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해서 말해 보면, 요즘 과학계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반 교양인들에게 친절히 설명하고 안내하는 저서들을 내놓고 있다. 물론 아직 충분히 친절하지 못한 것들도 있고 무리하게 자신의 주장을 확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어쨌든 그런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저서들에서 설명한 과학적 지식들이 이 세계와 사회, 그리고 인간 개개인까지 이해하는 ‘신념체계’(앎이란 기실 그렇게 믿는 것이다)를 이루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나도 크게 염려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과학이 담당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월권을 행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가치나 윤리에 관한 문제는 과학에서 다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과학을 지도할 수 있는 지침과도 같다. 그런 가치나 윤리에 관해 서양에서는 종교가, 동양에서는 철학이 주요 영역으로 다루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 특히 동양철학도들도 분발 매진하여 능력껏 교양서들을 저술해야 한다. 공부를 시작할 때 지녔던 거창한 이상과 포부가 점차 줄어들어 결국 개인적 만족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최선을 다해 저술해야 한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썼다. - P13

나는 결코 유학의 전도사가 아니다. 물론 사십대가 기울기 시작한 지금까지 유학을 학습하고, 또 한때는 진정한 유학 27 자라는 것도 되고 싶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21세기에 ‘공자왈’ ‘맹자왈’을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단순하다. 하나의 믿음 때문이다. 즉, 전체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발휘되었을 때가 바로 인류의 발전기였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의 다양성 혹은 문화의 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구 등이 주창한 유학도 인생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우리의 세상이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정치적으로도 어느 하나의 믿음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 P26

나는 청소년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인격적으로 독립했으며, 마흔에는 판단을 함에 있어 흔들리지 않았고 쉰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예순에는 다른 이들의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고 일흔에는 마침내 내 스스로 세상 이치와 하나가 되어 행위에 어떤 어그러짐도 없었다.

이런 경지가 누구나 나이만 먹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턱도 없다. 나름 동양학을 전공한 철학박사라는 나부 32 터도 아니다. 하나의 확실한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ㅡ공구 같은 사람만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도 어떤 잘못이 없는 경지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고 오직 도덕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완벽은 곧 자유의 경지를 의미하며(자기 마음대로 해도 괜찮으니까!),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전문적인 용어로 ‘공부工夫’가 필요하다. - P31

성인: 그의 자유와 공부
‘공부’란 한때 우리가 이소룡의 무술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쿵후’,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하는 ‘공부’, 그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 등 그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 ‘공부’에 속한다. 그러나 공구와 같은 자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로 도덕적 수양을 공부로 한다. 도덕적 수양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내가 먼저 닭살이 일어나게 되는(물론 감동적이어 33 서) 공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도덕 수양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늘을 원망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며, 아래에서 배워 위에 도달하니 나를 아는 이 하늘이로고!

이 이야기는 사실 공구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며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의역하면 이렇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책임이나 결과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하여 결국에는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 - P32

운명과 남 탓을 안 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으로,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뜻이다.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줏대를 갖고 자신을 확실하게 정립한다는 의미이다. 풀어서 말해 보자. 사람에게는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운명이다. 나는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에서 1964년에 ‘상자 운자를 쓰시는 아버님’과 ‘최씨 성을 가진 어머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대체 왜 그렇게 태어났을까? 그 까닭은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고, 싫다고 바꿀 수도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재할 수 있는 측면이 아니다. 그리고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서 자라고, 그러다 늙고, 결국 죽는다. 이와 같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현상도 우리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 있어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초탈하려고, 즉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 공구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가 귀신이나 죽음에 관심을 갖지 않 35 았다는 것은 바로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측면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노력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바로 초탈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혹은 더 나은지에 관해서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선택의 문제이다. 제발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않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다시 돌아오자.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말은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말과 같다. 주체성이 확립되면 진정한 자아를 둘러싼 잡스런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한 운명이나 물리현상에 함몰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참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고 해서 곧바로 멋대로 할 수 있는, 즉 성인의 자유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공구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한다"고 말한 것이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한다." 이 말은 우선 ‘공부’를 위해서 산속으로 들어간다던지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처박혀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많은 사람이 성인하면 신선과 같은 이를 떠올리고, 신선을 학 타고 이슬 먹고 사는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인간이 동서고금 어느 시대에 존재했었을까? 절대 없다. 그냥 우리처럼 차 타고 다니고(있다면) 밥 먹고 똥 싸고, 그렇게 살 뿐이다. 다만, 도덕적인 측면에서 완벽하여 자유를 구가하는 점만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성인을 성인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완벽을 통한 자유가 바로 성인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도덕적 완벽’은 산속에서 혹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여러 도덕적 정황, 즉 사람들 간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부모님의 장남이고 내 부인의 남편이며, 내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내 동생들의 형이다. 나는 이처럼 여러 관계 안에서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따른 덕목이 있다. 이것들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완벽’이다. 맨 앞에서 공구가 귀신과 죽음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설명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엄청나게 힘겨운 일이다. 그래서 공구의 제자 중에서 가장 어리고 총명했던 증삼(증자)조차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편안해졌다고 좋아했던 것이다.
37 그런데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터득하는 이치는 결과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지만, 결코 인간세계의 도덕적인 정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아가 우주 운행의 원리와 상통하게 된다. 정말 그런가?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적 신념이다. 공구와 그의 후학들, 그리고 거의 모든 유학자는 전부 그런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은 공구보다 훨씬 앞선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가장 주요하고 훌륭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었고 그래서 또한 우주의 총체적인 원리가 인간에게 입력되었는데, 그렇게 입력된 원리가 인간의 잠재된 본성(潛在性, 즉 있긴 분명히 있어서 조건만 충족되면 나타나지만 물에 잠겨 있듯 현실적으로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본성)을 이루었으며 그 잠재된 본성을 언제 어디서나 온전히 표현해 내는 이가 바로 요순과 같은 성인이다. 그런데 성인은 우리와 다른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도덕적 완벽을 이루어 자유로운 사람이다. 결국 인간에게 잠재된 본성의 내용이란 바로 도덕이며, 나아가 인간의 잠재성과 우주의 원리는 도덕을 매개로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 38 서 공구는 자신이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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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에 살고 있는 유명한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사는 데 굉장히 어려움을 겪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인간의 모든 실패는 바로 이런 유형의 인물에서 비롯된다."
심리학 책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우리 모두에게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글을 찾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만큼 아들러의 말은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기에 다시 한번 되풀이해 음미할 가치가 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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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지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한순간도 죄책감이나 불안함 없이 행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경은 인정했다. 은지의 말처럼 이경과 은지는 너무 비슷한 사람들이었고, 그 이유 때문에 빠르게 서로에게 빠져들었지만 제대로 헤엄치지 못했으며 끝까지 허우적댔다. 누구든 먼저 그 심연에서 빠져나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순간이었다. 은지와 함께했던 기언은 하루하루 떨어지는 시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흘러가버렸고, 더는 이경을 괴롭힐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갔다. - P58

"연락이 없었나요?"
그렇다고 말하려는데 입을 열 수가 없어서 이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수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도 모르게 됐어요. 이경은 속으로 말했다. 둘은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지와의 만남은 이경을 지난 시간으로 끌고 들어갔다. 수이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 번쯤은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차라리 그런 우연이 없기를 바랐다. - P59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했다. 어느 한 사람 울지도 못하고, 완성되지 못한 문장만을 조금씩 흘려보낼 뿐이었다. 나는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후 몇 달을 보냈다. 공무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공무 또한 나에게 편지나 전화를 하지 않았다. - P174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 P179

그날 밤, 여자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ㅡ혜인아, 답을 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네가 그냥 내 문자를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족해. 얼마 전에 꿈을 꿨어. 시청역 앞에서 우연히 만난 너와 함께 밤새 이야기하는 꿈을. 너와 함께 술을 마시고 네 앞에서 기타를 치고 같이 웃는 꿈을. 너와 함께 밤하늘을 보는 꿈을. 꿈 속에서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어. 꿈은 꿈일 뿐이라고, 잠에서 깬 내게 이야기했어. 그런데도 꿈속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꿈에서 깨어나서 너에게 말하고 싶어졌어.
잠자리에 누워서 혜인은 그 문자를 여러 번 읽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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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신기술이 야기할 모든 영향을 다룰 생각은 없다. 특히 오늘날 기술은 많은 놀라운 약속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나의 의도는 주로 그것이 초래할 위협과 위험을 조명하는 것이다. 기술 혁명을 주도하는 기업과 사업가 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학자나 철학자 그리고 나 같은 역사학자가 할 일이란 경고음을 내고 치명적인 잘못을 유발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 P13

너무 야심차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여유가 없다. 철학과 종교, 과학 모두 시간이 다 돼간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인생의 의미를 두고 논쟁해왔다. 그러나 이 논쟁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다. 다가오는 생태학적 위기, 커져가는 대량 살상무기의 위협, 현상 파괴적인 신기술의 부상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이 인간에게 생명을 개조하고 설계할 힘을 건넬 것이다. 머지않아 누군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어떤 이야기를 기반으로 이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학자는 인내심이 평균보다 훨씬 낮고 투자자는 최악이다. 생명을 설계할 힘으로 무엇을 할지 당신이 모른다 해도, 답을 찾을 때까지 1,000년의 시간을 시장 권력이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맹목적인 답을 당신에게 강요할 것이다. 인생의 미래를 분기 수익 보고서에 맡기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 P15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과업은 세계를 위한 갱신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산업혁명의 격동이 20세기의 참신한 이데올로기를 낳은 것처럼, 다가오는 생명기술과 정보기술 혁명을 맞이해서도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10년은 치열한 자아성찰과 새로운 사회-정치 모델 구상이 두드러지는 시기가 될 것이다. 자유주의는 1930년대와 1960년대 위기 때처럼 다시 한 번 자기 혁신에 성공해서 이전보다 더 매력적으로 떠오를 수 있을까? 전통적인 종교와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자가 주지 못하는 답을 줄 수 있을까? 그들은 아주 오랜 지혜를 활용해서 갱신된 세계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와 깨끗이 단절하고, 오랜 신이나 민족뿐 아니라 근대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마저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가 된 걸까? - P40

이런 기술적 도전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아마도 고용 시장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2015년 이래 나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정부 관리들, 사업가, 사회활동가, 학생들과 인간이 처한 곤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인공지능, 빅데이터 알고리즘, 생명공학에 대한 이야기에 참을성을 잃거나 지루해하면 단 한마디 마술같은 단어로 사람들의 주의를 다시 모을 수 있었다. 바로 일자리다. 기술 혁명은 조만간 수십억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내고, 막대한 규모의 새로운 무용 계급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이는 현존하는 이데올로기는 모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사회적, 정치적 격변으로 이어질 것이다. 기술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대단히 추상적이고 멀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대량 실직ㅡ혹은 개인 실업ㅡ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전망 앞에서는 아무도 무관심한 상태로 있을 수 없다. - P42

특히 AI는 다른 사람에 관한 직관이 필요한 업무에서는 인간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 보행자로 붐비는 거리에서 차량을 운전하는 일이나, 낯선 사람에게 자금을 대출하는 일, 사업 협상에서 흥정하는 일 등 많은 분야에서 다른 사람의 감정과 욕망을 정확히 측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저 아이가 길로 뛰어들려는 걸까? 정장 차림의 남성이 내 돈을 가지고 사라질까? 저 변호사가 위협을 주려고 저러는 걸까, 아니면 그저 허풍일까? 그런 감정과 욕망이 비물질적인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한, 컴퓨터는 인간 운전사와 은행원, 변호사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과 욕망이 사실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에 불과하다면, 이런 알고리즘을 해독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데 컴퓨터가 호모 사피엔스보다 훨씬 더 뛰어날 수밖에 없다.
보행자의 의도를 예측하는 운전사, 잠재적 대출자의 신용을 평가하는 은행원, 협상 테이블에서 분위기를 감지하는 변호사는 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뇌는 상대의 얼굴 표정과 음성의 높낮이, 손의 움직임, 심지어 체취까지 분석하는 방법으로 생화학적 패턴을 파악한다. AI가 적절한 센서만 갖춘다면 인간보다 훨씬 정확하면서도 믿을 만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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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런 이익을 측정할 객관적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에 따라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할 객관적인 척도는 우리에게 없다. 물론 늘 승자는 자기네 정의가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왜 승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마니교에게 승리한 것이 인류에게 유익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과 의견을 같이할 이유가 없다. 무슬림들은 사산 왕조 제국이 무슬림의 손에 무너진 것이 인류에게 이익이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이익이 명백한 것은 우리가 무슬림 세계관을 받아들였을 때뿐이다. 어쩌면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사라지고 패배했더라면 우리는 더욱 잘 살았을지도 모른다. - P343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ㅡ게임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밈 연구ㅡ역사의 역학은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 P346

적어도 인지혁명이 일어난 이후부터 인류는 우주를 이해하려 애썼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는 용의. 현대 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ignoramus-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면 틀린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 이론도 신성하지 않으며 도전을 벗어난 대상이 아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무지를 인정한 현대 과학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그 수단은 관찰을 수집한 뒤, 수학적 도구로 그 관찰들을 연결해 포괄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3. 새 힘의 획득. 현대 과학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론을 사용해서 새 힘을 획득하고자 하며, 특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한다. - P356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에게 거미 연구를 금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미학자는ㅡ중세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말이지만ㅡ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부수적이라는 점과 자신의 연구결과가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학자가 거미나 나비나 갈라파고스핀치에 대해 무엇을 발견하든 그 지식은 하찮은 것에 불과했고, 사회나 정치, 경제의 근본적 진리와 무관했다. - P358

현대 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덕분에 기존의 어떤 전통 지식보다 더 역동적이고 유연하며 탐구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느지 이해하는 능력과 새로운 기술을 발명할 역량이 크게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선조 대부분이 대처할 필요가 없었던 심각한 문제를 하나 제기하기도 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며 지금의 지식도 잠정적인 것이라는 가정은 우리가 공유하는 신화에까지, 즉 수백만 명의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하게 만들어주는 신화에까지 적용된다. 만일 이 신화들 중 많은 것이 의심스럽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까? 우리의 공동체, 국가, 국제 시스템은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까?
정치사회적 질서를 안정시키려는 현대의 모든 노력은 다음의 두 가지 비과학적 방법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1. 하나의 과학이론을 택해서 통상의 과학적 관례와는 반대로 그것이 궁극적인 절대진리라고 선포하는 것. 이것은 나치당원과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한 방법이었다. 나치당원들은 자기네 인종정책이 생물학적 사실들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제적 진리는 절대적이고 신성한 것이며 여기에는 결코 반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2. 과학은 내버려두고 과학과 무관한 절대진리에 따라 사는 것. 이것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전략이었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권리에 대한 도그마적인 신조를 토대로 건설된 이념인데, 그 신조는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와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놀랄 것은 없다. 과학 자체도 스스로의 연구를 정당화하고 자금을 공급받으려면 종교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신념에 의지해야 하는 마당이니까.
그럼에도 현대 문화는 이전 어떤 문화보다 더욱 폭넓게 기꺼이 무지를 받아들여 왔다. 현대의 사회질서를 지탱해준 요인 중 하나는 기술과 과학적 연구방법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의 확산이었다. 이것은 절대진리에 대한 믿음을 어느 정도 대체했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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