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에 불(火)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불이 많은 팔자의 공통점은 말을 잘한다는 점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 들어맞는 말을 하고, 유머가 있고, 말을 짧게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말을 길게 하는 스타일들은 불이 없는 경우가 많다. ‘젖은 장작 팔자’가 말을 길게 한다. 불이 많으면 성질 급해서 결론부터 말하는 직선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돌아가신 강원룡(1917~2006) 목사가 불이 많은 팔자였다. 그가 생전에 써놓은 자서전 《빈들에서》를 보니 생년월시가 나와 있었다. 만세력을 펴놓고 팔자를 조합해보니 불이 많은 화火 체질이었다. 그는 웅변가이기도 했다. 타고난 구변口辯에 신학적神學的 내공이 뒷받침되니까 상대방을 설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만약 강 목사가 이북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남에서 태어났더라면 대권에도 도전해 성공했을지 모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불이 많은 팔자였다. 달변가였다. 참모들이 미리 써준 원고를 무시하고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해 버리는 습관이 있을 정도였다. 최근 탄핵정국에서 ‘정치 워딩’의 묘미를 보여준 박지원 대표도 팔자를 보니 화 체질이었다. 여름에 태어난 데다가 천간天干에 불을 상징하는 병丙과 정丁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정치권에서 주목 받는 이재명 전 성남시장도 짐작건대 화 체질일 가능성이 높다.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여 붙은 ‘사이다’라는 별명이 불꽃 튀는 ‘스파크 체질’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도 불이 치성熾盛한 팔자다. 여름에 태어난 데다가 병丙과 정丁이 팔자의 천간天干에 모두 떠 있다. 병은 태양이고 정은 달이다. 병이 합리적 사고라고 한다면 정은 종교적 사유를 가리킨다. 낮에는 태양이 뜨고 밤에는 달이 뜬다. 밤낮으로 머리가 돌아간다는 의미다. 밤낮으로 밀린 원고 쓸 궁리만 하고 있다. 밤낮으로 돌아가면 머리가 피곤하다.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이 많은 팔자는 불을 빼내는 일이 관건이다. 팔자의 요체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화中和’에 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과불급過不及은 질병으로 드러난다. 대인관계에서도 원만하지 않다. - P21

불을 어떻게 빼낼 것인가? 플러스도 있지만 마이너스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자기체질의 약점을 알고 이를 보완하는 방법을 일찍 찾아내면 질병과 운세를 보강할 수 있고, 보완하는 방법과 처방을 모르고 멍청하게 살면 결국 고생만 몽땅 하면서 수업료를 과다 지불하기 마련이다. 처방은 음식이 될 수도 있고, 약물이 될 수도 있으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어떤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불이 많으면 물이 있는 장소에 거주하면 아무래도 도움이 된다.
30대 중반에 충남과 전북에 걸쳐 있는 대둔산(878미터)에 자주 갔다. 깎아지른 바위절 23 벽이 많은 악산岳山이다. 자기가 처한 상황 따라, 나이대에 따라 가게 되는 산도 각기 다르다. 이때는 산이 나를 불렀다. 돈도 없고 비전도 없는데 처자식은 거느린 지방대학 시간강사 시절이었다. 마음이 허하고 고독하니까 산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인간은 고독해야 성찰이 온다. 돈 있고 배부르면 주색잡기酒色雜技가 생각나지만 춥고 배고프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 굶주리고 추울 때일수록 도를 구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까.
어느 날 대둔산의 바위절벽에 혼자 앉아 도시락을 먹고 터덜터덜 내려오다가 한 암자 24 에 들렀다. 암자에는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공양주 보살이 있었는데, 내 팔자를 물어보더니만 대뜸 "화치승룡火熾乘龍이 되었네"라고 한마디 뱉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나의 뇌리 속에는 허름한 잿빛 보살 바지를 입은 아주머니가 던진 ‘화치승룡’이라는 단어가 박혔다. 나는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한문으로 된 고사성어를 한 번 들으면 잘 안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집에 와서 바로 이 단어를 찾아보니 《적천수滴天髓》에 나오는 표현이었다. 《적천수》는 사주명리학의 고전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일급 참모가 유백온이라는 인물인데, 이 유백온이 저술한 책이다. 중국에서 역대 최고의 전략가 세 명을 꼽으라면 장량·제갈공명·유백온을 들 만큼 유백온은 급수가 높은 인물이다.
《적천수》에 보면 ‘화치승룡火熾乘龍 수탕기호水蕩騎虎’라는 대목이 나온다. ‘불이 치성하면 용을 타야 하고, 물이 흘러넘치면 호랑이를 타야 한다.’ 용은 물에서 노는 동물이고, 호랑이는 불을 상징한다. 십이지로 보면 용은 진辰이고, 호랑이는 인寅이다. 불이 많은 팔자라도 여덟 글자 가운데 진辰이 하나라도 들어 있으면 괜찮고, 물이 흘러넘치는 팔자라도 인寅이 들어 있으면 보강이 된다는 뜻이다. 화가 많아도 진辰이 있으면 화기를 빼준다. 불이 많을 때는 물로 불을 제압하는 방법보다는 진으로 빼주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화생토火生土의 원리다. 토를 보면 화는 자기 에너지를 주고 싶어 한다.
진辰은 동물로 보면 용이지만, 오행으로 분류하면 토土다. 물이 많은 진흙을 의미한다. 질척질척한 땅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이게 논(畓)을 가리킨다. 벼농사를 짓는 논은 물을 대기 때문에 질퍽질퍽한 땅이다. 진辰은 바로 논두렁이다. 이를 알고부터 이사할 때 ‘주변에 논이 많은 들판 지역이 어디 없나.’를 늘 물색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익산의 아파트는 주변이 온통 들판이다. 마음 먹고 네댓 시간을 걸어도 다 걸을 수 없는 넓이다. 논두렁길을 한 시간 넘게 걸어가면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어려 있는 미륵사지彌勒 25 寺址가 나온다.
나는 시간만 나면 논두렁길을 걷는다. 취미이다. 보통 하루에 두 시간 가까이 걷는다. 칼럼을 쓰기 전에는 반드시 논두렁 길을 걷는다. 한시간 넘게 걸어야만 효과가 있다. 효과라는 것은 생각이 정리된다는 뜻이다. 한 시간 넘어가면서부터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부분이 기승전결로 정리가 된다. 두 시간 정도 걸으면 군더더기가 거의 제거되고 칼럼 원고의 덩어리만 남게 된다. 모내기하기 전에 양수기로 논에 물을 대는 장면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러다가 이앙기로 푸릇푸릇한 모를 심는 계절이 오면 논두렁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모내는 장면을 구경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10년 넘게 내가 쓴 글의 모든 원료는 논두렁에서 나왔다. 농부는 논에서 벼를 수확했지만 나는 논에서 글을 수확한 셈이다. 화기가 머리로 치솟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리지 않고 이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논두렁 덕택이다. 논두렁이 나를 살렸다. ‘화치승룡’의 용은 논두렁에 있었다. - P22

세상을 살면서 긴장(緊張)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하게 되지만, 이완(弛緩)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 신경 쓰는 게 다 긴장이고 스트레스가 다 긴장이다. 나도 처음에는 쌓인 긴장을 푸는 이완을 쉬운 걸로 알았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깜냥에 이완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긴장을 풀어주는 전문가는 누구인가? 물(水)과 불(火)이다. 물은 가라앉는 성질이 있고, 불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물은 머리에 불이 타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물을 가까이하고 호수·강·바닷가에 거처하면 재미를 본다. 나는 물이 질퍽질퍽한 논두렁을 많이 걸었다. ‘지자요수(知者樂水)’가 이 말이다.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물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뜻이다. 고스톱에서 패가 좋지 않은데도 흥분하여 ‘열고’를 외치면 결국 돈 잃는다. 열을 내리는 것이 관건이다. 열을 내리면 차분해지기 마련이고, 차분하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물소리를 들어야 번뇌가 사라진다고 되어 있다. 물소리가 잘 들리는 지점은 삶의 번뇌가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면 좋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은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게 된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번뇌도 시간이 지나면 떠내려간다는 이치를 깨우친다. 언젠가 쌍계사 불일암에서 하룻밤 자면서 밤새도록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꿈결에 들리는 물소리는 자장가처럼 편안했다.
《수심결(修心訣)》 첫 대목이다. ‘삼계열뇌三界熱惱가 유여화택猶如火宅이어늘.’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불난 집처럼 불타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이 뜨거운 고민에 싸여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번뇌를 식혀야 한다. 물로 열을 내린다.
그렇다면 불(火)은 언제 필요한가? 이 세상에 물 대포가 있다면 불 대포도 있다. 수화쌍포(水火雙砲)를 가동시켜야 한다. 불이 필요한 경우는 우울증이다. 세상사 모든 게 시들해진다. 마음이 허(虛)하고 낙(樂)이 없다. 가슴속에는 온갖 근심 걱정만 가득하다. 아무리 하지 않 37 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머리에 가득 차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불을 봐야 한다. ‘관화유술觀火有術 필관기아궁必觀其亞宮’이다.
불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는데, 아궁이에서 장작불 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아궁이 앞에다가 엉덩이를 받칠 만한 나무토막을 장만해놓고 여기에 편히 앉아 장작불을 때는 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이 아닌가 싶다. 근심 걱정이 가슴에서 올라오면 그 걱정거리를 장작불에 하나씩 내던진다. 하나 던지면 걱정이 또 올라온다. 그러면 그 걱정을 또 불 속에 던진다. 걱정거리가 1,000개쯤 되면 그 1,000개를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오는 족족 장작불에 내던지면 된다. 한 500개쯤 던지다 보면 시커먼 걱정덩어리가 새빨간 장작불에 타는 모습이 보인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제아무리 단단한 걱정거리도 불에 들어가면 재가 된다. 재가 되면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바람에 날아가는 재를 어떻게 손으로 잡을 수 있으며, 눈으로 추적할 수 있겠는가.
아궁이 앞에 앉아서 한 시간쯤 불을 때다 보면 아랫도리 쪽이 따끈해지다가 다음에는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이마 쪽에도 따뜻한 기운이 충만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빵빵한 기운이 몸에 차오른다. 그다음에는 마음이 환해진다. 근심 걱정을 견딜 만한 튼튼한 방패막이가 생겼다는 느낌이 온다. 조선시대 도공들은 하층민이었고, 노동 강도가 아주 심한 직업이었다. 그런 도공들이 피로를 푸는 방법이 바로 불을 때는 일이었다. 가마에 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집어넣고 4~5일 동안 계속 불을 때며 고단함과 근심을 모두 날려버렸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데 있어서도 어떤 나무를 태우느냐에 따라 기분이 다를 수 있다. 소나무를 태울 때 나는 냄새와 편백나무를 태울 때 나는 냄새가 다르다. 나무 타는 연기와 냄새에 독특한 치유효과가 있다. 나무 타는 냄새를 맡으면 어렸을 적에 외갓집에 가서 맡았던 냄새가 생각난다. 자신이 가장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던 시절이 연상된다. 냄새는 강 38 력한 회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소나무 장작 타는 냄새가 취향에 맞는다. 그다음은 편백나무다. 내가 글을 쓸 때 거주하는 황토집인 휴휴산방(休休山房)은 전남 장성의 축령산 자락에 있는데, 수백만 평이 60년 가까이 조성한 편백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간벌한 편백나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방 두 개 중 하나는 방바닥에 편백을 깔아 놓았다. 방에 들어가 편백 냄새를 맡으면 정신이 상쾌해지고, 아궁이에 편백 장작을 태우면 그 냄새가 신경을 안정시켜 준다.
인간은 원시 시절부터 밤이 되면 동굴에서 장작을 태우던 기억이 유전자에 남아 있을 것이다. 불을 피워 무서운 맹수도 쫓고 고기도 지글지글 굽고 부족이 모여 앉아 노래 부르던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가 조로아스터교(敎)다. 일명 배화교(拜火敎)다. 5,000년이 넘는 역사다.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인 중동의 이란에 가서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방문한 일이 있다. 사원 중심 건물에 신상(神像)이나 어떤 숭배의 조각도 없었다. 건물 가운데 ‘심플하게’ 화로만 하나 놓여 있었다. 가로세로 2미터, 높이 1미터 50센티미터 정도의 화로대(火爐臺)가 있었고, 대 위의 청동화로에서 장작불이 타는 모습을 사방에서 지켜볼 수 있는 구조였다. 밤에는 불씨를 재로 덮어 보관하고 낮에는 활활 불을 태운다. 불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신(神)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은 근심 걱정을 없애주고 우울한 마음에 활기를 준다.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궁이에 불을 땔 때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된다. - P36

악 자가 들어가면 바위가 험하다는 이야기이고, 바위가 험한 산들이 기도발이 잘 받는다. 바위에서 지자기(地磁氣)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기운이 탈진해 힘이 없을 때는 골산으로 가는 게 좋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고 분노심이 일어날 때는 지리산이 효과적이다. 지리산은 따뜻하게 품어주고, 설악산은 기백과 패기를 불어넣어준다. 골산과 육산 두 군데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방법이다. - P99

일본 교토의 ‘철학의 길’도 걸어보았다. 난젠지(南禪寺)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하천 옆을 따라 2.5킬로미터 정도 된다.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사랑한 길이다. 과연 사색의 길이었다. 서양 철학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고유의 철학 이론을 세우려 한 이른바 교 109 토학파(京都學派)가 이 길을 걸으면서 탄생되었다. 걷기는 철학자의 생각의 도구이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인 소요(逍遙)학파도 ‘걷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철학자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생각한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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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건 또 있다. 공동체 안에는 왜 그 같은 지혜가 없는 것일까? 『동의보감』을 리라이팅하면서도 밝혔듯이, 공동체는 몸과 몸이 직접 부딪히는 현장이다. 몸에 관한 앎, 운명에 대한 지혜가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헌데 왜 공동체는 명분과 이념…… 그리고 논리적 공통성만 있으면 된다고 간주하는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정서적 균열과 관련되어 있다. 감정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 13 다. 많은 경우, 명분과 논리는 감정의 ‘얼굴마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어울림과 맞섬이 사람들의 동선과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곧 인생이고 운명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야말로 운명에 관한 비전이 꼭 필요한 장소가 아닐까? 하나 더. 우리가 배운 그 많은 지식과 정보는 왜 이런 식의 예지력이나 운명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 화려한 언설들은 인생의 결정적 국면에선 어쩜 이리도 쓸모가 없는 것일까?
내친 김에 하나 더. 만약 그것이 그토록 ‘유용한’ 것이라면 우리는 왜 그걸 직접!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 P12

다른 한편, 소위 진보적 진영에선 이런 앎에 대해 원초적으로 터부시한다. 비과학적 숙명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어떤 점에서 보면 진보주의가 동양전통사상에 대해선 가장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역학뿐 아니라 유학이나 불교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물론/관념론이라는 이분법적 틀로 사상사를 구획하는 패턴이 여전히 지배적인 것이다. 헌데, 그렇다면 진보의 영역에는 운명이라는 키워드가 불필요한가? 진보단체들이 부딪히는 가장 28 큰 장벽은 더 이상 권력의 탄압이 아니다. 공동체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틈’이다. 뇌과학적으로 보더라도 감정을 주관하는 뇌는 변연계(Limbic System)다. 변연계는 호모 사피엔스 이후 발달한 신피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형성된 구피질에 속한다.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국가간 전쟁처럼 거창한 일을 수행할 때도 ‘빈정’이 상하는 바람에 어느 한쪽에 치명타를 안겨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 역시 좋게 말하면 사랑싸움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감정게임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감정의 회로가 운명 혹은 팔자의 키를 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예컨대 사회를 바꾸기 위해 공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을 한다면 마땅히 그의 내면도 평온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아주 많은 이들이 박탈감과 우울증에 시달린다. 어떤 활동가의 고백이다.

80년대엔 학생운동을 했고, 90년대에 졸업하면서 노동운동을, 중년이 되어선 환경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생협활동을 하고 있어요. 쉬지 않고 운동을 해왔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과 친밀감이 생기질 않을까요? 마음은 늘 급하거나 우울하고…… 몸에는 늘 병을 달고 살아요.

이런 식으로 운동의 가치와 명분이 자신의 몸, 그리고 삶의 현장 29 과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간극을 메우려고 더더욱 헌신적으로 활동을 조직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조증과 울증이 반복된다. 아울러 내적 충만감이나 존중감 또한 점점 더 무너져 간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아프다. 활동과 일상, 명분과 현장, 이 사이에 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이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진보든 혁명이든 별무소용이다. 그때의 진보나 혁명은 오직 물질적 분배, 제도적 서비스, 시스템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아니, 그 이전에 단체와 조직은 진화하는데,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불행해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운동단체들은 이런 문제들과 직접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이건 여성운동이건 실무적 투쟁이 중심이지 인생과 자연, 몸과 우주에 대한 공부를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마치 그것은 노동자나 여성들, 기타 소수자들과는 무관한 것인 양. 또 그런 것을 하면 마치 정치적 의식이 퇴행하기라도 하는 듯이. - P27

이분법의 종말 개와 늑대의 시간

"신새벽 뒷골목에 /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80년대를 풍미했던 절창, 「타는 목마름으로」의 첫소절이다. 신새벽은 ‘아직 동트지 않은’, 밤과 아침 사이의 시간이다. 어둠이 더 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헷갈리는’ 시간은 아니다. 이제 곧 밤이 가고 아침이 올 테니까.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이루어질 테니까. 선과 악, 혁명과 반동, 역사와 심판,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자명한 시절, 그것이 김지하의 ‘신새벽’이었다. 마침내 신새벽이 지나고 동이 터올랐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이 트면서 동시에 운무가 피어오를 줄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ㅡ이것이 소위 근대적(혹은 진보적) 시간관이다. 지구는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동일한 날씨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똑같은 밤도 동일한 낮도 없었던 셈이다. 겨울과 봄도 마찬가지. 우리가 겪는 밤이 어떤 리듬으로 흘러가는지, 우리의 겨울이 어떤 강밀도를 가지고 있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유를 위한 지도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이 담론의 배치 속에선 인간만이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주인은 오직 인간이고, 자연·동물·기후·바 33 람 따위는 다 엑스트라일 뿐이다. 이런 인간중심주의의 장에선 아이러니와 농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장하고 엄숙한 테제와 그 실현을 향한 전진만이 있을 뿐! 그 사유의 길이 곧 이분법이다.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생과 사 등 수많은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에 종속되어 버린다. 하여, 이분법은 선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빈곤하다. "이분법도 그 자체의 불행한 도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능한 모든 의견이 일직선상에 배열되고 그 양극단에 두 가지 반대 의견이 놓여 있다는 도식이다." 물론 대안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직선의 중간에 해당하는 위치, 즉 ‘황금의 중용’을 취"하여 "어딘지 불안스러운 중간에" 던져지는 것이 최선이다. 말이 좋아서 황금이지 실제론 아슬아슬한 중간, 사이비 균형에 불과하다. "나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하나의 직선상에 배치하고, 양극단에 해당하는 입장 대신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그 사이의 중간밖에 없다는 식의 모든 개념적 도식을 단호하게 거부한다."(스티븐 제이 굴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김동광 옮김, 경문북스, 2004, 66쪽) 물론 이분법에 대한 저항은 어렵다. 너무 오랫동안 이분법에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리라. 박노해의 시 「시대고독」은 바로 이런 시대적 징후에 대한 음울한 진단이다.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
선악의 경계가 증발되어 버린 시대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이 경쟁하는 시대
합법화된 민주화 시대의 저항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
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

옳음도 거짓도 다수결로 작동되는 시대
진리는 누구의 말에서나 반짝이지만
그것을 살고 실천할 주체가 증발되어 버린 시대
혁명의 전위마저 씨가 말라가는
이 고독한 저항의 시대는

ㅡ박노해, 「시대고독」전문(全文) - P32

그렇다! 바야흐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는, 혹은 개와 늑대를 구별하기 어려운 저물녘의 어스름. 개와 늑대만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차이조차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시간대다. 거의 모든 사건들엔 진(眞)과 망(妄)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겹쳐 있다. 그것은 분명 굴드의 표현대로 양극단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어설픈 타협으로는 불가능한 지대다. 인간이라는 주체, 계급적 적대감이 무너지면서 선악시비의 자명함이 사라져 버린 탓이다. 그렇다면, 이 운무 속에서의 길찾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운무: 雲霧 명사 구름과 안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 - P35

역학은 어느 한 종교에 부속되는 것이 아니라네. 특별히 공자가 주역을 많이 공부하여 그 원리를 도덕적인 면에서 강조하였을 뿐이지. 공자뿐만 아니라 유·불·선이 다 역학 원리를 응용한 것이네. 주역은 대략 5,000여 년 전 하도와 낙서라는 천출적(天出的)인 원리를 토대로 하여 우주 창조의 근본 원리와 삼라만상이 변화생멸 44 하는 현묘한 진리를 논리적, 수리적, 또는 추상적으로 이야기한 자연과학적 철학이네. (한규성, 『역학원리강화』, 예문지, 1997, 25~27쪽)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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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의 음양으로는 양적이지만 오행적으로는 음적인 사주는 예를 들어 어떤 일을 할 때 매우 빠르고 동적으로 현장에 적응하는 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음적인 금수의 성향으로 인해 조용해지고 정적인 태도로 바뀐다. 간지의 음양으로는 음적이지만 오행적으로 양적인 사주는 현장에선 좀 느리고 조용한 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목화의 역동적인 성향이 드러나면서 거침없고 빠른 태도로 변한다. - P95

같은 오행이 이렇게 많은 점수를 차지할 때는 이 기운을 좀 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행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불균형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음양오행은 순환과 흐름의 유동성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에 따라 길흉을 따진다. 부족한 것보다 넘치는 것이 더 문제다. 이 해당 오행은 평생의 화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P100

화의 열정은 적극적으로 현장을 지배하려고 하며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해 에너지를 강렬하게 사용한다. 그런 양기의 발산력 때문에 다른 오행보다 열정이 더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열정이 대체로 목화 기운에서 발산되는 에너지로 상징되는 것도 양적(陽的) 발산 때문이다. 그런데 열정은 말 그대로 애정을 불태워 열을 발산하는 일이다. 열기는 위로 올라가 자신감을 고양시키고 좀더 항진되면 다혈질적인 성격을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그것은 몸 안의 정기를 태워서 생기는 에너지이므로, 열정은 늘 기운의 소모를 불러온다. 그래서일까. 화기운이 강한 사람은 찐하게 불태워 일하고 나서 픽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 양적으로 항진되면, 그 발화가 강렬할수록 시간 감각이 무너지고 음적인 수렴과 통찰력이 약해진다. 그래서 속도와 강도를 잘 제어하지 못하고 체력이 다하도록 밀어붙이는 것이다. - P114

하지만 분별하고 개념화하려는 시도들은 자칫 강압적이고 배타적인 계몽의 덫에 걸리기 쉽다. 분류는 매우 자의적인 것이다. 그 중에서 계절과 밤낮 등 자연현상과 같은 과학적 분절은 비교적 주관적 편견이 들어갈 여지가 적다. 그러나 선과 악, 좌파와 우파, 로맨스와 불륜을 나누는 것은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기 힘들다. 푸코의 말처럼 우리 사회에는 ‘분할과 배척’의 원리가 존재한다. 자의적인 분류가 권력을 가지면 그 분류에 따라 윤리와 상식이 한정되고, 기준에 합당한 담론 외에는 배척된다. 화의 속성은 이런 딜레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화기운이 강한 사람은 명쾌하게 분류하고 분류된 공식을 당당하게 지켜 낸다. 하지만 그 경계를 신앙적으로 고착화시키면 자칫 경솔하고 교만한 정답(?)을 습관처럼 남발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을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다. 결국 관계가 틀어지고 상처만 남는다.

예(禮)를 화의 속성으로 해석할 때에도 그러한 이중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자는 제후들이 무력을 바탕으로 왕을 자칭하고 나섰던 대혼란기를 무도(無道)의 세계라고 규정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仁)을 내면적 근거로, 예를 형식적 질서로 삼았다. 여기서 예라는 덕목은 혼란과 갈등의 어둠을 밝혀 줄 하나의 빛이다. 그러나 다 116 른 제가(諸家)들이 유가를 비판할 때 반드시 근거로 들었던 것도 바로 ‘예’이다. 예컨대 묵가는 유가의 상례(喪禮) 문화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산 사람의 활동을 해치는 유해한 풍습이라고 비난하며, 가벼운 장례를 장려했다. 이처럼 예는 질서와 인습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화의 속성도 이와 비슷하다. 화기운이 강한 사람은 대체로 사람들을 잘 환대한다. 모르는 사람에게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예를 잘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 안의 질서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 환대는 끝난다. 레비나스는 초대한 손님만 받아들이는 것은 환대가 아니라고 했다. 조건적 환대는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의 연장일 뿐, 거기에는 타자도 환대도 없다는 것이다. 화기운은 빛을 닮았기 때문에 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미덕도 지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용의 과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자기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거나 배제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그래서 화기운이 강한 사람은 두루 친하지만 정작 서로에게 스며들어 마음을 나눌 상대는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 안의 질서와 윤리의 매뉴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예가 묵은 풍습으로 변하는 경우이며, 타자에게 자기 동일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을 환대라 할 수는 없다. - P115

사주에 화기가 강하다는 것은 이런 양기의 활동력이 강렬하다는 뜻이고, 그런 강렬함은 일, 즉 사회적인 활동에 유리하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일할 기회가 많아지고, 관계와 활동 영역이 확대되며, 배짱도 생긴다.
또 활동이 많아질수록 체력은 빨리 고갈된다. 그러니 양적으로 팽창하는 만큼 음적인 수렴력은 떨어지게 된다. 마무리가 미흡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무리는 체력의 집약적 사용과 깊은 사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화기운을 강렬하게 쓰면 빨리 지치고 사고가 단층적이 된다. 깊은 사고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마무리도 깔끔하지 않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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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상을 소멸하기 위해 삼천배도 하고, 면벽좌선(坐禪)도 하고, 밥을 빌어먹는 구걸행도 한다. 그래도 그게 잘 없어지지 않는다. 면벽좌선 30년 했다고 하는데, 전혀 아상 소멸이 되지 않은 경우를 보기도 했다. 오히려 아상이 더 증장되어 있었다. ‘나 30년 면벽했거든!‘ 하는 자존심만 가득 차 있기가 쉽다. 그 자존심이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든다. 사업을 하면 이 자존심을 죽이는 훈련을 자동적으로 하게 된다.

방 안에는 경상 하나, 책 몇 권, 그리고 차상과 다기(茶器)만놓여 있다. 잡다한 물건이 방안에 없다. 공부가 된 사람은 방안에 물건이 별로 없는 법이다.

영발도사는 가방끈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가방끈이 짧을수록 영발은 길다. 특히 책을 많이 본 책상물림은 절대로 영발도사가 될 수 없다. 먹물은 영발을 파괴하는독극물에 비유될 수 있다. 돼지고기와 새우젓처럼 영발과 먹물은 상극에 해당한다.

재벌 오너를 설득시키기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재벌 오너 정도 되면 그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속임수와 사기 사건, 그리고 배신당하는 경험을 겪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이 이야기하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너 무슨 이야기하나 어디 한 번 볼까‘, ‘어쭈구리 이 친구 제법 말발이 있네‘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수가 많다.

계룡산은 한국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산이다. 특수한 위치란 무엇인가. 무당파의 본산이란 점이다. 한국의 무당들치고 계룡산 싫어하는 사람 없다. 무당들은 모두 계룡산을 신성시한다. 왜 그런가. 먹잘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계룡산의 바위 암봉(岩峰)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이야말로 계룡산의 바위 기운이라 할 수 있다. 계룡산은 거의 통바위산이다. 통바위산일수록 기가 강하다. 대구 팔공산도 온통 암산이라 기가 강한데, 접근성에서 계룡산이 더 우위에 있다. 접근성이란, 주변에 들판이 많다는 점이다. 강경, 논산, 공주 인근에는 평야가 많다. 여기에서 먹을 것이 나온다.

도사 수련이 아니더라도 평상시에 밤이 되면 어두컴컴하게 있는 것이 좋다. 너무 환하면 혼백이 쉬지를 못한다. 쉬지 못하면 정신병이 온다. 20세기는 암이 큰 병이었지만 21세기에는 정신병이 큰 병이다. 정신병은 정신이 쉬지 못해서 오는 병이다. 쉰다는 것은 곧 어두컴컴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저녁에 불을 켜지않고 컴컴하게 있는 것도 양생법의 하나다. 밝은 것만 선호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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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평생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어"라는 말을 많이들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러분도 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정규직 일자리, 살기 좋은 보금자리, 또는 교육 수단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헬렌 레이저,
《밀레니얼은 왜 가난한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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