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가족이 왜 그렇게 나를 고쳐주려고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

육체노동자는 몸이 망가지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성실해도, 분발하여 열심히 노력해도, 몸이 나이를 먹으면 나도 이 편의점에서 쓸모없는 부품이 될지도 모른다. - P-1

나는 사기꾼을 사기꾼인 줄 알면서 집에 들인 듯한 기분으로 시라하 씨를 집에 놓아두기 시작했지만, 뜻밖에도 시라하 씨 말이 맞았다.
집에 시라하 씨가 있으면 편리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동생 다음으로 시라하 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미호네 집에 모였을 때였다. 모두 모여 케이크를 먹을 때 나는 집에 시라하 씨가 있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친구들이 모두 미친 듯이 기뻐 날뛰는 모습은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 P-1

18년 동안 그만두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빈틈은 메워져버린다. 내가 없어진 자리도 눈 깜짝할 사이에 충원되고, 편의점은 내일부터 전과 똑같이 굴러갈 것이다.
상품을 검품하는 스캐너도, 발주하는 기계도, 바닥을 닦는 대걸레도, 손을 소독하는 알코올도, 언제나 허리에 차고 있던 먼지떨이도, 늘 몸 가까이 두고 있었던 도구들을 만질 일도 없어진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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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가 슬퍼하거나 여러 사람에게 사과해야 하는 상황은 나의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집 밖에서는 가능한 한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사람 흉내를 내거나 누군가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일절 그만두었다.
필요한 말 이외의 말은 하지 않고 자진해서 행동하지 않게 된 나를 보고 어른들은 안심한 것 같았다.
고학년이 되어도 너무 조용하니까, 그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고, 살아가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처세술이었다. 통지표에 "좀 더 친구를 사귀고 밖에서 활기차게 놀아요!"라고 쓰여 있어도, 나는 절대로 필요 이상의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P-1

나는 아까와 같은 음색으로 큰 소리로 인사하고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 P-1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부모님은 무척 기뻐해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대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세상과 거의 접점이 없었던 예전의 나에 비하면 대단한 성장이라고 응원해주었다. - P-1

내가 언제까지나 취직하지 않고, 집요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같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자 부모님은 점점 불안해진 모양이었지만, 그 무렵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왜 편의점이 아니면 안 되는지, 평범한 직장에 취직하면 왜 안 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서 ‘점원’이 될 수는 있어도, 매뉴얼 밖에서는 어떻게 하면 보통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전혀 모르는 채였다.
부모님은 좀 무른 편이어서 언제까지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나를 그냥 지켜봐주고 있다. 20대 시절엔 죄송한 마음에 일단 취업 활동에 뛰어들어본 적도 있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험밖에 없는 나는 서류 심사를 통과한 경우가 별로 없고, 면접 단계까지 가더라도 왜 몇 년 동안이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 P-1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거의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3할은 이즈미 씨, 3할은 스가와라 씨, 2할은 점장, 나머지는 반년 전에 그만둔 사사키 씨와 1년 전까지 알바 팀장이었던 오카자키 군처럼 과거의 다른 사람들한테서 흡수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말투에 관해서 말하자면, 가까운 사람들의 말투가 나에게 전염되어 지금은 이즈미 씨와 스가와라 씨의 말투를 섞은 것이 내 말투가 되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전에 스가와라 씨의 밴드 동료들이 가게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그 여자들의 옷차림과 말투는 스가와라 씨와 비슷했고, 사사키 씨도 이즈미 씨가 들어온 뒤로는 "수고하십니다!" 하는 말투가 이즈미 씨와 똑같아졌다. 이즈미 씨가 전에 일했던 가게에서 친하게 지냈다는 주부가 일을 도우러 왔을 때는 옷차림이 이즈미 씨와 너무 비슷해서 착각할 뻔했을 정도다. 내 말투도 누군가에게 전염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전염하면서 인간임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P-1

두 사람이 풍부한 감정으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조금 초조한 기분이 든다. 내 몸속에 분노라는 감정은 거의 없다. 일할 사람이 줄어서 곤란하구나 생각할 뿐이다. 나는 스가와라 씨의 표정을 훔쳐보고, 연수받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같은 부위의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말해보았다.
"에이, 또 땡땡이인가요?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믿을 수가 없네요!"
스가와라 씨의 말을 되풀이하는 나를 보고 이즈미 씨가 시계와 반지를 벗으면서 웃었다.
"하하하, 후루쿠라 씨가 몹시 화가 났나 보네! 그래,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같은 일로 화를 내면 모든 점원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점장이 버럭 화를 내거나 야간조의 아무개가 농땡이를 부리거나 해서 분노가 치밀 때 협조하면, 불가사의한 연대감이 생기고 모두 내 분노를 기뻐해준다.
이즈미 씨와 스가와라 씨의 표정을 보며 아아, 나는 지금 능숙하게 ‘인간’이 되어 있구나 하고 안도한다. 이 안도를 편의점이라는 장소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 P-1

일손이 부족한 편의점에서는 ‘좋든 나쁘든, 어쨌든 간에 점원으로서 가게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주 달갑게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즈미 씨나 스가와라 씨에 비하면 우수한 점원은 아니지만, 지각도 결근도 하지 않고 어쨌든 날마다 온다는 것만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기 때문에 좋은 부품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 P-1

"하지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나를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이 꼬치꼬치 캐묻잖아? 그런 귀찮은 상황을 피하려면 그럴듯한 변명이 있어야 편리해."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게 민폐였고, 그 오만한 태도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너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처럼 상대를 삽으로 때려서 그러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 P-1

"그 사람 서른다섯 살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여태껏 편의점 알바라니, 이제 슬슬 끝내지 않을까요?"
"인생 종 친 거지. 그 녀석은 안 돼. 사회의 짐이야. 인간은 말야, 일이나 가정을 통해 사회에 소속하는 게 의무야."
크게 고개를 끄덕인 이즈미 씨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점장을 쿡 찌르며,
"후루쿠라 씨처럼 가정 사정이 있다면 이해하겠지만. 그렇죠?" 하고 말했다.
"아, 그래그래. 후루쿠라 씨는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있으니까!"
점장도 서둘러 말했고,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화제는 시라하 씨한테로 돌아갔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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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하지 마세요. 무서워하니까 정말 제가 무서운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 P-1

문득 떠오른 한마디의 말. ‘비밀은 사람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결국 좁고 어두운 사각에 몰고 가두는 것 역시 비밀이라고 했다.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밝혀지는 것뿐. - P-1

항상 엄마는 ㅈ에서 눈을 깜빡였다. 이번엔 아니었다. ㄴ에 눈을 깜빡였다. 다음엔 ㅓ 그다음엔 ㅈ 그리고 ㅏ 그다음엔 ㄹ. 유희진은 천천히 글자를 손으로 짚으며 엄마의 말을 조합했다. 말이 완성됐을 때 유희진은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엄마의 말을 대신 말했다.
"너 잘못이 아니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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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선기가 한 말은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만 따진다면 자신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유희진은 확신했다. 박기정이 유인한 것이다. 내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부터 따라오기 쉽게 운전했고 나중엔 자신에겐 익숙하겠지만 나에겐 사각인 어딘가로 이끌었다. 장선기의 입장에선 이런 주장이 억측으로 느껴지리라는 것을 안다. 그 느낌을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건 설명하기 어려울 뿐 분명한 사실의 영역이다. 유희진은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애를 썼다. - P-1

"죄가 있다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법이 제대로 못 하면 누군가는 해야 해요. 갇혀야 할 사람은 갇혀야 하고 고통을 줬다면 자기도 그만큼의 고통을 받는 건 당연할 뿐 아니라 이치에도 맞습니다. 그런데 안인수 그 자에게는…… 벌이 아닙니다. 자신을 순교자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고문받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오히려 선물이고 축복이라 믿으니까요. 몸이나 목숨이 아닌 믿음과 신념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막혀버렸어요." - P-1

아무튼 작가님은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사람마다 사정이 있다는 것을요. 때론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요. - P-1

기정에게는 걱정하지 말라 했고 유 작가에게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장선기에게는 그 어떤 확신도 없었다. - P-1

잘못된 답을 정답으로 믿는 경찰과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싶은 기자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치유해준다는 상담사는 마음을 다치게 했고 정신을 살펴준다는 의사는 오해했다. 그들은 모두 나를 어리석은 아이로 대했다. - P-1

인정한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엄마를 괴롭게 한 사람인데, 그래서 결국 죽게 만든 사람인데도 왜 엄마가 그 사람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 P-1

"어떤 이에게 죽음은 벌이 아닙니다. 고통을 가했다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느끼지 못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에게는, 고통을 원하는 이에게는, 그러니까 안인수 같은 자에게는 다른 방식의 재판이 필요해요. 그는 고문을 고행으로, 죽음을 순교로, 믿고 있거든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순 없어요. 그자는 절망하고 후회하고 나중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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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진은 친절하게 다가오는 간호사의 말이 관심과 애정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안쪽을 까보면 자신을 향한 비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해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죄책감을 심는 다정한 질문들. 사고 이후 유희진은 많은 이의 시선을 받았다. 위로인지 오지랖인지 알 수 없는 막막하고 답 없는 말들과 답답한 침묵들. 어둡게 있으면 불쌍한 인생이라 동정했고 밝게 있으면 무정하다고 수군댔다. 나중엔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평소에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나?’ ‘사고 당일 엄마는 어떤 상태였나?’ ‘엄마가 자살을 시도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술 취했을 때 엄마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엄마가 알코올의존증 치료를 중간에 그만둔 이유는 무엇인가?’ ‘평소 엄마와 딸의 관계는 원만했었나.’ 사실대로 말했고 아는 대로 말했다. 모르는 건 모른다 했고 아닌 건 아니라 했다. 그러나 경찰은, 몇몇 기자는, 꼭 들어야 하는 대답이 있는 것처럼, 듣고 싶은 대답이 있는 것처럼,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엄마가 그렇게 돼서 힘들겠다는 걱정 어린 말을 하는 이들은 반드시 힘들게 하는 말도 덧붙였다는 것을 유희진은 기억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엄마를 들먹이며 다가오는 이들은 다 자신을 힘들게 한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잠잠해졌다고 생각한 몇몇 기억이 눈을 뜨고 입을 벌려 유희진의 마음은 복잡하고 뜨거워졌다. 어떤 엄마는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 어떤 아이는 엄마를 돌본다. 다정한 엄마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엄마 역할을 맡은 연기자들은 아닐까? 엄마와의 일화는 동화가 아니다. 동화에 감춰진 저주에 가깝지. 엄마는 자기 상처를 내게 보임으로써 느리고 긴 치료를 받았다. 딸에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고 딸은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 엄마는 냉대를 받았다, 했다. 되는 일이 없었고 집단에게 배제됐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했다. 목격한 적은 없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달랐다. 엄마는 타인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무시를 읽고 말투에서 멸시를 느꼈다. 마트 캐셔의 건조한 인사에 마음이 상했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공무원의 평범한 질문에도 분노를 느꼈다. 성가대원들이 자신을 따돌린다고 생각했고 권사님들이 모일 때마다 자기 흉을 본다고 괴로워했다. 엄마는 삶을 바꾸려고 표정과 행동을 바꿨다. 집 밖에서의 엄마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했고 누구든 배려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저자세로 살았다. 엄마를 분노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는 엄마를 불쌍히 여겼다. 하지만 어린 딸에게 분노를 표현할 땐 잔인하고 비겁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는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연민도 동정도 들지 않고 화만 났다. 웅크리고 우는 모습이 늙은 개가 짖는 것 같았다. 저 입을 틀어막고 싶었고 그럴 때마다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 P-1

꼬박 사흘 하고 반나절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설정하고 뒤집어놓았다. 어디냐 묻는 문자엔 휴가 중이고 여행지에 있다고 했다. 암막커튼으로 창과 빛과 시간을 가렸다. 약통을 열었다. 한 알을 삼켰다. 잤고, 자려 했고, 잠에서 깨면 다시 한 알. 한 번씩 완전히 방전시키고 텅 빈 자리를 느리게 채우는 것. 유희진의 회복 방식이었다. - P-1

집에서는 달랐다. 노래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다면서 죽고 싶다면서 신을 찾지도 않고 울기만 했다. 토요일까지 침대에 누워 있거나 술에 취해 창가에 앉아 있던 엄마는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 성가복을 입고 성가를 불렀다. 나는 맨 뒷줄 장의자 끝에 앉아 성가대석에서 말씀을 듣는 엄마의 옆모습을 봤다. 영원한 미소로 조각된 하얀 석상 같았다. - P-1

하나님께 의지했던 밤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무릎을 꿇고 손마디가 저릴 정도로 두 손을 꽉 쥐고 기도했던 새벽이 있었다. 엄마의 마음을 고쳐주세요. 더는 울지 않게 해주세요. 치유해주세요. 위로해주세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저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세요. ‘너의 기도를 들어줄게. 걱정하지 말고 잠에 들거라. 사랑하는 내 딸아.’ 이렇게 한마디만 해주세요. 뭘 해야 한다면 하겠어요. 뭘 그만둬야 한다면 그것도 그만두겠어요.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눈물이 흘렀다. 멈추지 않았다. 몸이 떨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만감. 속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같은 마음. 아, 이런 게 신의 섭리인가. 이런 게 하나님의 만지심인가. 울다 잠들었다. 무릎 꿇은 모습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변한 건 없었다. 더 악화되기만 했다. 그래도 희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도했다. 어김없이 눈물이 났고 치유와 내적인 충만 속에 안심하고 잠들었다.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무의미한 반복 속에 깨달았다. 느낌과 감정일 뿐이다. 착각이고 혼란이다. 믿음이라고 생각했던 건 믿고 싶어하는 간절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느 새벽. 기도 중 눈을 번쩍 떴다. 보이는 건 없었다. 캄캄한 방 안에 더 캄캄한 사물들이 고요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다짐했다. 듣는 이가 없는 혼잣말은 더 이상 하기 않겠어. - P-1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시는 그 깊은 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더는 상처 속으로 파고들고 싶지 않고 피해의식이 모든 생각과 감정을 덮는 것도 싫다. 희진은 끌려가고 싶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인가. - P-1

그럴 때마다 나는 기도했다. 엄마의 마음을 만져주세요. 정말로 엄마를 변화시켜주세요. 아침이 되어도 이 모습 그대로 지켜주세요. 분명 신은 내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듣기만 했다. - P-1

대법원은 이례적인 판결을 내렸다. 아동 학대를 적용해 5년을 선고했던 2심을 깨고 아동 학대 살해죄를 적용해 20년을 선고한 것이다. 그동안 학대로 아동이 죽었을 때 살해죄가 적용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의도성의 유무였다. 과정 속에 학대가 있고 그 결과로 아동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죽이겠다는 의도와 의지를 갖지는 않았으리라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법정에서 부모들은 눈물을 쏟으며 ‘죽을 줄 몰랐다’고 주장했고 그 말은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죽이겠다’는 의지는 없었을지라도 ‘죽어도 상관없다’는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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