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는 보편적인 법칙이며 철도에 관해서도 결국은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이용할 수 있도록 세계 곳곳에 철도를 까는 일은 곧 지구 표면을 평평하게 만드는 일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주식으로 자금을 모아 삽질을 계속하기만 하면 마침내 모두가 어디든 순식간에 무료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생각하지만, 군중이 역에 몰려들고 차장이 "발차!"를 외치고 기관차의 김이 물방울로 가라앉고 나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기차에 치이는 사건이 생길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 일은 ‘하나의 슬픈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요행히 그때까지 살아 있고 차비도 벌어놓은 사람이라면 기차를 탈 수 있을 테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신체적 탄력을 잃고 여행 의욕도 사라져 있을 것이다. 인생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도 줄어들었을 노년기에 불확실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 돈을 버느라 인생의 황금기를 탕진한다는 것은, 훗날 고국으로 돌아가 시인으로 살겠다는 생각에서 먼저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가는 영국인을 연상시킨다. 그 영국인은 인도에 갈 것이 아니라 당장 다락방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 땅의 판잣집에 사는 수많은 아일랜드 인들은 놀라 외칠지 모른다. "뭐라고? 우리가 건설한 철도가 좋은 게 아니란 말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아니, 철도는 좋은 것이다. 비교적 좋단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들은 이보다 더 무가치한 일에 종사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동포인 여러분에게 바라건대, 지금 이렇게 땅을 파는 것보다는 좀더 나은 일에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것이다." - P63

나는 사람이 가축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가축이 사람의 주인이며, 가축 쪽이 사람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소는 서로 일을 교환하는 것이지만, 필요한 일만 생각해 볼 때는 소가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농장이 더 넓은 것이다. 사람은 교환한 일의 일부로 6주 동안 건초 작업을 하는데 그건 결코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나라, 즉 철학자의 국가라면 가축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 같은 엄청난 실수는 범하지 않으리라. 물론 철학자의 국가는 과거에도 없었고, 조만간 생겨날 가망도 없으며, 또 그런 국가가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게 해 줄 노동의 대가로 말이나 소를 길들여 내 집에 하숙시키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자칫하면 내가 마부나 목동으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설혹 그 일에서 사회가 이득을 보는 듯이 보인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자. 한쪽의 이득이 다른 쪽에게는 손실이 되지 않는다고, 마부소년이 주인과 똑같이 만족할 이유가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어떤 공공사업을 가축의 도움 없이는 이룩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업의 영광을 소와 말과 더불어 누리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좀더 가치 있는 사업을 이룩할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이 가축의 도움을 받아 불필요하고 기교적인 일뿐 아니라 사치스럽고 무익한 일까지 하기 시작한다면, 그 중 몇몇은 소와 맞바꾼 노동을 전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가장 강한 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동물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그 상징물인 외부에 있는 동물을 위해서도 일을 한다. - P66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신념과 경험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소박하고 현명하게만 산다면 이승에서 한 사람이 먹고사는 일은 힘겨운 일이 아니라 유희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소박한 민족이 영위하는 직업이라는 것이 아직도 인위적인 민족의 경우에는 스포츠인 것과 마찬가지다. 나보다 더 쉽게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닌 한 꼭 이마에 땀을 흘려 가며 생계비를 벌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한 젊은이가 유산으로 몇 에이커의 땅을 물려받았는데, 자기는 그럴 방도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결코 누구도 내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내 생활방식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방식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이유말고도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부모나 이웃의 생활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생활방식을 신중하게 찾아서 추구하기를 바란다. 젊은이는 건축가도 농부도 선원도 될 수 있다. 다만 그가 하고 싶다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 선원이나 도망중인 노예가 북극성을 지표로 삼듯이 우리는 정확한 한 점을 지표로 삼을 때만 현명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평생의 길잡이로 삼기에 충분하다. 그것만 있다면 예정된 시일 안에 목표로 삼은 항구에 도착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올바른 항로를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 P83

그러나 그런 삶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다. 사실이지 나는 지금껏 자선사업에 그다지 관여한 적이 없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는 바이다. 나는 일종의 의무로 몇 가지를 희생시켰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자선의 즐거움을 희생시켰다. 마을의 몇몇 가난한 가정을 돕도록 만들려고 온갖 방법으로 나를 설득하려 한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면 어쩌면 심심풀이 삼아서라도 그 일에 손을 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가한 자에게는 악마가 일거리를 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일에 관여하여 모든 면에서 내가 자립한 것만큼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의무를 지워볼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제안해 보기까지 했지만, 모두들 주저없이 가난한 채로 그대로 살겠노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처럼 많은 방법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 한 사람쯤 인도적인 일과는 거리가 먼 다른 일을 해도 좋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선에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 선행이라는 일자리는 이미 만원이다. 게다가 나도 그 일이라면 꽤 해본 편인데,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일이 내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선행을 하기 위해, 또는 세상을 파멸로부터 건지기 위해 나만의 소명을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어딘가 이 세상과 비슷하면서도 거의 무한대로 더 큰 어떤 불변성이 있어 현재의 세상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일에 소질이 있다면 막을 생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내가 사양하는 이 일에 성심껏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지만 훗날 세상이 그 일을 나쁘다고 하더라도 결코 굴하지 마시오, 라고.
난 결코 내 경우가 특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독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는(이웃들이 그 일을 선한 일이라고 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는 내가 그 일에 적임자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지만, 그 일이 어떤 것인지는 내 고용주가 찾아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의미에서 내가 어떤 좋은 일을 하느냐는 내게는 논외의 일이며, 설혹 그것이 좋은 일이 된다 해도 그 대부분은 전적으로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좀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든가 친절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려 들지 말고 현재 있는 그 위치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대로 시작하라고들 말한다. 만약 내가 그런 엄숙한 어조로 설교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보다는 먼저 착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흡사 따뜻하고 자애롭던 그 빛이 점점 강해져 결국 너무 눈부시게 된 나머지 어떤 인간도 그것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궤도를 따라 세상을 돌며 선행을 하는 게 아니라(또는 새로 밝혀진 원리에 의하건대 세상이 선행을 하는 그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달이나 6등성에 자신의 불을 옮겨붙이고, 요정 로빈처럼 이집 저집 기웃거리면서 광인들을 미치게 만들고, 고기를 썩히고, 어둠을 어둡지 않게 만드는 태양은 없애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행을 베풀어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려 했던 파이톤이 하루 동안 태양의 전차를 타고 엉뚱한 길로 모는 바람에 하늘 아래에 있던 동네를 불태우고 지상을 그을렸으며 샘물이란 샘물은 모조리 말라붙게 만들고 거대한 사하라 사막을 만들어 결국 주피터가 벼락으로 그를 땅에 동댕이쳤고 태양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1년 동안 빛나지 않는 일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변질된 선(善)에서 솟는 것만큼 지독한 악취도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신의 경우에도 한낱 썩은 고기일 뿐이다. 만약 의식적으로 내게 선을 베풀려는 계획을 품고 내 집으로 누군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될 경우 나는 그의 선행이 내게 베푸는 결과, 즉 그 선이라는 것이 내 핏속에 섞일까 두려워 입과 코와 귀와 눈을 흙먼지로 가득 채워 질식하게 만드는 저 아라비아 사막의 건조하고 뜨거운 모래폭풍을 피하듯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날 것이다. 그건 안 될 일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악행을 당하는 것이 낫다.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떨 때 따뜻하게 해주고, 또는 수렁에 빠졌을 때 (정말 내가 수렁에 빠지는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끌어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게 선을 베푼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일은 뉴펀들랜드 종의 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자선은 인간애가 아니다. 하워드는 분명 나름대로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훌륭한 사람이었고 나름대로 그 보답도 받았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가장 유복하게 살고 있을 때야말로 바로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그리고 그 경우 우리를 돕지 못한다면 그런 하워드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 또는 나와 비슷한 인간에게 진심으로 선을 베풀려고 한 자선 모임에 대해선 들어 본 적도 없다. - P85

가난한 이들에게는 설혹 그들에게는 요원한 본보기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도록 하라. 돈을 주려면 그들에게 직접 건네지 말고 당신이 그들을 위해 그 돈을 쓰도록 하라. 우리는 종종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가난한 사람이 더럽고 남루하고 추해 보이더라도 그렇게 춥고 배고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다. 그건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취향이며 단순히 불운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럴 때 그에게 돈을 준다면 그는 그 돈으로 누더기를 더 사 입을지도 모른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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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컴퓨터가 이번에는 다른 것, 이를테면 야생 꿀벌의 집을 연구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거기에서는 명백히 인공에 기인하는 모든 기준이 발견될 것이다. 즉 밀와와 그것을 구성하는 밀방에서는 단순하며 반복이 많은 기하학적 구조가 발견되고, 그 때문에 벌집은 발비존의 집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될 것이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벌집이 벌의 활동의 소산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이 ‘만들어진 것(인공으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즉 이 활동은 엄밀히 자동적이고 직접적이지만 의식적으로 기도된 것은 아니다. 한편 양식 있는 박물학자로서의 우리는 꿀벌을 ‘자연으로 된‘ 존재로 보고 있다. 이 ‘자연으로 된‘ 존재의 자동적 활동의 산물을 ‘만들어진 것(인공적)‘으로 본다면 명백한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좀 더 검토해 보면 알겠지만 모순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프로그램을 짤 때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판단의 애매성에서 오는 것이다. 즉 만약에 그 기계가 이번에는 벌집이 아니라 꿀벌 그 자체를 검사한다고 하면,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극히 주의 깊게 제작된 인공적인 물체일 것이다. 극히 표면적인 검사만으로도 꿀벌에게서는 좌우상칭과 평행이동 등의 단순한 대칭요소가 명백히 발견된다. 또 꿀벌을 한 마리씩 검사해 가는 동안에, 그 컴퓨터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의 구조의 극단적인 복잡성(이를테면 복부의 털의 수와 위치, 시맥(날개맥) 등)이 개체마다 충실히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러한 존재가 깊이 고려되고 건설적이며 또 가장 세련된 활동의 산물이라는 증거가 된다. 그 기계는 이러한 결정적인 자료를 토대로 화성의 NASA 관리에게 이러한 보고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ㅡ지구에서 한 기술을 발견하였는데, 그와 비교하면 화성의 기술 같은 것은 거의 원시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라고.
이상에서 우리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데, 이렇게 길을 우회한 것은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명백한 듯이 보이는 ‘자연으로 된‘ 물체와 ‘인공으로 된‘ 물체의 구별을 확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예시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구조적(거시적) 기준을 기초로 하면 인공적이란 어떤 것인가를 완벽히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기술의 산물과 같은 ‘진짜‘ 공예품의 전부를 포함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결정 구조와 같이, 생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명백히 자연스런 물체를 배제할 수 있는 정의다. 우리는 결정 구조도 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 체계 속에 분류하고 싶기 때문이다. - P24

그러나 우리는 바로 객관성이 가리키는 바에 의하여 생물이 갖는 합목적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생물이 제각기 구조와 성능을 통해서 어떤 목적을 실현하고 또 추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거기에는 외견상 심각한 인식론상의 모순이 있다. 생물학의 중심적 문제는 바로 이 모순 자체며, 만일 이 모순이 외견상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문제를 풀어야 하고, 만일 실제로 모순된 것이라면 그것이 근본적으로 해답할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 - P42

도태이론은 지금까지 제출된 모든 이론 중에서 객관성의 원리와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불변성을 유일한 근본적 특성으로 보고, 합목적성을 불변성에서 파생되는 제2차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또한 도태이론은 단지 현대 물리학과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며, 또 그에 아무런 제한이나 부가도 붙이지 않는 유일한 이론이다. 도태적 진화의 이론이야말로 생물학의 인식록적 수미일관성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객관적 자연‘에 대한 제과학(諸科學) 사이에 그것을 정립시키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이론을 떠받들기 위한 유력한 논거는 되지만, 이것만으로 그 이론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는 없다. - P44

따라서 한편에서는 생물권, 즉 ‘생명을 가진 물질‘ 속에서만 명백히 작용한다고 생각되는 합목적성의 원리를 인정한다는 일군(一群)의 이론을 정의할 수가 있다. 내가 지금부터 ‘생기설(生氣說)‘ 이라 부르는 이들 이론은 생물과 무생물의 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보편적·합목적적 원리에 입각하는 일군의 생각이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 원리는 생물권의 진화뿐만 아니라 우주의 진화도 지배하고 있으며 생물권의 내부에서는 다만 보다 정밀하고 또 강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 이론은 생물 속에서, 보편적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는 진화에서 생겨난 더욱 세련되고 더욱 완벽한 산물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진화의 도달점이 인간과 인류며, 거기까지 도달한 것은 그렇게 미리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ㅡ나는 이것을 ‘물활설(物活說)‘이라 부르기로 한다ㅡ는 많은 점에서 생기설보다도 흥미 있다. 그러므로 생기설에 대해서는 간단히 일별을 던지는 데 그치기로 한다. - P45

이러한 생각에 베르그송이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던 또 하나의 생각이 결부되어 있다. 즉 합리적 지성은 비생명 물질을 지배하는 데는 매우 적합한 수단이지만 생명 현상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단지 본능만이 생명의 약동과 동질적인 것으로서 생명 현상에 관해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직관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분석적·합리적인 논문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있어서의 합리적 지성의 고도한 발달에 따라 그 직관력은 중대하고 또 유감스러울 정도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직관력의 부(富)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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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나는 종종 우리가 흑인 노예제라는 이 야비하고도 이질적인 노예 행태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천박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실제로 남부와 북부 모두에는 그 제도에 전념하는 교활한 노예 주인들이 적지 않다. 남부의 노예 감독은 거칠다고 하는데 북부의 노예 감독은 한술 더 뜬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쁜 것은 자신이 자신의 노예 감독이 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신성에 대해서 떠들다니! 밤낮으로 장터를 찾아다니는 저 큰길의 짐꾼을 보자. 그의 내면에 어떤 신성이 작용하고 있는가? 그의 가장 거룩한 의무는 자기 말들에게 사료와 물을 먹이는 일이다! 운송으로 얻는 이익과 비교할 때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처한 운명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지금 평판 좋은 시골 지주 나리가 되기 위해 마차를 몰고 있을까? 그는 얼마나 존엄하며, 또 어느만큼이나 불멸의 존재일까? 하루 온종일 움츠리며 굽실거리는 꼴을, 뭔지 모르는 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라. 그것은 그가 불멸이나 신성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 대해 스스로 내린 평가, 자신의 행위에서 얻게 된 평가의 노예이며 죄수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평가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내린 평가에 비하면 나약한 폭군에 불과하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하는 생각,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짓거나 방향을 지시한다. 공상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 서인도제도에서 자기 해방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윌버포스가 필요할 것인가? 또한 자신들의 운명에 지나친 관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죽는 날까지 화장대 방석이나 짜고 있는 이 땅의 숙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마치 영원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시간을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 P13

사치품 대부분, 그리고 이른바 생활 편의품이라고 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없어서 안 될 물건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에 확실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사치와 편의에 대해 말하자면, 현인들은 가난한 이들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빈약한 생활을 누려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지의 고대 철학자들은 외적인 부라는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하면서 내적인 부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부자였던 계층이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 알고 있는 정도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들과 같은 부류로 좀더 현대적이었던 개혁자와 자선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자유의사에 의한 가난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리한 지점에 오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인생에 대하여 공정하거나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간에 사치스러운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다. 요즘에는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대학교수직이 찬탄의 대상인데, 그것은 한때 산다는 일이 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P21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심오한 사상을 갖는다거나 학파를 세우는 일뿐만 아니라 지혜를 너무도 사랑하여 지혜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이며 관대하고 믿음성 있게 산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인생의 제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들의 성공은 대체로 왕이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라 아부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이 영합함으로써만 겨우 삶을 영위해 나가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고귀한 인간의 본보기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은 이토록 끊임없이 타락하고 있는 걸까? 무엇이 가문을 영락케 만드는 걸까? 국가를 쇠약케 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사치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의 삶에 사치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철학자는 외적 삶의 양태에서조차 시대를 앞서는 사람이다. 그는 동시대인들처럼 배불리 먹거나 편안히 자거나 좋은 옷을 입거나 따뜻하게 지내지 못한다. 어떻게 철학자이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의 열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 P22

그런 식으로 나 역시 섬세한 재료로 일종의 바구니를 엮었지만 결국 남이 살 만한 물건으로 만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것들을 엮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들이 내 바구니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들 궁리를 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팔지 않아도 될까를 궁리했던 셈이다. 사람들이 찬미하고 성공했다고 여기는 삶은 한 가지뿐이다. 어째서 우리는 다른 삶들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어느 한 가지 삶만을 과장하는 것일까? - P26

또는 식초 한 방울에 든 세균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자기 주위에서 우글대는 괴물에 먹혀버릴 수도 있다. 자신이 캐내어 녹인 광석에서 잭나이프를 만든 아이와(그는 그 과정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책을 읽는다), 대학에서 야금학 강의에 출석하면서 아버지에게서 로저스제 주머니칼을 선물로 받은 아이 둘을 놓고 한 달이 지나면 어느 쪽이 더 많은 발전을 이룩했을까? 둘 중 어느 아이가 손가락을 베기 쉬울 것인가?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내가 재학중에 항해학을 수강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만약 내가 한 번이라도 항구로 나간 적이 있다면 항해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을 텐데 말이다. 가난한 학생들조차 정치경제학만 공부하고 또 수업 받고 있는데, 정작 철학과 동의어인 삶의 경제학은 오늘날 대학에서 진지하게 교습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학생이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와 세이의 저술을 읽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갚을 길 없는 부채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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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류는 뇌가 커지면서 두 가지 대가를 지불했다. 첫째, 식량을 찾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둘째, 근육이 퇴화했다. 국방예산을 교육 부문으로 전용하는 정부처럼 인류는 근육에 쓸 에너지를 뉴런에 투입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대초원에서 살아남기 좋은 전략이었다고 성급히 결론을 내려버릴 수는 없다. 침팬지는 호모 사피엔스와 논쟁을 벌여 이길 수는 없지만 인간을 헝겊 인형처럼 찢어버릴 완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우리의 큰 뇌는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자동차와 총을 만들 수 있다. 자동차 덕분에 우리는 침팬지보다 훨씬 빨리 이동할 수 있고, 레슬링을 하는 대신 총으로 안전한 거리에서 침팬지를 쏠 수 있다. 하지만 차와 총은 최근에 등장한 산물이다. 인간의 신경망은 2백만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장을 거듭해왔으나, 몇몇 돌칼과 날카로운 막대기를 제외한다면 그것이 이룬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지난 2백만 년간 인간의 엄청난 뇌 용량 증가를 일으켰을까? 솔직히 우리는 모른다. - P27

이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빨리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는 대부분 당당한 존재들이다. 수백만 년간 지배해온 결과 자신감으로 가득해진 것이다. 반면에 사피엔스는 중남미 후진국 독재자에 가깝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사바나의 패배자로 지냈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두 배로 잔인하고 위험해졌다. 치명적인 전쟁에서 생태계 파괴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참사 중 많은 수가 이처럼 너무 빠른 도약에서 유래했다. - P31

농업혁명의 핵심이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 P129

20세기 중반에 과거 남부연합에 속했던 주들에서 자행되었던 인종차별은 19세기 말보다 더욱 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 미시시피 대학교에 지원한 흑인 학생 클레넌 킹은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는데, 판사가 미시시피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흑인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결했기 때문이었다. - P210

20세기 전반의 학자들은 모든 문화가 완전하고 조화로우며 언제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불변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계관과 사회적, 법적, 정치적 처리방식의 체계를 지녔으며, 이것들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처럼 순조롭게 운영된다고 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외부의 간섭이 없는 상태로 남겨진 문화는 변하지 않았다. 변화는 외부에서 가해진 힘이 있을 때만 생겨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인류학자, 역사학자, 정치가 들은 마치 사모아나 태즈메이니아 사람들이 태곳적부터 동일한 신념과 규범과 가치관을 지니고 살았던 것처럼 ‘사모아 문화’니 ‘태즈메이니아 문화’니 하는 식으로 언급했다.
오늘날 문화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실은 그 반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문화는 나름의 전형적인 신념, 규범,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환경의 변화나 이웃 문화와의 접촉에 반응해 스스로 모습을 끊임없이 바꾼다. 스스로의 내부적 역동성으로 인해 변이를 겪기도 한다. 안정된 생태계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존재하는 문화조차 변화를 피할 수 없다.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럭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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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궁의 애정관계를 볼 때에는 언제나 음양이 맞는지를 유념해서 살펴야 한다. 남자는 양간 일간에 음간인 정재가 부부궁이나 자식인 관과 가까이 있고, 여자는 음간 일간에 양간인 정관이 부부궁이나 자식인 식상과 가까이 있는 것이 찰떡궁합이다. 이 경우 정재나 정관이 또 있지 않다면 서로 아끼며 거의 한눈을 팔지 않는다. - P266

4. 나쁜 운에 대처하는 법
다음의 임인일주 사주에는 특색이 있으니, 일지인 식신 인목이 미토 묘지 옆에서 신금의 충을 당해 몹시 약하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도 아무 일없이 고관절이 자주 아팠다고 한다. 만약 1933년 계유년생이라면 15세부터의 정사대운에는 인사신 삼형살이 걸려 고생이 아주 심했을 것이다. 중년과 말년으로 가면서 점점 좋아질 것이다. 식신이 약함은 물론 일간 276 임수도 약한데 대운이 수와 목으로 흘러 보완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2013년 계사년은 물론 2016년 병신년에는 다소 조심해야 한다. 묘지와 충으로 약할 대로 약한 식신 인목이 정사 대운에서의 사화 형살까지 받기 때문이다. 계사년에 몹시 고생했을 것인데, 약한 식신이 다치기 쉬우니, 을미년도 그렇고 병신년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운이 나쁠 때는 흔히 외국에 다녀오라고 한다. 내가 태어나면서 형성된 사주의 에너지가 아주 멀리 다른 곳에 가면 뒤죽박죽으로 엉켜 원래 그대로 작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가능하다면 자신과 식신을 강화시켜 주는 곳으로 바다나 강과 가까우면서 나무가 많은 곳에 사는 것이 좋고, 사는 곳의 지명을 수나 목이 들 277 어간 곳을 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검은색이나 푸른색 옷으로 자신과 식상을 강화시켜도 되고, 집안에 어항이나 화분을 많이 두어도 좋다. 운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매사에 언행을 조심하고 덕을 베풀며 건강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다. 나이 들어 아주 나쁜 운이 왔다면, 세상의 활동을 접고 조용히 심신을 안정시키고 수행을 하거나 그동안 해 보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서 지내는 것이 최상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욕망이나 안락함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므로 타고난 사주의 인자를 무화시키는 것이고 이 때문에 나쁜 운이 와도 내 사주의 에너지가 운과 강하게 부딪히지 않고 넘어가기 쉽다. - P275

일반적으로 알아야 할 사실 하나는 사주에서 식상이 약하면 말을 굉장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잘한다는 것이다. 식상이 아예 사주에 없으면 말하는 기운이 없어 말이 투박하고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식상이 약할 경우, 그 기운이 약해 함부로 내뱉지 않고 남들의 눈치를 살피며 가능한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즐겁게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한 것만이 굳이 좋다고 볼 필요는 없다. 어떤 육친이 사주에 강하게 있는데 또 운에서 강하게 오면, 그것을 반드시 실현하기 위해 피를 보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아 몹시 피곤한 삶을 살게 된다. 곧 상황에 따라 강하면 강한 그대로 약하면 약한 그대로 잘 사용할 수도 있고 함부로 마구 사용할 수도 있으니, 그것을 알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 P278

물론 남자의 경우도 식상관이 유흥으로 나타 283 나 주색잡기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여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 P282

한쪽으로 치우친 사주 때문에 남녀 관계로 잘못되는 경우는 막기가 아주 어렵다.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 중에서 특히 성적인 욕망은 다른 것보다 강하다. 그리하여 절제가 없으면 윤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치정 관계로 곤란을 당하기 쉬우니, 굳은 마음을 가지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사주를 안다면 무엇보다 가정에 충실하고 남편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넘치는 기운은 취미 생활이나 종교 생활 또는 수행으로 극복해야 한다. 종교 생활이나 수행이 싫다면 마음을 가다듬는 책이라도 가까이 두고 틈날 때마다 보면서 마음을 정화시켜야 한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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