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무모한 사랑에 매료되는가
엄마가 흰머리 염색을 해야한다고 해서 동네미용실에 따라갔다.
지루하던 차에 TV는 <꽃보다 남자>를 보여주고 있었고, 나는 금새 빠져들었다.
원작의 인기와 미남 배우들의 캐스팅, 판타지적 로맨스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남자".
나 또한 드라마 초반엔 열심히 챙겨보며 시각적 즐거움을 만끽했던 드라마였으니,
조잡한 편집과 비현실성, 캐릭터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맛'만은 좋았음을 인정한다.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거니와, "꽃보다 남자"의 작품성을 논하는 것에는 이젠 관심이 없다.
그저 이글을 쓰는 건 ,오늘 잠깐 이 드라마를 보며 들었던 생각 때문에 손가락 끝이 간지러운 탓이다.
"꽃보다 남자"는 대표적인 "무모한 사랑"을 보여준다.
재벌가의 아들들과 서민의 대표격인 잡초같은 여자주인공. 그리고 사랑.
10대 여중, 여고생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화려한 사랑을, 아마 자신만의 판타지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대는? 20대를 어느정도 경험한 여성들은 어떨까. 우리는 왜 드라마나 영화 속에 보여지는 무모한 사랑에 열광하는 것일까.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단골소재인 로맨스. 그러나 꼭 주인공 중 하나는 불치병에 걸리거나, 대비되는 집안이나 직업, 처지의 차이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다. 아, 불륜도 있다.
어쨌건 주인공들은 그러한 온갖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고, 그래서 더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에서 역경은 전혀 반갑지 않다. 아파선 안 되고, 돈도 좀 있어야 편하다. 집안의 반대? 골치 아프다. 불륜? 법적인 문제며 윤리,사회적 범죄이다. 현실의 사랑은 충전기처럼 지속적인 충전이 필요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도 않다. 역경이 있다면 조금 더 오래 뜨겁고 간절할 테지만 그건 반갑지 않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로맨틱 코미디가 되었으면 좋겠다.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행복하게 끝나는 해피엔딩 말이다. 그러나 현실의 역경은 때때로 사랑의 Just End 가 되기도 한다.
10대, 20대 초반, 소녀로써의 나는 스크린 속 로맨스로부터 나 자신만의 로맨스를 꿈꿨다. 그러나
20대 중반, '아가씨'혹은 '**씨'로 불리는 나는,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는 판타지를 스크린에서 찾는 나를 발견한다.
현실의 사랑도 스크린 속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달콤하고 쓰며, 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람을 밀어버린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꽃처럼 시들어버리고, 불씨처럼 사그러든다.
사랑의 시작은 훨씬 더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시작되고
사랑의 끝은 더욱 더 허무하고 쓸쓸하다.
얼마 전, 한 친구가 5년간 사귄 남자친구로부터 갑작스런 이별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
또다른 친구의 친구 역시 오래 사귄 남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고, 그동안의 시간에 해당되는 돈을 달라는 협박 비슷한 황당한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현재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상대방을 완전히 알았다고 확신한 순간,
지금 이것이 사랑이라고 확신한 순간,
동시에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 현실.
사랑을 꿈꾸다 사랑에 찔리는 순간. 그리하여 마음에 굳은 살이 배길 때.
TV를 켜 드라마를 보고, 극장을 찾아 로맨틱 코미디를 본다.
어렸던 날,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
이제는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 다른 이유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점점 현실의 사랑에는 사랑말고도 다른 것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니까.
직업이나 돈, 가족, 집안, ,시간, , 살아가는 데 중요한 다른 것들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스크린 속 그들처럼 더 이상 무모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사랑 앞에 무모할 수 있는 삶을 정말로 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2009년의 마지막 날, 사랑을 잘 의심하는 내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난 후의 나는 같은 것을 보고 또 다른 얘기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그저 이말을 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 Love actually ! 정말로 무모한 사랑을 하라고.
그리고 그 믿음이 실망으로 바뀔지언정 "기대가 있는" 삶은 조금 더 행복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