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사회, 여가사회는 특수한 시간적 양상을 나타낸다. 대대적인 생산성의 증가 덕택에 남아돌아가게 된 시간은 즉흥적이고 남는 것 없는 휘발성 사건과 체험으로 채워지고 있다. 시간을 지속적으로 묶어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시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 인상, 모든 것이 가속화되는 듯한 인상이 생겨난다. 소비와 지속성은 상반적이다. 소비재는 지속을 알지 못한다. 소비재는 파괴를 구성적 요소로서 자기 안에 품고 있다. 사물의 등장과 파괴의 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성장을 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지상명령에 따라 사물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생산되고 소비되기에 이른다. 소비의 강제는 생산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다. 경제 성장은 사물의 빠른 소모와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이 갑자기 사물들을 잘 보존하고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사물들을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성장을 추구하는 경제는 당장 쓰러져버릴 것이다. - P149
잘 알려진 대로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삶과 죽음을 둘러싼 싸움을 묘사한다. 이 싸움의 끝에서 한편은 노예가 되고 다른 편은 주인이 되어 전자가 후자를 위해 일하게 된다. 헤겔의 테제에 따르면 장래의 노예로 하여금 타인에게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다. 그는 죽음보다는 복종을 택하는 것이다. 그가 생존하려고 아둥바둥 매달려 있다면, 주인은 단순한 생존보다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 주인은 권력과 자유를 추구한다. 노예와는 반대로, 주인은 생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정립한다. 그는 상대방을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전체로 만든다. 이제 노예가 된 자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기에, 주인도 자아도, 그의 권력도 제한하지 못한다. 주인은 노예를 통해 자신을 연장한다. 노예는 주인의 자아를 위해 자신의 자아를 포기한다. 그리하여 주인은 노예 안에서 아무런 낯선 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연속성이 주인의 권력과 자유를 만들어낸다. - P152
권력의 변증법이기도 한 노동의 변증법의 요체는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 억지로 일을 하던 노예가 바로 이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자유의 이념에 도달한다는 데 있다. 노예는 사물을 제작하는 노동의 과정에서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고, 이로써 자연에 자기 자신을 각인한다. 제작된 물건은 노예 자신의 형상이다. 그렇게 해서 노예는 사물 속에 자신을 연장시킨다. 그는 자신에게 자연을 예속시킨다. 처음에 자연은 저항하지만, 노예는 결국 저항을 깨뜨리고 자연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노예는 한때 단순한 생존을 위해 주인에게 굴종하며 일하게 되었지만, 이제 노동은 그런 단순한 생존과 구별되는 권력과 자유의 관념을 전해준다. 노동은 그를 "형성"한다. 노동은 의식 형성의 매체이다. 노동은 그에게 자유의 이념을 전달하며, 그는 역사의 과정에서 계급투쟁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이러한 자유의 이념을 실현할 것이다. - P152
그들은 사색적 삶에 접근하지 못한다. 아렌트 역시 이 부분에서 현저한 모순점을 발견한다. "마르크스는 사상의 모든 발전 단계에서 인간을 일하는 동물로 정의하는 데서 출발하면서도, 결국 이 일하는 생명체를 하필이면 그가 지닌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인간적인 능력이 쓸모없게 될 어떤 이상적 사회질서로 이끌어가려 했다." - P160
아렌트는 진정 새로운 것이 오직 행동을 향한 단호한 영웅적 주체의 결단에서만 나온다는 잘못된 믿음에 빠져 있다. 그러나 세계를 만들어내고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건들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의 의식적 결단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그런 사건들은 대체로 한가로움의 결과이거나 강요되지 않은 놀이, 자유로운 상상력의 결과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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