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 정철운은 "맥락 저널리즘은 기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중립적 형식의 객관 저널리즘과 달리 언론인의 주관이 듬뿍 담기게 되는데, 이때 중요한 전제가 기자와 언론사에 대한 ‘신뢰‘다. 신뢰가 없는 맥락 저널리즘은 편파 방송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뉴스룸>은 포맷상 그 어떤 뉴스보다 ‘신뢰받는 언론인‘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최적의 퍼즐은 신뢰도 1위 손석희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JTBC는 2014년 4월 손석희 사장이 직접 진도 팽목항에 내려가 뉴스를 진행하고, 서복현 · 김관 기자를 수개월간 팽목항에 남겨두는 식으로 시청자에게 그들의 ‘진솔한‘ 태도를 강조했다. JTBC ‘사회부 소셜스토리‘는 손석희 사장에게 겨울 장갑과 점퍼를 요구하는 장면을 통해 기자들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 시민들은 뉴스의 관점을 갖고자 할 때 JTBC를 믿고 보게 됐다. ‘신뢰‘다. JTBC <뉴스룸>은 타 방송사에 비해 기자 개인의 브랜드를 키우는 데도 적극적이다. 과거 ‘팩트체크‘의 김필규 기자를 비롯해 서복현 · 심수미 기자 등 여러 기자들은 생방송에서 손석희 앵커와 마주하며 성장한다. 이는 BBC를 비롯한 전통의 공영방송 뉴스가 신뢰도를 높여 온 과정과도 유사하다. 예컨대 이 뉴스에서 이 기자가 등장하면, 시청자는 뉴스를 보기 전부터 뉴스를 신뢰하게 되는 식이다." - P242

손석희의 저널리즘적 의미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괴리를 돌파해냈다는 점에도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저널리즘 학자가 강단에서 저널리즘의 바람직한 방향과 내용에 대해 말하기는 쉽다. 그 누구도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 학자로서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실천은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런데 손석희는 그 두 세계를 연결하는 데에 적잖은 성공을 거두었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 P243

"기자들이 청와대의 권위에 주눅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그건 예의도 질서도 아닌 직무유기일 뿐이다. 어느 취재 현장에서도 질문 순서를 짜고 질문 내용을 조율하는 곳은 없다. 질문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듣기만 하는 취재는 다른 취재 현장에서도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대본이 없으면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대통령,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려 하는 청와대와 무력하게 청와대의 요구를 따르는 착한 기자들, 이 기묘한 질서가 청와대를 망치고 한국 사회를 이 지경으로 몰고 왔다. 청와대 기자실이 바뀌지 않으면 언제든 이런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 - P251

"많은 사람들은 그가 기자이기에 앞서 하나의 시민이고, 그의 신고는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개인의 결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시민으로서 신고하기로 했다면 보도를 포기했어야 했다. 그리고 만약 보도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관찰자로 남았어야 했다. 그게 보도 윤리다. 그런 게 2017년 언론계에 남아 있다면 말이다."
이어 박상현은 "양심 있는, 행동하는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기자의 역할은 다르다. 특히 자신의 신고로 자신이 속한 언론사의 시청률이 올라간다면 그때부터는 이해의 충돌이라는 심각한 문제마저 낳는다. 신고하고 체포되는 장면까지 방송한 JTBC 보도는 재난 현장에 있다가 갑자기 도와줘야 하는 위치에 처한 기자의 윤리를 논하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명백한 이해의 충돌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P253

『조선일보』 디지털뉴스본부 부본부장 박은주는 「그럼에도, 사악해지지 말자」라는 칼럼에서 "해당 방송사가 ‘보도 윤리를 깼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행위를 일반 원칙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가정은 어떤가. 지난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어느 주택에 숨어 있었다고 치자. 그를 인터뷰하려고 며칠을 기다리던 기자가 다른 곳으로 도주하려는 한씨를 경찰에 신고했다면? 한쪽은 기자를 ‘경찰 프락치‘라고 비난하고, 다른 쪽에서는 ‘현행범을 고발하는 건 시민의 의무‘라고 옹호했을 것이다"며 다음와 같이 말했다.
"그들이 지향한 ‘철학‘을 빼고, 정유라와 한상균의 차이는 뭘까. 한마디로 정유라는 국민 밉상이고, 한상균에겐 지지자가 있다. 니체가 말한 ‘괴물의 심연‘은 언론에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다수가 증오하는 자를 신고하면 선, 좋아하는 사람을 신고하면 악인가. ‘다수‘의 기준은 뭔가.‘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 구글이 이런 모토를 갖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막대한 개인정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닥다리 세대에 속하는 기자는 언론이 구글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많은 국민은 언론에 악마도, 괴물도, 천사도, 보안관도 되지 말고, 그저 ‘잘 닦은 거울‘로 남을 것을 요구한다고 믿는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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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이 전환될 때 정치적 차원에서 가장 큰 비용과 고통은 정적의 극렬한 반대다.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추진한 ‘뉴딜 정책‘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안철수에게 루스벨트의 현란한 정치력은 없다. 물론 다른 정치인 대선 후보들 또한 그런 역량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니 안철수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안철수에겐 패러다임 전환을 추진할 수 있는 독보적인 강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분노하는 강남 좌파‘라는 장점이다.
"안철수 원장이 지난해 국회에서 강연을 했다. 끝날 때쯤 미국 실리콘밸리 얘기를 하다 우리 벤처업계엔 사기꾼이 많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사기꾼들은 다 사형시켜야 한다고 했다. 안철수 교수 하면 좋은 사람이 아닌가? 컴퓨터 백신도 만들고 정의로운 사람인데, 또 굉장히 분노와 증오가 많은 것 같았다."
2012년 4월 28일 새누리당 의원 정몽준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다른 정치인들이 "사형" 운운했더라면 논란이 됐겠지만, 안철수는 다르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별 문제될 게 없다. 오히려 그의 개혁 의지가 확고 · 단호하다는 증거로 여겨질 것이다.
안철수는 ‘분노하는 강남 좌파‘이기 때문이다. 이 ‘강남 좌파‘라는 말이 적잖은 오해를 낳으니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안철수가 왜 좌파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안철수는 "최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상류계급"이면서도 "계층적 기반은 99퍼센트에 속하는 중소기업가, 자영업자, 대학생, 노동자, 비정규직, 서민"이기에, 상대적 의미로 이해하면 펄쩍 뛸 일은 아니다. - P195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은 강남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것들은 ‘합리적 주장‘, ‘상대에 대한 배려‘, ‘다양성의 인정‘, ‘닮고 싶은 매력‘, ‘촌스럽지 않음‘, ‘글로벌 경쟁력‘ 등이라면서, 이를 안철수의 화려한 스펙, 경제적 여유,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화법 등과 연결 지었다. "왜 대중은 이렇게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강남성을 가진 엘리트들에게 열광할까요? 우선 시대가 변했어요. 지금 이 시대 시민의 정체성은 ‘소비자‘로 규정됩니다. 이들은 세상사를 다른 무엇보다도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살핍니다." - P196

"20세기는 카리스마를 갖고 외향적 성격에, 목소리 큰 사람이 특정한 위치에 올랐어요. 그 위치에는 인사권과 돈이 부여됐고 그것을 휘둘러서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21세기는 일반 대중이 리더를 무조건 따라가지 않아요. 탈권위주의 시대가 되면서 지금은 대중이 리더에게 리더십을 부여하지요. 게다가 대중이 리더에게 원하고 갈망하는 자질이 더 중요해요. 현재 대중이 원하는 리더십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 그리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에요.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해요."
안철수의 동지인 박경철은 "우리 사회는 선배 세대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힘든 시기를 넘어왔고 이 시대는 대중을 이끌고 ‘나를 따르라‘를 외치는 리더십이 가장 효율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나와 함께‘라고 말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의 생각과 후배 세대들의 생각이 큰 괴리를 보이는 지점이고 쉽게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다. 기성세대의 리더십이 이끌고 당기는 계몽주의적 리더십이었다면 앞으로 필요한 리더십은 밀어주고 어깨를 내어주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는 리더십이다." - P200

가혹한 현실을 피하고 유쾌한 환상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말만 앞서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주로 증오의 담론을 구사한다. 증오의 담론은 면책 심리와 친화적이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솔 알린스키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은 채 ‘말로만 하는 급진주의자‘들을 가장 경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로만 하는 구두선口頭禪식 급진주의자란 낡아버린 옛 단어나 구호를 사용하고 경찰을 ‘돼지‘라든지 ‘백인 파시스트 인종차별주의자‘ 혹은 ‘쌍놈‘이라고 부르는 등의 방식으로 오히려 자신을 정형화시킴으로써 남들이 ‘아, 뭐 쟤는 그냥 저런 애‘라고 하는 말로 대응하고는 즉시 돌아서게끔 만들어버리는 사람이다. 의사소통하는 기술을 이해하지 못한 젊은 활동가들의 실패는 처참했다. 의사소통은 청중의 경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타인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개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해만 있었어도……." - P211

2011년 1월에 출간된 『정치의 발견』에서 박상훈은 알린스키론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한다. 가장 인상적인 한 대목을 소개한다. 박상훈은 "일부 진보파들이 보이는 가장 나쁜 습속은 ‘분노는 나의 힘!‘을 외치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했다는 식의 행태가 아닌가 한다. 그들은 화를 내고 세상을 탓하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대안을 만들고 꾸준히 실천하는 노력은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끊임없이 화를 낼 이유를 찾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며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알린스키의 말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한때 나는 조직가가 필요로 하는 기본적 자질은 불의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분노할 줄 아는 것이라 믿었던 적이 있다. 이제 나는 분노가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조직가들이 계속 조직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주는 힘의 연료일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수단과 활동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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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 여가사회는 특수한 시간적 양상을 나타낸다. 대대적인 생산성의 증가 덕택에 남아돌아가게 된 시간은 즉흥적이고 남는 것 없는 휘발성 사건과 체험으로 채워지고 있다. 시간을 지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 모든 것이 가속화되는 듯한 인상이 생겨난다. 소비와 지속성은 상반적이다. 소비재는 지속을 알지 못한다. 소비재는 파괴를 구성적 요소로서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사물의 등장과 파괴의 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성장을 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에 따라 사물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되고 소비되기에 이른다. 소비의 강제는 생산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다. 경제 성장은 사물의 빠른 소모와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이 갑자기 사물들을 잘 보존하고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사물들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성장을 추구하는 경제는 당장 쓰러져버릴 것이다. - P149

잘 알려진 대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삶과 죽음을 둘러싼 싸움을 묘사한다. 이 싸움의 끝에서 한편은 노예가 되고 다른 편은 주인이 되어 전자가 후자를 위해 일하게 된다. 헤겔의 테제에 따르면 장래의 노예로 하여금 타인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그는 죽음보다는 복종을 택하는 것이다. 그가 생존하려고 아둥바둥 매달려 있다면, 주인은 단순한 생존보다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 주인은 권력과 자유를 추구한다. 노예와는 반대로, 주인은 생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정립한다. 그는 상대방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전체로 만든다. 이제 노예가 된 자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기에, 주인도 자아도, 그의 권력도 제한하지 못한다. 주인은 노예를 통해 자신을 연장한다. 노예는 주인의 자아를 위해 자신의 자아를 포기한다. 그리하여 주인은 노예 안에서 아무런 낯선 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연속성이 주인의 권력과 자유를 만들어낸다. - P152

권력의 변증법이기도 한 노동의 변증법의 요체는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 억지로 일을 하던 노예가 바로 이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자유의 이념에 도달한다는 데 있다. 노예는 사물을 제작하는 노동의 과정에서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고, 이로써 자연에 자기 자신을 각인한다. 제작된 물건은 노예 자신의 형상이다. 그렇게 해서 노예는 사물 속에 자신을 연장시킨다. 그는 자신에게 자연을 예속시킨다. 처음에 자연은 저항하지만, 노예는 결국 저항을 깨뜨리고 자연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노예는 한때 단순한 생존을 위해 주인에게 굴종하며 일하게 되었지만, 이제 노동은 그런 단순한 생존과 구별되는 권력과 자유의 관념을 전해준다. 노동은 그를 "형성"한다. 노동은 의식 형성의 매체이다. 노동은 그에게 자유의 이념을 전달하며, 그는 역사의 과정에서 계급투쟁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이러한 자유의 이념을 실현할 것이다. - P152

그들은 사색적 삶에 접근하지 못한다. 아렌트 역시 이 부분에서 현저한 모순점을 발견한다. "마르크스는 사상의 모든 발전 단계에서 인간을 일하는 동물로 정의하는 데서 출발하면서도, 결국 이 일하는 생명체를 하필이면 그가 지닌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인간적인 능력이 쓸모없게 될 어떤 이상적 사회질서로 이끌어가려 했다." - P160

아렌트는 진정 새로운 것이 오직 행동을 향한 단호한 영웅적 주체의 결단에서만 나온다는 잘못된 믿음에 빠져 있다. 그러나 세계를 만들어내고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건들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의 의식적 결단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그런 사건들은 대체로 한가로움의 결과이거나 강요되지 않은 놀이, 자유로운 상상력의 결과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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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흐의 침묵은 우리를 환대하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타인을 경청하는 대신 모든 것을 듣기만 하는 분석가의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손님을 환대하는 경청자는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타인을 해방시켜 자신에게로 오게 한다. 경청만이 치유할 수 있다.
카네티에 따르면 경청자의 침묵은 "작게 들리는 숨소리들에 의해서만 중단된다. 이 숨소리들은 그가 나를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나는 내가 한 문장 한 문장 말할 때마다 어떤 집으로 들어서서 번거롭게 자리를 잡는 것처럼 느낀다." 이 작은 숨소리들은 환대의 표시이며 어떤 판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격려다. 최소한의 반응이다. 완전한 모습을 갖춘 단어와 문장은 이미 하나의 판단일 것이며, 하나의 입장 표명과도 같을 터이기 때문이다. 카네티는 판단 유보와 비슷한 "숨멎기"에 대해 언급한다. 마치 모든 판단이 타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 편견과 다름없다는 듯, 경청자는 판단을 유보한다.
경청의 기술은 호흡의 기술로 수행된다. 타자를 환대하는 영접은 들숨이다. 하지만 이 들숨은 타자를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대신 그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를 보호해준다. 경청자는 자신을 비운다. 그는 무명의 인물이 된다. 이 비어 있음이 경청자의 친절함의 핵심이다. "그는 지긋히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자에 대한 경청자의 책임감 있는 태도는 인내로 표현된다. 인내의 수동성이 경청자의 준칙이다. 경청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타자에게 내맡긴다. 내맡김은 경청자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준칙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을 막는다. 에고는 경청하지 못항다. 경청의 공간은 에고가 보류된 타자의 공명 공간으로서 열린다. 나르시시즘적인 에고 대신 타자에 대한 몰입, 타자에 대한 욕망이 들어선다. - P110

경청자의 배려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와 반대로 타자를 향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는 자신에 대한 배려다. 카네티는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경청하고자 한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지의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그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데만 모든 행동을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이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의 죽음이다. 나의 말, 나의 판단, 심지어 나의 열광조차도 항상 타자의 무언가를 죽음으로 이끈다. "누구나 말하게 하라. 너는 말하지 말라. 너의 말은 타인으로부터 그들의 형상을 빼앗는다. 너의 열광은 그들의 윤곽을 흐린다. 네가 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너다." - P112

‘좋아요‘의 문화는 모든 형태의 상해와 전율을 거부한다. 그러나 모든 상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모든 깊은 경험, 모든 깊은 인식에는 상해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단순한 ‘좋아요‘는 경험의 절대적 소멸 단계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정신을 두 가지 종류로, 즉 "상처들에 자리를 잡는 정신과 집들에 자리를 잡는 정신"으로 나눈다. 상처는 타자가 입장하는 열린 곳이다. 그것은 또한 타자를 위해 자신을 열어놓는 귀다. 자기 안에서 완전한 안락함을 느끼고 자신을 집에 가두어 놓는 사람은 아무것도 경청할 수 없다. 집은 에고를 타자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준다. 상처는 집의 내면성, 나르시시즘적인 내면성을 찢는다. 그럼으로써 상처는 타자를 위한 열린 문이 된다. - P113

페이스북에서는 우리 모두와 상관이 있고,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문제들이 거론되지 않는다. 여기서 전송되는 것은 무엇보다 광고들이다. 어떤 토론도 필요로 하지 않으묘 오로지 송신자를 알리는 데만 기여할 뿐인 광고들 말이다. 타인에게 걱정과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좋아요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만 만난다. 여기서는 어떠한 담론도 가능하지 않다. 정치적 공간이란 그 안에서 내가 타인들을 만나고,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다. - P115

경청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다. 경청은 타인들의 현존재에 대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경청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매개하여 비로소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듣지만, 타인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언어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은 갈수록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그래서 고통은 자격도 없이 자아와 자아의 심리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만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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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에게 옳은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 것은 아니다. - P114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속임수 감지기가 그냥 작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예민하게 작동한다. - P117

하지만 신비에는 결코 해답이 없다. 신비는 다 풀리는 거라고 억지를 부리면 인생은 더 진부하고 더 희망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신비의 영역은 결코 설명할 수 없으니까. - P118

나를 찾아왔던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호의로 찾아왔던 사람들이다. 또 내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의 행동은 ‘욥의 위안자‘와 같았다. 비참한 처지의 욥을 찾아와 ‘동정‘을 보여 그를 더 깊은 절망으로 빠뜨린 친구들 말이다. - P120

단절은 지옥처럼 끔찍하지만 잘못된 관계보다는 낫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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