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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다시 한 번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받은 인상이 꽤 불편했기 때문에 재독을 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독자들의 평이 상당히 후한 편이어서 이거 내가 너무 삐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받은 불편한 심사는 소설의 문체가 너무나 단조롭다는 것, 이야기의 구조와 주제 의식도 무척이나 단조롭고 순진하다는 감상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의미에선 독자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순간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시류에 적당히 편승하기 좋은 ‘말랑말랑한 힐링(healing) 테마’의 글을 소설로까지 읽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자조랄까. 어쩐지 SNS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미담 부류의 사연을 엮어 놓은 이야기를 읽고 있는 심정이 든 것도 사실이다.

 

재독을 하면서는 일전에 받았던 감상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런저런 요인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이 소설의 성격을 인지한 독서라는 점이 가장 크지 않을까(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다).

다시 읽는다고 소설의 주제가 변할 리 없기 때문에, 또 소설이 난해해서 작가의 메시지를 오독할 수 있는 창조적 독서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이 말랑말랑한 힐링을 테마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금 더 얘기해보면 세상을 선량하고 성실한 태도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훈훈함이 이야기의 곳곳에 배어 있다. 긍정적 관점, 역지사지의 미덕에 대한 에피소드로서 친숙하고 온정적인 맛이 있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로서 이것은 또 이것대로 괜찮은 것이 아닐까, 그저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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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그야말로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 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경제적 양극화와 곤궁, 사회적 문제가 된 취업과 실업의 문제 등이 뾰족한 대응책도 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실감할 것이다. 이 달에 전달 받은 두 권의 소설이 모두 그와 무관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시대의 거울이라는 오래된 소설의 명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점이 있다. (공교롭게도) 두 권의 소설이 모두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도, 쓰나미와 원전 누출이라는 참담한 재앙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고, 고통의 현재진행형일 자국민들에 대한 위로의 심정이 보통의 일본 작가들이라면 지닐 보편적 심리 상태가 아닌가 하는 추측마저 들게 한다.



그러나 소설의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작가의 의욕이 작품을 망친 것은 아닐까 싶은 안타까움이 독자인 나에게는 남는다. 작가의 의욕이란 비난 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엔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선량함의 의지'와 비슷한 것이다.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세상이어서는 안 돼'라는 목소리에 대고 누가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비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손해를 보지 않고서는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이 오늘날의 시대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손해를 보는 모두가 착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행위는 선량함과 무관하다. 그리고 세계는 선량함으로 조직되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적이든, 불합리하든, 혹은 인간적이거나 비인간적이든 오늘날의 세계는 선량함마저 상품으로 팔 각오와 실행력을 갖추고 있다. 적당히 포장된 선량한 기업의 이미지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보다 효과적으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전략에서 창조 된다. 선량함이란 무엇일까. 쉽게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소크라테스라면 선량함을 '아는 것'이라 말 할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선행은 선행이 아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 주장에 기대어 본다.



호스트, 호스티스, 프리터, 술집 마담, 야쿠자, 고아로 자란 형제, 자살한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딸 등등. 사회에서 소외 받고 천대받는 직종에 종사하는 인물이거나 인간적인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원숭이에게 복수하는 '게'들이다. 그러나 웬 걸. 이들의 복수극에 속도를 가해야 했는지 아니면 실상 작가는 현재의 사회적 문제아들이 형편 없어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는지 우리의 '게'들은 그 처량한 사회적 냉대를 가볍게 무시하고 적당히 평화로운 삶들을 살아 가는 듯 보인다. 속았다. 하마터면 나는 호스트와 호스티스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제법 살 만 하잖아, 싶은 생각을 하게 되고 만다. 그들의 어려움과 말 못할 속사정은 독자의 상상력이 채워가야 할 공백으로 남겨 둔 것일까. 어쨌거나 솔직한 심정으로 값비싼 유모차를 몰며, 아르마니 셔츠를 입고 살아가는 자들을 속물적 차원에서 남의 얘기 읽듯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복수극이 통쾌할 리 없다.



사실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복수를 행하는 인물은 단 두 사람이다. 부모를 자살로 몰고 간 에노모토를 차로 치어 숨지게 한 미나토 게이지. 역시나 자신의 부친에게 자살을 강요한 정치가에게 복수하는 소노 유코. 우리가 그들의 복수에 언뜻 공감하고 동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조금 위험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나토 게이지의 차에 치어 숨진 에노모토 요스케는 악덕 자본가에 다름 아니지만 그것으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다면 우리가 등 뒤에서 칼을 꼽고 도덕적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해보라. 내리 3선한 실력자인 정치가의 비리를 숨기기 위해 자살한 부친을 대신해 정치에 불법적으로 개입하는 소노 유코에게선 위험한 기운이 감지된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매니지먼트 하고 있는 입후보자를 사지로 몰아세우는데 거리낌이 없다(준페이가 야쿠자에게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거리 연설을 강행하려 한다). 그리고 정말 우습게도, 많은 유권자들은 개개의 정치인이 아닌 바로 그 정치적 생리에 대해 씻을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꽤 많은 복수극들을 읽거나 본 경험이 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그것은 끊임 없는 피와 공포의 <퍼레이드>이다. 아마도 작가는 그 사실을 끝끝내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인정하지 못하면 극복하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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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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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가 기억에 남는다. 몇 문장을 빌려 쓴다.

<중요한 것은 『지옥설계도』가 좋은 소설인가 아닌가의 문제뿐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판단해 주시기를 빕니다. 무슨 주의, 무슨 주의 말은 많지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설밖에 없습니다. 황당무계하고 졸렬한, 대중이 좋아하는 새빨간 거짓말만 씌어 있는 나쁜 소설과 어떤 사회 속에서 부대끼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 그려져 있는 좋은 소설입니다.>

그렇다. 중요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자 여러분 중 하나인 나에게 『지옥설계도』는 좋은 소설이 아니다. 결론에 합당한 이유라는 게 필요하겠지만 일단 먼저 밝혀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것이 벌써 2주 전이다. 지금에 와서는 내용이 잘 기억 나질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두 번 씩이나 읽을 수는 없다. 남은 것은 독서 후 남겨둔 메모와 인상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게다가 흔히 장르소설이라 불리우는 소설들에 대한 독서 경험이 아주 얄팍하다. 장르소설의 문법이라는 것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다만 그런 독자의 입장이라는 사실을 언급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군더더기처럼 덧붙이고야 말았다. 아직 리뷰라는 것을 써야하는 괴로움이 남았다. 

 

 

메모를 보니 중반 이후부터 소설이 술술 읽힌다고 적어 두었다. 초반부의 산만함과 지리멸렬함이 비로소 퍼즐이 맞추어지는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현실과 판타지, 보통의 세계와 강화 인간의 세계라는 다중 구조를 산개시키는 방법으로 전개된다. 의문의 살인사건이 하나씩 베일을 벗어나가면서 이야기가 집중력을 갖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클리셰가 되어 독자들을 어떻게든 마지막 책장까지 끌고 간다.  

소설은 추리물에 중세와 현세의 영웅담이 짬뽕 되어 있다. 인페르노 나인의 세계는 게임 세계를 말한다지만 중세적 영웅담 이야기와 차이가 없고, 강화인간이라는 설정은 흔하디 흔한 여타의 에스퍼들과 크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현 세계의 가장 커다란 문제적 담론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의 경제철학적 이야기가 논쟁을 촉발시키는 중심에 놓인다. 작가의 해박함은 독자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전히 클리셰를 넘지 못한다. 거칠게 얘기해 보면 이렇다. 공생당은 자본주의의 비극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려는 비밀조직이다. 자본가들의 끝 없는 욕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은 선한 자본을 통한 장악이다.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과 연민이며 자본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논쟁은 공생당 내부의 분열을 일으킨다. 그리고 자본가는 뒤에서 웃는다. 공생당의 내부 분열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취조하던 국가정보부 소속의 중년 남성이 내부의 비리를 까발리게 된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사실 거의 결정이 나있는 셈이다. 어떻게 전개되어도 전혀 놀랍지가 않다.  

 

 

물론 우리는 큰 줄기를 이미 예상하면서도 소설을 읽는다. 그것은 소설이 단지 이야기로 완성되는 언어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렇다. 소설은 언어 예술이다. 작가는 소설 미학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소설을 읽고 나니 이건 단지 변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설가는 소설로 말해야 한다. 작가의 말은 변명의 장이 아니다. 소설의 문장이 술술 읽힌다. 어떤 문장들은 안 읽고 그냥 넘어가도 큰 무리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에스컬레이터식 문장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욕구가 인다. 도식적 전개에서 적당한 긴장감이 유발된다. 점점 책 읽는 속도감이 붙는다. 고마운 점도 없지 않다. 읽어 치우는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도 기억에 남는 인물이 없다. 삶의 최하층을 경험한 이들이 한 순간에 초인적 능력을 갖게 된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소수의 자본가들이며 그들의 욕망 때문에 민중이 병드는 것이라면 이들 강화인간이라는 것은 그 자본가들을 대체 할 신 인류이며, 그들 역시 과거와 단절된 초엘리트 집단이다. 강화인간들의 추상적 논리에 인류의 운명이 좌지우지 될 판인 것이 이 소설의 눈물 나는 투쟁이며, 위선의 극치이다. 나는 여기에서 어떤 진지함을 느낄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할 말도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비판도 비판 나름인지라 조금 더 성의 있는 글이어야 했다는 반성을 동시에 하게 된다. 그저 한 독자의 견해일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침묵 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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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소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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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화 《레미제라블》의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영화의 흥행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강력한 권위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파리 시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장중하고 미려한 음악과 함께 어우러져 일궈낸 미학이 제 1의 조건일 것이다. 다수의 피지배자들이자 권력의 유배자인 시민으로부터 발발한 혁명은 언제나 최종적 결과의 미진함을 안고 있다 하더라도 말로 하기 힘든 애환을 만들어 낸다. 개인이 시민으로서의 자격으로 참여했든 참여하지 않았든, 경험자든 미경험자든 여부를 가리지 않고 혁명적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저 비통하고 절박한 몸짓 하나하나가 간절히 구하는 바가 사람답게 살수 있는 권리, 즉 '인권'이고, 이것이 한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가치라는 점을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인권을 위해 민중이 스스로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면 단연 '동학 혁명'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혁명이라는 용어의 개념적 적합성은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근대적 시민운동의 성격을 갖추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도 전혀 중요한 바가 아니다. 다만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주의를 내세우며 인권의 가치를 드높인 운동이 이전과 이후로도 동학에 비견될 만큼 충실하고 대중적인 경우가 없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19세기 말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지적하는 것도 기억해 둘 만 하다. 

 

 

황석영 선생의 『여울물 소리』가 반가운 것은 무엇보다도 그 동학을 소설의 내부로 끌고 들어왔다는 점이다. 독서력이 별 볼일 없는 필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이후 동학이 소설의 소재가 된 것은 박경리 선생의 『토지』등과 같은 대하서사류의 작품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편입된 기억 밖에는 없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탈고하신 지 언제이며, 또 생을 달리하신 지 언제인가 하면 『여울물 소리』는 반가워도 너무 반갑다.

그런데도 나는 조금 아쉬운 소리부터 하기로 한다. 매를 먼저 맞는 게 낫다면 때리는 일도 먼저 하는 게 낫다. 때리다 지쳐 내가 무엇을 위해 매를 들었는지도 모르는 폭력노동 만큼 쓸데없고 불쾌한 일이 어디 있을까. 물론 여기에서 내가 매를 들다 지칠 일 따위가 있을 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여울물 소리』라는 소설의 형식이 낯설면서도 낡았다는 이 아이러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황석영 선생이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우리네 서사의 울창한 숲'이라는 감각이 도대체 무엇인지 경험하지를 못한 세대의 독자인 나는 이야기를 듣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라는 시스템이 '우리네 서사'의 서사 형식이기 때문에 낯설고, 근대적 독자로서 어떤 정치한 형식의 틀에 묶여 있기 때문에 낡아 보인다. 『여울물 소리』의 화자는 박연옥이라는 기생 출신의 여성이다. 연옥은 자신과 부부의 정을 맺은 이신통이라는 예능인(적합한 소개가 아니라고 해도 나로서는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을 추적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이를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셈이다. 이 연옥이라는 인물의 귀신 같은 기억력에 대한 놀라움은 우스갯소리로 넘긴다 하더라도 화자의 설정이 서사를 다소 평면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말이라는 우리 역사의 격변기가 연옥이라는 화자의 활동범위 안에 갖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중에서 평면화의 가장 큰 희생제물은 다름 아닌 연옥 그 자신이기도 하다. 연옥이 제 아무리 일개 주막집 기생에서 천지도(동학을 소설화한 명칭)에 감화되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소설 내내 이신통의 뒤를 따라 다니는 전형적인 수동적 인물에 불과하게 된다. 왜냐하면 연옥은 이신통의 행적을 쫓아 만나게 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화자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19세기 말의 조선의 사회상에 대해 발설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결과를 알고 읽는 소설에서 독자에게 긴장감을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화자의 위치는 그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갖는 미덕이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불만을 어느 정도 묵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어지는 가렴주구와 유교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애환이 소설에 녹아 있는 것이다. 화자인 연옥이나 그의 어미 구례댁은 말 할 것도 없고, 서얼의 그 중에도 얼자의 환멸 속에서 살아 온 이신통, 충신이었던 가문의 몰락 속에서 올바른 세상을 꿈 꾸는 서일수, 힘 없는 나라의 군인이라는 차별을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김만복, 배 서방, 백화, 박인희 박도희 형제, 안 서방, 또 저 절망의 삶 속에서 사람을 하늘로 대하고 받들려 했던 천지도의 대신사와 도인들 면면의 삶들이 그늘이 지면 그늘이 지는 대로, 볕이 나면 볕이 나는 대로, 웃고 울고 마시고 놀고 투쟁하고 저항하며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치고 일어서며 죽고 다시 만나는 삶이 여울물 흐르듯 펼쳐져 있다. 소설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천지도의 교리가 아니라 하늘을 품은 사람 하나하나의 일면이다. 나는 앞서 결과를 알고 읽는 소설에서의 긴장감을 언급했지만 사실 삶이 녹아나는 이야기에 요구되는 긴장감은 손에 땀이 나고, 잡아먹듯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서스펜스가 아니다. 삶이라는 모순의 공간에 던져졌음에도 살아 가고 죽고 살아 가야 하는 순환, 그 순환 속에서 느슨함과 연민과 사그라들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포와 분노로 자연발생하는 긴장감이 필요하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까지 그 애환을 유지하게끔 하는 소설이 바로 그 조건을 만족하는 소설일 것이고, 나는 『여울물 소리』를 그렇게 읽었다.

또 하나, 묵독의 시대에 음독의 욕망을 일깨우는 듯한 황석영 선생의 유려하면서도 구수한 문체에 책 읽는 즐거움이 있다. 이야기 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들 이렇게 맛깔 나는 문장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로 나는 책을 읽는 도중에 몇 번은 소리를 내어 문장을 읽어 내려 간 적이 있다. 그렇게 읽으면 이 소설의 리듬은 어느새 묵독의 침묵으로부터 현란하게 살아난다.  

 

 

 

<덧 붙이는 말>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다. 소설 『레미제라블』의 힘이 영화 『레미제라블』의 완성도를 보장하지 않는다. 『여울물 소리』를 읽으면서 나는 자꾸 영화 『레미제라블』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잡가나 타령, 판소리와 같은 우리 소리를 즐겨 듣는 청중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영화 『서편제』를 통해 각인된 우리 소리의 울림이 귓가에 맴돈다. 가슴이 조금 먹먹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여울물 소리』의 영화제작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를 원한다. 그것도 아주 괜찮은 영화로 나타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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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전집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은미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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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느 만큼 재미있어야 하는가.

고대의 동양에서 소설이란 말 그대로 '사소한 이야기'로서 정치적 사상이라는 지배자들의 담론 반대편에 자리한다. 그것은 집안을 무대로 이루어지는 아녀자들의 이야기였다. 서양 역시 소설(Novel)은 로망스라는 기사들의 연애와 무용담의 모태에서 비롯되어 나온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설의 원천으로서의 주요 기능은 오락의 문제였다. 근대 이래 소설의 위상이 높아지게 된 데에는 소설이 덜 재미있어졌다는, 심지어는 아주 지루해졌다는 이유가 무겁게 버티고 있다.

 

 

쿤데라는 『이별의 왈츠』를 통해 (내용의)무거움을 (형식의)가벼움에 담아내려고 애를 썼고 그것이 자신이 중요시하는 바라고 말했다. 『이별의 왈츠』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극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극적인 형식이란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기대하지 않던 과장의 일치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빈 틈 없는 연결이라는 정교함과 여유를 두지 않는 속도감에 힘 입어 자연스럽고 흥미를 유발시키는 그럴싸한 하나의 실제로 인식된다. 그렇다. 우리는 이런 것을 두고 (조심스럽지만)통속적이라고 부른다.

 

 

온천이 유명한 조그마한 관광도시에서 닷새 동안 벌어지는 해프닝을 우리는 지켜본다. 유명한 인기 트럼펫 주자인 클리마는 루제나라는 아름답고 젊은 여성과의 하룻밤 사이에 생긴 아이를 낙태시켜야만 한다. 루제나는 이 잘나가는 트럼펫 주자를 잡기 위한 유일한 무기가 아이임을 알고 낙태를 거부한다. 루제나를 끔직이도 사랑하는 연하의 남자 프란티셰크는 두 사람을 감시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몽상적인 산부인과 의사 슈크레타는 조국에서의 불행한 삶을 형제애로 이겨내기 위해 불임 치료차 찾아오는 여성 환자마다 자신의 정액을 몰래 투입한다. 당원인 친구의 밀고로 수감 생활을 한 야쿠브는 망명을 앞두고 친구인 슈크레타와 자신을 밀고했던 친구의 딸을 찾아 온천 도시를 찾아 온다. 야쿠브를 밀고한 당원의 딸인 올가는 독립적인 여성이 되고자 아빠와도 같은 야쿠브를 유혹한다. 트럼펫 주자의 아름다운 아내인 카밀라는 남편의 끝 없는 바람기에 대한 확고한 의심으로 온천 도시를 찾는다. 여기에 돈 많고 허풍스러운데다가 여성 애찬론자인 베르틀레프라는 미국인 요양객이 더해져 사건은 톱니바퀴 맞아 떨어지듯 굴러간다.

 

 

결국 한 여성의 우스꽝스러운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정교한 초침은 점점 귓 속에서 큰 소리로 울리고 마지막 순간엔 오로지 그 초침 소리만이 가득해진다. 이것이 쿤데라가 말하는 형식적 가벼움이다. 그것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아 떨어지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내용의 무거움은 그 안에 담긴 온갖 죄의식과 죄의식에 대한 무감각과 이미 무감각으로 점철되어 버린 지나온 삶의 행적이다. 쿤데라의 말 대로 이것은 우리 삶의 무의미함을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다. 인간이 지닌 무거움(기억의 순간)은 삶이라는 형식의 가벼움(망각의 연장) 안에서 소진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고 망각 속에서 모든 것을 지워버릴 운명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어느 만큼 재미있어야 하는가.

이제는 위상이라고 할 만한 양말도 갖춰 신지 못한 소설의 신세를 두고 우습기 짝이 없는 질문이겠지만 나로선 대답은 해야겠다. 소설은 '너무' 재미있어선 곤란하다. 극적인 이야기라는 괴물이 한 인간의 실존을 잡아 먹어버려선 소설은 오락거리 이상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소설의 노력이란 최소한 기억에 남기려는 것이 하나의 이야기를 등에 진 인간이어야 한다. 이야기가 모든 것을 잡아 먹는다면 남는 것은 오직 재미 뿐이다. 모든 추리 소설 속의 흥미로운 인물들이 하나의 '캐릭터'는 될 수 있어도, 한 명의 '인간'이기에는 미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설의 책장을 덮고 나니 가벼움만 남고 무거움이 소멸하는 헛헛함을 나는 아직도 심드렁하게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설령 그것이 똥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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