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이 되어 어질지 못하면, 禮는 해서 무엇하며, 사람이 되어 어질지 못하면, 樂은 해서 무엇하랴?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八佾>

이것은 바로 仁이 禮의 기초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에 公心이 없으면, 질서를 세울 수 없다. 질서는 올바름[正當性]에 의거하고 올바름을 구하려면 마땅히 공심에 의거해야 한다.
이에 이르러 우리는 孔子학설 중에서 ‘禮과를 義에로 포섭하였을‘ 뿐만 아니라, ‘禮를 仁에다 포섭하였음‘과 義는 ‘仁을 기초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합하여 말하면, ‘仁, 義, 禮‘ 세 관념은 이론적으로 하나의 주요 맥락을 형성하여 공자의 학설을 관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후세 유학사상의 총체적인 맥락이 되었다. 여기서 이 학설의 정신방향은 다음 절에 논술하겠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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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어진 이만이 남을 좋아할 수 있고, 남을 미워할 수 있다.
子曰, 唯仁者能好人, 能惡人. <里人>

‘좋아하고 미워함‘은 정서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모든 사람, 일체의 동물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어진 사람뿐이겠는가? 공자의 뜻은 바로 이치대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仁者는 公心을 세울 수 있다. 이미 사사로운 감정의 얽매임[私累]이 없으니 일체의 외계 사물에 대하여, 이치에 따라 가치판단을 세울 수가 있다. 이것이 이른바 ‘남을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기에 역시 여러 유학자들이 ‘好惡‘를 말한 것은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긍정과 부정을 말한 것이지 心理的인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P74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仁에 뜻을 가지고 있으면 죄악[惡]이 없다."
子曰, 苟志於仁也, 無惡也. <里仁>

이 惡자는 罪惡의 뜻이다. 好惡의 뜻과는 같지 않다. 앞에서는 正面(긍정적인 면)으로 말했다. 즉, 우리가 仁德을 갖추고 있으면 大公하여 사사로움이 없다. 즉, 이치대로 긍정과 부정을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反面(부정적인 면)에 대하여 말했다. 우리가 사사로움을 없앨 수 있으면, 일체의 죄악을 초월할 수 있다. 대개 죄악은 사적인 잡념[私念]에 근원을 두고 있으니 사사로움을 없애면, 자연히 악함이 없게 된다.
윗절에서 인용한 義利의 구분은 여기에서 그 실질적 의미가 드러날 수 있다. 私念에 따르면 利를 추구하고, 公心에 따르면 義를 추구한다. 仁은 公心을 가리키니 仁은 義의 근본이 된다. 이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이치는 매우 뚜렷하다. 대개 義란 정당성[올바름]을 가리키며, 우리가 올바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공심을 세울 수 있는 데에 있다. 公心이 서지 못하면, 반드시 利欲에 빠지게 된다. 公心이 이미 세워지면, 저절로 理分에 따라갈 수 있다. 公心을 세우는 것이 仁이요, 이치에 따르는 것이 義이다. 뒷날 맹자가 ‘仁에 머물고 義를 거친다‘(居仁由義)고 말하고, 또 仁은 ‘인간의 마음‘이요, 義는 ‘인간의 길‘이라고 한 것은 공자의 仁義 관념을 가장 잘 밝힌 것이다. 대개 仁은 자각의 경계이며, 義는 이 자각의 發用이다. 公心을 세울 수 있는 자는 실천 중에서 반드시 올바름[正當]을 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은 의의 기초요, 의는 인이 드러난 것이 되는 까닭이다. 의가 인에 의거하는 것은 마치 예가 의에 의거하는 것과 같다.
75 이상은 仁과 義, 두 관념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이제 다시 仁과 私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 P74

顏淵이 仁을 물었다. 선생님은 대답하였다. "自己[사욕]를 누르고, 禮에 돌아가는 것이 仁이다. 하루만 자기[사욕]를 누르고 예에 돌아가면, 天下 사람들이 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仁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세목[자세한 것]을 청하였다. 선생님은 대답하였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顔淵問禮.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

이것은 전적으로 仁과 禮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어째서 ‘자기(욕심)를 누르고 예에 돌아가는 것이 仁이라‘고 하였는가? 克己는, 즉 사사로움을 제거하는 것이며, 複禮는, 즉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義를 말하지 않는 까닭은 義와 禮는 이론적으로는 비록 차원이 다른 관념이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말하면, 사욕에 따르지 않고 禮로 돌아갈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이치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며, 역시 올바름을 구하려는 의지의 방향대로 활동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실천하면 오히려 仁心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 귀절은 원래 실천에 대하여 말한 것이므로 그 다음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예의를 지킴으로써 實踐하는 과정을 지적하였다.
禮는 義를 그 내용으로 삼고, 義는 또 仁을 기초로 삼는다. 이것은 이론적 순서이다. 인간은 예를 지킴으로써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양성한다. 즉 이러한 의지로 말미암아 公心을 환기시키는데, 이것은 실천과정이다. 이론적 순서로 말하자면, 義의 지위는 지극히 뚜렷하다. 실천순서에서 말하면 禮와 義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로 나누어서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실천순서를 말할 떄 仁으로부터 직접 禮를 언급하였던 것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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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주문화의 중건에 치중한 것은 결코 순전히 전통에 의해서가 아니다. 사실은 자각적으로 긍정을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해 공자는 결코 하나의 전통을 옹호할 줄만 안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이유에 의거하여 그 주장을 건립한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중국문화의 자각시기의 시초를 대표하는 이유이다. - P62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로써 바탕을 삼고, 예로써 이를 실행하며, 겸손으로써 이를 나타내고[表出] 믿음으로써 이를 이룩한다. 이것이 군자이다."
子曰君子義以質. 禮以行之, 孫以出之, 信以成之, 君子哉. <衛靈公>

​ 여기서 ‘정의로써 바탕을 삼고. 예로써 실행한다‘는 말은 예를 의에 귀속시킨 이론이다. 質은 바로 實이요. 현대어로 말해, ‘실질‘을 나타낸다. ‘예로써 이를 실행한다‘는 것은, 바로 예로써 義를 실행하는 것으로 삼은 것이다. 바꾸어 말해, 예는 義에 의하여 성립된다. 義는 예의 실질이요, 예는 義의 표현이다. 이리하여 일체의 제도, 儀文과 모든 생활질서는 모두 정당성 또는 理를 그 기초로 삼는다. 인간이 생활질서가 있어야 하는 까닭과, 크게는 제도가 있고 작게는 儀文이 있는 까닭은 모두 인간이 그 옳음[正當]을 실현하려는 요구이다. 바꾸어 말해 일체의 습속전통이 예의 참된 기초가 아니라, 올바름을 요구하는 의식이 바로 禮의 참된 기초가 된다. 이에 이르러 일체의 역사사실, 사회사실, 심리 및 생리방면의 사실, 그 자체는 가치기준을 제공하지 않으며 자각적인 의식이 가치기준의 유일한 근원이 된다. 인간의 자각적인 지위는 갑자기 드러나게 되는데, 유학의 최초 기반은 여기에서 建立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 P69

대체로 仁이란 것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세워주고, 자기가 달성하고자 하면 남을 달성케 하는 것이다. 가까운 자신을 비유로 삼는다면, 仁을 구하는 길[方]이라 할 수 있다.
夫仁者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巳 <雍也>

여기서 仁의 본래 의미는 아주 뚜렷해진다. 仁이란 남을 자기처럼 여기고, 사사로운 감정의 얽힘을 깨끗이 제거하는 경지이다. 이 경지는 자연히 하나의 자각적인 경지이며, 잠시라도 밖에서 구할 수 없고, 또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자는 또한 이것으로써 自我의 主宰性을 말하였다. - P73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仁은 멀리 있는가? 내가 仁을 바라니, 이에 仁이 이르도다."
子曰仁, 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述而>

​ 仁은 초월적 의미의 大公한 경계이며, 이것은 ‘남과 나를 같이 보는‘ 의미로부터 드러낼 수가 있다. 우리가 사사로운 잡념을 제거하고 ‘公的인 마음‘을 세울 수 있으면, 이것은 순수한 자각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최후의 主宰性이 드러나며, 모든 존재의 제약을 초월한다. 우리가 이 "公心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스스로 주인노릇을 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仁을 바라니, 이에 仁이 이르도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公心을 세울 수만 있으면, 일체가 자연히 이치대로 될 수 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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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분석기술이 이미 중국에는 결여된 것이며 우리가 운용하는 논리 지식은 자연히 대부분 서양의 연구성과에서 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정말로 ‘외국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논리적인 사고로 중국철학사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관념이다. - P19

 똑같은 이유로 우리가 서양철학의 분석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가 있다. 논리적 분석의 훈련은 줄곧 ‘사상상의 현미경‘으로 비유되었다. 이 ‘사상상의 현미경‘은 참으로 서양의 산물이다. 일체의 비교적 엄격한 분석기술도 근대에 비로소 생겨났다. 그러나 이 때문에 논리적 분석하에 발견된 사상법칙이 반드시 논리적 분석 자체가 발전된 뒤에 비로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에도 세균은 여전히 존재했던 것과 같다. ‘사상상의 현미경‘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사상의 법칙은 마찬가지로 존재했었다. - P19

 전장에서 고대 중국사상을 논한 것은 철학이 성립되기 이전의 설을 가리킨다. 공자는 周나라 말기에 유학을 창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철학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순서로 말하자면, 공자는 이미 하나의 중국철학의 이론을 건립한 사람이니까, 중국철학사의 논술은 공자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고 하겠다.
 공자를 최초의 중국철학가라 할 수 있는 까닭은 공자가 제일 먼저 하나의 계통적인 이론을 제출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가치 및 문화 제반 문제에 대해 확실한 관점과 주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통성과 자각성이 철학의 특색인 이상 공자 이전의 원시사상은 哲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공자의 자각적 이론 및 계통적인 관점이 출현해야 비로소 중국철학이 정식으로 시작됨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비록 공자가 건립한 유학이론은 단지 중국 선진철학 중의 일파에 지나지 않지만 공자 이전에는 아무런 철학이론도 정식으로 출현되지 않았으므로(老子의 시대문제에서 사실 舊說은 잘못되었다. 道家哲學의 장을 참고할 것), 철학사의 입장에서 볼 때 공자를 마땅히 중국철학의 창립자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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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이르니 이사의 뜻은 아주 분명해진다. 그 주요 관념은, 즉 ‘法敎‘와 ‘私學‘의 대립에 있다. 대체로 이사는 사상과 언론은 마땅히 법교에 복종해야 하며, 사학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官方에서 결정한 모든 것은 곧 영원히 잘못이 없는 표준적인 규범인 것이다. 관방에서 결정하지 않은 사상에 속하는 것은 모두 ‘사학‘이며,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통하지 않음은 아주 쉽게 알게 된다. 천하 사람들의 지혜와 능력을 이용하면 반드시 소수인의 지혜와 능력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는 이치이다. 이사가 사학을 금하려 한 것은 사실 학술사상 그 자체는 개인이 표현하고 세워 놓은 바가 아닐 수가 없으며, 사학을 금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모든 학술사상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관가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소수의 통치집단의 사상적인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빈곤하고 어리석은 견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P11

 ‘금문‘은 한대에 사용하던 문자이며, ‘고문‘은 올챙이처럼 생긴 과두문자를 가리킨다. 한대 초에 빠져 없어진 경전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의거한 경전은 모두가 나이 많은 儒生의 口述로 말미암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당시의 문자를 사용하였다. 이른바 금문의 경전이 이것이다. 고문의 경전은, 즉 남아 있었던 簡策이기 때문에 한대에 통용되던 글자가 아니었다. 이것이 두 가지가 구분이 지어지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경학을 하는 선비들은 또 파가 나뉘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금문에 의 14 거하고 어떤 사람은 고문에 의거하여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지식인들의 정력은 거의 대부분이 훈고를 하는 것에 빨려 들어가버렸다. - P13

 도가의 기본정신은 원래 ‘情意我‘의 자유를 활달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므로 밖에 대해서는 냉철한 지혜로 靜觀하였고, 안에 대해서는 淸虛 17 로서 스스로 지켰다. 한나라 왕실이 처음 일어났을 때는, 본래 일정한 문화의식이 없었다. 文帝 이후에는 조정 안에서 ‘黃老‘를 중시하여 도가의 말을 마루[宗]로 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도가의 설은 역시 커다란 왜곡을 당했으니, 이것은 즉 정의아의 경계가 육체생활의 작용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노자는 "아무것도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는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의 본래의 취지는 自我가 아무 데도 집착한 데 없고 아무 데도 구속됨이 없는 경지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 그러나 ‘智‘를 말했기 때문에 때로는 權術의 말이 들어있었다. 장자에는 <逍遙遊> 및 不死不生의 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자아가 육체의 일들에 봉쇄되지 않은 것을 묘사한 것이지만, 萬言을 쓰기 좋아했기 때문에, 때로는 ‘늙지 않는다‘ 및 ‘고통이 없다‘는 말로 비유하였다.
 한나라 초에 선진의 옛 학문은 이미 그 전통이 끊겼고, 도가를 말하는 자는 모두 노자·장자가 긍정한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단지 그 껍데기의 비유만을 뚝 잘라 취하여, 이것이 바로 도가의 학이라고 여기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도가의 설을 권모술수로 보았다. 그리고 법가의 순전히 속임수 잘 쓰는 마음으로 도가의 냉철한 지혜를 운용하였다. 그리고 ‘黃老‘에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도가의 설을 長生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날마다 守尸之術에 마음을 썼다. 두 가지 중 하나는 조정에 있고, 하나는 민간에 있는 것[在野]이다. 조정에 있는 것은 황노의 권술 사상을 위탁하였고, 민간에 있는 것이 점점 ‘道敎‘로 전환이 되었으며, 역시 황노의 종교에다 위탁하였다. 위탁이 위탁되는 까닭은 바로 ‘정의아‘의 기본적인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술이 다룬 것은 정치利害이며, 장생술이 추구한 것은 육체의 생존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육체생활 중의 일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서 도가를 논하면 도가의 학은 왜곡되어 육체생활 중에 어떠한 효력을 구하는 학문이 된다. 어찌 커다란 잘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한대 지식인의 도가에 대한 공통적인 오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대에 들어온 이후 도가가 말한 ‘정의아‘는 이미 다시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없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 관념 중에서 도가는 점점 육체생활의 효과를 구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커다란 왜곡이며, 이러한 왜곡이 도가에 대한 영향이 막대한 것은, 역시 음양오행 관념의 유가에 대한 영향보다 못지 않았다. - P16

 공맹의 유학은 원래가 心性을 위주로 한다. 이 하나의 심성론 문제는 맹자의 ‘性善‘ 두 자로서 그것을 표시한다. 이 문제는 본래 두 가지 부분을 함유하고 있다. 한 부분은 가치와 덕성의 해석에 관계되는 것이며, 또 다른 한 부분은, 즉 人性의 이해에 관계되는 것이다. 맹자는 가치 덕성의 근원을 주체의 자각 위에 두었기 때문에 ‘善‘은 그 근본이 인간의 자각성에 있는 것이다. 즉 세상에 전해져 오는 ‘성선설‘이 그것이다. 한대의 유가는 ‘마음[心靈]의 자각‘이란 의미를 잘 알지 못하였으며, 단지 비루하고 조잡한 우주론의 틀에 묶여서 철학 문제를 처리하였다. 그러므로 심성론 문제는 한대유가의 손에서 두 가지 문제로 분열되었다. 그래서 각기 아주 가소로운 처리를 하게 된 것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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