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상대방과 친해서 라포르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 논쟁에서 이긴다거나 말을 멋지게 하는 것보다는 우정을 이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 친구는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내 생각을 진지하게 고려해주는 사람이다. 사실 친구라는 존재 자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형성된 라포르를 허물지 말고, 잘 키워나가고 소중히 여기자. 그렇다고 해서 친구와는 의견 대립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의견 대립 덕분에 우정이 더 단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는 친구임을 무엇보다 유념하자. 논쟁의 소지가 큰 화제를 꺼내기 전에 어느 정도 편안한 라포르 형성 시간을 갖도록 하자. 일단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담소를 나누고, 대화의 목표는 잠시 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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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선이 생각할 때 음양이 태극에서 생성돼 나온다면 우주의 어떤 시점에 기가 없음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리가 기를 생성한다면 기는 영원하지 못하고 생멸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음양에는 시작이 없다"는 정이의 사상과 모순된다. 설선이 생각할 때 기와 그 운동은 우주의 영원한 과정 가운데 한 부분에 해당하며, 기의 운동에는 상대적인 정지와 뚜렷한 변화라는 서로 다른 단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가 어떠한 운동 상태에 있든지 간에 리는 언제나 기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리는 기 속에 존재한다. 리와 기는 절대로 선후를 구분할 수 없다.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는다‘는 말처럼, 움직이기 전에는 고요하며 고요함은 곧 기다. 리와 기를 두고 어떻게 선후를 논하겠는가"라고 강조하였다. - P326

물론 어떤 의미에서 설선이 리를 햇빛에 비유한 까닭을 납득할 수도 있다. 그는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햇빛을 들어, 우주를 가득히 채우면서도 구체적인 형체를 지니지 않는 ‘리‘ 개념에다 비유하였다. 이러한 비유에 꿰맞추자면 기는 단지 흘러다니며 취산하는 구름 정도로 비유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리학에서는 어떤 비유를 사용하든지 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리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실체 자체로 돌아간다는 모순이다. 구성론 자체의 이러한 난점 이외에도, 이러한 구성론은 리학의 또 다른 입장 즉 리는 마땅히 사물의 운동을 지배하는 소이연이어야 한다는 이론과도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햇빛과 같이 천지를 가득 채운 리가 어떻게 일정한 기물 안에 품부되어 일종의 능동 작용을 지닌 ‘소이연‘으로 전화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리학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 P329

인심과 도심의 문제는 천리와 인욕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 이 점에서도 나흠순은 정주와 조금 다른 견해를 제기하였다.

"인심은 인욕이고 도심은 천리이다"라는 정이의 말은 『예기』의 「악기」편에 근거한 것으로, 아주 분명하다. 그런데 나중에 여러 학자들은 종종 인욕이라는 두 글자를 지나치게 의식했기 때문에 논의가 한 곳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성에는 반드시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다. 선천적인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욕구를 절제하고 못하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인 것인데 어찌 그것을 방종하게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태어나면서 고요한 것은 하늘의 성이고,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의 욕구이다"는 『예기』의 「악기」편의 한 문단은 그 의리가 정밀하고 순수하니, 성인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육구연은 이것마저 의심하였으니, 의심이 지나쳤다. 그는 아마도 욕구를 악으로 여긴 듯하다. 사람이 욕구를 지닌다는 것은 분명히 선천적이다. 필연적이어서 그칠 수 없는 것이 있고, 또 당연하여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 그칠 수 없는 것이 모두 당연한 원칙에 합당하다면 어디에서든 선하지 않겠는가? 오직 정을 제멋대로 내버려 두고 욕구를 풀어 놓은 채 되돌이킬 줄 모르니, 악이 되는 것이다. 선배 유학자들은 대부분 인욕을 없애거나 인욕을 막도록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인욕에 빠지는 것을 엄격히 방비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말의 의도가 편중된 듯하다."

나흠순이 생각할 때 ‘인심’을 ‘인욕’으로 여기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며, 인욕을 ‘없애라’는 견해도 ‘편중된 듯하다.’ 욕망은 인성의 고유한 요구이며 이미 선천적으로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인욕일 뿐만 아니라 천욕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욕망을 전적으로 ‘악하다’고만 간주하는 주장은 잘못이다. 욕망의 발생은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기도 하다. 도덕 준칙을 위배하지 않는 욕망이라면 선한 것이다. 오직 정욕의 방탕함에만 내맡기면서 규범이 없을 때에만 비로소 악한 것이 된다. 정주 리학의 ‘리욕지변’이 지닌 병폐에 대한 나흠순의 비판은 옳다. 그는 감성적 욕망을 극복하고 억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긍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욕망의 필연성과 합리성도 긍정하였다. - P432

유학자는 "천지만물의 모든 형상은 퇴색되게 마련이지만, 오직 리만이 낡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은 어리석은 소리다. 리에 형질이 없는데 어떻게 낡을 수 있겠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선양이 있은 다음에 방벌이 있었고, 방벌이 있은 다음에 찬탈이 있었다. 정전제가 망가지자 천맥제가 생겼고, 봉건제가 폐지되자 군현제가 실시되었다. 앞서 실행되었던 제도는 뒤에 실행할 수 없고, 고대에 제정된 제도는 오늘날에 실행할 수 없다. 리는 시대에 따라 마땅함에 이른다. 지나간 것은 모두 추구일 따름이니 낡고 퇴색되지 않겠는가?

왕정상의 사상에 입각할 때, 만물의 규율은 사물 자체의 물질적인 존재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규율이란 물질 과정의 규율이다. 물질 과정과 조건이 변하면 그에 상응하게 규율 내용도 변한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규율이 영원 불변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규율과 법칙도 변화하는 것이라는 변증법적 이해를 지녀야 마땅하다. 왕정상은 이러한 사상을 인류 사회에 응용하여 정주리학을 비판함으로써 적극적인 의의를 직접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정주 리학에서는 인류 사회의 어떠한 발전 단계에서도 어떤 원칙들을 영원한 규율의 표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왕정상이 생각할 때 인류 사회의 각종 원칙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사물의 법칙은 구체적인 사물처럼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새로 영글었다가 부패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시대에는 서로 다른 규범과 원칙이 있게 마련이다. 과거의 것은 폐기물처럼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못한다. 이러한 사상은 리가 "시대에 따른 마땅함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표명한다. 정주 리학에 대해 왕정상은 대단히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 P444

영아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도 먹고 마실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나오자마자 듣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천성적인 지식이며, 신묘한 조화의 끊이지 않음이다. 그 나머지는 학습하여 알게 되고, 깨달아 알게 되며, 잘못하여 알게 되고, 의심하여 알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람이 노력하여 아는 것이다. 부모 형제 간의 친근함도 학습하여 익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부모가 아이를 낳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맡겨 기른다면, 장성한 뒤 그 아이는 오직 길러 준 사람만을 친근히 대한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친부모를 만나도 남으로 여겨 모욕할 수도 있고 꾸짖거나 욕할 수도 있다. 이것을 천성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부자 사이의 친근함을 미루어 유추한다면 만물 만사에 대한 지식이란 모두 학습하고, 깨닫고, 잘못하고, 의심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요컨대 사람의 도덕 감정은 사회 생활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배양된다. 만약 어떤 아이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양육되고 친부모와 아무런 접촉도 갖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친부모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 왕정상은 사람의 인식 능력이 천부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떠한 감성 경험도 지니지 못할 때는 지식을 획득할 방도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왕정상은 한 차례에만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어떤 어린아이를 어두운 방에 가둔 채 외부 사물과 전혀 접촉하지 못하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그 방을 나왔을 때, 그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모를 것이고, 더욱이 천지의 높고 넓음이나 귀신의 존재, 고금의 사건 등과 같은 복잡하고 심오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지식은 사회 생활의 경험에 의존한다’는 주장은 확실히 선험론을 반박하는 데 유력한 주장이다. - 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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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에 혹은 자기 의지로, 또 혹은 상대방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기가 끝나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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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이들을 두루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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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스 카플란이 신념 변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유의지라는 개념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습니다. 우주는 결정론적이에요.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써내려 가는 주체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보다 226 앞선 무언가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니까요."
그는 이런 경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결정은 부분적으로 감정 상태에 의해 조절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에게 자유의지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는 것을 우울하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는 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인지과학 종사자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최근의 수많은 연구들은 자유의지에 대한 개인의 믿음이 약해지면 자기중심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이 늘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대체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사회의 규칙을 무시하고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성향이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신념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사회가 매끄럽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매끄럽게 돌아가는 인생을 위해서도). - P225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면 더 열린 마음을 향해, 더욱 깊어진 연민과 이타주의를 향해 나아가도록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2017년 말에 『연민의 과학 옥스퍼드 핸드북』이라는 환상적인 책이 발표됐다. 이 책은 이 신흥 분야에서 나온 연구 결과들을 리뷰하는 책이다. 나는 이것이 내리고 있는 주요 결론을 다섯 가지 팁으로 요약해서 모두가 연민과 향상된 소통 능력을 일상 속으로 통합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우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워 그 내용을 긍정적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행위는 자신의 감정을 지각하는 방식에 신체적인 변화 320 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나 화가 났어‘라고 차분하게 말하는 행위는 뇌 속의 원시적인 감정적 분노 반응을 누그러뜨려 고등 인지 회로로 활동을 올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분노에 따르는 감정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운이 따라 준다면 당신이 이런 감정을 표출했던 사람이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반응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자신의 감정을 입으로 표현하기만 해도 당신의 뇌 속에서는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긍정적이고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와 비슷하게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몸짓, 얼굴표정, 행동 등을 관찰함으로써 명확한 언어적 단서 없이도 그 사람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법을 훈련하는 것에서 도움을 얻는다. 이런 기술을 익히면 우정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되고, 더욱 연민 어린 관점이 자랄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얼굴에 감정을 표현하고, 그 감정을 읽는 연습을 해 봐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즐거운 저녁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연민의 명상 연습하기
이것을 하려면 자기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에 방점을 찍고 자아 성찰을 할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이 행동의 목적은 자신의 결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에게 연민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주의를 돌려 그들을 자신의 연민과 감사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삶에서 대하기 어려웠던 사람들, 당신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321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 목적은 그들 역시 사랑과 친절, 평화로 채워지기를 빌어 주는 것이다. 연민의 명상은 마음챙김mindfulness, 행복,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 걱정의 감소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명상은 잠재적으로 부정적이거나 괴로운 사건도 거기에 압도당하지 않을 새로운 방식으로 틀 잡을 수 있게 해서 그런 사건을 잘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 명상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두려움과 쾌락이 들쭉날쭉 불안정한 보상경로 중심의 생활과 거리를 두고 좀 더 안정된 마음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3. 타인의 연민에 감사하기
다른 사람의 이타적인 행동을 목격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인 감정을 품을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타인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들게 해 준다. 이것은 도덕성을 고양해 준다. 도덕성 고양은 경외심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강력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투쟁-도피 반응을 담당하는 좀 더 원시적인 감정 회로에 대한 앞이마겉질의 통제력을 높여 주기 때문에 좀 더 집행력 있는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도덕성 고양은 또한 옥시토신 수치를 높이고,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신경가소성을 높여 예상치 못했던 경험을 더욱 잘 이해하고 통합할 수 있게 해 준다. 종합해 보면 도덕성 고양이라는 이 긍정적인 감정은 ‘선행 나누기‘ 정신을 고양해 준다. 사람들의 친절한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사회 322 전반에 연민을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4. 감사의 마음 갖기
우리는 대단히 개인주의적인 사회에 살고 있지만 혼자서 자급자족할 수 있게 진화하지는 않았다. 인간이 친사회적인 뇌를 발달시키게 된 것은 서로 의존할 때 생기는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가 성립되면 생존에 도움이 된다. 타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 단순한 행위도 그런 지지를 소중히 여기는 데 도움이 된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그날 하루 감사했던 세 가지 일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이렇게 하면 그런 일을 있게 해 준 사람에게 잊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하루에 긍정의 마침표를 찍고, 나 자신도 친절한 행동을 통해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유도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5. 연민에 초점을 맞추는 부모가 되기
연민을 강화하는 환경 속에서 아이를 키우면 나중에 자기만의 긍정적인 지지 네트워크를 발전시키고 세대를 가로질러 이타주의를 더 널리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아이들은 보호자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어떤 감정이 용인되는 감정인지, 그런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배운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느린 호흡 같은 기술을 이용해서 감정을 통제해서 분노를 가라앉히는 행동은 당신 자신이나 자식 모두에게 이롭다. 연구에 따르면 시간을 내어 자기관리를 323 하는 부모를 둔 아동도 그와 유사하게 장기적으로 그에 따른 혜택을 입는다고 한다. 건강하게 잘 먹고,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라. 그리고 취미생활을 통해 긴장을 풀고 명상을 실천하라.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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