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선이 생각할 때 음양이 태극에서 생성돼 나온다면 우주의 어떤 시점에 기가 없음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리가 기를 생성한다면 기는 영원하지 못하고 생멸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음양에는 시작이 없다"는 정이의 사상과 모순된다. 설선이 생각할 때 기와 그 운동은 우주의 영원한 과정 가운데 한 부분에 해당하며, 기의 운동에는 상대적인 정지와 뚜렷한 변화라는 서로 다른 단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가 어떠한 운동 상태에 있든지 간에 리는 언제나 기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리는 기 속에 존재한다. 리와 기는 절대로 선후를 구분할 수 없다. ‘태극이 움직여 양을 낳는다‘는 말처럼, 움직이기 전에는 고요하며 고요함은 곧 기다. 리와 기를 두고 어떻게 선후를 논하겠는가"라고 강조하였다. - P326
물론 어떤 의미에서 설선이 리를 햇빛에 비유한 까닭을 납득할 수도 있다. 그는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 햇빛을 들어, 우주를 가득히 채우면서도 구체적인 형체를 지니지 않는 ‘리‘ 개념에다 비유하였다. 이러한 비유에 꿰맞추자면 기는 단지 흘러다니며 취산하는 구름 정도로 비유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리학에서는 어떤 비유를 사용하든지 간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리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실체 자체로 돌아간다는 모순이다. 구성론 자체의 이러한 난점 이외에도, 이러한 구성론은 리학의 또 다른 입장 즉 리는 마땅히 사물의 운동을 지배하는 소이연이어야 한다는 이론과도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햇빛과 같이 천지를 가득 채운 리가 어떻게 일정한 기물 안에 품부되어 일종의 능동 작용을 지닌 ‘소이연‘으로 전화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리학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 P329
인심과 도심의 문제는 천리와 인욕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 이 점에서도 나흠순은 정주와 조금 다른 견해를 제기하였다.
"인심은 인욕이고 도심은 천리이다"라는 정이의 말은 『예기』의 「악기」편에 근거한 것으로, 아주 분명하다. 그런데 나중에 여러 학자들은 종종 인욕이라는 두 글자를 지나치게 의식했기 때문에 논의가 한 곳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성에는 반드시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다. 선천적인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욕구를 절제하고 못하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인 것인데 어찌 그것을 방종하게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태어나면서 고요한 것은 하늘의 성이고,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의 욕구이다"는 『예기』의 「악기」편의 한 문단은 그 의리가 정밀하고 순수하니, 성인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육구연은 이것마저 의심하였으니, 의심이 지나쳤다. 그는 아마도 욕구를 악으로 여긴 듯하다. 사람이 욕구를 지닌다는 것은 분명히 선천적이다. 필연적이어서 그칠 수 없는 것이 있고, 또 당연하여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다. 그칠 수 없는 것이 모두 당연한 원칙에 합당하다면 어디에서든 선하지 않겠는가? 오직 정을 제멋대로 내버려 두고 욕구를 풀어 놓은 채 되돌이킬 줄 모르니, 악이 되는 것이다. 선배 유학자들은 대부분 인욕을 없애거나 인욕을 막도록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인욕에 빠지는 것을 엄격히 방비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말의 의도가 편중된 듯하다."
나흠순이 생각할 때 ‘인심’을 ‘인욕’으로 여기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며, 인욕을 ‘없애라’는 견해도 ‘편중된 듯하다.’ 욕망은 인성의 고유한 요구이며 이미 선천적으로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인욕일 뿐만 아니라 천욕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욕망을 전적으로 ‘악하다’고만 간주하는 주장은 잘못이다. 욕망의 발생은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기도 하다. 도덕 준칙을 위배하지 않는 욕망이라면 선한 것이다. 오직 정욕의 방탕함에만 내맡기면서 규범이 없을 때에만 비로소 악한 것이 된다. 정주 리학의 ‘리욕지변’이 지닌 병폐에 대한 나흠순의 비판은 옳다. 그는 감성적 욕망을 극복하고 억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긍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욕망의 필연성과 합리성도 긍정하였다. - P432
유학자는 "천지만물의 모든 형상은 퇴색되게 마련이지만, 오직 리만이 낡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은 어리석은 소리다. 리에 형질이 없는데 어떻게 낡을 수 있겠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선양이 있은 다음에 방벌이 있었고, 방벌이 있은 다음에 찬탈이 있었다. 정전제가 망가지자 천맥제가 생겼고, 봉건제가 폐지되자 군현제가 실시되었다. 앞서 실행되었던 제도는 뒤에 실행할 수 없고, 고대에 제정된 제도는 오늘날에 실행할 수 없다. 리는 시대에 따라 마땅함에 이른다. 지나간 것은 모두 추구일 따름이니 낡고 퇴색되지 않겠는가?
왕정상의 사상에 입각할 때, 만물의 규율은 사물 자체의 물질적인 존재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규율이란 물질 과정의 규율이다. 물질 과정과 조건이 변하면 그에 상응하게 규율 내용도 변한다. 따라서 세계의 모든 규율이 영원 불변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규율과 법칙도 변화하는 것이라는 변증법적 이해를 지녀야 마땅하다. 왕정상은 이러한 사상을 인류 사회에 응용하여 정주리학을 비판함으로써 적극적인 의의를 직접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정주 리학에서는 인류 사회의 어떠한 발전 단계에서도 어떤 원칙들을 영원한 규율의 표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왕정상이 생각할 때 인류 사회의 각종 원칙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사물의 법칙은 구체적인 사물처럼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새로 영글었다가 부패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시대에는 서로 다른 규범과 원칙이 있게 마련이다. 과거의 것은 폐기물처럼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못한다. 이러한 사상은 리가 "시대에 따른 마땅함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표명한다. 정주 리학에 대해 왕정상은 대단히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 P444
영아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도 먹고 마실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나오자마자 듣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천성적인 지식이며, 신묘한 조화의 끊이지 않음이다. 그 나머지는 학습하여 알게 되고, 깨달아 알게 되며, 잘못하여 알게 되고, 의심하여 알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람이 노력하여 아는 것이다. 부모 형제 간의 친근함도 학습하여 익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부모가 아이를 낳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맡겨 기른다면, 장성한 뒤 그 아이는 오직 길러 준 사람만을 친근히 대한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친부모를 만나도 남으로 여겨 모욕할 수도 있고 꾸짖거나 욕할 수도 있다. 이것을 천성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부자 사이의 친근함을 미루어 유추한다면 만물 만사에 대한 지식이란 모두 학습하고, 깨닫고, 잘못하고, 의심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요컨대 사람의 도덕 감정은 사회 생활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배양된다. 만약 어떤 아이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양육되고 친부모와 아무런 접촉도 갖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친부모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또 왕정상은 사람의 인식 능력이 천부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떠한 감성 경험도 지니지 못할 때는 지식을 획득할 방도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왕정상은 한 차례에만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어떤 어린아이를 어두운 방에 가둔 채 외부 사물과 전혀 접촉하지 못하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그 방을 나왔을 때, 그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모를 것이고, 더욱이 천지의 높고 넓음이나 귀신의 존재, 고금의 사건 등과 같은 복잡하고 심오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지식은 사회 생활의 경험에 의존한다’는 주장은 확실히 선험론을 반박하는 데 유력한 주장이다. - P4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