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어공주 - The Merm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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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인어공주.
나이에 맞지 않게 웬 동화 이야기냐고 하겠지만
동화 인어공주를 테마로 삼은 현대판 인어공주 이야기다.
그것도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는 모스크바 한가운데 존재하는.
아, 그러고보니 우리가 사는 이곳도 그것에 해당될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끝에서 말하기로 하자.)

영화는 "인어공주"에 걸맞게 바닷속에서 시작된다.
아니, 정확히는 주인공 알리사의 엄마가 입은, 노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푸른 원피스에서.
알리사가 태어난다.



알리사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빠가 바다에서 돌아오길 기다리지만, 아빠는 돌아오지 않고
일식이 있던 어느 날, '세상의 끝'을 본다는 흥분으로 들떠 달려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함께 일식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일식의 끝에선 허무하게 흩어지는 군중들의 발걸음이 있을 뿐.
그끝에 멈춰선 알리사는 더 이상 기다리는 일을 하지 않기로 한다.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던 어떤 날, 알리사는 특별한 능력을 자신이 가졌음을 알게 된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그것이 이뤄지는 것.
1..2..3.. 숫자를 세며 소원을 빌면 된다.
 



그 특별한 능력 덕분에 (혹은 때문에)
알리사의 가족은 드디어 바다에서 뭍으로- '갈곳없는 이들이 가는' 모스크바로 오게 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러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한 사람, 샤샤.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구하듯 알리사는 샤샤를 구한다.

영화에서 인상깊은 장면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알리사와 샤샤의 첫만남이다.
쭈뼛쭈뼛 다리끝에 서는 알리사를 지나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한번에 풍덩, 강물에 몸을 던지는 샤샤.
그런 샤샤를 알리사가 구하고, 알리사는 첫눈에 그에게 반한다.
그리고, 굳게 닫혔던 알리사의 말문이 트인다. 이제 그녀에게 기다림의 결과는 더이상 무참하지도 허무하지도 않으며, 더구나 마음껏 대화를 나누고싶은 빛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저 달을 판다고?
-보이는 것만 팔아
달이 자기건가, 그걸 어떻게 팔아?
달의 주인이라니, 정말 웃긴다

-그럼 지구 땅덩어리 사고파는 건 안 웃기냐?

사람들은 왜 달에 땅을 살까?
-도망갈 곳을 찾는거야


샤샤는 달의 땅을 파는 일을 한다. 스스로도 그게 웃기는 일이란 걸 알고있다. 그러나 그는 달을 판다. 비틀거리며 세상을 걷는 그는, 위태롭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 보면 안아주고 싶을 것 같아. 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리사였어도 그에게 반했을 거라고.
그리고, 휘청거리는 샤샤에게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마지막 장면을 본다.

릴리, 저게 새야. 잘 봐, 저 도시가 새야. 저건 도시가 아니야. 저 도시에는 사람 따위는 살고 있지 않아. 저건 새야. 그걸 모르겠어? 사막에서 미사일이 폭발하라고 외친 사내는 새를 죽이려고 했던 거야. 새를 죽이지 않으면 안돼. 새를 죽이지 않으면 나는 내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 새가 방해하고 있어. 내가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을 나에게 감추고 있어. 나는 새를 죽이겠어, 릴리. 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음을 당해. 릴리, 어디 있는 거야? 같이 새를 죽여 줘, 릴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릴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나는 바닥에 쓰러진다. 릴리가 밖으로 달려나갔다. 차소리가 난다. .. 새가 날고 있다. ..릴리는 아무 곳에도 없다. 거대한 검은 새가 이리로 날아오고 있다. 나는 양탄자 위에 있는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꽉 움켜쥐고서 떨고 있는 팔에 푹 찔렀다.

릴리, 나 돌아갈까? 돌아가고 싶어.
어딘지 모르지만 돌아가고 싶어.
분명히 난 미아가 되어버린거야.
좀더 시원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옛날에 그곳에 있었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릴리도 알고 있지?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는 큰 나무 아래 같은 곳.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여기가 어디야?

_《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中

 
영화엔 장치들이 등장한다.
집을 가리는 거대한 광고현수막, 길을 걷는 중간중간 보여지는 광고문구들은
러시아의 사회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는 자본주의를 보여준다.
"꿈을 향해 질주하라.", "당신의 욕망을 두려워말라", "승자는 얻고 패자는 잃는다",,,
어쩌면 이것들은 우리 사회의 허망한 물거품이지 않겠는가.
단지 재촉하는 말을 멈추고 싶었고, 공부를 하고싶었던 것 뿐인데,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이 다친다.
또한 알리사의 아르바이트 중에는, 전화기인형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있는데 이는 진정한 관계와 소통이 단절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화기 인형 속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듯, 타인의 모습은 주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은 가리게 되는 것.
그래서 결국 서로의 참모습을 볼 수 없게 되고,
모두들 '마음으로' 외로워지는 것.

샤샤처럼 휘청거리는 삶을 살게되는 것.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처럼 삶의 구토증을 느끼게되는 것.

그리하여 사람들은 달에 땅을 사고
도망치듯 거리를 걷고
그러다 샤샤처럼 강물에 몸을 던지는 건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은 거다.
섬처럼 고립되어 살아가는 삭막한 도시에서, 인어공주의 고향과 같은 저 깊고 푸른 곳으로.
세상을 몰랐던 유년기(인어공주의 바닷속세상)의 자신에게로.

동화 인어공주에서 자본주의를 말하게되다니.
동화적 상상력이 무색해지는 순간.
자, 그럼 다시.
동화적 상상력에 어울리는 말을 해볼까. 인어공주 테마에서 빠질 수 없는 테마 "사랑"

알리사는 사랑에 빠진 후, 집에 돌아와 햇빛을 가린 거대현수막을 창문크기로 오려버리는 대담하고 속시원한 행동을 한다.
또한 샤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초록색으로 염색을 한다. 근데, 그 계기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영화《제5원소》이다. 집에서 우연히 TV속 제5원소 랄리의 빨간머리를 본 알리사가 이거다, 하며 염색을 한 것.
(잠시 얘기하자면《제5원소》는 물, 불, 바람, 흙이 네가지 요소인데 절대인간'랄리'가 다섯번째 원소로써 나머지와 결합해 세상을 구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즉 인류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원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우리 내면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의미하는 랄리. 그 랄리를 따라 염색한 알리사. 알리사가 살려낸 샤샤.
감독은 어쩌면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흐려서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구하는 것은 결국 사랑일 거라는. 

정말로 영화를 보자면 그렇다. 사랑은 알리사의 말문을 트이게 하고, 방에 햇볕이 들어오게 하고, 샤샤의 마음속 말을 내뱉게 하고, 닫혔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서, 한밤중에 '진짜'파인애플을 찾아 뛰어다니고, 유치한 놀이도 하게 한다. 파인애플을 훔쳐서 거리를 뛸 때의 그 해방감이란,!!
결국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이 답답한 도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까.
동화에선 인어공주가 왕자를 구한 뒤 물거품으로 사라졌었다.
이 영화 역시 해피엔딩은 기대할 수 없다. 현대판 인어공주기에, 더더욱 현실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알리사의 마지막 말처럼 단지 흔한 일일 뿐이다.

우리도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 곁의 많은 것들이 허망하게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또 누군가에게서 기억되었다가, 잊혀진다.
매우 쓸쓸한 일이지만
이 영화가 그려내듯, 그냥, 경쾌한 우울, 발랄한 슬픔이라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편해진다.

따뜻한 웃음으로 엄마와 화해하고, 시원하게 스치는 바람에- 그렇게 생각난 누군가 때문에
마음 한 켠이 꽉 찰 수 있다면.. 그런 경험을 할 수만 있다면..
우울도, 슬픔도, 일상다반사로, 경쾌하고 발랄하게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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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워 - D-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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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제 영화 디워를 봤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웬 큰 뱀이 나오길래 호기심이 생겨서 보고 있었다.
제목은 디 워. 많이 들어봤는데, 뭐였더라. 이 정도만 생각하고 그냥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영화가 이상해진다. 아, 디-워! 심형래의 영화였다.
나-참. 내 기억력에 박수를 보냈다. 이런 것도 건망증에 포함시켜야 하나. 흠.
 
여튼, 영화는 말 그대로 쓰레기였다.
'쓰레기 책'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에도 쓰레기라는 장르가 존재한다.
말이 거칠어서 심형래 감독에게 인간적으로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솔직한 감상평이니까.
영화가 나왔을 당시에 평론가들은 악평을 해댔고, 네티즌도 호평과 악평이 분분했다.

저 정도면 열악한 상황에서 엄청난 노력을 한 것이고, 한국영화에서도 엄청난 발전을 한 것이라며, 특히 한국적 요소를 많이 가미했다는 것에 대해 심형래 감독을 인간적으로 지지하는 목소리들.
호평은 이 정도였던 것 같다.

악평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대부분 스토리 빈약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직접 영화를 본 결과, 스토리 빈약? 맞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보진 않았지만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더구나 어떤 감정적 교류상황이 충분히 주어지지도 않았는데 급속도로 깊은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사랑에 빠져야한다는 그런 논리인 것인지.

"장면 보여주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스토리"가 긴밀히 연결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다 찍어놓고선 편집을 심하게 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이런 내용 생략하기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많이 보여지는데, 주로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경우나 기존 TV드라마를 영화화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경우엔 스토리가 독자(관객)들에게 충분히 알려진 경우이기 때문에 단독적인 작품성은 떨어질 수 있지만 관객들이 소화하는 데엔 크게 무리가 가진 않는다.

반면 디워는 그것이 의존하는 전설에 대한 상식말고는 관객이 도움을 얻을 수 없다.
이야기 대신 넘쳐나는 장면들을 보면서 '스토리와 인과성의 부재'을 관객 스스로 추리해내고 상상해내서 메꾸어야 한다.

그리고 과유불급.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다. 욕심이 지나쳤는지 너무 많은 것을 영화에 집어넣은 탓에 영화는 잡탕이 되었다.
사실 도심 한복판에 출현한 "큰 뱀"의 설정까진 괜찮았다. 그래, 여의주까지도 봐줄만은 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군단이 나온다. 현대에도 과거에도 맞지 않는. (조선시대같은 옛적의 모습에 그 군단이 출현해 해를 가하는 장면에서 난 정말 실소했다.) 영화는 순식간에 울트라맨이 생각나는 심형래표 어린이영화가 된다.《영구와 공룡 쭈쭈》,《드래곤 투카》뭐 이런.  또한 큰 뱀(이무기)은 엄청 빠르고 주인공들을 쉽게 찾아내면서도 막상 주인공 앞에만 가면 느려터지고, 집어삼키는 걸 망설인다. 빌딩이 나와서 "분명히 저 빌딩 감싸며 올라갈거야", 라고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올라간다. 영화 《킹콩》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즈음 해서, 영화는 아, 끔찍했다.
이상한 괴생명체들이 줄지어, 떼를 지어 출현하고 인간 대 괴물간의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다.
불을 뿜는 익룡이 나타나고 정체불명의 뒤뚱거리는 괴물들과 군단들. 영화는 순식간에 《쥐라기공원》《반지의 제왕》축소판이 된다.
그리고 한참동안 그런장면들로만 흘러간다. 저 모두를 과감하게 빼버리고, 대신에 인물중심으로 스토리를 탄탄하게 받쳐주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 역시 영화는 꿋꿋했다. 갑자기 이유불문 '선한 이무기'가 나타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 여자는 선녀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다음 생에 만나자고 하고 사라진다. 그 와중에 아리랑 음악이 흐른다.

심형래 감독은 순수하게 한국을 알리고자 한 의도로 한국적 요소를  영화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의도는 내가 볼 땐 나쁘게 작용한 것 같다. 한국 특유의 들끓는 애국심이 영화감싸기로 흘러간 것, 영화에 포함시킨 '한국적 요소'- 옛시대의 모습(초가집,한복입은 사람들)과 선녀, 이무기, 여의주의 전설- 가 영화에 제대로 융합되지 못한 탓에 영화에서 '들뜬'채 겉돌아야 했다.

한국의 관객으로선 슬픈 일이다. 내가 가진 '한국'이란 정체성이 영화 속 세상에서 '이슈'는 되지만 섞어들지 못하고 매우 다른 것으로 느껴지는 건 말이다. 외국인들에게도 어쩌면 이 영화는 한국의 이질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으로 역할할지도 모른다. 영화를 들여다보라. 전설을 믿는 사람들과 그 목격자의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 그 사람들과 이무기를 편리하게 처리해버리려는 세력들.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여기에서 타국에 살고 있지만 제대로 섞여들지 못하는 각국의 한인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된다. 한국적이나 한국적이지 못하고, 이국에 살고 있으나 그곳에 한 요소로 제대로 섞여들어가지는 못하는 그들을 말이다.

오히려 마지막에 잔잔하게 흐른 아리랑 음악은 생각보단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든다. 한국의 관객에겐 애국적요소로 작용할 것이기에 이 또한 국수주의, 민족주의를 권하는 것 같아 곱게 봐지진 않지만. 그래도 타국의 관객에겐 그나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한국적 요소를 포함시키고자 했다면 감독은 그래야했다. 시청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짧은 초로 중간중간 화면에 삽입하는 광고처럼, 은연 중에 한국이 영화 속에서 녹아나오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국이 받아들여지도록. 아, 나의 지나친 욕심이란 말인가.

 
결론은, 심형래 감독의 도전 자체는 아름다웠을지 모르지만
영화 자체는 아름답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제작상 어려웠다는 기술의 문제나 금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 자체가 탄탄하지 못했고, 소재 선정과 편집이 적절치 못했다.

CG의 발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다른 많은 문제점들을 결코 상쇄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젠 제발 어떤 작품을(사람에 있어서도) 우리의 그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애국심'운운하며 보지 말고, 그 작품 자체로 평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디워》가 애국 덕을 봤다면, 《청연》은 애국에 의해 깎여내려간 작품. 네이버 영화평점이 디워가 청연보다 더 높다는 것, 말 다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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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랜드를 찾아서 - Finding Nev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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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알아서 보게 된 걸까.
심지어 나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야 조니뎁을 발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쨌거나, 이 영화를 볼 당시, 나는 "네버랜드"라는 단어에 심취해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영화를 보진 않았을테니 말이다.

네버랜드(never-land). 그대로 해석해보면 '어디에도 없는 곳', 존재하지 않는 땅이란 뜻이다.
이는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인 '없는(ou-)'과 '장소(toppos)'를 결합해 만든 유토피아(eutopia)의 좋은 곳이란 의미와도 상통하는데, 유토피아가 사회적 제도나 법의 이상향으로써 사회학적 의미로 쓰인다면, "네버랜드"는 그 단어 자체에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온다 리쿠의 《네버랜드》처럼.

또한 "원더랜드"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영화《원더랜드》등에 등장하는데, 이는 '좋은곳'의 의미보단 '이상한 곳'의 의미를 가지므로 네버랜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피터팬》에서 "네버랜드"는 피터팬이 사는 꿈의 세계로, 그곳에서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고 아이인 채 남을 수 있다.
영화는 바로 이 "네버랜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배경은 20C 초반, 런던. 극작가인 제임스 베리는 공원에서 우연히 한 가족을 만나게 된다. 남편을 병으로 잃은 실비아 데이비스와 그녀의 어린 네 아들들을.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마치 소년같은 제임스 베리에게 실비아와 아이들은 호감을 갖게 되고, 매일 어울려 놀면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제임스는 네 아이들 중 가장 예민한 감성을 지닌 피터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작품인 피터팬을 완성하게 된다.

[첫번째 아기가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을 때
그 웃음은 수천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져 흩어져 버렸지
그때부터 요정이 생기게 된거야
지금은 아이가 한명 태어날 때마다
그 아이의 첫번째 웃음이 요정이 되는거야
그러니까 모든 아이들한테는 요정이 하나씩 있는 거지
요샌 아이들이 너무 많은 걸 배워서
곧 요정따윈 안 믿게 되버려
그래서 아이들이 '요정따윈 안 믿어'라고 말하는 순간
어디에선가 요정 하나가 떨어져 죽게 되는거야]   

피터는 영화 초반에도 나오듯, 처음엔 제임스 베리의 '상상'에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어린 나이임에도 보통의 어른들처럼 세상을 보게된 것. 어른이지만 아이의 눈을 가진 제임스를 통해 피터 역시 글을 쓰고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지만 어머니의 병을 알게되면서 또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제임스의 연극 피터팬을 보게되고, 피터는 '피터팬'이 된다. 다시,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권한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겪어야 하는 많은 것들에 의해서 우리는 점차 웃음을 잃고, 놀이를 잊고, 요정이라든가 해적, 인디언이 나오는 동화를 현실이 아니여서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게 된다.

그렇게 어른이 된 우리는 누구나 완전히 행복하지는 않다. 그래서 "네버랜드"는 매혹적으로 다가오고, 누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 그곳을 꿈꾼다.

실제로, 가수 마이클 잭슨은《피터팬》에서 따온 "네버랜드"라는 이름으로 대저택을 만들어 산 적이 있다. 동심의 세계 속에서, 아이의 마음으로 피터팬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에 대한 차별과 그릇된 선입견, 삐뚤어진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다. 기린,낙타,원숭이 등의 동물들과 회전목마 등의 놀이기구, 분수대, 극장 등을 저택 내에 꾸미고는 많은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초대해서 지내던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네버랜드를 꿈꾸는 것조차 가만두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 저택에 대한 안 좋은 루머들이 퍼지기 시작했고, 그는 네버랜드를 떠나야 했다. 동심의 세계에 남고자 했던 그에게 상처를 주고, 어른으로 만들어 네버랜드 밖으로 쫓아버린 건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엄마는 왜 죽어야 하는 거죠?]

비정한 현실 속에서 네버랜드는 말도 안 되는 헛된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Neverland is possible. Neverland exists in your mind.
네버랜드를 믿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마지막장면. 피터는 묻는다, 네버랜드로 어떻게 가느냐고.
대답은 Just believe it. 믿으란 거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 Neverland이지만
자신만의 네버랜드를 마음 속에 지니고, 그 속에서 희망을 얻고 살아갈 힘을 얻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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