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물소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레미제라블》의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영화의 흥행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강력한 권위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파리 시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장중하고 미려한 음악과 함께 어우러져 일궈낸 미학이 제 1의 조건일 것이다. 다수의 피지배자들이자 권력의 유배자인 시민으로부터 발발한 혁명은 언제나 최종적 결과의 미진함을 안고 있다 하더라도 말로 하기 힘든 애환을 만들어 낸다. 개인이 시민으로서의 자격으로 참여했든 참여하지 않았든, 경험자든 미경험자든 여부를 가리지 않고 혁명적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저 비통하고 절박한 몸짓 하나하나가 간절히 구하는 바가 사람답게 살수 있는 권리, 즉 '인권'이고, 이것이 한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가치라는 점을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인권을 위해 민중이 스스로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면 단연 '동학 혁명'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혁명이라는 용어의 개념적 적합성은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근대적 시민운동의 성격을 갖추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도 전혀 중요한 바가 아니다. 다만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주의를 내세우며 인권의 가치를 드높인 운동이 이전과 이후로도 동학에 비견될 만큼 충실하고 대중적인 경우가 없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19세기 말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지적하는 것도 기억해 둘 만 하다. 

 

 

황석영 선생의 『여울물 소리』가 반가운 것은 무엇보다도 그 동학을 소설의 내부로 끌고 들어왔다는 점이다. 독서력이 별 볼일 없는 필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이후 동학이 소설의 소재가 된 것은 박경리 선생의 『토지』등과 같은 대하서사류의 작품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편입된 기억 밖에는 없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탈고하신 지 언제이며, 또 생을 달리하신 지 언제인가 하면 『여울물 소리』는 반가워도 너무 반갑다.

그런데도 나는 조금 아쉬운 소리부터 하기로 한다. 매를 먼저 맞는 게 낫다면 때리는 일도 먼저 하는 게 낫다. 때리다 지쳐 내가 무엇을 위해 매를 들었는지도 모르는 폭력노동 만큼 쓸데없고 불쾌한 일이 어디 있을까. 물론 여기에서 내가 매를 들다 지칠 일 따위가 있을 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여울물 소리』라는 소설의 형식이 낯설면서도 낡았다는 이 아이러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황석영 선생이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우리네 서사의 울창한 숲'이라는 감각이 도대체 무엇인지 경험하지를 못한 세대의 독자인 나는 이야기를 듣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라는 시스템이 '우리네 서사'의 서사 형식이기 때문에 낯설고, 근대적 독자로서 어떤 정치한 형식의 틀에 묶여 있기 때문에 낡아 보인다. 『여울물 소리』의 화자는 박연옥이라는 기생 출신의 여성이다. 연옥은 자신과 부부의 정을 맺은 이신통이라는 예능인(적합한 소개가 아니라고 해도 나로서는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을 추적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이를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셈이다. 이 연옥이라는 인물의 귀신 같은 기억력에 대한 놀라움은 우스갯소리로 넘긴다 하더라도 화자의 설정이 서사를 다소 평면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말이라는 우리 역사의 격변기가 연옥이라는 화자의 활동범위 안에 갖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중에서 평면화의 가장 큰 희생제물은 다름 아닌 연옥 그 자신이기도 하다. 연옥이 제 아무리 일개 주막집 기생에서 천지도(동학을 소설화한 명칭)에 감화되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소설 내내 이신통의 뒤를 따라 다니는 전형적인 수동적 인물에 불과하게 된다. 왜냐하면 연옥은 이신통의 행적을 쫓아 만나게 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화자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19세기 말의 조선의 사회상에 대해 발설하게 해야 하기 때문에. 결과를 알고 읽는 소설에서 독자에게 긴장감을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화자의 위치는 그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갖는 미덕이라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불만을 어느 정도 묵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어지는 가렴주구와 유교적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애환이 소설에 녹아 있는 것이다. 화자인 연옥이나 그의 어미 구례댁은 말 할 것도 없고, 서얼의 그 중에도 얼자의 환멸 속에서 살아 온 이신통, 충신이었던 가문의 몰락 속에서 올바른 세상을 꿈 꾸는 서일수, 힘 없는 나라의 군인이라는 차별을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김만복, 배 서방, 백화, 박인희 박도희 형제, 안 서방, 또 저 절망의 삶 속에서 사람을 하늘로 대하고 받들려 했던 천지도의 대신사와 도인들 면면의 삶들이 그늘이 지면 그늘이 지는 대로, 볕이 나면 볕이 나는 대로, 웃고 울고 마시고 놀고 투쟁하고 저항하며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치고 일어서며 죽고 다시 만나는 삶이 여울물 흐르듯 펼쳐져 있다. 소설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천지도의 교리가 아니라 하늘을 품은 사람 하나하나의 일면이다. 나는 앞서 결과를 알고 읽는 소설에서의 긴장감을 언급했지만 사실 삶이 녹아나는 이야기에 요구되는 긴장감은 손에 땀이 나고, 잡아먹듯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서스펜스가 아니다. 삶이라는 모순의 공간에 던져졌음에도 살아 가고 죽고 살아 가야 하는 순환, 그 순환 속에서 느슨함과 연민과 사그라들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포와 분노로 자연발생하는 긴장감이 필요하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기까지 그 애환을 유지하게끔 하는 소설이 바로 그 조건을 만족하는 소설일 것이고, 나는 『여울물 소리』를 그렇게 읽었다.

또 하나, 묵독의 시대에 음독의 욕망을 일깨우는 듯한 황석영 선생의 유려하면서도 구수한 문체에 책 읽는 즐거움이 있다. 이야기 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들 이렇게 맛깔 나는 문장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로 나는 책을 읽는 도중에 몇 번은 소리를 내어 문장을 읽어 내려 간 적이 있다. 그렇게 읽으면 이 소설의 리듬은 어느새 묵독의 침묵으로부터 현란하게 살아난다.  

 

 

 

<덧 붙이는 말>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다. 소설 『레미제라블』의 힘이 영화 『레미제라블』의 완성도를 보장하지 않는다. 『여울물 소리』를 읽으면서 나는 자꾸 영화 『레미제라블』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잡가나 타령, 판소리와 같은 우리 소리를 즐겨 듣는 청중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영화 『서편제』를 통해 각인된 우리 소리의 울림이 귓가에 맴돈다. 가슴이 조금 먹먹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여울물 소리』의 영화제작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를 원한다. 그것도 아주 괜찮은 영화로 나타나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