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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뽐내고 싶었던 것일까.

배경은 학교.
꿈에서 임과 정이 나를 찾아왔다. 맙소사.
그들이 나를 찾아온 게 너무 기쁘고, 반가웠다.
임과 정은 TV에 나온 나를 봤다고 했다.
계단을 올라가, 임과 어깨동무를 한채 복도를 가로질러 걸었다.
아주 당당하게, 보란듯이.
넘칠만큼 가득 채워진, 든든한 마음. 힘이 되는, '존재'.
임과 정은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도 역시 학생이었다.

그 무렵에 꿈의 시간이 멈춰선 것일까.

복도를 걷다가 신을 만났다.
신이 무어라고 장난을 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창가에 서 있는 그... 누구였더라.
조였던가,, 임이었던가,,아닌데, 어쨌든 *을 보았고
이번엔 임이 말을 건넸다.
창밖에는 어떤 주택의 옥상이 보였는데
거위 한마리가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답답하게.
옥상엔 텃밭이 가꾸어져 있었고
한가운데에 큰 무덤이 풀이 무성한 채 동그랗게 솟아있었다.
나는 임에게 "절대로 저집에 가선 안돼"라고 충고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절대로 거기 가서는 안돼. 설사 너의 가족이 죽는다해도."
그리고 스스로도 그말이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왜 하필 임과 정이었을까.
서로를 알지도 못할텐데.
더구나 정은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너무 오래된 이야기.
아주 깊숙한 기억들의 만남.

달리던 꿈의 기차가 하필이면
기억의 아주 외딴 곳에 멈춰섰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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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밤, 책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 한 라디오방송에 주파수를 맞춘다.
이번주도 어김없이 금요일 밤 10시, 구십오쩜구(95.9).
지지직. 소리 알러지가 있는 나지만 이건 듣기 좋은 라디오잡음. 지직.
음악퀴즈와 광고들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내가 기다리던 그 코너가 시작된다.
꿈꾸는 책방.
두근. 오늘은 어떤 책을, 어떤 시를 듣게 될까.

그런데 이번 주 첫 이야기는 하워드 진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그가 죽었다고 했다.
87세의 나이로 27일 바로 며칠 전, 심장마비로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워드 진은 미국의 진보적 성향의 역사학자로, 보스턴대의 명예교수이자 동시에 정치학자, 사회비평가, 희곡 작가이기도 했으며, 전쟁을 반대하고 인권운동을 했던 대표적인 실천적 지식인이다.)

하워드 진? 공허하게 다가오는 내가 모르던 이의 죽음.
그의 책 한번 읽어본 적도 없고,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두 진행자의 대화를 듣는 동안 그 공허감은 메워지고, 곧 특별한 기분이 뒤섞인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직접 하워드 진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 진행자에게
그의 죽음은 각별한 것이었고, 울음이 날 수 밖에 없었다고.
아니, 단지 인터뷰를 했던 '안면'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존엄한 순간'을,
고요하고 따뜻했던 노학자 '하워드 진'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에 갑작스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큰 울음이 터졌버렸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마지막 낭독 또한 하워드 진에 대한, 그녀가 직접 쓴 에세이.

그녀는 하워드 진에게 마지막으로 이것을 물었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대답은 "Um... Kindness."
'평화'도 아닌,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친절함, 카인드니스.

 
그게 다였다.



어제 한 선배에게 문자를 보냈다. 말도 놓고 장난도 치며 친하게 지냈지만 대학졸업후, 조금은 소원해진 관계. 친구가 식당에서 선배를 봤다고 문자가 왔길래, 평소에 문자를 잘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지만 그냥, 정말 그냥, 반가운 마음에 "지금 *에서 밥먹고 있지? 다 보고있어." 장난을 좀 쳤다.

몇번의 문자가 간단히 오가고, 몇시간이 지나 일행과 헤어진 듯 다시 문자가 왔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

먼저 연락해줘서 고맙다고. 감기 걸리지 말고 따스한 겨울 나라고. 선배랍시고 밥 한끼 제대로 못 먹인 것 같다고, 한번 보자고.

차가운 기계, 그 텍스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시험을 준비한단 핑계로 거의 1년을 보지 못한 친구에게 고민 끝에 '보자'고 했더니
전화가 왔다. 그리고 마지막엔 또 고맙다는 말...

 
그랬다. 평소에도 주변을 잘 돌아보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무언가에 열중하면 다른 것은 마음에 잘 넣지 못하는 그런 몹쓸 버릇을 가진 덕택에, 난 주로 연락을 하기보단 연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연락을 받는 그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계속된 거절을 밥먹듯 하던, unkind하게 관계로부터 숨어버리던..

지나간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상황이라는 변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손들을 놓아버렸는지.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여전히 나는 망설이다 허공에 마음을 쓰고, 입술을 떼지 못하고, 손을 잘 내밀지 못하지만
하워드 진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필요한 건 kindness.
그건 바로 마음을 표현하는 친절함 이 아닐까.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더없이 부족한 그것, Kindness.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마음을 내민다는 것.

혼잡한 버스 속에서 벨에 손이 닿지 않을 때 대신 눌러주는 것,
학생이 들고있는 무거운 책을 받아 내 무릎 위에 잠시 올려놓는 것,
아무말 하지 않아도 따뜻한 미소로 마음을 전하는 친절.
무언 중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먼저 말을 건네는 것.
때로는 이병률 시인이 받았던 문자처럼
"면아, 네 잘못을 용서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까지도.

그렇게 한명 한명 숨겨놓은 따뜻한 마음들을 풀어놓는다면,
이렇게 추운 겨울날에도 세상은 한결 따뜻해질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모두가 "감기 걸리지 않고 따스하게" 겨울을, 세상을 날 수 있을 것이니까.

우린 충분히 kind 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건 하워드 진이 평범한 우리들을 위해 남긴 가장 분명하고도 가장 쉬운 가르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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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무모한 사랑에 매료되는가
 
엄마가 흰머리 염색을 해야한다고 해서 동네미용실에 따라갔다.
지루하던 차에 TV는 <꽃보다 남자>를 보여주고 있었고, 나는 금새 빠져들었다.

원작의 인기와 미남 배우들의 캐스팅, 판타지적 로맨스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꽃보다 남자".
나 또한 드라마 초반엔 열심히 챙겨보며 시각적 즐거움을 만끽했던 드라마였으니,
조잡한 편집과 비현실성, 캐릭터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맛'만은 좋았음을 인정한다.

 
사실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거니와, "꽃보다 남자"의 작품성을 논하는 것에는 이젠 관심이 없다.
그저 이글을 쓰는 건 ,오늘 잠깐 이 드라마를 보며 들었던 생각 때문에 손가락 끝이 간지러운 탓이다.
 
"꽃보다 남자"는 대표적인 "무모한 사랑"을 보여준다.
재벌가의 아들들과 서민의 대표격인 잡초같은 여자주인공. 그리고 사랑.
10대 여중, 여고생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화려한 사랑을, 아마 자신만의 판타지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대는? 20대를 어느정도 경험한 여성들은 어떨까. 우리는 왜 드라마나 영화 속에 보여지는 무모한 사랑에 열광하는 것일까.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단골소재인 로맨스. 그러나 꼭 주인공 중 하나는 불치병에 걸리거나, 대비되는 집안이나 직업, 처지의 차이에 의해 어려움을 겪고,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다. 아, 불륜도 있다.
어쨌건 주인공들은 그러한 온갖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고, 그래서 더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에서 역경은 전혀 반갑지 않다. 아파선 안 되고, 돈도 좀 있어야 편하다. 집안의 반대? 골치 아프다. 불륜? 법적인 문제며 윤리,사회적 범죄이다. 현실의 사랑은 충전기처럼 지속적인 충전이 필요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도 않다. 역경이 있다면 조금 더 오래 뜨겁고 간절할 테지만 그건 반갑지 않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로맨틱 코미디가 되었으면 좋겠다.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행복하게 끝나는 해피엔딩 말이다. 그러나 현실의 역경은 때때로 사랑의 Just End 가 되기도 한다.

10대, 20대 초반, 소녀로써의 나는 스크린 속 로맨스로부터 나 자신만의 로맨스를 꿈꿨다. 그러나
20대 중반, '아가씨'혹은 '**씨'로 불리는 나는,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는 판타지를 스크린에서 찾는 나를 발견한다.
현실의 사랑도 스크린 속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달콤하고 쓰며, 순식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람을 밀어버린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꽃처럼 시들어버리고, 불씨처럼 사그러든다.
사랑의 시작은 훨씬 더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시작되고
사랑의 끝은 더욱 더 허무하고 쓸쓸하다.


얼마 전, 한 친구가 5년간 사귄 남자친구로부터 갑작스런 이별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
또다른 친구의 친구 역시 오래 사귄 남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았고, 그동안의 시간에 해당되는 돈을 달라는 협박 비슷한 황당한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현재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상대방을 완전히 알았다고 확신한 순간,
지금 이것이 사랑이라고 확신한 순간,
동시에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 현실.


사랑을 꿈꾸다 사랑에 찔리는 순간. 그리하여 마음에 굳은 살이 배길 때.
TV를 켜 드라마를 보고, 극장을 찾아 로맨틱 코미디를 본다.
어렸던 날,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서 펑펑 울었던 기억.

이제는 <러브 액츄얼리>를 보면 다른 이유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점점 현실의 사랑에는 사랑말고도 다른 것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니까.
직업이나 돈, 가족, 집안, ,시간, ,  살아가는 데 중요한 다른 것들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스크린 속 그들처럼 더 이상 무모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사랑 앞에 무모할 수 있는 삶을 정말로 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2009년의 마지막 날, 사랑을 잘 의심하는 내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간이 더 지난 후의 나는 같은 것을 보고 또 다른 얘기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그저 이말을 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 Love actually ! 정말로 무모한 사랑을 하라고.
그리고 그 믿음이 실망으로 바뀔지언정 "기대가 있는" 삶은 조금 더 행복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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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01-0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스텔님, 서재에는 처음 방문합니다.
이글이 다음블로거 튜스 특종 10에 선정이 되셨네요
추카추카^*^
새해에도 행복하시길...

pastel 2010-01-05 10:54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해요 ㅋ 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셔요~^^ㅋ
 

이 드라마의 맹점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보면서도, 또 많은 욕을 먹는 이유는 바로 "소통의 부재"에 대한 답답함 때문일 것이다.

강회장이 한태수라는 사실.
나사장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예정된 대로 이철이 알게 되고, 나윤, 동자, 그리고 수현, 이렇게 한명 한명 사실을 알아간다.
그러나, 너무 더디다, 너무 답답하다.
사실을 아는 순간, 각 인물들은 자신만의 '이유'때문에 꿀먹은 벙어리가 된 양 함구해버린다.
TV밖에서 모든 사실을 다 알고, 누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조차 다 알고있는 우리는, 속이 터질 수 밖에 없다. 저런,, 막장! 이라고 외칠 수 밖에 없다.

 
극 중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나은혜. 그녀의 모든 행동은 오로지 남편 강신욱에 대한 '사랑'때문이다. 남편을 잃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숨긴다. 그러나 그 행동이 결국은 스스로를 '소통'으로부터 격리시키게 된다.
신욱은 기억을 서서히 찾으면서 아내가 진실을 말해주기를 바라지만, 은혜는 어김없이 소통을 거부한다. 그 결과, 신욱도 아내 은혜에게 더이상 예전처럼 숨김없이 말하진 않게 된다.
은혜와 신욱의 관계에서 서로 공유하지 않는 개인의 영역이 넓어지고 불신이 생기면서,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은혜는 또한 자신의 이유 때문에 타인의 소통을 금하는데, 이는 연쇄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이철의 입막음의 댓가로 나윤과의 결혼을 보장하지만, 은혜는 진우와 나윤을 결혼시켜 남편을 지키려하고, 따라서 배신당한 이철은 장이사와 손을 잡고, 더 이상 은혜와 소통하지 않는, 서로 '꿍꿍이'를 가진 관계가 이루어진다.
나윤은 자신의 사랑 때문에 타인(한태수의 가족)의 아픔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그 엄마에 그 딸'이 되어버리며, 사실을 모르는 진우와, 사실을 아는 진우 사이에서 관계의 벽을 잠시 겪게 된다. 물론, 여기엔 이철의 개입해 갈등을 고조시키고, 해소하는 역할을 동시에 해낸다.



동자 역시 은혜로 인해 입을 다물게 되는데, 동자의 함구는 그 동기가 불순하다는 점에서 더욱 큰 욕을 먹는 것 같다. 다른 인물들의 함구는 '사랑'이라는, 그래도, 순수성이 포함된 이유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동자는 동서와 시어머니에게 미안해 하면서도 이게 올바른 거겠지, 라며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 저면에 아들의 성공과 결혼, 결국 돈과 지위라는 또다른 동기가 깔려있음을 시청자는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시시콜콜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동서 윤정에 비해 혼자 생각이 많은 동자는 나쁜 형님, 나쁜 며느리, 나쁜 큰 엄마가 되어버렸다.



이제 문제의 중심에 있는 강회장. '강신욱'인지 '한태수'인지를 놓고 갈등한다. 여기서 이름 세 글자는 단순히 개인이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강신욱에서 한태수가 되는 순간 그의 정체성은 정녀의 아들, 윤정의 남편, 수현의 아빠, 진우의 큰아버지, 동자의 서방님이 되는 것이다.
강신욱은 한태수를, 한태수는 강신욱을 버릴 수 없을 것이지만
또한 두 정체성은 역할이 겹쳐지기 때문에 동시에 수용할 수도 없다.
그래서 강회장은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원래의 가족과도, 지금의 가족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현을 보자.
우연히 강회장이 아빠인 걸 알게 되고, 누구보다 간절히 소통을 바란다.
아버지가 자신의 입으로 아버지임을 말해줄 것을 바라는 것.
은근슬쩍 아빠, 보고싶었어요. 라고 속마음을 다른 핑계를 빌어 말하는가하면,
자신의 아버지도 회장님처럼 좋은 분이었다고, 마음을 다해 말한다.   
  
수현의 행동에 주목하는 이유는,
수현이 다른 인물들처럼 단순히 사실을 숨기는 것에서 벗어나
직접적 말을 삼가되, 눈빛과 표정, 말의 여백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에 있다.

결국 강회장은 그 마음을 읽게 되고, 수현은 강회장과의 무언(無言)의 소통을 통해 아빠와 딸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진정한 소통이 어떤 것인지 잠깐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이유와 목적이 소통을 가로막지만
결국 이들의 이유와 목적이란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닌가.
은혜는 신욱과 마음을 터놓는 예전의 부부관계를,
이철은 나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나윤은 진우와의 행복한 생활을,
동자는 가족의 평화와 안정, 자신의 행복을,
신욱은 두 가족의 행복을,,,,, 

그리고 그 소통이란 것은, 단순한 의사소통이 아닌, 진정한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그것을 서로 주고받는 것일 거다.  

소통의 부재는 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또한 동시에, 이 드라마를 이끄는 힘이 된다.
이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게 되는 순간,
드라마는 주저없이 끝나게 될테니 말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주변을 둘러보라.
당신은 충분히 소통하고 있는지.

그리고 혹여 소통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마라.
그건 당신의 드라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당신의 드라마틱한 인생, 그 해피엔딩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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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다 

혹은 삼켜버린다 

존재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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