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에 불(火)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불이 많은 팔자의 공통점은 말을 잘한다는 점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 들어맞는 말을 하고, 유머가 있고, 말을 짧게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말을 길게 하는 스타일들은 불이 없는 경우가 많다. ‘젖은 장작 팔자’가 말을 길게 한다. 불이 많으면 성질 급해서 결론부터 말하는 직선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돌아가신 강원룡(1917~2006) 목사가 불이 많은 팔자였다. 그가 생전에 써놓은 자서전 《빈들에서》를 보니 생년월시가 나와 있었다. 만세력을 펴놓고 팔자를 조합해보니 불이 많은 화火 체질이었다. 그는 웅변가이기도 했다. 타고난 구변口辯에 신학적神學的 내공이 뒷받침되니까 상대방을 설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만약 강 목사가 이북에서 태어나지 않고 이남에서 태어났더라면 대권에도 도전해 성공했을지 모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불이 많은 팔자였다. 달변가였다. 참모들이 미리 써준 원고를 무시하고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해 버리는 습관이 있을 정도였다. 최근 탄핵정국에서 ‘정치 워딩’의 묘미를 보여준 박지원 대표도 팔자를 보니 화 체질이었다. 여름에 태어난 데다가 천간天干에 불을 상징하는 병丙과 정丁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정치권에서 주목 받는 이재명 전 성남시장도 짐작건대 화 체질일 가능성이 높다.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여 붙은 ‘사이다’라는 별명이 불꽃 튀는 ‘스파크 체질’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도 불이 치성熾盛한 팔자다. 여름에 태어난 데다가 병丙과 정丁이 팔자의 천간天干에 모두 떠 있다. 병은 태양이고 정은 달이다. 병이 합리적 사고라고 한다면 정은 종교적 사유를 가리킨다. 낮에는 태양이 뜨고 밤에는 달이 뜬다. 밤낮으로 머리가 돌아간다는 의미다. 밤낮으로 밀린 원고 쓸 궁리만 하고 있다. 밤낮으로 돌아가면 머리가 피곤하다.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이 많은 팔자는 불을 빼내는 일이 관건이다. 팔자의 요체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화中和’에 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과불급過不及은 질병으로 드러난다. 대인관계에서도 원만하지 않다. - P21

불을 어떻게 빼낼 것인가? 플러스도 있지만 마이너스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자기체질의 약점을 알고 이를 보완하는 방법을 일찍 찾아내면 질병과 운세를 보강할 수 있고, 보완하는 방법과 처방을 모르고 멍청하게 살면 결국 고생만 몽땅 하면서 수업료를 과다 지불하기 마련이다. 처방은 음식이 될 수도 있고, 약물이 될 수도 있으며,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어떤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불이 많으면 물이 있는 장소에 거주하면 아무래도 도움이 된다.
30대 중반에 충남과 전북에 걸쳐 있는 대둔산(878미터)에 자주 갔다. 깎아지른 바위절 23 벽이 많은 악산岳山이다. 자기가 처한 상황 따라, 나이대에 따라 가게 되는 산도 각기 다르다. 이때는 산이 나를 불렀다. 돈도 없고 비전도 없는데 처자식은 거느린 지방대학 시간강사 시절이었다. 마음이 허하고 고독하니까 산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인간은 고독해야 성찰이 온다. 돈 있고 배부르면 주색잡기酒色雜技가 생각나지만 춥고 배고프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 굶주리고 추울 때일수록 도를 구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까.
어느 날 대둔산의 바위절벽에 혼자 앉아 도시락을 먹고 터덜터덜 내려오다가 한 암자 24 에 들렀다. 암자에는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공양주 보살이 있었는데, 내 팔자를 물어보더니만 대뜸 "화치승룡火熾乘龍이 되었네"라고 한마디 뱉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나의 뇌리 속에는 허름한 잿빛 보살 바지를 입은 아주머니가 던진 ‘화치승룡’이라는 단어가 박혔다. 나는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한문으로 된 고사성어를 한 번 들으면 잘 안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집에 와서 바로 이 단어를 찾아보니 《적천수滴天髓》에 나오는 표현이었다. 《적천수》는 사주명리학의 고전이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일급 참모가 유백온이라는 인물인데, 이 유백온이 저술한 책이다. 중국에서 역대 최고의 전략가 세 명을 꼽으라면 장량·제갈공명·유백온을 들 만큼 유백온은 급수가 높은 인물이다.
《적천수》에 보면 ‘화치승룡火熾乘龍 수탕기호水蕩騎虎’라는 대목이 나온다. ‘불이 치성하면 용을 타야 하고, 물이 흘러넘치면 호랑이를 타야 한다.’ 용은 물에서 노는 동물이고, 호랑이는 불을 상징한다. 십이지로 보면 용은 진辰이고, 호랑이는 인寅이다. 불이 많은 팔자라도 여덟 글자 가운데 진辰이 하나라도 들어 있으면 괜찮고, 물이 흘러넘치는 팔자라도 인寅이 들어 있으면 보강이 된다는 뜻이다. 화가 많아도 진辰이 있으면 화기를 빼준다. 불이 많을 때는 물로 불을 제압하는 방법보다는 진으로 빼주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화생토火生土의 원리다. 토를 보면 화는 자기 에너지를 주고 싶어 한다.
진辰은 동물로 보면 용이지만, 오행으로 분류하면 토土다. 물이 많은 진흙을 의미한다. 질척질척한 땅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이게 논(畓)을 가리킨다. 벼농사를 짓는 논은 물을 대기 때문에 질퍽질퍽한 땅이다. 진辰은 바로 논두렁이다. 이를 알고부터 이사할 때 ‘주변에 논이 많은 들판 지역이 어디 없나.’를 늘 물색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익산의 아파트는 주변이 온통 들판이다. 마음 먹고 네댓 시간을 걸어도 다 걸을 수 없는 넓이다. 논두렁길을 한 시간 넘게 걸어가면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어려 있는 미륵사지彌勒 25 寺址가 나온다.
나는 시간만 나면 논두렁길을 걷는다. 취미이다. 보통 하루에 두 시간 가까이 걷는다. 칼럼을 쓰기 전에는 반드시 논두렁 길을 걷는다. 한시간 넘게 걸어야만 효과가 있다. 효과라는 것은 생각이 정리된다는 뜻이다. 한 시간 넘어가면서부터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부분이 기승전결로 정리가 된다. 두 시간 정도 걸으면 군더더기가 거의 제거되고 칼럼 원고의 덩어리만 남게 된다. 모내기하기 전에 양수기로 논에 물을 대는 장면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러다가 이앙기로 푸릇푸릇한 모를 심는 계절이 오면 논두렁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모내는 장면을 구경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10년 넘게 내가 쓴 글의 모든 원료는 논두렁에서 나왔다. 농부는 논에서 벼를 수확했지만 나는 논에서 글을 수확한 셈이다. 화기가 머리로 치솟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리지 않고 이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논두렁 덕택이다. 논두렁이 나를 살렸다. ‘화치승룡’의 용은 논두렁에 있었다. - P22

세상을 살면서 긴장(緊張)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하게 되지만, 이완(弛緩)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 신경 쓰는 게 다 긴장이고 스트레스가 다 긴장이다. 나도 처음에는 쌓인 긴장을 푸는 이완을 쉬운 걸로 알았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깜냥에 이완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긴장을 풀어주는 전문가는 누구인가? 물(水)과 불(火)이다. 물은 가라앉는 성질이 있고, 불은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물은 머리에 불이 타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물을 가까이하고 호수·강·바닷가에 거처하면 재미를 본다. 나는 물이 질퍽질퍽한 논두렁을 많이 걸었다. ‘지자요수(知者樂水)’가 이 말이다.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물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뜻이다. 고스톱에서 패가 좋지 않은데도 흥분하여 ‘열고’를 외치면 결국 돈 잃는다. 열을 내리는 것이 관건이다. 열을 내리면 차분해지기 마련이고, 차분하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물소리를 들어야 번뇌가 사라진다고 되어 있다. 물소리가 잘 들리는 지점은 삶의 번뇌가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면 좋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은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게 된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번뇌도 시간이 지나면 떠내려간다는 이치를 깨우친다. 언젠가 쌍계사 불일암에서 하룻밤 자면서 밤새도록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꿈결에 들리는 물소리는 자장가처럼 편안했다.
《수심결(修心訣)》 첫 대목이다. ‘삼계열뇌三界熱惱가 유여화택猶如火宅이어늘.’ 삼계의 뜨거운 번뇌가 불난 집처럼 불타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이 뜨거운 고민에 싸여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번뇌를 식혀야 한다. 물로 열을 내린다.
그렇다면 불(火)은 언제 필요한가? 이 세상에 물 대포가 있다면 불 대포도 있다. 수화쌍포(水火雙砲)를 가동시켜야 한다. 불이 필요한 경우는 우울증이다. 세상사 모든 게 시들해진다. 마음이 허(虛)하고 낙(樂)이 없다. 가슴속에는 온갖 근심 걱정만 가득하다. 아무리 하지 않 37 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머리에 가득 차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불을 봐야 한다. ‘관화유술觀火有術 필관기아궁必觀其亞宮’이다.
불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는데, 아궁이에서 장작불 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아궁이 앞에다가 엉덩이를 받칠 만한 나무토막을 장만해놓고 여기에 편히 앉아 장작불을 때는 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이 아닌가 싶다. 근심 걱정이 가슴에서 올라오면 그 걱정거리를 장작불에 하나씩 내던진다. 하나 던지면 걱정이 또 올라온다. 그러면 그 걱정을 또 불 속에 던진다. 걱정거리가 1,000개쯤 되면 그 1,000개를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오는 족족 장작불에 내던지면 된다. 한 500개쯤 던지다 보면 시커먼 걱정덩어리가 새빨간 장작불에 타는 모습이 보인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린다. 제아무리 단단한 걱정거리도 불에 들어가면 재가 된다. 재가 되면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바람에 날아가는 재를 어떻게 손으로 잡을 수 있으며, 눈으로 추적할 수 있겠는가.
아궁이 앞에 앉아서 한 시간쯤 불을 때다 보면 아랫도리 쪽이 따끈해지다가 다음에는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이마 쪽에도 따뜻한 기운이 충만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빵빵한 기운이 몸에 차오른다. 그다음에는 마음이 환해진다. 근심 걱정을 견딜 만한 튼튼한 방패막이가 생겼다는 느낌이 온다. 조선시대 도공들은 하층민이었고, 노동 강도가 아주 심한 직업이었다. 그런 도공들이 피로를 푸는 방법이 바로 불을 때는 일이었다. 가마에 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집어넣고 4~5일 동안 계속 불을 때며 고단함과 근심을 모두 날려버렸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데 있어서도 어떤 나무를 태우느냐에 따라 기분이 다를 수 있다. 소나무를 태울 때 나는 냄새와 편백나무를 태울 때 나는 냄새가 다르다. 나무 타는 연기와 냄새에 독특한 치유효과가 있다. 나무 타는 냄새를 맡으면 어렸을 적에 외갓집에 가서 맡았던 냄새가 생각난다. 자신이 가장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던 시절이 연상된다. 냄새는 강 38 력한 회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소나무 장작 타는 냄새가 취향에 맞는다. 그다음은 편백나무다. 내가 글을 쓸 때 거주하는 황토집인 휴휴산방(休休山房)은 전남 장성의 축령산 자락에 있는데, 수백만 평이 60년 가까이 조성한 편백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간벌한 편백나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방 두 개 중 하나는 방바닥에 편백을 깔아 놓았다. 방에 들어가 편백 냄새를 맡으면 정신이 상쾌해지고, 아궁이에 편백 장작을 태우면 그 냄새가 신경을 안정시켜 준다.
인간은 원시 시절부터 밤이 되면 동굴에서 장작을 태우던 기억이 유전자에 남아 있을 것이다. 불을 피워 무서운 맹수도 쫓고 고기도 지글지글 굽고 부족이 모여 앉아 노래 부르던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중 하나가 조로아스터교(敎)다. 일명 배화교(拜火敎)다. 5,000년이 넘는 역사다.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인 중동의 이란에 가서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방문한 일이 있다. 사원 중심 건물에 신상(神像)이나 어떤 숭배의 조각도 없었다. 건물 가운데 ‘심플하게’ 화로만 하나 놓여 있었다. 가로세로 2미터, 높이 1미터 50센티미터 정도의 화로대(火爐臺)가 있었고, 대 위의 청동화로에서 장작불이 타는 모습을 사방에서 지켜볼 수 있는 구조였다. 밤에는 불씨를 재로 덮어 보관하고 낮에는 활활 불을 태운다. 불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신(神)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은 근심 걱정을 없애주고 우울한 마음에 활기를 준다.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궁이에 불을 땔 때마다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된다. - P36

악 자가 들어가면 바위가 험하다는 이야기이고, 바위가 험한 산들이 기도발이 잘 받는다. 바위에서 지자기(地磁氣)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기운이 탈진해 힘이 없을 때는 골산으로 가는 게 좋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고 분노심이 일어날 때는 지리산이 효과적이다. 지리산은 따뜻하게 품어주고, 설악산은 기백과 패기를 불어넣어준다. 골산과 육산 두 군데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방법이다. - P99

일본 교토의 ‘철학의 길’도 걸어보았다. 난젠지(南禪寺)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하천 옆을 따라 2.5킬로미터 정도 된다. 일본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사랑한 길이다. 과연 사색의 길이었다. 서양 철학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고유의 철학 이론을 세우려 한 이른바 교 109 토학파(京都學派)가 이 길을 걸으면서 탄생되었다. 걷기는 철학자의 생각의 도구이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인 소요(逍遙)학파도 ‘걷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철학자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생각한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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