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실감은 현상이 있다는 사실과 사물이 은폐된 존재의 어둠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공론 영역이 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적이고 친밀한 삶을 비추는 희미한 빛도 결국 그 광력을 공론 영역의 보다 강한 빛에서 얻는다. 그러나 공적인 무대에 있는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에서 오는 강력한 빛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도 많다. 공론 영역에서는 보고 듣기에 적절하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만이 공적인 빛을 견딜 수 있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것들은 자동적으로 사적인 문제가 된다. 사적인 관심이 일반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 오직 사적 영역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안다. 예컨대 사랑은 우정과는 달리 공적으로 드러나는 한, 끝나거나 없어진다. ("사랑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마세요. /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 내재하는 무세계성 때문에 사랑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고 구원하려는 모든 정치적 시도는 우리에게 거짓되고 왜곡된 것으로 비친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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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는 미래를 100% 결정짓지 않는다
ㅡ 사주와 현대 사회

 정확하게 말하면 명리학(혹은 사주학)은 앞선 이들이 오랫동안 관심을 두었던 "인간 길흉화복 예측"이라고 하는 목적에 여전히 도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사주는 없다를 외치며 폐기하는 것도 썩 바람직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문화를 강제로 소멸시켜서는 안될 뿐더러, 명리학이 인간의 주요 관심사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 되지도 않을 것이다.

 사주학의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다른 모든 학문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중에서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에게 내재된 자연의 원리를 인간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서 탐구한다는 것이다. 여느 학문처럼 연구 방법론과 도구도 존재한다. 근본적으로 천체가 순환한다는 사실로부터, 출생시의 시공간에 주어진 특정한 기가 인간에게 입력된다고 본다. 그것이 각각 네 개의 천간-지지 쌍으로 표현된다. 기본적인 개념으로서 음과 양, 그것이 구체화된 목화토금수의 오행, 천간과 지지, 십성, 십이운성, 오행의 생극제화 등이다. 사주명리학은 이러한 도구를 통해 인간에 내재한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며,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참고 자료로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최근 2-30대가 사주학에 주목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점차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불안감을 표상하는군."같은 진부한 촌평(사실상, 미래는 과거에도 확실하지 않았고, 우리는 언제나 불안했다)을 제외한다면, 이러한 현상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다른 측면도 있을까.

 20세기 말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이후의 세계화 국면에서, 현대 기술 문물을 누리며 과학기술 중심 교육을 받고 자라온 소위 말하는 "MZ세대"의 "미신"에 대한 관심이다. 신비주의적 권위로 무장하고 뜻 모를 글자를 적어가며 호통치듯 천기를 누설하던 역술인들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주를 풀이하고 공부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여느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유튜브나 웹사이트를 통해서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사주는 이미 사업적인 면에서 제법 돈이 되기도 한다. 사주/운세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제공하는 "포스텔러"나, 사주 상담 예약 서비스인 "천명"과 같은 제법 성공한 벤처기업이 등장했다. 10만 구독자를 보유한 사주 유튜버도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사주가 정신과 방문이 꺼려지는 이들에게 상담이나 카운셀링의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사업성은 이미 나타난 사주명리학의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주학이 가진 학문적 가능성은 없을까?

 나는 사주 이론이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으로 체계화되어 정립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다만 역술인의 직감과 예측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기존 사주학과는 달리,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파악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고 이를 신진 연구가들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라고 본다. 가장 큰 요인은 투입량(input)의 증가다. 한 명의 대중 인문 강연자의 성공 뒤에는 이를 받쳐주는 수많은 연구자들이 있는 것처럼, 인풋이 늘어나면 아웃풋도 커지기 마련이다. 직업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는, 소위 "덕후"기질이 충만한 현대인의 특성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이론적 지식은 무엇이어야 할까? 사주학의 기본 바탕은 천체의 운행, 즉 천문학이다. 음양오행이라는 전통 동양 개념과 현대 과학의 개념 및 용어 사이의 호환성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 천문학 지식을 적용하는 일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다. 가령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을 공전한다고 알려졌는데, 이에 따르면 태양계 행성들은 동일한 공간을 반복적으로 운행하는 것이 아닌, 우주 공간에서 나선형의 궤도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60년마다 동일한 사주를 가진 사람이 태어난다. 태양의 공전 주기는 약 2억 3천만년이므로 같은 시공간의 에너지(혹은 기)를 부여받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구와 가까워 인력을 크게 미치는 태양계의 천체들도 60년마다 같은 위치에 배열되지 않는다. 이 점이 사주학이 가진 치명적 맹점이 아닐까 한다.

 여전히 과학계에서조차도 인간이 천체 운동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 추후 다양한 연구가 진행될 여지가 충분한 이유다. 지금까지 공개된 연구 결과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보름달이 식욕 억제 호르몬 분비를 증가시키고 식욕 자극 호르몬은 억제시킨다는 연구(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2015), 보름달이 떴을 때 대동맥 박리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사망률이 삭, 초승달, 그믐달이 뜬 날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 비해 21% 낮았다는 연구(미국 로드아일랜드 병원, 2017), 그믐달이 뜬 날의 멜라토닌 분비량이 8pg/ml였던 것에 비해 보름달이 뜬 날은 4pg/ml로 수면에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스위스 바젤대학교, 2013) 정도다.

 현재 세계의 모든 곳은 "인간 창의성 실험장"과 마찬가지다. 기후 위기와 핵전쟁, AI의 위협과 같은 비관적인 미래가 우리를 짓누른다. 인간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야 하는 시기다. 수많은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 나타날지 모를 놀라운 혁신을 기대하고 있다. 어쩌면 사주학에서 놀라운 혁신의 단초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주희는 《격물보전》에서, 격물치지의 누적이 계속될 때 어느 날 홀연히 활연관통의 경지에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자연과학자가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비록 주자학이 당시 그러한 과학적 풍토를 조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주희 자신은 확실히 과학적 탐구정신이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주희가 풀 한 포기의 격물을 이야기했으니, 사주가 격물의 대상이 되는 것에 전혀 문제는 없을 것이다. 현대 학문에 다양한 분과 학문이 존재하고, 저마다의 탐구 방법을 사용하는 여러 학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뜻있는 젊은 명리학 연구자들이 제시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대해본다. "사주," "명리"에 "學"자를 붙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날이 조만간 찾아오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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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몸의 모든 느낌들 가운데 고통만이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과 같다. 인간이 쾌감을 좇으려고 애쓰는 곳 어디서나 쾌감은 막다른 길임이 밝혀진다.
_발터 벤야민 - P7

네가 고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하라,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에른스트 융어의 이 구절은 사회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고통은 암호다. 고통에는 각각의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가 담겨 있다. 따라서 모든 사회비판은 고통을 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에만 맡길 때, 우리는 고통이 기호로서 갖는 성질을 놓치게 된다. - P9

 고통공포는 정치까지 장악한다. 일치강제와 동의 압박이 심해진다. 정치는 일종의 진통지대에 자리를 잡고 활력을 모조리 상실한다. "대안의 부재"라는 주장은 정치적 진통제Analgetikum로 작용한다. 막연한 "중도"가 진통작용을 한다. 논쟁하고 더 나은 논거를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우리는 체제의 강제에 투항한다. 탈민주주의가 확산된다. 탈민주주의는 진통적인 민주주의다. 그래서 샹탈 무페는 고통스러운 대결을 피하지 않는 "경합적 정치agonistische Politik"를 요구한다. 진통적인 정치는 고통을 줄 수 있는 비전이나 날카로운 개혁을 추구하는 능력이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체제의 기능장애나 불화를 그저 은폐할 뿐인, 단기 효과만 지니는 진통제를 움켜쥘 뿐이다. 진통적인 정치는 고통을 감수할 용기가 없다. 그 결과, 동일한 것이 지속된다. - P10

 생산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 전략으로서의 창의성은 동일한 것의 변주만 허락한다. 완전한 타자에는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창의성에는 고통을 주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고통과 상업은 서로를 배제한다. - P15

예술영역이 소비영역과는 철저히 분리된 채 그 자신의 논리를 좇던 때, 사람들은 예술이 만족을 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상업을 멀리했다. 예술은 "세상에 대한 낯섦‘이라는 아도르노의 격언은 아직 유효했다. 아도르노의 말이 맞다면 쾌적한 예술이란 모순이다. 예술은 낯설게 하고, 교란하고, 당황하게 하고, 고통을 줄 수도 있어야 한다. 예술은 어딘가 다른 곳에 머무른다. 예술의 집은 낯선 곳에 있다. 다름 아닌 낯섦이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고통은 완전한 타자가 들어오는 균열이다. 완전한 타자의 부정성이야말로 예술로 하여금 지배적 질서에 대한 반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 만족을 주는 것은 동일한 것을 지속시킨다. - P15

영웅적 세계상에는 고통도 반드시 포함된다. 《반反고통》이라는 제목의 미래파적인 선언에서 알도 팔라체스키(1885~1974, 이탈리아의 작가, 시인-옮긴이)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 속에서 더 많은 양의 웃음을 발견해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더 깊이가 있다. 이전에 인간의 고통 속에 깊이 파묻힌 적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웃을 수 없다." 영웅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언제든 고통과 만날 수 있도록 "무장"되어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 고통의 장소로서의 몸은 더 높은 차원에 예속된다.
"물론 이 절차는 하나의 사령탑이 있을 것을 전제한다.
이 사령탑으로부터 몸은 인간이 원거리에서 투쟁에 투입하고 희생시킬 수 있는 하나의 전초로서 관찰된다." - P19

스마트한 권력은 유혹적이고 관대하게 작업한다. 자유의 모습으로나타나기 때문에 억압적 규율권력보다 더 잘 보이지 않는다. 감시도 스마트한 형식을 취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소망과 취향을 알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전면적 소통과 전면적 감시, 포르노그래피적 노출과 파놉티콘적 감시가 서로 같아진다. 자유와 감시는 구별할 수 없게 된다. - P21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의 피로는 나의 피로로 간주되고, 이런 점에서 비정치적이다.
이 피로는 혹사된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피로는 사람들을 하나의 우리로 결합하지 않고 오히려 개별화한다. 그러므로 이 피로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우리의 피로와 구별되어야 한다. 나의 피로는 혁명을 막는 최상의 예방약이다. - P24

행복은 최적화 논리를 거부한다. 행복의 특징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고통은 행복에 지속성을 부여해준다.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 아니다. 모든 강렬함은 고통스럽다. 걱정은 고통과 행복을결합한다. 깊은 행복은 괴로움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고통과 행복은 "서로 결합하여 크게 자라거나 [・・・] 서로 결합하여 작게 남아 있는 형제이며 쌍둥이다." 고통이 저지되면 행복은 흐릿한 편안함으로 쪼그라든다.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깊은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수많은 종류의 괴로움이 무한한 눈보라처럼 쏟아지고, 고통의 가장 강력한 번개 또한 그에게 떨어진다. 모든 방향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고통에 항상 열려 있을 때만 그는 가장 섬세하고 드높은 종류의 행복에도 열려 있을 수 있다." - P25

 오늘날 고통은 오로지 육체적이기만 한 고통으로 사물화되었다. 고통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예컨대 고통을 신학적 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적 행위로 일면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통의 의미 상실은 생물학적 과정으로 축소된 우리의 삶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음을 암시한다. 고통이 의미를 지니려면 삶을 의미 지평 안으로 편입시키는 서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 의미를 상실한 벌거벗은 삶 속에서만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다. - P38

고통은 처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이다. 하지만 이 둑은 "이야기의 물살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휩쓸어간다면" "무너진다." 아픈 아이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은 이야기가 흘러갈 강바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고통은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 자체가 이야기의 강물을 불어나게 하여 이 강물이 고통을 휩쓸어가게 만든다.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만 고통은 실제로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이 된다. - P39

융어가 주장하는 고통의 간지는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다. 분명 삶에서 고통을 몰아낼 수는 없는 것 같다. 고통은 삶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온갖 방법으로 관철시키는 듯하다. 통증의학이 매우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종류의 진통제가 있지만 고통은 정복될 수 없다. 융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통의 선명한 그림자는 지워졌지만, 그 대신 산란하는 빛이 공간을 채운다. 고통은 희석된 형태로 넓게 살포된다. 오늘날 만성 통증이 대량으로 발생하는 것은 융어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해주는 것 같다. 가장자리로 밀려난 무언의 고통이, 의미도 언어도 형상도 없이 지속되는 고통이 고통 적대적인 진통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다. - P46

빅토르 폰 바이츠제커는 에세이 <고통들>에서 고통을
"살이 된 진실", "진실의 육화"라고 부른다. 결별이 고통을 줄 때, 그 이전에 맺어졌던 결속이 진실했음이 입증된다. 진실만이 고통을 준다. 모든 진실은 고통스럽다. 진통사회는 진실 없는 사회이며 같은 것의 지옥이다. "삶의 질서의 짜임새"는 "고통이라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삶의 질서는 "고통의 질서"다. 고통은 진실을 가늠하는 믿을 만한 기준이며, "살아 있는 것들의 현상 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도구"다. 고통은 참된 결속이 위협받을 때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눈이 멀고, 진실을 분간할 수도 없고, 인식할 능력도 잃는다. "이런 결별이 고통을 준다면 그 결속은 참된 것이었고 육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겪을 수 있을 때만 진실로 현존하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랑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짜임새에 대한 눈이 뜨인다. 고통을 겪을능력이 있을 때, 존재자는 그저 기계적이고 공간적인 병존Nebeneinander을 넘어서서 진실한,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공존Miteinander을 진실로 실행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도 살지도 않은 것이다. 삶은 편안한 생존을 위해 희생된다. 오직 살아 있는 관계만이, 진정한 공존만이 고통을 줄 수 있다. 반면 생명 없는 기능적인 병존은 심지어 그것이 파괴될 때도 고통을 주지 않는다. 살아 있는 공존을 죽은 병존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고통이다. - P50

 고통은 결속이다.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속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을 줄 수 있는 깊은 관계를 피한다. 모든 일이 고통이 억제된 안락구역 안에서 일어난다. 《사랑 예찬》에서 알랭바디우는 어떤 데이트 포털의 광고 문구를 인용한다. "아픔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타자를 성적 대상으로 사물화하는 소비로서의 사랑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이런 사랑은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서의 에로스와 대립한다. - P51

나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그 각각의 것들이 내게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게되고, 고통의 이런 법칙이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 및 세상 만물이 내게 지닌 가치를 온전히 결정한다." 고통이 없다면 구별에 근거하는 가치평가가 불가능해진다. 고통 없는 세상은 같은 것의 지옥이다. 이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차별성이다. 이런 세상은 독특함을 소멸시킨다. - P52

고통은 자기 지각을 강화한다. 고통은 자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통은 자아의 윤곽을 표시한다. 증가하는 자상행위는 나르시시즘적이고 우울에 빠진 자아가 자신을 확인하고 느끼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실존감 또한 고통이있어야 가능하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면 고통을 대체할 다른 것을 찾게 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고통이 구제책이 된다. 익스트림 스포츠와 모험적 태도는 자신의 비실존을 확인하려는 시도들이다. 이렇게 진통사회는 역설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을 만들어낸다. 고통의 문화가 없으면야만이 생겨난다. "무감각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생동감을 주려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여전히 자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극들로는 이제 마약, 폭력테러만 남아 있다." - P54

아름다움은 고통의 반대색이다. 고통 앞에서 정신은 아름다움을 상상한다. 정신은 고통으로 인해 일그러진 사람 앞에 온전한 것을 제시한다. 아름다운 가상은 그 사람을 진정시킨다. 고통은 정신으로 하여금 현존하는 세계에 맞서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치유하는 반反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한다. "고통에 맞서고자 하는 지성의 어마어마한 긴장은 지성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빛을 받아 반짝이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조명들이 낳는 말로 할 수 없는 매력은 흔히 너무나 강력하여 고통받는 자가 모든 자살의 유혹을 이겨내고 삶을 연장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도록 만든다." 고통은 상상력을 활성화한다. 니체는 예술이 현존의 견딜 수 없고 끔찍한 면들을 마술로 사라지게 해주는 "구원하는 마술사, 능숙하게 치료해주는 마술사"라고 했다. - P57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만날 때, 소통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좋아요가 소통을 가속화한다. 고통의 작용은 이와 반대다. 고통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경향이야말로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해준다. - P60

하이데거의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서 출발한다. 존재 덕분에 존재자는 명백함을 갖게 되고, 이해될 수 있다. 존재가 먼저 파악되어야 존재자에 대해 이해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나의 관심을 어떤 대상으로 돌리기 전에, 나는 이미 성찰 이전에vorreflexiv 파악된 세계 안에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기분Stimmung이 세계를 파악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성찰 이전에 기분을 통해 파악된, 그러나 따로 의식되지는 않는 세계는 대상을 향하는 지향성에 선행한다. "기분은 이전에 이미 전체로서의 세계 내 존재를 파악했고, ...
을 향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기분과 같은 현상들은 이미 하이데거의 사유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das Unverfügbare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성찰 이전에 파악된 세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세계 안으로 내던져졌고, 내맡겨졌고, 이 세계에 의해 기분으로규정되어 있다be-stimmt. 실로 기분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리를 덮치는 어떤 것이다. - P68

오늘날에는 정신적 태도로서의 인내와 기다림 또한 침식되고 있다. 인내와 기다림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강제로 인해 사라지고 있는 하나의 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길고 느린 것 안에서 인내하는 기다림은 특별한 의도성을 갖는다.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태도다. 이 기다림은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안에 서 있음In-Ständigkeit이 이 기다림의 특징이다. 이 기다림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자신을밀착시킨다. 포기가 의도 없는 기다림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포기는 준다gibt. 포기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점에서 소비와 반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포기해야 함과 내어줌을 슬픔 속에서 견디는 것"이 "잉태"다. 고통은 어떤 결핍을 가리키는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잉태, 나아가 존재의 잉태다. 고통은 주어지는 것Gabe이다. - P76

반면 지금 우리는 내밀한 개인적 데이터들까지 자발적으로 내놓고 있다. 강제가 아니라 내적 욕구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 우리를 구석구석 철저히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한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여기서 자유의 변증법이 일어난다. 자유의 표현인 무한한 소통이 총체적 감시로 변한다. - P89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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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風雷益풍뢰익 九五구오

九五구오는 有李惠心유부혜심이라 勿問물문하여도 元吉원길21하니 有学유부하여 惠我德혜아덕22하리라.

구오는 진실함을 가지고 마음을 은혜롭게 하려고 한다. 묻지 않더라도 크게 길하니, (천하의 사람들 역시) 진실함을 가지고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길 것이다.


주21 "혜심(惠心)"은 천하에 은혜를 베풀려는 마음을 말한다. 또 "물문(勿問)"은 조금도 의문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최경(崔憬)은 『주역집해』에서 "문(問)"을 "언(言)" 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은 구오가 양강(陽剛), 중정(中正)의 덕으로 군주의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육이와 상응하여 아래에 은혜를 베풀려고 하는 진실한 마음, 즉 자기가 가진 것을 덜어서 다른 것에 더해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도 없이 "크게 길하다" 라고 말한다. 손괘와 익괘의 오효에는 모두 "크게 길하다"는 말이 있다. 두 효의 차이에 대해 정유악(鄭維岳)은 『주역절중』에서 "손괘의 육오는 아래의 보탬을 받지만, 익패의 구오는 아래를 보태주고 있다. 손괘의 육오가 보탬을 받기 때문에 크게 길함을 얻고, 익괘의 구오는 백성은 마땅히 보탬을 받아야 한다는 것만을 알 뿐이기 때문에 "묻지 않더라도 크게 길하다"고 하는 것이다(損之六五, 受下之益者也, 益之九五, 益下者也, 損六五受益而獲元吉, 益九五但知民之當益而已, 勿問元吉也)"라고 하였다. 이처럼 두 효가 이야기하는 각도는 조금 다르다. 다시 말하면 손괘의 육오는 아래의더함을 받는 위치이고, 익괘의 구오는 아래를 더해주는 경우이다.

주22 "아(我)"는 구오를 가리키고,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길 것이다(惠我德)"는 말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은덕에 대해 진심으로 보답하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앞의 문장에서 말하는 "원길(元吉)"의 의미를 이어서 설명하는 내용에 해당한다. 구오의 길(吉)이라는 것은 천하가 크게 이익 받는 것 이외에 또한 천하의 사람들이 위로부터의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낀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상하가 서로 믿음을 주고받고 마음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 길함이 매우 크다. 이에 대해 주자는 『주역본의』에서 "윗사람이 진실함을 두어 아랫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아랫사람 또한 믿음을 두어 윗사람을 은혜롭게 여길 것이니 묻지 않아도 크게 길함을 알 수 있다(上有信以惠於下, 則下亦有信以惠於上矣, 不問而元吉可知)" 라고 하였다. - P179

象日상왈 有李惠心유부혜심이라 勿問之矣물문지의며 惠我德혜아덕이 大得志也대득지야23라.

상전에 말하기를 진실함을 가지고 마음을 은혜롭게 함이 있으니 물을 필요도 없으며,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기는 것은 크게 뜻을 얻는 것이다.


주23 명령이 진실함에서 나오고 실제 정치를 시행할 때 민심을 따라 하는 정부는 분명히 크게 길하고 크게 이로울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진실함을 가지고 마음을 은혜롭게 함이 있으니 물을 필요도 없으며(有孚惠心, 勿問)"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을 필요도 없다(勿問)"는 말에 "원길(元吉)"이라는 두 글자가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혜(惠)"자는 여기에서 감격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기는 것" 이라는 말은 바로 정부의 은혜에 감격한다는 의미로 백성들이 모두 정부의 큰 덕에 감사함을 느끼고 마음이 정부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에서 군주가 어찌 그 마음속에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덕을 은혜롭게 여기는 것은 크게 뜻을 얻는 것이다(惠我德, 大得志也)"라고 하는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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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러니 당장 집을 나가라

자식은 언젠가는 부모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22 그러지 않으면 나이를 먹어 육체가 어른이 된다 한들, 정신은 미숙한 그대로다. 정신이 성숙하지 않은 자를 어른이라 할 수 없으니, 그런 상태로 이 가혹하고 험난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정이 유복하다 해도, 대인관계나 연애 같은 금전 이외의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탓에 두 번 다시 헤어날 수 없는 전락을 맛보게 된다.
가정환경이 어떻든지, 부모가 착실한 사람이든 다소 병약한 몸이거나 소극적인 성격이든, 자식은 아무튼 학교를 졸업하면 당장 집을 나가야 한다.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죽음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 것인가.
또는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정한 삶을 살 것인가.

(중략)

학생 신분이 끝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더라도 부모에 의존하는 생활을 과감하게 떨치고 미련없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가족회의도 필요 없다.
23 어디까지나 스스로 결심하고, 스스로 길을 결정하고, 자신의 의지로 집을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식의 의무이며, 다른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아직 구체적인 인생 설계가 세워지지 않았어도,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구실을 둘러대며 단 하루일망정 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 목표를 정하지 못한 자는, 어찌되었든 집을 나선 후에 앞일을 생각한다. 가출이나 다름없어도 전혀 상관없다. 이 경우의 망설임은 목숨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결심이 굳세지 않으면 평생 부모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하게 빼앗기고, 사는 참맛을 모르고 죽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부모란 울고 매달리는 데 명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는 자기밖에 염두에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집에 묶어 두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든 하고 그 어떤 수치스러운 짓도 태연하게 한다.사회로 나가 봐야 고생만 할 뿐이다, 집에서 살면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밥값도 들지 않고 청소나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집만큼 마음 편한 곳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그런 달콤한 말에 넘어가면 애써 다진 결의가 흐지부지되고, 24 그 다음에는 편하게 사는 것만 지향하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인종으로 전락해 끝내는 부모와 집에 혼마저 압살당하는 신세가 된다.
집을 떠난다는, 인생 최대의 전환이며 필연적이고 숭고한 행위에 대해서는 이성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을 잠든 채 사는 꼴이 되고, 그 결과는 굶어 죽는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 이런 형태의 정신적인 죽음이다.
정신적인 죽음이란 살아 있는 주검을 뜻하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 봐야 살아가는 충만감은 얻을 수 없다. 오래 살아 봐야, 그 눈이 기쁨으로 빛나는 일은 없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무의미한 사건들로 가득하고, 놀고먹다 보면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의 정체가 부모와 자식 간의 비정상적인 연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다 늙어 꼬부라진 후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은 제2의 탄생을 뜻한다.
제1의 탄생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부모 의지에 따른 것이 25 지만, 제2의 탄생은 그 전권을 자식이 쥔다.
이 때문에 인생 최대의 사건이며 한없이 위대한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삶을 쟁취하느냐 마느냐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었다는 표식은 집을 나가는 것이다.
요컨대 집을 떠나는 것이 성인식인 셈이다.
그러니, 부모를 버리는 것이냐, 기댈 사람은 너밖에 없는데, 하는 유의 비난과 애원과 정에 이끌려 판단해서는 안 된다. 행여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양심에서 우러나왔다 볼 수 없으며, 부모나 국가에 유리한 형태로 조작된 도덕 등의 독을 먹어 발생한 경련에 불과하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때다. 자식은 집을 떠남으로써 진정한 인생을 만끽하는 데 꼭 필요한 자립과 자율의 정신을 키울 수 있고, 부모 또한 늦게나마 부모의 진정한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렇게 양쪽이 진정한 부모 자식 관계가 무엇인지를 꺠우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안이한 근성을 버려야 타인이 아닌 오직 자신을 의지해 사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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