있는데,

   이 수치는 오늘날 표준으로 삼고 있는 365.2421987929.530589비교해도 수치가 거의

   일치하는 정밀한 자료이다.

   또한 외편에서는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은 아라비아 방식에 따라 원주를 360도로 1도를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정해 운영했다고 한다. 이렇듯 우수한 우리의 역법은 세종 이후

   급격히 쇠퇴하면서 다시 중국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중국이 서양 천문학에 따라 채택한

   역법인 시헌력이 우리의 달력이 되어 버리고 만다

 

[태음태양력]

-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용되고 있는 순수 태음력과는 다른

   태음 태양력이다.

   순수 태음력은 달의 운행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달의 모양이 평균 29.50359일을 주기로

   변하는 것을 1달로 정했다면 순수 태음력에는 윤달이 없어서 계절과 달력이 점차 달라

   지는 결점이 있다.

   이에 비해 태음태양력은 태음력에 따른 계절의 오류를 보정하기 위하여 윤달의 개념을

   도입해 달력과 계절의 불일치를 다소 해소한 달력이다.

   , 태양의 공전주기 365.2422일과 태음력에 따른 1354일과의 차이 11.2422일을 보정

   하기 위해 19년 동안 7번의 윤달을 넣었다. 이에 따라 대략 3년 정도의 간격으로 13개월

   짜리 1년을 두게 된다. 

 

   읽고, 느끼고, 생각하며 나를 돌아보자

 

- 달력을 의미하는 칼렌다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 달력에서 매월 1일을 의미하는 말에서

   단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 1225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삼은 것은 4세기 이후부터이다.

 

- , , 초의 개념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닌 인간이 임의로 정한 기준으로서

   세슘이 방출하는 파장의 진동수를 기준으로 1초를 잡은 것인데 하루가 실제는 86,400

   가 아님에도 인간이 그 숫자를 임의로 기준으로 잡아 대략 3년마다 2초의 윤초를 두고

   있다.

 

- 요일의 순서가 정해진 이유는 모르겠으나 별에서 따온 이름은 기원전 1세기 경에는

   로마에서 이미 일반화되었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부터 매주 일요일이 국가가 지정한

  공휴일이 되었다.

 

- 성서에 나타난 나이로 유추해 보는 성경 속 주요 인물들의 실제 나이

   * 아래의 주장은 저자의 주장으로 기독교도인 나도 저자의 주장에 동감하는 바이며,

     이 내용으로 기독교를 비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이런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미가 있으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1) 1= 1년으로 보았을 때 (창세기~ 므두셀라)

    아담(930), 게난(910), 에녹(365), 므두셀라(969), 노아(950)

    이 중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969)를 현재의 나이로 유추해 보면

    1= 29.53, 1= 365.24일로

    969 × 29.53 = 28,614.57÷ 365.24 = 78.39년으로 약 79세가 된다

 

2) 5= 1년으로 보았을 때 (노아의 후손 ~ 야곱)

    아브라함은 175세에 세상을 떠났다

    175 × 5 ÷ 12 = 72.91년으로 약 73세가 된다

 

3) 6= 1년으로 보았을 때(창세기 25장부터 끝장까지)

    야곱(147) = 74, 요셉(110) = 55세라고 유추할 수 있다.

 

- 기독교인들이 자동차에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의 악티스라는 문자를 만들어 붙이고

   다니는 이유는 그리스어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문장의 각 단어

   첫머리를 따면 믈고기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 로마시대의 검투사들의 경기나 맹수와의 격투 경기는 에트투리아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 로마에서는 에트투리아의 관습에 따라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길거리를 지나갈 때 하급

   관리가 여러 개의 몽둥이와 도끼를 묶은 파스케스라는 것을 메고 앞서 가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파스케스로부터 단결을 의미하는 파쇼(fascio)'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 말이 훗날 베니토 무솔리니가 등장하면서 파시즘(fascism)'의 어원이 되었다.

 

- 세계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는 이집트에 있지 않고 멕시코 시티로부터 남동쪽으로

  100km 쯤 떨어진 훌룰라 데 리바다비아라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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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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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8

 

상황은 다르지만 중국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나 할까?

 

주인공 허삼관은 생활이 곤궁하거나,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특히 자식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를 해결할 자금 마련의 일환으로 피를 판다. 그것도 피의 양을 많게 하기

위해 냉수를 잔뜩 마시고 소변도 참아가면서 자신의 피를 팔아 목적했던 필요한 돈을

마련한다.

 

작품의 큰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는 '매혈(買血)'은 중국 뿐만이 아니라 아시아권 국가 어느

곳에서나 몇 년 전까지 - 아마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는 행하여지고 있을

것이다 - 만 해도 경제적 하층민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행동으로서, 매혈은 특별한 육체적

노동이나 고생 없이 자신의 몸에서 단순히 일정량의 피를 뽑아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손쉽게 벌게 되자, 인간들은 여타의 다른 수단을 고려치 않고 이 행동에 젖어 들었으며,

정상적인 경제적 활동을 통한 부의 획득에서 벗어난 저급한 행동에 익숙해져 쉽게 번 돈을

쉽게 쓰는, 예를 들면 건전치 못한 행동(마약, 매춘 등)으로 없애 버렸기 때문에

'매혈=인간 이하의 행동'이라는 고정 관념이 일반인들 속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나의 중학시절을 돌이켜 보면, 학교 가는 길에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병원이 있었는데

병원 정문 앞에는 매일 아침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 전부가 환자의 가족 내지는 병원과 관계되는 사람들인 줄 알았었으나,

사실은 모두가 피를 팔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그런 사정을 모를 때에는 거기에 줄을 선 모든 사람들이 무조건 불쌍하고 안됐다고만

생각하였으나, 그런 속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로부터 줄을 선 사람들 대부분이 피를 판

돈으로 좋지 못한 목적에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 이상 그들에 대해 불쌍하게만은

보려 하지 않았다.

당시 내 기억으로는 매혈이라는 단어가 '마약', '창녀' ''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매혈을 이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살아보려는 없는 자들의 발버둥

으로,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어린 시절 보았던 매혈의 대열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큰아들이 사고를 쳤을 때, 문화혁명 기간 동안 먹을 식량을 위해, 큰 아들이 간염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 때, 아들들이 좋은 직장을 배정받게 해 주기 위해, 주인공 허삼관은 주저

없이 자신의 팔뚝을 걷었으며 피를 팔았다. 자신의 쾌락과 건전치 못한 행동을 위한

비용이 아닌 가족들의 기본적인 생활 기반을 위해서.

 

젊은 시절 생명과도 같았던 피를 팔아가며 식구들을 먹여 살리던 주인공은 자신만의 행복

(돼지 간볶음과 황주)을 위해 또 다시 피를 팔러 갔을 때, 너무 늙어 피를 사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한다.

젊은 시절, 가족들의 안위에 온 힘을 받치며 살아온 뒤, 마지막으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사용하려고 살펴보니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화가 줄기차게 일어나던 시기에 나라의 경제적 기반이 약했던 우리나라나 중국의 일반

서민들이 택했던 '매혈'은 어쩔 수 없는 삶의 방편을 제공하는 최후의 어쩔 수 없는 없는

자들의 행위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매혈이라는 것은 없는 자들의 최후의 선택 사항임과 동시에 불가항력적인 행동이었으며,

기본적인 삶의 시간을 연장 시킬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매혈도 말 년에 자기

자신을 위해 쓰려 할 때는 이미 사용할 수 없게 된 가장의 모습이 가슴 깊이 각인되는

작품이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맞이하게 될 노년, 노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인 것이 하찮은

것으로 판명될 때, 우리는 쉽게 그런 현실을 웃으며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울음으로 받아들일까?

나는 오늘을 사는 또 다른 허삼관이 아닐까 생각해 보며 허삼관 그를,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중국인이 아닌 춥고 배고프던 시절의 우리 아버지 모습으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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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상 여불위 2
정 시앙밍 지음, 김하림 옮김 / 솔출판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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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8

 

최근 우리의 독서계에 돌풍을 몰고 온 작품 '商道'(최인호)라는 작품이 있다.

商人의 진정한 자세와 길에 대해 1800년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실존했던 인물,

임상옥(林尙沃)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리고 있다.

작품 商道의 주인공 임상옥은 '商人'으로서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한 -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여불위'라는 작품의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라면,

중국의 巨商 '여불위'는 단순한 보석상으로 출발해 '왕권이라는 상품'을 거래한 글자

그대로 희대의 '巨商'이었다.

 

여불위, 그는 상인이었으면서도 물품에 대한 혜안과 함께 사람에 대한 혜안을 두루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국(조나라, 효성왕)에 볼모로 잡혀 간 세손(이인, 후에 이름을 '子楚'로 바꿈)의 행동

면면을 보고 그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를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으며, 국가 간

및 국가 내 권력 상층부의 상관관계를 냉철히 분석하고, 파악하여 줄대기를 잘 했으며

확실한 줄을 확인하고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는데 상인이기 이전에 그는 전략가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작품을 읽으며 - 작품 자체는 우리의 작품 '商道'가 갖는 주제성, 극적 전개 등 과는 비교도

안 되는 3류 수준의 작품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고 있는 샐러리맨

들이 배워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점검해 보면

 

첫째, 商人 이상의 현실 인식력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여불위는 우연한 기회에 적국인 조나라(효성왕)에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소양왕)의 세손

(이인)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 세손에게 접근하고 있다.

 

둘째, 목표 접근력과 달성방법에 대한 전략이 우수했다는 점이다.

여불위는 베팅 목표가 설정되자 자신이 자지고 있는 모든 것을 투자한다. 단순한 투자가

아닌 투자자로서 투자의 대상에게 '자산 가치 상승 방법'에 대해서도 지도하고 있다.

 

셋째 어떤 형태이든 '리더'는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불위가 세손에게 비록 치졸한 방법이기는 하나 돈으로서 - 당시 사회 구조상 왕손인데

다른 무엇으로 할 수 있는 방법보다 돈으로서 부하를 이끄는 방법 외에는 더 이상의

최고의 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 인근 마을사람들과 수하에 선비를 이끌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상기의 3가지 점이 바로 내가 '거상 여불위'라는 작품을 통해 어떻게 현상을 분석하고

접근해야 하는지에 관해 얻은 지혜이다.

거상 여불위는 한 나라의 왕권에 대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베팅을 했고, 성공했다.

여불위를 일부 사학자나 작품 속에서 간악하고, 모사를 잘 꾸미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나의 견해로는 그는 한 시대를 풍미 했고,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꾼

진정한 商人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사람이 셋이서 걸어가면 그 중에 선생이 반드시 한 명이 있다'는 옛말이 있듯이 어떤

일이든 부정적인 면만을 보지 말고 그런 역사적 사건의 뒤에 숨겨져 있는 참 모습 혹은

그 의미를 오늘의 관점으로 재분석하여 나름대로의 지침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여불위'를 바라보고, 삼국지에서 간악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조조

생각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우리가 읽고 있고, 들어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역사서를 기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올바른 시각은 아니라 여겨진다. 여불위와 같은 사람이 요새 우리나라의 정치권을 흔들고

있기는 하나 여불위의 상인 정신 정도는 배워 볼 만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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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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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8

  

조선시대를 통 털어 왕이면서 사후에 후손들로부터 ''혹은''라는 명칭으로 추존되지

못한 분이 두 분 계시는데 '연산군(10)''광해군(15)'이다.

작품은 그 중, 광해군이 어째서 존호를 부여받지 못하고 ''으로 격하되었는지 역사적

배경과 당시의 국제 정세 등에 대한 분석서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나의 부족한 역사관에 부끄러움을 한

없이 느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그 어느 왕보다 외유를 많이 하여 민생의 처참함을 직접

목도한 광해군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안정화시키고자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각종 역사서는 증거하고 있으나 나는 여기서 광해군의 실책 몇 가지

확인해 보았다.

 

첫째, 정책의 중심으로서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비록 정권을 잡고 있는 대북파들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해서 왕권이 제대로 발휘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나, 왕으로서 중요한 것은 참모들의 진언을 듣는 것도 중요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왕으로서, 권력의 핵심으로서 추진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이

섰을 때 이를 밀어 붙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한 결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광해군은 당시, 정치적인 입지가 부족했다고는 하나 너무도 대소

신료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말해 역사는 후세에 전해지는 치적에 의해 당시의 왕을 평가할 뿐이지 왕을 보위

하는 신하를 통해 당시의 왕을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민중과 긴 시간을 함께 호흡했음에도 민심을 너무 몰랐다는 점이다.

임란 당시 북진해 오는 왜군을 피해 왕과 왕자들은 제각각 도피생활을 한다.

이때 함경도 쪽으로 피난 간 왕자들을 현지 백성들이 잡아서 일본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점과 임란 당시 다른 집보다 궁궐이 제일먼저 불이 났다는 사실을 광해군은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을 확립하고 자신과 선대 왕의 꿈인 북벌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할 수 있겠으나

왜란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궁궐을 중수하고, 신축하고 거기다가 국방을 튼튼히

한다는 이유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한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몸뚱아리는 하나인 백성들이 이를 모두 몸으로 때우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계획이나 연차적인 시행이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 '夷夷制夷'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북파에 의해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난 인물들을 왕 자신의 뜻을 세우고자 아무런 후속

대책도 없이 정권의 핵심으로 불러 들여서, 종내는 이들에게 배척 당하는 꼴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문제라는 것이다.

또 하나 아무리 화급하다 할지라도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또 다른 ''인 명나라군을

들인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명나라군은 끝내 조선에 대해 각종 행학이 지나쳐

나중에 광해군 자신의 족쇄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이이제이전법을 쓰기 위해서는 정말로 심사숙고한 뒤에 추진했어야 할 것이나

광해군은 비록 자신의 아버지인 '선조'가 추진했다고는 하나, 이에 대한 방비가 미약했다

할 것이다.

광해군이 당시 처한 정치적 국제적 상황 속에서 행한 각종 정책이나 외교술은 당시의

시대적 안목을 꿰뚫고 행하였다는 점에서는 반론은 없으나 너무도 소심하게 추진한 것이

오히려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작금의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 임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입장이기는 하나,

민생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 국회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와 날로

쌓여만 가는 민생 법안들을 보면서 또 다른 광해군의 시대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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