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무모한 사랑에 매료되는가
 
엄마가 흰머리 염색을 해야한다고 해서 동네미용실에 따라갔다.
지루하던 차에 TV는 <꽃보다 남자>를 보여주고 있었고, 나는 금새 빠져들었다.

원작의 인기와 미남 배우들의 캐스팅, 판타지적 로맨스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남자".
나 또한 드라마 초반엔 열심히 챙겨보며 시각적 즐거움을 만끽했던 드라마였으니,
조잡한 편집과 비현실성, 캐릭터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맛'만은 좋았음을 인정한다.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거니와, "꽃보다 남자"의 작품성을 논하는 것에는 이젠 관심이 없다.
그저 이글을 쓰는 건 ,오늘 잠깐 이 드라마를 보며 들었던 생각 때문에 손가락 끝이 간지러운 탓이다.
 
"꽃보다 남자"는 대표적인 "무모한 사랑"을 보여준다.
재벌가의 아들들과 서민의 대표격인 잡초같은 여자주인공. 그리고 사랑.
10대 여중, 여고생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화려한 사랑을, 아마 자신만의 판타지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대는? 20대를 어느정도 경험한 여성들은 어떨까. 우리는 왜 드라마나 영화 속에 보여지는 무모한 사랑에 열광하는 것일까.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단골소재인 로맨스. 그러나 꼭 주인공 중 하나는 불치병에 걸리거나, 대비되는 집안이나 직업, 처지의 차이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다. 아, 불륜도 있다.
어쨌건 주인공들은 그러한 온갖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고, 그래서 더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에서 역경은 전혀 반갑지 않다. 아파선 안 되고, 돈도 좀 있어야 편하다. 집안의 반대? 골치 아프다. 불륜? 법적인 문제며 윤리,사회적 범죄이다. 현실의 사랑은 충전기처럼 지속적인 충전이 필요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도 않다. 역경이 있다면 조금 더 오래 뜨겁고 간절할 테지만 그건 반갑지 않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로맨틱 코미디가 되었으면 좋겠다.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행복하게 끝나는 해피엔딩 말이다. 그러나 현실의 역경은 때때로 사랑의 Just End 가 되기도 한다.

10대, 20대 초반, 소녀로써의 나는 스크린 속 로맨스로부터 나 자신만의 로맨스를 꿈꿨다. 그러나
20대 중반, '아가씨'혹은 '**씨'로 불리는 나는,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는 판타지를 스크린에서 찾는 나를 발견한다.
현실의 사랑도 스크린 속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달콤하고 쓰며, 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람을 밀어버린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꽃처럼 시들어버리고, 불씨처럼 사그러든다.
사랑의 시작은 훨씬 더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시작되고
사랑의 끝은 더욱 더 허무하고 쓸쓸하다.


얼마 전, 한 친구가 5년간 사귄 남자친구로부터 갑작스런 이별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
또다른 친구의 친구 역시 오래 사귄 남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고, 그동안의 시간에 해당되는 돈을 달라는 협박 비슷한 황당한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현재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상대방을 완전히 알았다고 확신한 순간,
지금 이것이 사랑이라고 확신한 순간,
동시에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 현실.


사랑을 꿈꾸다 사랑에 찔리는 순간. 그리하여 마음에 굳은 살이 배길 때.
TV를 켜 드라마를 보고, 극장을 찾아 로맨틱 코미디를 본다.
어렸던 날,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

이제는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 다른 이유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점점 현실의 사랑에는 사랑말고도 다른 것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니까.
직업이나 돈, 가족, 집안, ,시간, ,  살아가는 데 중요한 다른 것들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스크린 속 그들처럼 더 이상 무모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사랑 앞에 무모할 수 있는 삶을 정말로 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2009년의 마지막 날, 사랑을 잘 의심하는 내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난 후의 나는 같은 것을 보고 또 다른 얘기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그저 이말을 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 Love actually ! 정말로 무모한 사랑을 하라고.
그리고 그 믿음이 실망으로 바뀔지언정 "기대가 있는" 삶은 조금 더 행복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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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1-0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스텔님, 서재에는 처음 방문합니다.
이글이 다음블로거 튜스 특종 10에 선정이 되셨네요
추카추카^*^
새해에도 행복하시길...

pastel 2010-01-05 10:54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해요 ㅋ 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셔요~^^ㅋ
 
디 워 - D-Wa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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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참, 어제 영화 디워를 봤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웬 큰 뱀이 나오길래 호기심이 생겨서 보고 있었다.
제목은 디 워. 많이 들어봤는데, 뭐였더라. 이 정도만 생각하고 그냥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영화가 이상해진다. 아, 디-워! 심형래의 영화였다.
나-참. 내 기억력에 박수를 보냈다. 이런 것도 건망증에 포함시켜야 하나. 흠.
 
여튼, 영화는 말 그대로 쓰레기였다.
'쓰레기 책'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에도 쓰레기라는 장르가 존재한다.
말이 거칠어서 심형래 감독에게 인간적으로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솔직한 감상평이니까.
영화가 나왔을 당시에 평론가들은 악평을 해댔고, 네티즌도 호평과 악평이 분분했다.

저 정도면 열악한 상황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이고, 한국영화에서도 엄청난 발전을 한 것이라며, 특히 한국적 요소를 많이 가미했다는 것에 대해 심형래 감독을 인간적으로 지지하는 목소리들.
호평은 이 정도였던 것 같다.

악평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대부분 스토리 빈약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직접 영화를 본 결과, 스토리 빈약? 맞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보진 않았지만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더구나 어떤 감정적 교류상황이 충분히 주어지지도 않았는데 급속도로 깊은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사랑에 빠져야한다는 그런 논리인 것인지.

"장면 보여주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스토리"가 긴밀히 연결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다 찍어놓고선 편집을 심하게 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이런 내용 생략하기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많이 보여지는데, 주로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경우나 기존 TV드라마를 영화화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경우엔 스토리가 독자(관객)들에게 충분히 알려진 경우이기 때문에 단독적인 작품성은 떨어질 수 있지만 관객들이 소화하는 데엔 크게 무리가 가진 않는다.

반면 디워는 그것이 의존하는 전설에 대한 상식말고는 관객이 도움을 얻을 수 없다.
이야기 대신 넘쳐나는 장면들을 보면서 '스토리와 인과성의 부재'을 관객 스스로 추리해내고 상상해내서 메꾸어야 한다.

그리고 과유불급.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다. 욕심이 지나쳤는지 너무 많은 것을 영화에 집어넣은 탓에 영화는 잡탕이 되었다.
사실 도심 한복판에 출현한 "큰 뱀"의 설정까진 괜찮았다. 그래, 여의주까지도 봐줄만은 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군단이 나온다. 현대에도 과거에도 맞지 않는. (조선시대같은 옛적의 모습에 그 군단이 출현해 해를 가하는 장면에서 난 정말 실소했다.) 영화는 순식간에 울트라맨이 생각나는 심형래표 어린이영화가 된다.《영구와 공룡 쭈쭈》,《드래곤 투카》뭐 이런.  또한 큰 뱀(이무기)은 엄청 빠르고 주인공들을 쉽게 찾아내면서도 막상 주인공 앞에만 가면 느려터지고, 집어삼키는 걸 망설인다. 빌딩이 나와서 "분명히 저 빌딩 감싸며 올라갈거야", 라고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올라간다. 영화 《킹콩》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즈음 해서, 영화는 아, 끔찍했다.
이상한 괴생명체들이 줄지어, 떼를 지어 출현하고 인간 대 괴물간의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불을 뿜는 익룡이 나타나고 정체불명의 뒤뚱거리는 괴물들과 군단들. 영화는 순식간에 《쥐라기공원》《반지의 제왕》축소판이 된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런장면들로만 흘러간다. 저 모두를 과감하게 빼버리고, 대신에 인물중심으로 스토리를 탄탄하게 받쳐주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 역시 영화는 꿋꿋했다. 갑자기 이유불문 '선한 이무기'가 나타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 여자는 선녀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다음 생에 만나자고 하고 사라진다. 그 와중에 아리랑 음악이 흐른다.

심형래 감독은 순수하게 한국을 알리고자 한 의도로 한국적 요소를  영화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의도는 내가 볼 땐 나쁘게 작용한 것 같다. 한국 특유의 들끓는 애국심이 영화감싸기로 흘러간 것, 영화에 포함시킨 '한국적 요소'- 옛시대의 모습(초가집,한복입은 사람들)과 선녀, 이무기, 여의주의 전설- 가 영화에 제대로 융합되지 못한 탓에 영화에서 '들뜬'채 겉돌아야 했다.

한국의 관객으로선 슬픈 일이다. 내가 가진 '한국'이란 정체성이 영화 속 세상에서 '이슈'는 되지만 섞어들지 못하고 매우 다른 것으로 느껴지는 건 말이다. 외국인들에게도 어쩌면 이 영화는 한국의 이질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으로 역할할지도 모른다. 영화를 들여다보라. 전설을 믿는 사람들과 그 목격자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 그 사람들과 이무기를 편리하게 처리해버리려는 세력들.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여기에서 타국에 살고 있지만 제대로 섞여들지 못하는 각국의 한인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된다. 한국적이나 한국적이지 못하고, 이국에 살고 있으나 그곳에 한 요소로 제대로 섞여들어가지는 못하는 그들을 말이다.

오히려 마지막에 잔잔하게 흐른 아리랑 음악은 생각보단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든다. 한국의 관객에겐 애국적요소로 작용할 것이기에 이 또한 국수주의, 민족주의를 권하는 것 같아 곱게 봐지진 않지만. 그래도 타국의 관객에겐 그나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적 요소를 포함시키고자 했다면 감독은 그래야했다. 시청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짧은 초로 중간중간 화면에 삽입하는 광고처럼, 은연 중에 한국이 영화 속에서 녹아나오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국이 받아들여지도록. 아, 나의 지나친 욕심이란 말인가.

 
결론은, 심형래 감독의 도전 자체는 아름다웠을지 모르지만
영화 자체는 아름답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제작상 어려웠다는 기술의 문제나 금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 자체가 탄탄하지 못했고, 소재 선정과 편집이 적절치 못했다.

CG의 발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다른 많은 문제점들을 결코 상쇄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젠 제발 어떤 작품을(사람에 있어서도) 우리의 그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애국심'운운하며 보지 말고, 그 작품 자체로 평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디워》가 애국 덕을 봤다면, 《청연》은 애국에 의해 깎여내려간 작품. 네이버 영화평점이 디워가 청연보다 더 높다는 것, 말 다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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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미래보고서 2 - 2020년 위기와 기회의 미래
박영숙 외 지음, 류형우 외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라디오를 통해 이책을 알았다.

요즘 온난화 등 환경변화가 주목받으면서 기후협약,  MBC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 등이 주요 이슈 키워드가 되고 있다. 2012년 지구멸망론이 제기되면서 2012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실정. 

결국 이 모든 것은 "미래예측"이란 테마로 모아진다.
5년 후, 세상은 어떻게 될까. 10년 후, 더 이후엔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자신의 미래에 대해 궁금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타로점을 보고, 사주를 묻고, 점집을 찾는 것처럼
자신의 미래와 연관된 즉 '내가 살아갈 세상'을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보게되었다.  온전히 '궁금하다'란 이유에서.

사실 환경에 관련된 것은 내 전공이기도 하므로 크게 궁금했거나, 또 새로운 것은 그다지 없었다.
오히려 출산감소로 인한 한국인의 급격한 감소,
또 지금은 미국이 권력을 쥐고있지만 10~20년 후쯤엔 미국인의 감소, 중국과 인도 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서양에서 동양으로 권력(책에선 직접적으로 권력이라 지칭하지 않지만)이 이동할 것이라는 것,
백인의 감소와 '나라'라는 경계가 무너지고 세계정부가 탄생할 것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참, 잠시 얘기하면, 난 또 잠깐 무섭기도 했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영화가 있었다. 지식층은 출산을 하지 않는 반면 비지식층은 출산을 많이 해서 결국 오랜 시간 뒤에 지구는 진보가 아닌 퇴보를 하게 된다는 설정. 사람들은 쓰레기더미 곁에서 살고, 은어와 비속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인기있는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화면가득 엉덩이만 보여주는 게 전부인, 그런 세상. 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한 남자가 실수로 미래로 가게 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
끔찍한 픽션이지만, 슬프게도 난 잠깐 정말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다. 뭐-그러나 나는 인류의 가능성을 믿으니까, 흠흠.)

어쨌든 읽다보면 응,응, 아- 그렇겠네. 라고 생각하게 된다.
암울한 것도 있고 또 희망적인 것도 있다.
그리고 물론 '예측'이니까, 불확실한 것들도.

사실 제목이 2020이라 되어있어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인 그때 딱 그 시점만의 상황을 예측할 것이라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책에선 다양한 시간대의 예측을 한다. 현재부터 2015년, 2020년, ,, 2500년까지도!!
그리고 읽다보면 시간대가 지금의 나로부터 멀리멀리 건너 뛰기도 해서
솔직히 말해 이건 나랑 상관없겠네. 라고 생각이 드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갈 시간과 결국은 연관되는 것이기에 단시간의(약 30년이내) 트렌드를 파악하기에 유용하다.

책에서는 교육상황에 관해서도 현재와 미래를 말하는데
극단적으로 소제목을 '교사자격증이 필요없어진다.'라고 하는 바람에 잠시 발끈했다. 하지만 읽어보면, 거꾸로 교육의 역할이 더 중요해짐을 알 수 있다.
이미 말레이시아, 핀란드에서 불고있는 교육의 변화.
지식의 전달이 아닌 문제해결력, 의사결정력, 정보분석력이 중요해지는 것.
교사는 전달자가 아니라 공부방법을 가르치고, 배움의 guide가 되는 것.
what 이 아니라 how가 중요한 시대가 오고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당신, 한번 읽어보라구.
작년 2018에서 2009년의 변화가 업데이트된 따끈따끈한 신작 미래예측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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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를 찾아서 - Finding Neverla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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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아서 보게 된 걸까.
심지어 나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야 조니뎁을 발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쨌거나, 이 영화를 볼 당시, 나는 "네버랜드"라는 단어에 심취해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영화를 보진 않았을테니 말이다.

네버랜드(never-land). 그대로 해석해보면 '어디에도 없는 곳', 존재하지 않는 땅이란 뜻이다.
이는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인 '없는(ou-)'과 '장소(toppos)'를 결합해 만든 유토피아(eutopia)의 좋은 곳이란 의미와도 상통하는데, 유토피아가 사회적 제도나 법의 이상향으로써 사회학적 의미로 쓰인다면, "네버랜드"는 그 단어 자체에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온다 리쿠의 《네버랜드》처럼.

또한 "원더랜드"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영화《원더랜드》등에 등장하는데, 이는 '좋은곳'의 의미보단 '이상한 곳'의 의미를 가지므로 네버랜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피터팬》에서 "네버랜드"는 피터팬이 사는 꿈의 세계로, 그곳에서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고 아이인 채 남을 수 있다.
영화는 바로 이 "네버랜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배경은 20C 초반, 런던. 극작가인 제임스 베리는 공원에서 우연히 한 가족을 만나게 된다. 남편을 병으로 잃은 실비아 데이비스와 그녀의 어린 네 아들들을.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마치 소년같은 제임스 베리에게 실비아와 아이들은 호감을 갖게 되고, 매일 어울려 놀면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제임스는 네 아이들 중 가장 예민한 감성을 지닌 피터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작품인 피터팬을 완성하게 된다.

[첫번째 아기가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을 때
그 웃음은 수천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흩어져 버렸지
그때부터 요정이 생기게 된거야
지금은 아이가 한명 태어날 때마다
그 아이의 첫번째 웃음이 요정이 되는거야
그러니까 모든 아이들한테는 요정이 하나씩 있는 거지
요샌 아이들이 너무 많은 걸 배워서
곧 요정따윈 안 믿게 되버려
그래서 아이들이 '요정따윈 안 믿어'라고 말하는 순간
어디에선가 요정 하나가 떨어져 죽게 되는거야]   

피터는 영화 초반에도 나오듯, 처음엔 제임스 베리의 '상상'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어린 나이임에도 보통의 어른들처럼 세상을 보게된 것. 어른이지만 아이의 눈을 가진 제임스를 통해 피터 역시 글을 쓰고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지만 어머니의 병을 알게되면서 또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제임스의 연극 피터팬을 보게되고, 피터는 '피터팬'이 된다. 다시,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권한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겪어야 하는 많은 것들에 의해서 우리는 점차 웃음을 잃고, 놀이를 잊고, 요정이라든가 해적, 인디언이 나오는 동화를 현실이 아니여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게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된 우리는 누구나 완전히 행복하지는 않다. 그래서 "네버랜드"는 매혹적으로 다가오고, 누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 그곳을 꿈꾼다.

실제로, 가수 마이클 잭슨은《피터팬》에서 따온 "네버랜드"라는 이름으로 대저택을 만들어 산 적이 있다. 동심의 세계 속에서, 아이의 마음으로 피터팬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에 대한 차별과 그릇된 선입견, 삐뚤어진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다. 기린,낙타,원숭이 등의 동물들과 회전목마 등의 놀이기구, 분수대, 극장 등을 저택 내에 꾸미고는 많은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초대해서 지내던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네버랜드를 꿈꾸는 것조차 가만두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 저택에 대한 안 좋은 루머들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는 네버랜드를 떠나야 했다. 동심의 세계에 남고자 했던 그에게 상처를 주고, 어른으로 만들어 네버랜드 밖으로 쫓아버린 건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엄마는 왜 죽어야 하는 거죠?]

비정한 현실 속에서 네버랜드는 말도 안 되는 헛된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Neverland is possible. Neverland exists in your mind.
네버랜드를 믿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마지막장면. 피터는 묻는다, 네버랜드로 어떻게 가느냐고.
대답은 Just believe it. 믿으란 거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 Neverland이지만
자신만의 네버랜드를 마음 속에 지니고, 그 속에서 희망을 얻고 살아갈 힘을 얻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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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맹점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보면서도, 또 많은 욕을 먹는 이유는 바로 "소통의 부재"에 대한 답답함 때문일 것이다.

강회장이 한태수라는 사실.
나사장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예정된 대로 이철이 알게 되고, 나윤, 동자, 그리고 수현, 이렇게 한명 한명 사실을 알아간다.
그러나, 너무 더디다, 너무 답답하다.
사실을 아는 순간, 각 인물들은 자신만의 '이유'때문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양 함구해버린다.
TV밖에서 모든 사실을 다 알고,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조차 다 알고있는 우리는, 속이 터질 수 밖에 없다. 저런,, 막장! 이라고 외칠 수 밖에 없다.

 
극 중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나은혜. 그녀의 모든 행동은 오로지 남편 강신욱에 대한 '사랑'때문이다. 남편을 잃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숨긴다. 그러나 그 행동이 결국은 스스로를 '소통'으로부터 격리시키게 된다.
신욱은 기억을 서서히 찾으면서 아내가 진실을 말해주기를 바라지만, 은혜는 어김없이 소통을 거부한다. 그 결과, 신욱도 아내 은혜에게 더이상 예전처럼 숨김없이 말하진 않게 된다.
은혜와 신욱의 관계에서 서로 공유하지 않는 개인의 영역이 넓어지고 불신이 생기면서,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은혜는 또한 자신의 이유 때문에 타인의 소통을 금하는데, 이는 연쇄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이철의 입막음의 댓가로 나윤과의 결혼을 보장하지만, 은혜는 진우와 나윤을 결혼시켜 남편을 지키려하고, 따라서 배신당한 이철은 장이사와 손을 잡고, 더 이상 은혜와 소통하지 않는, 서로 '꿍꿍이'를 가진 관계가 이루어진다.
나윤은 자신의 사랑 때문에 타인(한태수의 가족)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그 엄마에 그 딸'이 되어버리며, 사실을 모르는 진우와, 사실을 아는 진우 사이에서 관계의 벽을 잠시 겪게 된다. 물론, 여기엔 이철의 개입해 갈등을 고조시키고, 해소하는 역할을 동시에 해낸다.



동자 역시 은혜로 인해 입을 다물게 되는데, 동자의 함구는 그 동기가 불순하다는 점에서 더욱 큰 욕을 먹는 것 같다. 다른 인물들의 함구는 '사랑'이라는, 그래도, 순수성이 포함된 이유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동자는 동서와 시어머니에게 미안해 하면서도 이게 올바른 거겠지, 라며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 저면에 아들의 성공과 결혼, 결국 돈과 지위라는 또다른 동기가 깔려있음을 시청자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시시콜콜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동서 윤정에 비해 혼자 생각이 많은 동자는 나쁜 형님, 나쁜 며느리, 나쁜 큰 엄마가 되어버렸다.



이제 문제의 중심에 있는 강회장. '강신욱'인지 '한태수'인지를 놓고 갈등한다. 여기서 이름 세 글자는 단순히 개인이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강신욱에서 한태수가 되는 순간 그의 정체성은 정녀의 아들, 윤정의 남편, 수현의 아빠, 진우의 큰아버지, 동자의 서방님이 되는 것이다.
강신욱은 한태수를, 한태수는 강신욱을 버릴 수 없을 것이지만
또한 두 정체성은 역할이 겹쳐지기 때문에 동시에 수용할 수도 없다.
그래서 강회장은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원래의 가족과도, 지금의 가족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현을 보자.
우연히 강회장이 아빠인 걸 알게 되고, 누구보다 간절히 소통을 바란다.
아버지가 자신의 입으로 아버지임을 말해줄 것을 바라는 것.
은근슬쩍 아빠, 보고싶었어요. 라고 속마음을 다른 핑계를 빌어 말하는가하면,
자신의 아버지도 회장님처럼 좋은 분이었다고, 마음을 다해 말한다.   
  
수현의 행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수현이 다른 인물들처럼 단순히 사실을 숨기는 것에서 벗어나
직접적 말을 삼가되, 눈빛과 표정, 말의 여백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에 있다.

결국 강회장은 그 마음을 읽게 되고, 수현은 강회장과의 무언(無言)의 소통을 통해 아빠와 딸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진정한 소통이 어떤 것인지 잠깐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이유와 목적이 소통을 가로막지만
결국 이들의 이유와 목적이란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닌가.
은혜는 신욱과 마음을 터놓는 예전의 부부관계를,
이철은 나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나윤은 진우와의 행복한 생활을,
동자는 가족의 평화와 안정, 자신의 행복을,
신욱은 두 가족의 행복을,,,,, 

그리고 그 소통이란 것은, 단순한 의사소통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그것을 서로 주고받는 것일 거다.  

소통의 부재는 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또한 동시에, 이 드라마를 이끄는 힘이 된다.
이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게 되는 순간,
드라마는 주저없이 끝나게 될테니 말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주변을 둘러보라.
당신은 충분히 소통하고 있는지.

그리고 혹여 소통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마라.
그건 당신의 드라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당신의 드라마틱한 인생, 그 해피엔딩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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