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유혹이란, 본질을 말하자면 다정다감한 언행으로 상대방의 상상력을 자극해 내가 품은 호감(심리적 호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호감)을 그 사람이 확신하도록 촉진하는 행위다. 상대방을 조종해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유혹은 상대방에게서 매력을 발견하고 그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선물이다. 상대에게 기분 좋은 유혹을 하려면 분명히 모순되어 보이는 다음 세 가지를 차례차례 설득시켜야 한다.
당신과 섹스를 해보면 좋겠다. 당신과 섹스를 하지는 않겠다. 당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어서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분 좋은 유혹은 섹스가 함의하는 중요한 진실을 (불순한 의도 없이) 이용하는 행위다. 섹스에서 가장 즐거운 요소를 꼽으라고 하면, 몸을 섞는 행위 자체보다는 그 행위에 담긴 수용인 경우가 많다. 아무 꾸밈 없이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나를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 수용할 만큼 좋아한다는 확신이 생기면 기꺼이 자기를 내어놓고 일상의 품위를 벗어던지게 된다. 처음으로 상대방의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다거나 몹시 무례하고 저속한 말을 해달라는 상대방의 요구에 응할 때 느끼는 쾌감은 대부분 상대를 능숙하게 애무하는 행위보다도 상대방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안도감에서 비롯한다.
착한 바람둥이는 이 수용의 개념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시간을 안겨주지 못할까봐 걱정할 일이 없다. 식사를 하는 중에도, 또 요리를 하는 주방에서도 그리 길지 않은 대화만으로도 우리가 섹스에서 느끼는 가슴 뭉클하고 황홀한 경험을 얼마든지 상대방에게 선사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P101

착한 바람둥이는 세상이 좀 더 성숙하게 움직일 때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고, 그런 세상에서 어떤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 암시한다. 유혹은 실제 성관계의 서곡이라는, 융통성 없고 노골적인 공식에 매이지 않게 되면 유혹을 받은 사람도 이후 섹스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의 의도를 왜곡할 일이 없다. 그러면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 없이 처음과 똑같이 품위를 지키며 상대가 제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자기 모습 중에서 어떤 점이 괜찮고 흥미로운지 상기시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유혹을 주고받는 시간은 서로의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이 실제 성관계로 이어져야만 정당하다고 고집한다면 다양한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차단하게 된다. 유혹을 올바로 이해할 때 이 시간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엄청난 장벽을 뛰어넘는 시간이 된다. 정치적 신념도,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지위도, 결혼 여부도, 성적 취향도, 나이(물론, 분명하게 알려야 되지만) 차이도 불문하고 서로에게 만족을 주는 시간이 될 수 있다. 26세의 기업 변호사와 52세의 구멍가게 주인도, 청소부와 최고경영자도 유혹을 주고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와는 매우 동떨어진 영역에 있는 타인을 상상하고 사유하며 서로의 매력을 발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린다면 그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본질적이고 흥미로운 질문이자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다. - P103

나에게 착한 거짓말을 한 사람의 상세한 변론을 듣고 있자면, 그 사람이 나를 아랫사람 다루듯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으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짓을 했든 상관없으니 상대방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감정이 진실을 소화하는 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따금 거짓을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에게 이따금 거짓을 말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을 말했다는 사실을 절대 알게 되지 않기를 조용히 소망하자. - P112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혼란스럽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명쾌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자신의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은 상대방의 욕구를 대화 중에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경청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제를 분석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얼마나 신바람이 났는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기대에 부풀어 있는지 그저 표현을 달리하며 반복 진술할 뿐이다. 이때 맞은편에 앉아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상대방은 화자가 미처 보지 못한 문제의 본질을 발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P115

잘 들어주는 사람은 대화 중에 상대방의 말이 모호해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상대를 책망하지도 보채지도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보편타당한 문제로 보기 때문에 진정한 친구라면 선명하게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는다. 자꾸 짜증이 치솟거나 혹은 가슴이 설렐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마음을 들여다보지만, 그저 언저리에 머물 뿐 그 핵심에 이르지 못하기 일쑤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이럴 때 문제를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더 깊이 문제를 들여다보라고 옆에서 격려하는 일이 얼마나 유익한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섣부르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람보다는 그저 "더 얘기해줘"라는 마법 같은 한마디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 P116

잘 들어주는 사람은 훈계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아무리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도 여간해서는 깜짝 놀라거나 경악할 일이 없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욕망을 말해도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없다. 이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내가 무시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아무리 우울하고 괴로워도 남에게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이 낙오자나 변태 같은 기분이 든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기 때문이다. - P119

잘 들어주는 사람은 나의 약한 모습을 보아도 이를 실패의 신호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들은 내가 위험하거나 연약한 면모를 드러내도 그 모습을 꺼리지 않고 따뜻하게 반긴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좌절한다. ‘나만큼 운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큼 이상한 사람이 있을까, 나만큼 능력 없는 사람은 없겠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경청하는 사람은 스스로 비정상이라고 고민하는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의 약한 모습을 고백함으로써 인간이란 본래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알쏭달쏭한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다. - P120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책임감도 있고 논리적이며, 자기혐오나 강박증을 보이는 사람도 없고, 배우자와 자기 인생에 별 불만 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듯이 보인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인생이나 자아와 비교해보면 그들과 나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자아를 형성하고 나이를 먹게 되면 내 안에 심히 두렵고 참혹한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충동적이고 방탕한지, 얼마나 가식적이고 치사하고 불안정하고 유별난지 알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내면의 모습과 다른 사람이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 사이에 놓인 틈을 보게 되면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어째서 나는 저들과 달리 이토록 이상해졌는지, 내 삶은 어째서 이토록 힘든지, 내 성격은 왜 이토록 삐뚫어졌는지 고민에 싸인다.
다들 멀쩡한데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고립감은 마음이 닫힌 사람을 만나게 되면 더욱 커진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사회 곳곳에서 만난다. 마음이 닫힌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대체로 호의를 품고 사람을 대하지만, 줄곧 상대방을 예의주시하면서 혹시라도 이상한 구석이 감지되면 언제든 흠을 잡아 멀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반감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특히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면)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감추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로써 자신의 평판은 지키겠지만 마음속 깊은 데서 느끼는 고립감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무척 드물긴 해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대체로 상대방을 긍정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마음이 열린 사람‘으로 높이 평가한다. 인간이란 본래 부도덕하고 순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는 광기를 보이는 존재라고 전제하기에 이들은 누군가에게서 이상과 동떨어진 면모를 본다고 해도 깜짝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이들은 인류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든 당연히 야성적 충동에 이끌려 비도덕적인 행위도 저지르고 때로는 가슴 치고 후회할 일도 하며 살았으리라고 전제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해도 나에게 어떤 고민이 있을지 이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과 내밀한 모습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음을 이들은 순순히 인정한다. 이들이 보기에 정상적인 사람이 있다면 아직 자기가 잘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상대방이 마음에 무엇을 감추고 있을지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면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사이에는 대부분 거대한 틈이 안전하게 놓여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대부분 현실에서는 실행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것만으로는 나 자신이나 사회 질서에도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음을 이들은 잘 안다. 우리는 때로 경쟁자에게 어떻게 응수해야 속이 시원할지 궁리하고, 이것저것 다 버리고 세상과 어떻게 작별할지(그러면 세상이 이 사건을 얼마나 슬퍼할지) 계획을 세우며, 모든 문명사회의 규범을 거스르는 섬뜩한 성적 판타지를 그리며 즐겁게 지내곤 한다. 하지만 마음이 열린 사람은 이 모든 공상이 실제로 벌어질 일의 서곡이 아니라 그 대안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과는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생각들을 꺼내놓고 함께 살펴볼 수도 있고 함께 웃어넘길 수도 있다.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치며 날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생각이나 욕망을 누군가 앞에서 들춘다고 해서 그런 욕망이 더 나빠질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런 생각과 욕망을 잠재우고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킬 빌미가 내 안에 있다고 해서 선량함과 겸손, 자비심 같은 미덕이 동시에 공존할 가능성까지 배제하지 않는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그랬듯이 ‘죄‘와 ‘죄인‘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들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려고 애쓴다. 우리 안에 감추어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에서 도움을 받고, 관심을 받으며, 우정을 나눌 권리마저 영영 손실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잘 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자신의 바람과는 별개로, 좋은 사람이라도 별로 착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도 자꾸 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고맙게도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누군가 저지른 악행을 접할 때도 그 사람을 혹독하게 판단하지 않는다. 이들이 관용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개선하는 방식을 놓고 나름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냉혹한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용서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마음이 닫힌 사람도 인간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이들은 비난과 굴욕감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깨달을 때라야 비로소 변화의 길로 들어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기를 비하하는 이 감정이 매우 가혹할 수 있고, 자기 행동을 개선하는 효과도 미미하다는 데 있다. 자기를 비하하는 감정에 빠지게 되면 의지력이 심각하게 약해져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해져서 결국 영혼이 피폐해지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과 열등함에 혐오감이 생기면 사람들은 이 끔찍한 감정에서 벗어나고자 방종과 방탕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누군가의 어두운 그림자를 목격하고 나면 악감정을 드러내고 침묵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자기가 앞장서서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위로받거나 구원받을 길이 없는 세상을 구축하게 된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대다수 현대인이 이미 충분히 자기를 비판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더 격렬하고 혹독하게 그들을 정죄할 까닭이 없다. 내 안에 불순한 자아가 기거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에게 절실한 일은 용기를 가지도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낯설고 거친 상대방 내면의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조언하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자기 안의 고결한 자아를 격려하고 나약한 자아를 극복하려면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이들은 모범 답안을 제시한다. 어째서 우리가 마음이 열린 사람을 친구로 두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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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권력은 자신에 대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항은 이미 그 권력이 약화되는 순간에 일어난다. 권력자가 무자비한 폭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의 권력 기반은 이미 허약해져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강력한 권력자는 권력을 펼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폭력과 혼란은 포괄적인 권력이 부재하는 곳에서, 권력의 담지자여야 할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심급과 기관이 붕괴하는 곳에서 확산되는 것이다. 긍정적 형태로서의 권력은 형성하고 산출해내며 질서를 부여한다. 권력은 폭력과는 반대로 생산적이다. 권력은 혼란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 - P6

권력이 반드시 강제라는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권력자에 대립적인 의지가 생겨나 그에 맞서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그 권력이 나약해졌다는 증거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권력은 이미 약화된 권력이다. - P14

강제로서의 권력이라는 모델은 권력의 복합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강제로서의 권력은 타자의 의지에 대항해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의 매개 수준은 매우 낮다. 여기서 에고와 타자는 서로에 대해 적대적 관계에 놓이며, 에고는 타자의 영혼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매개 수준이 높은 권력은 타자가 하려는 행동에 맞서는 권력이 아니라 그 타자로부터 솟아나 작용하는 권력이다. 더 강한 권력은 타자의 미래를 봉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형성해준다. 그러한 권력은 타자의 특정 행동에 맞서려는 대신, 타자의 행동반경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써 부정적인 제재 없이도 타자가 자발적으로 에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게 한다. 이를 통해 아무런 폭력 행사 없이 에고는 타자의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 P18

그에 반해 생명 없는 사물은 응답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존재가 특별한 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외적 원인을 중단시키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전환시키며, 그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게 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살아 있는 존재가 먹이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서 그 먹이가 생명의 원인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원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것은 권력을 통해 외적인 것을 특정한 유기체적 과정의 원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유기체적 과정은 외적 원인들을 내부에서 반복하기만 하지 않는다. 그 과정은 살아 있는 존재가 스스로 만들어내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외적인 것에 자립적으로 반응한다. 외적 원인이란 살아 있는 존재에 의해 비로소 원인으로 규정되는, 여러 자극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원인 역시 살아 있는 존재에 의해 결코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하지 않는다. 외적 원인은 내적 결정이나 스스로의 수용 없이는 결코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물체의 운동 에너지가 다른 물체에 전이되듯이 외적인 것이 그대로 내적인 것으로 연장되는 경우는 없다. 인과성이라는 범주는 정신적인 생명체를 묘사하는 데는 더더욱 부적합하다. 정신적 생명체의 복합성은 원인과 결과라는 일선적 관계로만 번역되지 않는 권력 행사의 복잡성을 조건 짓는다. 이 복잡성으로 인해 권력은, 힘 혹은 강함과 그 결과라는 단순 인과성으로 설명되는 물리적 폭력과 구별된다. 물리적 폭력이 갖는 장점이라면 이러한 복잡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다. - P19

권력이 자유를 배제한다는 견해가 고집스럽게 이어지지만,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에고의 권력은 타자가 자발적으로 에고의 의지를 따르는 관계에서 최고에 도달한다. 에고는 타자를 강제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권력이란 모순어법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가 자유로이 에고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는 자는 폭력이 아니라 타자의 자유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절대적 권력은 자유와 복종이 서로 완전히 합일되는 순간에야 얻을 수 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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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들을 가장 대규모로 모아놓은 빅데이터에도 지식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빅데이터는 상관성을 조사하는 데 사용된다. 상관성이란 A가 발생하면 흔히 B도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상관성은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가장 원시적인 지식의 형태다. 그것은 그렇다. 왜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은 파악하기다. 빅데이터는 이렇게 사유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은 그렇다‘에 만족한다. - P11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만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 전면적인 같게-만들기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소멸을 낳는다. 의미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돈만으로부터는 의미도 정체성도 생기지 않는다. 같은 것의 폭력으로서의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정보와 소통과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타자, 단독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의 부정성을 파괴한다. 같은 것이 같은 것과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 P21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일반적인 교환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단독적인 것을 쓸어 없앤다. 테러리즘은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테러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 죽음은 테러리즘과 함께 시스템 속으로 난폭하게 침입한다. 시스템 안에서 삶은 생산과 성과로 전체화된다. 죽음은 생산의 종말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죽음 예찬과 삶을 그저 삶으로서 무조건 연장하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건강 히스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너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라는 알카에다의 구호는 바로 이런 체계적인 연관을 지적하고 있다. - P22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난 불의를 낳고 있다. 착취와 배제는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는 체제비판적인 혹은 체제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달갑지 않은 인물들로 확인하고 배제하는 "반옵티콘banopticon," 즉 추방의 옵티콘을 구축한다. 판옵티콘은 훈육을 위해 작동하지만, 반옵티콘은 안전을 위해 작동한다. 서양의 복지 지역 안에서조차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철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뤼스토우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시장법칙에만 맡겨지면 사회는 반인간적으로 변하고, 사회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산출하는 "생명정치"로 신자유주의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를 이 생명정치로 교정하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에 좌우되는 대중이 생겨날 것이며, 이들은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세력들에 쉽게 포섭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로 바뀐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오로도 표현된다. 두려움의 사회와 증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 P24

돈은 정체성을 매개해주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정체성을 대체할 수는 있다. 돈은 적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안전하고 평안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돈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정체성도, 안전도 없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상상적인 것으로, 예컨대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주는 국수주의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적을 발명해낸다. 그 한 예가 이슬람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의미를 제공해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상상적인 경로를 통해 면역성을 구축한다. 자신에 대한 걱정이 무의식적으로 적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적은 상상적인 형태 속에서도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척도를, 나 자신의 경계를, 나 자신의 형태를 획득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상상적인 것은 현실 속의 결핍을 보충해준다. 테러리스트들 안에도 상상적인 것이 내재한다. 세계적인 것은 현실적인 폭력을 야기하는 상상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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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 (옮긴이) 장소가 없는, 무소적인)라고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아토포스로서의 타자는 언어를 뒤흔든다. 그에 관하여, 그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수식어는 틀리고, 고통스러우며, 서투르고, 민망하다 [......]." 부단히 동일화시키는 오늘의 문화는 아토포스의 부정성을 용인하지 않는다. 바로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경험 자체가 사라져버린 까닭에,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타자성과 반대로 일종의 긍정성이다.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 P18

우리는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리비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체성에 투입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주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 속을 철벅거리며 나아가다가, 결국 그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 P19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를 확인해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이러한 인정의 논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를 자신의 에고 속에 더 깊이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성공 우울증이 발생한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 P20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 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만한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빛을 탕감받고 속죄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로써 채무의 위기뿐만 아니라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한다. - P31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없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타자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질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이질성을 절대적으로 원초적인 에로스의 관계 속에서, 즉 할 수 있음으로 번역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에로스의 이러한 관계를 실패로 규정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답은 그렇다이다. 만약 우리가 흔히 에로스의 묘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에로스적인 것을 ‘붙잡다‘ ‘가지다‘ ‘알다‘와 같은 말로 규정하려 한다면 말이다. 에로스 속에 그런 것은 전혀 없다. 혹은 에로스는 그 모든 것의 실패다.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의 동의어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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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 없음. 사랑하는 자의 특별한 감수성은 그를 쉽게 상처 입는 존재로 만든다. 가장 깊숙한 내면까지 가장 쉽게 상처를 입는다." - P53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는 본다는 것을 상처로 묘사한다.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 내 자아의 미지의 영역 속으로 침범하도록 온전히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기를 배우는 것은 전혀 적극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은 과정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버려두기 혹은 어떤 사건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말한다. "나는 보기를 배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고, 평소에는 언제나 종착지였던 곳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던 내면을 가지고 있다. 지금 모든 것이 거기로 간다.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 P54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미는 도덕과 개성을 표현할 때만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지금은 개성의 미가 섹시함에 밀려나고 있다. "19세기에는 중산층 여성들이 섹스어필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때 매력적이라고 여겨졌다. 아룸다움은 육체적이자 정신적인 속성으로 이해되었다. [......] 성적인 매력 그 자체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 이 기준은 미뿐만 아니라 도덕적 개성과도 분리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성과 심리적인 특성들을 궁극적으로 섹시함에 종속시킨다. - P73

성적 매력을 몸의 평가기준으로 삼는 것은 해방의 논리만을 일면적으로 좇지 않는다. 몸의 상업화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미용산업은 몸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몸을 착취한다. 소비와 섹시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적인 매력을 근거로 하는 자아는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소비문화는 미를 점점 더 자극과 흥분의 도식에 종속시킨다. 미의 이상은 소비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미의 추가적 가치는 모조리 제거된다. 미는 매끄러워지고, 소비에 종속된다. - P74

섹시함은 도덕미나 개성미에 대립한다. 도덕과 덕성 혹은 개성은 특별한 시간성을 갖고 있다. 이것들은 지속성, 견고성, 불변성에 기초한다. 개성은 원래 낙인찍힌 기호,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의미한다. 불변성이 개성의 주요한 특성이다. 카를 슈미트는 어떠한 고정된 표시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을 개성이 없는 요소라고 불렀다. "바다에는 [......] 어떠한 선도 견고하게 새길 수 없다. [......] 바다는 근원적 의미에서의 개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개성은 ‘심다, 새기다, 인각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diarassein에서 유래되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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