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건 또 있다. 공동체 안에는 왜 그 같은 지혜가 없는 것일까? 『동의보감』을 리라이팅하면서도 밝혔듯이, 공동체는 몸과 몸이 직접 부딪히는 현장이다. 몸에 관한 앎, 운명에 대한 지혜가 반드시 필요한 곳이다. 헌데 왜 공동체는 명분과 이념…… 그리고 논리적 공통성만 있으면 된다고 간주하는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은 정서적 균열과 관련되어 있다. 감정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 13 다. 많은 경우, 명분과 논리는 감정의 ‘얼굴마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어울림과 맞섬이 사람들의 동선과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곧 인생이고 운명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야말로 운명에 관한 비전이 꼭 필요한 장소가 아닐까? 하나 더. 우리가 배운 그 많은 지식과 정보는 왜 이런 식의 예지력이나 운명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 화려한 언설들은 인생의 결정적 국면에선 어쩜 이리도 쓸모가 없는 것일까?
내친 김에 하나 더. 만약 그것이 그토록 ‘유용한’ 것이라면 우리는 왜 그걸 직접!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 P12

다른 한편, 소위 진보적 진영에선 이런 앎에 대해 원초적으로 터부시한다. 비과학적 숙명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어떤 점에서 보면 진보주의가 동양전통사상에 대해선 가장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역학뿐 아니라 유학이나 불교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물론/관념론이라는 이분법적 틀로 사상사를 구획하는 패턴이 여전히 지배적인 것이다. 헌데, 그렇다면 진보의 영역에는 운명이라는 키워드가 불필요한가? 진보단체들이 부딪히는 가장 28 큰 장벽은 더 이상 권력의 탄압이 아니다. 공동체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틈’이다. 뇌과학적으로 보더라도 감정을 주관하는 뇌는 변연계(Limbic System)다. 변연계는 호모 사피엔스 이후 발달한 신피질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형성된 구피질에 속한다.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국가간 전쟁처럼 거창한 일을 수행할 때도 ‘빈정’이 상하는 바람에 어느 한쪽에 치명타를 안겨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 역시 좋게 말하면 사랑싸움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감정게임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감정의 회로가 운명 혹은 팔자의 키를 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예컨대 사회를 바꾸기 위해 공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을 한다면 마땅히 그의 내면도 평온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아주 많은 이들이 박탈감과 우울증에 시달린다. 어떤 활동가의 고백이다.

80년대엔 학생운동을 했고, 90년대에 졸업하면서 노동운동을, 중년이 되어선 환경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생협활동을 하고 있어요. 쉬지 않고 운동을 해왔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과 친밀감이 생기질 않을까요? 마음은 늘 급하거나 우울하고…… 몸에는 늘 병을 달고 살아요.

이런 식으로 운동의 가치와 명분이 자신의 몸, 그리고 삶의 현장 29 과 동떨어져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간극을 메우려고 더더욱 헌신적으로 활동을 조직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조증과 울증이 반복된다. 아울러 내적 충만감이나 존중감 또한 점점 더 무너져 간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아프다. 활동과 일상, 명분과 현장, 이 사이에 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이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진보든 혁명이든 별무소용이다. 그때의 진보나 혁명은 오직 물질적 분배, 제도적 서비스, 시스템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아니, 그 이전에 단체와 조직은 진화하는데, 거기에 속한 개인들이 불행해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럼에도 운동단체들은 이런 문제들과 직접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이건 여성운동이건 실무적 투쟁이 중심이지 인생과 자연, 몸과 우주에 대한 공부를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마치 그것은 노동자나 여성들, 기타 소수자들과는 무관한 것인 양. 또 그런 것을 하면 마치 정치적 의식이 퇴행하기라도 하는 듯이. - P27

이분법의 종말 개와 늑대의 시간

"신새벽 뒷골목에 /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80년대를 풍미했던 절창, 「타는 목마름으로」의 첫소절이다. 신새벽은 ‘아직 동트지 않은’, 밤과 아침 사이의 시간이다. 어둠이 더 깊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헷갈리는’ 시간은 아니다. 이제 곧 밤이 가고 아침이 올 테니까.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이루어질 테니까. 선과 악, 혁명과 반동, 역사와 심판,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자명한 시절, 그것이 김지하의 ‘신새벽’이었다. 마침내 신새벽이 지나고 동이 터올랐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이 트면서 동시에 운무가 피어오를 줄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ㅡ이것이 소위 근대적(혹은 진보적) 시간관이다. 지구는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동일한 날씨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똑같은 밤도 동일한 낮도 없었던 셈이다. 겨울과 봄도 마찬가지. 우리가 겪는 밤이 어떤 리듬으로 흘러가는지, 우리의 겨울이 어떤 강밀도를 가지고 있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유를 위한 지도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이 담론의 배치 속에선 인간만이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주인은 오직 인간이고, 자연·동물·기후·바 33 람 따위는 다 엑스트라일 뿐이다. 이런 인간중심주의의 장에선 아이러니와 농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장하고 엄숙한 테제와 그 실현을 향한 전진만이 있을 뿐! 그 사유의 길이 곧 이분법이다.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생과 사 등 수많은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에 종속되어 버린다. 하여, 이분법은 선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빈곤하다. "이분법도 그 자체의 불행한 도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능한 모든 의견이 일직선상에 배열되고 그 양극단에 두 가지 반대 의견이 놓여 있다는 도식이다." 물론 대안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직선의 중간에 해당하는 위치, 즉 ‘황금의 중용’을 취"하여 "어딘지 불안스러운 중간에" 던져지는 것이 최선이다. 말이 좋아서 황금이지 실제론 아슬아슬한 중간, 사이비 균형에 불과하다. "나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하나의 직선상에 배치하고, 양극단에 해당하는 입장 대신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그 사이의 중간밖에 없다는 식의 모든 개념적 도식을 단호하게 거부한다."(스티븐 제이 굴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김동광 옮김, 경문북스, 2004, 66쪽) 물론 이분법에 대한 저항은 어렵다. 너무 오랫동안 이분법에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리라. 박노해의 시 「시대고독」은 바로 이런 시대적 징후에 대한 음울한 진단이다.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
선악의 경계가 증발되어 버린 시대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이 경쟁하는 시대
합법화된 민주화 시대의 저항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
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

옳음도 거짓도 다수결로 작동되는 시대
진리는 누구의 말에서나 반짝이지만
그것을 살고 실천할 주체가 증발되어 버린 시대
혁명의 전위마저 씨가 말라가는
이 고독한 저항의 시대는

ㅡ박노해, 「시대고독」전문(全文) - P32

그렇다! 바야흐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는, 혹은 개와 늑대를 구별하기 어려운 저물녘의 어스름. 개와 늑대만이 아니라, 빛과 어둠의 차이조차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시간대다. 거의 모든 사건들엔 진(眞)과 망(妄)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겹쳐 있다. 그것은 분명 굴드의 표현대로 양극단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어설픈 타협으로는 불가능한 지대다. 인간이라는 주체, 계급적 적대감이 무너지면서 선악시비의 자명함이 사라져 버린 탓이다. 그렇다면, 이 운무 속에서의 길찾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운무: 雲霧 명사 구름과 안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 - P35

역학은 어느 한 종교에 부속되는 것이 아니라네. 특별히 공자가 주역을 많이 공부하여 그 원리를 도덕적인 면에서 강조하였을 뿐이지. 공자뿐만 아니라 유·불·선이 다 역학 원리를 응용한 것이네. 주역은 대략 5,000여 년 전 하도와 낙서라는 천출적(天出的)인 원리를 토대로 하여 우주 창조의 근본 원리와 삼라만상이 변화생멸 44 하는 현묘한 진리를 논리적, 수리적, 또는 추상적으로 이야기한 자연과학적 철학이네. (한규성, 『역학원리강화』, 예문지, 1997, 25~27쪽) - P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