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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조선의 지존으로 서다 - 타고난 절대군주가 뿜어낸 애민의 카리스마 숙종의 진면목 ㅣ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8월
평점 :
추천 권유도 9
국왕은 숙명이요 운명이다. 어떤 국왕을 만나느냐에 따라 한 시대, 한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한 개인의 운명까지 결정된다는 뜻으로 ‘숙종’에 대해 평가한다면 한 마디로
‘쇠잔한 조선에 힘을 불어넣은 임금’
이라 평할 수 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는데,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마주한 우리가 몰랐던
조선의 또 다른 리더 숙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작품을 통해 역사 속에
남긴 그의 자취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 중 가장 두드러진
사항은 아마도 조선판 ‘마키아벨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고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은 아마도
숙종을 끝으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염원인 ‘북벌(北伐)’에 대한 의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도
일부 확인한 아쉬운 시간이었다.
조선 19대 왕 숙종(肅宗)은 재위기간 45년 10개월로 그의 명칭은 사후에 신하들이 붙인 묘호(廟號)로 숙(肅, 엄숙할 숙)은 ‘손에 수건(巾, 수건 건)을 들고서 깊은 연못(淵, 못 연)에서 일을 한다’는 것으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 매우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깊은 연못에 임하듯이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이 1남 7녀 중 독자였고, 숙종 역시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에서 1남 3녀로
독자로 1667년(현종 8년) 세자위에 올라 10세 때 김만기의 딸(인경왕후)과 혼인하여 딸만 둘을
두었으나 자식들은 어려서 모두 요절했으며 부인 인경왕후도 20세에 천연두에 걸려 발병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떤 이유로 그런 평가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경왕후가 장수하였다면 숙종대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역사적 평가가 있다.
숙종을 거론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장희빈’을 함께 언급하며 숙종을 조선의 여타의
왕들처럼 여인을 밝혔던 왕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함이 없는데 이는 일부로 전체를 평가하려는
편협한 생각이라고 본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숙종 재위기간 행한 여러 정치적 조치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14세의 어린 나이에 권좌에 올랐으나 나이를 뛰어넘는 그의 정치적 행보만 봐도 숙종에 대한
섣불리 내린 평가가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숙종은 신하들에게 엄숙했으며 신하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던 반면 공포와 경계의
대상으로 말 그대로 엄한 왕이었다고 한다.
숙종의 숙청([肅淸] 혼란한 세상, 그릇된 일 따위를 엄하게 바로잡음 혹은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제거함)은 무자비했고 또 국왕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할 때는 서늘한 늦가을
같았다고 한다.
그 결과 조선 ‘4대 사화’를 통해 죽은 선비 모두를 합쳐도 숙종에 의해 목숨을 잃은 선비 숫자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숙종을 어느 역사가도 ‘폭군(暴君)‘이라 부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 에브러험 링컨은 재위기간 동안 남북전쟁이라는 특수 사정이 있어 그랬다고는 하지만 언론을
그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탄압했고, 통폐합하는 등 그 어느 대통령보다 언론을 심하게 다루었음
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미국인들은 링컨을 언론을 탄압한 저급한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 것과 동일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링컨이 이 땅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격변의 시기마다 자주
심판 대상이 되어 아마 몇몇 무늬만 사학자인 저질 폴리테이너들과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자리
차지하려는 이상한 놈들이 주도하는 무늬만 이상한 단체인 것들에 의해 폄훼되고 평가 절하
되어 국회라는 곳에서 언론 압살의 주역으로 평가되는 수모 아닌 수모를 겪은 뒤 국립현충원
명부에서도 삭제되었을 것이다 -
숙종의 성격내지는 통치술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는 사례는 태종이나 세조는 숙청을 단행할 때
최소한 관련 공신(功臣)만은 어느 정도 남겨놓고 정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숙종은 한순간에
모든 신하를 전격적으로 단칼에 바꿔버리는 환국(換局)을 단행한 인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는
데 숙종은 자신이 계획한 거사를 실행함에 있어 조금의 미련도, 아쉬움도 남기지 않았던 인물
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숙종은 알면 알수록 과단성이 강하며 권위와 능력을 겸비한 왕으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다했던 리더로 평가할 수 있는데 작품에 나타난 숙종의 정치적 행보를 통해 얻은 강한 느낌을
정리해 보면
* 본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특정 사안에 대한 원인과 배경, 처리 결과에 대한 분석보다는 숙종시대에
활약했던 관련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인물과 관련된 집안 설명이 많아 사건 내용에 집중했던 여타의
작품과는 차이가 있었다.
절대 왕권에 의해 운영되던 ‘고려’와는 달리 신하 및 참모에 의해 국가를 통치하고자 하는 이념이
강했던 ‘조선’은 좋게 이야기해 신하들의 자율성이 극대화된 혹은 여론 수렴 창구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으나 역으로 이런 현상은 자칫 왕권을 무시하는 행위로도 비춰질 수도
있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항이 ‘사문난적’이라는 단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던 당시 문관들의 절대권위자
였던 ‘우암 송시열’은 어린 나이에 권좌에 등극한 숙종을 가볍게 보고 - 송시열, 그는 나름 이유와
사정이 있어 그랬겠으나 왕의 출사 권유를 습관적으로 거부하는 모습은 내가 왕이라도 그런 행동
을 보이는 인간을 왕은 자신을 낮추어 본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 4번에 걸친 숙종의 출사 권유를
외면하는데, 선대왕부터 이어져 온 왕권의 정통성을 의심케 하는 ‘복제논쟁’과 현종(숙종의
아버지)의 ‘묘지문’ 사건으로 부터 시작된 조정과의 악연을 그의 제자들이 이를 옹호한다고 무리
하게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숙종의 미움을 받아 큰 화(사화, 士禍)를 자초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의 주도 세력을 바꾸지만 숙종은 ‘서인’들은 다루기는 어려우나 신뢰할 수 있었던 반면 ‘남인’은 다루긴 쉽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숙종은 참모들을 통치를 위해 자기를 보좌하는 집단으로 여기기 보다는
단순히 자신의 정적 제거를 위한 수단이요 도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결과, 숙종이 직접 특정인을 지명해 그를 탄핵시키도록 노골적으로 3사를 압박하는 일이 예사였다고 한다.
이즈음 되면 최근에 일어난 우리의 탄핵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숙종에 의해 주도되었던 당시의 ‘탄핵’과 최근 우리 정치사에서 남발되었고 지금도 툭하면 터져 나오는 다수당에 의해 추진되는 ‘탄핵’을 비교해 보면,
숙종의 탄핵은 절대권자가 지향하는 국정방향 내지는 의도하는 정치적 야망에 반할 경우 이에
해당하는 집단 내지는 개인에 대한 정리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면, 작금의 탄핵은 민생을
대표하는 다수당이 자신들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다고 판단되면 민생 문제와는 관계없이 자신들이 속한 정당의 목표 달성을 위해 탄핵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마치 중국
문화혁명 시대에 홍위병들이 순수한 소년 홍위대를 이용해 난리치던 방법으로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내 눈에만 그렇게 비춰지는 것일까?
듣보잡으로 살다 뱃지를 달게 해 준 리더에게 보은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들이 앞장서서 난리
치는 모습과 정치 전과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라 걱정하는 질 낮은 행동을 보면서 웃음 이전에 눈물부터 나오는 것은 왜일까?
마치 어린이 성폭행범인 ‘조 XX’이가 ‘어린이 성범죄 예방 및 인권재단 이사장’을 뽑는 단체에
회장후보로 입후보하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또 왜일까?
꼴뚜기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특히 겸손이 힘들다고 난리치는 어떤 고매하신 안면 불량 자칭 언론인은 말도 안 되는 가짜 뉴스를 통해 짭짤한 수입을 올리며 연일 예술적으로 난리치면서 뚫린 입이라고 확인할 수도 없고,
취재원 보호라는 미명하에 첩보운운하며 마구 떠들어대도 이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는 특정 집단과 그에 편승해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하면서 수수방관을 가장하고 오히려 응원하는
듯한 모습에서 그들이 진정 이 땅의 진정한 참 언론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고는 하는데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더욱 애처로운 것은 무슨 일만 벌어지면 고발장 접수하러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서민의 대변인이 아닌 고발장 접수를 주 업무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수준 낮은 인간들이 더욱 문제이고 웃기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의도에 민생 챙기라고 보내놨더니 그런 일보다는 무슨 일만 생기면 고발장 접수하러 몰려다니고그런 모습을 남기겠다고 기념사진 촬영에만 열중하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인간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난리치며 접수한 고발장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된 것이 무엇인지 나는 궁금할 따름이며 정말로 있다면 어느 내용인지 밝혀주길 바랄 뿐이다.
하여간 모두가 봉숭아 학당의 맹구 수준의 행동을 하지만 맹구처럼 자신은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고 눈깔 부릅뜨고 난리치고 있으니 애처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뿐이다.
나는 얼마 전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을 만들지 말자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벌서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 수준 낮은 중국 대표라는 저질 인간 아가리에서 드디어 우려되던 사항이 튀어나왔다고 한다.
미국이 부과한 한국의 관세가 낮아진 이유가 자신들이 미국과 싸운 결과이기에 자신들의 은공을 잊지 말라는 심청이 랩하는 개소리를 했다고 한다. 내가 뭐랬는가...수준 낮은 어느 인간의 혼밥질
과 영혼 없는 쎄쎄 발언 여파는 언젠가 후세에 또 다른 역사의 ‘하인리히 법칙’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이다. 앞으로 이 색히들 더하면 더했지 질낮은 간섭질 절대 줄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서해 우리 영해에서 양식장을 위장한 채 해양영토를 넓히려는 야욕이 어떤 형태의 하인리히 법칙으로 나타날지 걱정스런 마음 뿐이며 그런 모습에 대해 쎄쎄라고 또 이야기할 것인지가 자못 궁금하다.
여기에 더하여 더욱 애타는 것은 간첩 때려잡는 관련 법안을 만들지 못하게 해 이제는 중국의
고등학생까지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국가 안보시설을 촬영해 난리도 아닌 중차대한 시국에 원천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자기 반성적 성찰과 함께 정치인 모두가 합심해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없고 이미 판결로 위법이 확정된 문제 사항을 사골뼈 진국 우려먹듯 재탕 삼탕하면서 상대 짓밟기에만 전력투구하는 어느 집단을 보면 공동의 외부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죽일 놈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행동하는 집단의 저의를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잘못된 것일까?
두 번째는 안타깝게도 숙종시대나 현 시대나 동일하게 ‘지록위마’([指鹿爲馬]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제 마음대로 휘두름)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고사는 너무나 잘 알려진 것으로 중국 진(秦)나라의 조고(趙高)가 자신의 권세를 시험해 보고자 제2세(世) 황제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작금 우리 정치사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과 거의 유사해 이렇게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특정 정당의, 특정 인물에 의해 위의 고사와 같은 현상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숙종은 3사를 동원해 ‘지록위마’를 실현하였으나 작금은 소년 홍위병들을 동원해 곳곳에 조고(趙高)같은 인물이 주도가 되어 숙종 시절 호가호위하던 ‘김석주’같은 인물이 여기저기서 나와
난리치고 있는 모습이 위의 고사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고만고만한 김석주가 나오다 보니 차별화한다고 비슷하게 어필하거나
밋밋하게 어필하면 자신에게 은전을 베푼 리더에게 찍힐까봐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사사건건 침소봉대하고 같은 문제라도 임팩트를 증가시키려 격한 단아와 문구로 이목을 집중
시키려는 현상이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특정 집단에만 나오는 현상도 아니다. 모두가 난리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지도자라고 참칭하는 어느 말도 안 되는 인간은 자기 수준의 괴상망칙한 말도 안 되는논리로 통수권자의 헛발질을 찬양하고 이를 빌미삼아 이를 반대하는 인간들은 기회를
잡은 양 밑도 끝도 없는 제보형식을 빌어 세상을 마구 흔들어 대고 있으며, 민생 문제를 갖고 민의의 전당에서 토의하라고 하면 발제와는 상관없는 사항을 갖고 상대를 면박 주는 저급한 발언을 일삼고 이를 지적해야 할 중립을 지켜야 할 어느 리더는 한쪽에 치우쳐 자신이 왕이 될 상이라고 맹구같은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새 시대가 오면 바뀔 것이라고 외치며 촛불로 정권을 세운 이들도 그들의 정권이 막을 내린 뒤
장부를 뒤져 보니 만만치 않은 여러 문제 사실이 나오고 있는 등 그 밥에 그 나물이었음이 나타
나며 상황이 좋지 않게 전개되자 반성은 고사하고 상대의 약점을 더욱 더 파헤치는 물타기 작전과 성동격서식 화제 전환용 단어를 주구장창 생성해 내면서 자신들의 선임자들이 저지른 오류와의 단절과 은폐를 유도하려 하나 그게 말같이 되지 않으니 이를 막아보겠다고 전직 고위직에
있던 어느 인간은 보이는 것만 시원치 않은 줄 알았더니 터진 입도 쓰레기라 주접떠는 것 보면
대학시절 사람 패 죽이라고 사주하다 전과자가 된 어느 잡독설가처럼 오늘도 자신만 똑똑하고
예지력이 있다고 외치고 있다.
독설을 날리며 그들의 옛 영화를 구현하고 싶으면 또 그들이 정말로 그렇게 잘 났으면 그들의
전임자들이 유야무야 덮어 버리고 지나간 518 민주화 유공자 명단과 선정 이유, 사드로 중국과
밀약한 삼불일한에 대해, 혼밥의 달인이 통돼지에게 넘겨준 USB 내용에 대해 조사하자고 왜
이야기를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으며 이전부터 문제가 있어 이야기되어 와 금번에 문제가 되었던 통계조작에 대해 설명을 시원하게 줄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누구 말처럼 입으로만 반일을 외치고 머리로는 친일하지만 말고 올바른 독설가이고 나라를 진정 걱정하는 인물이라면 동일한 잣대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데 어찌 생각하는지 자못궁금할 뿐이며 이런
수준 낮은 질문에 답을 못하면 정말로 그대들이 수준 낮은 인간들일 것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갖고 미래를 행해 닥쳐오는 시련을 이겨나가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것이다’라고했습니다.
우리에게 멋지고도 행복한 내일을 만들어가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노력에 노력을 하시는
‘창조적 소수자’님들에게 이야기해 드리고 싶은 것은 혼란한 세상에 이름 한 번 남겨 보겠다고
오지랖 떠는 것도 중요하지만 ‘엘라 골짜기’에 나뒹구는 누구의 몽뚱이처럼 되지 마시고 아무리
자기의 리더가 말(馬)을 갖고 사슴(鹿)이라 칭한다고 할 때 이를 적극 부정할 수 있는 올바름을
최우선적으로 지녀주길 당부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에휴...어찌 되었던 나부터라도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원망하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는 가족에게
욕 안하고 작은 일 갖고 침소봉대하지 않으며 비전과자 출신인 정치꾼이 아닌 정치가를 뽑고자 합니다.
오늘도 핏대 올리며 협치와 협력을 입으로만 외치는 창조적 소수자님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비천한 상태로 유배당했고 거기서 종말의 신비한 계시록을 받았고
민족의 개혁을 꿈꾸던 정약용도 강진으로 비천하게 유배된 다음 ‘목민심서’를 썼다고 합니다.
부채를 떠안은 채 치명적 마비 ㅇ증세를 앓으면서 구금상태로 지내던 헨델은 세기적 명곡을
창작했습니다. 영광의 메시아, 할렐루야 대합창은 비천한 상태에서 이뤄졌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혜안을 발휘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어느 박수무당 닮은 질낮은 인간이 자장면 쳐 드시면서 터진 입으로 개소리하는 영상이 가끔
보이던데 우리의 수준 높은 창조적 소수자님들은 진중했으면 합니다.
첨언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경계하지 않는 자신의 장점은 언젠가 자신에게 두 배의 약점으로
돌아온다는 것과 또 입으로 성공한 자는 반드시 입으로 망했음을 기억하라는 이야기입니다.
- 자의대비, 즉 장렬왕후 조씨는 말 그대로 비운의 왕비로, 15세에 인조 16년 인렬왕후 한씨의
뒤를 이어 인조의 계비가 되지만 피부병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로 인조와 사실상 별거에
들어간다.
인조와 효종 사후 손주며느리인 명성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경우 자의대비의 존재가 껄끄러워질
것을 우려해 자신의 가족을 지배세력으로 넣으려 국왕인 숙종을 보필할 사촌 김석주를 등용
시킨다.
-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조선 국왕 중에 유일하게 정실왕후(명성왕후 김씨) 한 사람만을 아내로
두었다. 명성왕후는 영의정을 김육의 아들인 김우명의 딸로 숙종 즉위 후 일어나는 주요 사건에
배후 조정자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 14세의 숙종의 명령에 송시열은 대놓고 4번이나 거부하며 항명한다. 아니 게겼다는 게 맞다.
1) 송시열을 원상에 임명하나 이를 거부
2) 성균관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 요직에 앉히려 하나 이를 거부
3) 현종의 묘지문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거부
4) 중추부 판사라는 관직을 제수하나 이를 거부
숙종은 조선 최고의 ‘호모 폴리티쿠스’ 태종에 버금갈 정도의 정치력을 갖춘 인물로, 집권
과정에서 정변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세져야 할 공신이 없었다. 군주로서 본인의 능력만
탁월하다면 왕권강화를 추구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 어린 시절 누구로부터 어떤 책을 어떤 방식으로 읽었느냐 하는 것은 훗날 그가 보여줄 통치
방식을 미리 점칠 수 있게 해준다.
14세 숙종의 공부는 ‘논어’와 ‘자치통감’을 양축으로 진행된다. 허적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온
남인계통의 허목과 윤휴도 ‘특별히’ 참여하게 되는데, 숙종의 기본적인 학문 틀은 남인계열에
의해 만들어진다.(P122)
* 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문제로 영의정 허적과 의견이 갈려 허목은 강경파 청남(淸南)
영수가 되고 허적은 온건파 탁남(濁南)의 영수가 되어 대립
* 윤휴는 독학자답게 당시 유학자라면 누구나 당연시 하던 주자학적 경전해석을 거부하고
독자적 해석을 가해 당시 큰 파문을 일으킨다.
- 숙종 대에 행한 여러 치적 중 눈에 띄는 것은 선대에 대한 예우가 극진하였다는 점이다
1)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를 태묘에 배향하고 태조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이방석(소도군), 이방번(무안군)을 추증했다는 사실이다.
2) 태종 이방원에 의해 허수아비 임금을 했던 공정대왕을 ‘정종’으로 정한 일
3) 자칫 왕실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 있는 노산대군을 단종으로 정한 일
4) 사육신의 복작(復爵)을 명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한 일
5)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소현세자의 강빈과 그의 세 아들에 대한 회복을 명한 일
- 숙종은 청나라와의 항복 조건을 깨고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를 요새화하고 군제를 개편
하는 등 북벌의 꿈을 키우게 되는데 숙종 6년 청나라 사신들이 귀국길에 백두산에 들로 제사를
올리는 일이 조정에서 현안으로 떠올랐는데 숙종의 엄명으로 청나라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
시키라는 엄명을 내린다.
특히,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외교 문서를 통해 일인들에게 분명하게 통보하였으며 2년에 한번씩
강원도 부사들이 현지를 순찰하고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 화폐유통을 건의한 인물은 영의정 허적과 좌의정 권대운인데 화폐유통은 태종도 실패한 국가
프로젝트로 숙종은 특유의 카리스마 리더십으로 화폐유통을 관철시킨다. 그로 인해 조선의
상공업은 일대 약진(P199)
반면에 상업이 본격화되고 농민의 이농현상이 극심했으며 화폐유통으로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
전국을 떠돌며 유리걸식하는 유민의 숫자도 급격하게 증가했다.(P401)
- 암행어사 제도는 세종 때 예종에서 당나라의 예에 의거해 강력히 추진하던 제도이지만 숙종
때처럼 거의 해마다 조선 팔도 전체에 파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암행어사를 파견할 때
숙종은 즉위 초부터 지방 수령과 변방의 장수를 반드시 직접 불러서 격려와 함께 경고를 잊지
않았다.
- 인재 발굴의 어려움에 봉착하자 경연에서 신하들이 인재 부족을 토로하자 숙종은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어찌 말세여서 인재가 없기 때문이겠는가? 예부터 창업한 임금은
모두 이전 나라의 인재를 등용하여 성공에 이르렀으니 어느 시대인들 인재가 없겠는가? 다만
알아보지 못함으로 인해 쓰지 못할 뿐이다’ 라고 일갈하고 있다.(P208)
--->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리는 ‘적폐청산’과 ‘이전청산’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 집안은 송시열과 같은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을 비롯해
여러 문제로 송시열과 갈등을 빚어왔다. 사촌 오빠 김석주와 함께 남인이 추진한 송시열 제거에
동의한 이유가 그런 맥락이다.
- 숙종 5년 중반부터 남인의 과도한 당파성과 무능에 숙종이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 점을
간파한 김석주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핵심 인사들과 비밀리에 의견을 교환하며 정권
교체 준비에 들어갔다.
작품에서 얻은 지식들
- 함벽여츤(銜璧與櫬) 패한 나라의 군주가 손을 뒤로 결박 지은채 구슬을 입에 물어 진상하며
죽음에 처해도 이의가 없다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관(棺)을 짊어지고 가는 것
- ‘참람하게’란 분수를넘어서 왕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뜻이다.(P 95)
- 일언가파 [一言可破]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능히 판단할 수 있음. 즉 단칼에 정곡을 찔렀다.(P102)
- 도목정(都目政) 이조와 병조에서 매년 두 차례씩 인사평가를 하여 승진과 좌천시키던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