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 로스쿨 교수인 브라이언 타마나하는 『로스쿨은 끝났다』에서 로스쿨 지망생들의 ‘낙관주의 편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스쿨 학생들은 최고 연봉 변호사로 취직할 확률이 평균 10퍼센트나 5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확률은 그보다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로스쿨에는 노력을 통해 좋은 성적을 받는 데 익숙한 우수한 학생들이 많다. 따라서 다른 동기생들도 자기만큼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한다는 사실을 (로스쿨에 들어와서 직접 보기 전까지) 정확히 모른 채 지금까지 해온 대로 열심히 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일단 로스쿨에 오면, 지금까지의 성공 확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 P187
경영자도 마찬가지다. 미국 중소기업이 5년 동안 생존할 확률은 35퍼센트 정도인데, 중소기업 경영자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기업이 큰 성공을 거둘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보느냐"고 물어보면 60퍼센트가 상당한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답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에 대해 대니얼 카너먼은 "사회적으로 비관주의보다 낙관주의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불확실성보다 자신감이 더욱 인정받기 때문에 자기 과신의 오류가 나타난다"며 "이를 누그러뜨릴 수는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게 대다수 인간의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 P195
그러나 아무리 주의를 한다 해도 과신 오류를 넘어서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스라엘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심리학자 탈리 샤롯은 "낙관주의 편향은 인간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낙관주의가 스트레스를 줄여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자연재해, 전염병, 전쟁과 같은 다사다난한 인간사를 견디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과신 오류에 세대별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미국은 물론 한국 사회도 휩쓸었던 ‘아이 자존감 키워주기 운동‘은 젊은 세대의 자기도취를 부추겨 그들의 과신 오류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미국 샌디에이고 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 진 트웬지의 『자기중심주의 세대』(2006)에 따르면, 미국에서 "나는 잘났다"는 말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여긴 10대는 1950년대엔 12퍼센트에 불과했지만, 1980년대엔 무려 80퍼센트로 늘었다고 한다. "오냐 오냐 너 잘났다" 했더니, 아이들이 정말 자신이 잘난 걸로 생각하게 된 걸까? 미국의 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도 비슷하다. 다음과 같은 노래 가사들이 그런 ‘과신 오류의 대중화‘를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어. 아직 쓸 만한 걸, 죽지 않았어"(G-드래곤의 <하트브레이커>), "날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싫진 않아. 나는 예쁘니까"(씨야의 <여성시대>), "잘빠진 다리와 외모 너는 내게 반하지, 내 앞에선 니 모든 게 무너지고 말걸"(애프터스쿨의 <AH>), "널 내가 갖겠어,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 물론 과신 효과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업에서 스포츠까지 그 어떤 분야에서든 모든 도전에는 자신감이 필요하며, 그런 확신이 강할수록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독일 시인 괴테가 말했듯이, "사람이 자신에게 요구되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보다 더 위대하다고 믿어야만 한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우리 인간은 자긍심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다. 설사 그 자긍심이 기만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면서 자신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무엇을 망설이랴. 그래서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오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다만 ‘낙관적 감성‘을 ‘비관적 이성‘으로 보완하거나 견제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과유불급의 철칙을 믿는다면 말이다. - P196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죽은 자만 말이 없는 게 아니다. 실패자도 말이 없는 법이다. 실패자는 찾기 어렵다. 실패 사례를 애써 찾아낸다 해도 성공 사례를 더 많이 접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앞에서 살펴본 ‘과신 오류‘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경우의 과신 오류에는 성공 사례, 즉 살아남은 자들의 사례를 많이 접한 게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를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생존 편향‘의 문제다. ‘생존자 편향‘이라고도 한다. 생존 편향은 생존에 실패한 사람들의 가시성 결여로 인해 비교적 가시성이 두드러지는 생존자들의 사례에 집중함으로써 생기는 편향을 말한다. 이 편향은 ‘낙관주의 편향‘과 ‘과신 오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연구자들에게 실패 사례는 기록이 없거나 빈약한 반면, 성공 사례는 풍부한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본의 아니게 성공 사례를 일반화하는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 P200
이야기에는 육하원칙이 필요하지 않다. 그럴듯하면 그걸로 족하고 설득력은 말하는 이의 권위와 말솜씨에 좌우된다. 굳이 옛날 이야기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그거 말 되는데‘라거나 ‘말도 안 돼‘라는 말을 즐겨한다. 진실은 때로 얼른 듣기엔 말도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진실은 이야기로서 생명력이 약하다. 이처럼 이야기가 진실보다 큰 힘을 발휘하는 현상을 가리켜 ‘이야기 편향‘이라고 한다. 롤프 도벨리는 이야기 편향은 이야기들을 왜곡해서 현실을 단순화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지만, 이야기에는 본능적으로 끌리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저주다. 그리하여 중요하지 않은 관점들에 밀려서 중요한 관점들이 저평가되는 왜곡이 생긴다.……직관적인 생각은 그럴듯한 이야기에 취약하다. 그러니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릴 때 되도록 드라마처럼 앞뒤가 딱 맞는 그럴듯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 P205
영혼은 소환장이나 반대 심문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영혼은 고요하게 그를 받아들이며 신뢰할 만한 상황에서만 자신의 진실을 말한다. - P24
우리 인생의 의미를 헤아리도록 도와 주는 것은 언제나 침묵이다. 또한 말로는 결코 건드릴 수조차 없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역시 침묵이다. - P25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P32
"신은 내게 ‘왜 너는 모세 같은 사람이 되지 못했느냐?‘라고 묻는 게 아니라, ‘왜 너는 주즈야답게 살지 못했느냐?‘라고 물을 것이오." - P33
참자아의 선로를 벗어났을 때, 어떻게 하면 그 흔적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타고난 재능에 좀더 근접하게 살았던 어렸을 때의 기억에서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 P35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당신이 어떤 진리와 가치관에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당신이 어떤 진리를 구현하고 어떤 가치를 대표해야 할지 인생이 들려 주는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 젊은 시절, 나는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라는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 내어 그것이 내 것이든 아니든 우격다짐으로 나의 인생에 꿰맞추어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혹시 이 책을 읽는 당신도 가치란 원래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그동안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도덕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인 삶이란 베스트셀러 처세서의 차례를 뒤적여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을 일일이 체크해 가며 교양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살다 보면 우리가 너무 미숙한 나머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어떤 가치를 버팀목처럼 세우고 그것에 의지해야 하는 순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 되풀이된다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남의 인생을 살려고 하거나 추상적인 규범에 의존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실패하게 마련이다. 나아가 아주 치명적인 손해를 입게 될 수도 있다. - P16
나는 한때 소명을, 자기 인생이 원하든 원치 않든 따라야만 하는 단호한 의지의 행동이자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는 엄숙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죄의식과 강박증에 사로잡혀 진리와 선의 길을 따른다면 소명에 대한 그런 접근법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우리의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 완전함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아무리 숭고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길러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부여된 강제의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우리 안의 참자아는 침범을 당하면 우리에게 저항할 것이다.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때로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우리 인생을 방해할 것이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참모습이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내 의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결코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한다. - P17
인생의 표면적인 경험 아래에 더 깊고 진실한 인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고생도 해봐야 한다. - P19
흔히 우리는 입에 담아 말했다는 이유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이성이나 에고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때, 우리 내면의 스승이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그런 종류의 말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럴 때는 우리의 인생이 해 주는 말을 잘 듣고 받아 적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잊지 않고, 그것을 들은 적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물론, 인생은 꼭 언어를 통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행동과 반응, 직관과 본능, 감정과 몸의 상태를 통해서 어쩌면 말보다도 더욱 심오한 표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도 식물처럼 어떤 특정한 경험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끌어당기고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것들을 멀리하려는 지향성이 있다. 만약 우리가 자기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읽어낼 수만 있다면(매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가는 그 텍스트를), 더욱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생으로 하여금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 남들에게 기꺼이 해 주고 싶은 말을 하게 해야 한다면, 또한 내가 듣기 싫은 말, 남들에게 결코 하고 싶지 않은 말도 하게 해야만 한다! - P22
이 책에서 나는 내 실수들을 자주 언급할 것이다. 내가 잘못한 선택들, 내 실체에 대한 오해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 순간에 속에 숨겨진 진실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일을 찾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때로 그런 실수 때문에 고통받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는 않는다. 우리 인생은 간디의 자서전 부제를 빌어 말하자면 ‘진실의 실험‘이다. 실험에서는 나쁜 결과도 성공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나의 진실과 소명을 깨달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랬다간 내가 훨씬 더 긴 책을 써야 했을 수도 있지만! - P24
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종종 제목만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원제 《Let Your Life Speak》는 '퀘이커 공동체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경구'(8쪽)다. 직역하면 "너의 삶이 말하게 하라."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표제)나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15쪽)처럼 의역될 수 있겠다.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주 조바심을 내곤 했다. 그 과정에서 큰 괴로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성취는 당연하게도 다른 무언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며, —호사가들의 오랜 얘깃거리인 노력과 행운을 위시한— 여러 요소에 의해 좌우된다. 맞닥뜨렸던 문제들도 어느 부분이 키 포인트고 어떤 방법을 적용하면 해결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아닌 경우도 있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직접 해보면 할 수 없거나 해결을 시도할수록 점점 복잡해지는 문제도 있었다. 어쩌면 진짜 실마리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캉은 인간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통찰했다. 나는 그가 인간이 가진 절대불변의 특성을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식은 으레 변화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데도 무의식에 이끌려 그것을 좇지 않도록 하려면, 행운이 오기를 빌거나 노력을 쏟기에 앞서 '삶이 내게 걸어오는 말'을 듣는 게 우선이다. 다만, 삶은 언어로만 말하지 않는다.
긍정사회는 변증법과 해석학에 작별을 고한다. 변증법의 바탕은 부정성에 있다. 그리하여 헤겔의 "정신Geist"은 부정적인 것에 등을 돌리지 않고, 부정적인 것을 감당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보존한다. 부정성은 "정신의 생명"에 양분을 준다. 자기 속의 타자는 부정의 긴장을 촉발하며, 이로써 정신의 활력을 유지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이 "힘"이 되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무를 때"뿐이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역전시키는 마법"이다. 반면 오직 긍정적인 것 사이에서만 뛰어다니는 자는 정신이 없다. 정신은 느리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며 그것을 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투명성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 처분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보다 긍정성 속에서 질주하는 것이다. - P20
긍정사회는 부정적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대하는 법, 그러한 감정을 형식에 담는 법을 잊어버린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영혼의 깊이, 위대함, 강인함은 바로 부정적인 것에 머무름으로써 나온다. 인간 정신도 산고의 결과이다. "영혼에 강인함을 심어주는 저 불행에 빠진 영혼의 긴장, [.......] 불행을 견디고, 버티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예민함과 용기, 그리고 예로부터 비밀, 가면, 정신, 계략, 위대함으로부터 영혼에 주어져온 것ㅡ그것을 영혼은 괴로움 속에서, 엄청난 괴로움의 훈육 속에서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긍정사회는 인간 영혼을 완전히 새로 조직화하려는 참이다. 영혼의 긍정화 흐름 속에서 사랑 역시 안락한 감정들, 복잡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흥분들의 평면적인 배합으로 전락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싱글 거래소 미틱Meetic의 슬로건에 주의를 환기한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세요!" 또는 "괴로움 없이 사랑하기, 참 쉬워요!" 사랑은 길들여지고 긍정화되어 소비와 안락의 상투형이 된다.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아야 한다. 고뇌와 정열은 부정성의 형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부정성 없는 향락에 밀려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진, 피로, 우울과 같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장애에 의해 대체된다. - P21
정치는 전략적 행위이다. 이미 이 이유 때문에라도 비밀스러운 영역은 정치와 잘 어울린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를 마비시킨다. 카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공개주의 원칙과 특수한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은 [......] 기밀, 즉 정치기술적 비밀이 모든 정치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관념이다. 사유재산과 경쟁에 바탕을 둔 경제활동에서 사업과 경영 상의 비밀이 필수적인 것만큼이나 정치기술적 비밀도 절대주의의 필수 요소이다." - P23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 - P26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불명료함은 오히려 더욱 첨예화된다. - P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