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그렇다면 막다른 골목이 아닌, 우리를 무한한 잠재력의 세계로 이끌 열린 통로는 과연 무엇일까? ‘이 모든 것들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존재의 신비에 대해 지금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대인들이 제시한 해답을 포함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봐도, 우리는 아직 그 대답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열린 통로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런 마음 자세를 계속 유지한다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줄 새로운 사상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설령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알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 P52

53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시대들을 떠올려 보면, 하나같이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과 지나친 독단주의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들과 같은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그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명백히 모순되는 행동을 하곤 했다. - P53

53 지난번 강연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난 역사 속에서 여러 번 경험했듯이 우리는 매우 무지하며 우리가 가진 모든 해답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다. 이를 인정할 때 인류는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향해 계속 뻗어 나갈 수 있는 열린 통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른 도덕적 가치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아직 그 해답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 P53

61 무신론자인 나와 과학자 동료들을 (모든 과학자들이 다 무신론자는 아니다) 신을 믿는 동료들과 비교해 봤을 때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도덕적 감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인간성과 같은 문제들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가 운행되는 원리와 도덕적 가치관 사이에는 일종의 독립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P61

61-2 실제로 과학은 종교와 관련이 깊은 사상이나 주장에 영향을 미치지만(우주 탄생의 기원이라든가 진화론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옮긴이), 종교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나는 믿는다. 종교는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온갖 종류의 질문들에 친절히 답을 해 준다. 그중에서도 종교가 가지는 세 가지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첫째, 종교는 우리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신은 누구인지, 신의 성격은 어떠한지 등에 대해 알려준다. 이것을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이라고 부르겠다.
두 번째로는, 종교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종교적인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가치관에서 일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는 얘기다. 이를 종교의 도덕적인 측면이라고 부르겠다.
끝으로, 종교는 선한 행동을 하도록 감화inspiration시킨다. 사람들은 나약하다.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양심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심지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종교의 감화가 필요하다. 종교의 가장 강력한 측면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감화적인 기능이다. 덧붙여 종교는 예술을 포함해 다른 많은 인간 활동에도 감화와 영감을 제공한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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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7 모든 문명이 예술 영역에 있어 독특한 양식을 갖는 일이 허락된다면 양식의 본질인 질적 독자성이 각 문명의 모든 부분과 기관, 제도, 활동 속에는 스며들지 않고 예술 영역에만 나타날 수 있는가를 조사해야만 한다. 이 방향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문명으로 말미암아 특히 중점을 두는 활동 분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헬라스 문명은 인간의 삶을 심미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뚜렷한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본래 심미적으로 미라는 것을 나타내는 그리스 어의 ‘카로스‘라는 형용사가 도덕적인 ‘선‘을 나타내는 데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인도 문명과 그 ‘자식 문명‘인 힌두 문명은 주로 종교적인 견지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유럽 문명은 어떤가 하면, 서유럽 문명 자신의 경향 내지는 편향을 쉽게 발견한다. 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기계 중시의 경향, 정교한 물적·사회적 ‘태엽 장치‘ㅡ자동차나 손목시계나 폭탄과 같은 물적 기관과, 의회 제도나 사회 보장 제도나 군사 동원 계획 같은 사회적 잠재력 기관ㅡ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연 과학의 여러 발견을 물질적인 목적에 응용하는 일에 관심과 노력과 재능을 집중하는 경향이다.
더구나 이 경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이상으로 예부터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유럽인들은 소위 ‘기계 시대‘의 훨씬 전부터 다른 문명의 교양있는 엘리트로부터 혐오해야 할 물질주의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역사가가 된 비잔틴의 왕녀 안나 콤네나는 11세기경의 우리 선조를 그렇게 보았고,서유럽 사회의 신예 무기였던 정교한 십자군의 석궁을 공포와 경멸이 뒤섞인 눈길로 보았다. 언제나 재빨리 살해 도구가 발명되는 일이 상례이지만, 이 석궁 역시 중세 서유럽 인의 기계 애용 경향을 누르고 먼저 발명되었다. 전쟁에 비해 매력이 뒤떨어지는 평화적 기술을 적용한 걸작인 ‘태엽 장치‘가 발명되기 수세기 전에 발명되었던 것이다.
근대에 서유럽에 있어 몇 사람의 저술가, 특히 슈펭글러가 이 이질적인 문명의 ‘특성‘이란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데, 그 논의는 냉정한 진단을 일탈하여 마음대로 공상으로 달리고 있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분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충분히 확증되었지만, 만일 그와 마찬가지로 확실하면서 더 중요한 사실ㅡ그 인간의 생활과 제도에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다양성은 밑바닥에 숨어 있는 동일성을 해치는 일 없이, 그 표면을 덮고 있는 피상적인 현상이라는 사실ㅡ을 간과한다면 겉과 속의 비례 감각을 상실하여 혼돈의 위험에 빠질 것이다. - P306

310-1 세계 문명 쇠퇴의 내적 특징은 이미 앞서 정의하였다. 그것은 미개인 수준에서 어떤 종류의 초인간적 생활의 높이에 오르려는 대담한 계획의 실패인 것이며, 우리는 이 장거하고 더없이 거대해 보이는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위험을 갖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것을 동반자가 산정의 새로운 휴식 장소인 암반에 이르지도 못한 채 자신이 막 출발한 암반 위에 떨어져 추락사하거나 그 위에서의 죽음과 다름없는 보기 흉한 사태에 비유했다. 다시 쇠퇴의 특징을 비물질적인 면으로 설명하면, 이것은 창조적 개인이나 소수자의 정신에서 창조력이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창조력이 상실되면 이러한 사람들은 비창조적 대중의 정신을 감화시킬 수 있는 신통력을 빼앗겨 버린다. 창조가 행해지지 않는 곳에는 미메시스(모방)도 행해지지 않는다. 피리 부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이미 마력을 잃어 군중의 발을 춤추게 할 수 없다. 만약에 흥분하고 당황하여, 훈련 하사관 또는 노예 사역자로 변신하면, 이미 이제까지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으로 끌고 갈 수 없어진 민중을 완력으로 누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더 확실하고 재빠르게 자신의 의도를 번복하는 꼴이 된다. 추종자들은 신묘한 음악이 그쳤기에 춤추는 발이 무디어지고 정지하였을 뿐이었는데, 이번에는 회초리가 자극을 하니 추종자들은 적극적으로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어떤 사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여 이미 거기에 합당치 않게 된 지위를 힘으로 유지하려고 들면 이 지배 요소는 성격이 변화되는 반면, 이미 지배자에 경복하여 지배자를 모방하지 않게 되고 예속 상태에 반항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분리라는 결과가 야기된다. 이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존재를 주장할 때 처음부터 두 개의 다른 부분으로 갈라진다. 표면은 온순하게 엎드려 있으나 내심으론 완강하게 반항하는 내적 프롤레타리아와 폭력으로 병합을 거부하는 국경 저쪽의 외적 프롤레타리아가 그것이다.
이상 고찰한 바에 따라 문명 쇠퇴 특징은 소수의 창조적 능력의 상실, 거기에 호응하는 다수의 미메시스(모방) 철회, 그 결과로 인한 사회 전체의 사회적 통일의 사일 등 세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쇠퇴의 특징을 머리에 두면서 쇠퇴의 원인 탐구에 들어가기로 하자. 그러면 우리들이 연구하는 이 편의 나머지 전부를 쇠퇴의 원인탐구에 할애하게 되는 셈이다. - P310

326-7 쇠퇴의 원인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서유럽 문명 공유의 예술적 전통을 버림으로써 자기의 능력을 영양 실조와 불모의 상태에 빠뜨리고 다오메(서아프리카의 구 프랑스 식민지)나 베냉(서아프리카 기니 만에 면한 나라)의 이국적 원시적 예술에, 마치 그것이 광야에 내린 만나(<출애굽기> 16:14~36)이기나 한 것처럼 탐식함으로써 서유럽 인들은 모든 사람 앞에 스스로의 정신적 상속권을 포기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서유럽 문명의 전통적인 예술적 기술의 포기는 분명히 서유럽 문명에 일어난 어떤 종류의 정신적 쇠퇴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정신적 쇠퇴의 원인을 그 결과의 하나인 현상 속에서 찾아 낼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다.
투르크 인이 얼마 전에, 아라비아 문자를 폐하고 라틴 문자를 채용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와 그 일당은 이슬람 세계 내부에 있어서 철저히 서유럽화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의 전통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의 문명을 전해 온 문자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더 오랜 옛날 죽어 가는 상태에 있던 문명의 전통적인 문자를 폐지했던 것ㅡ이를테면, 이집트에서 상형문자가 폐지되고 바빌로니아에서 설형문자가 폐지된 것ㅡ도 역시 같은 이유로 설명이 된다.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도 한자를 폐지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의 기술을 대체하는 흥미 깊은 예는 헬라스 문명의 건축 양식이 폐기되고 신식의 비잔틴 양식이 채용된 예이다. 이 경우 바야흐로 숨을 거두려 하고 있는 사회의 건축가들은 비교적 간단한 원 주위에 대륜(고대 건축의 중방의 최하부)을 얹는 구조를 그만두고 십자형 건물의 상부에 원형 돔을 얹는 매우 곤란한 방식의 실험을 시도했다. 따라서 기술적 능력의 퇴보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위해 비잔틴 건축 하기아소피아 성당의 구조상의 여러 문제를 훌륭히 해결한 이오니아의 건축가들이 고전 그리스식의 사원을 세우는 것이 전제 군주의 뜻이며 그들 자신의 뜻이었는데도 그리스 양식의 사원을 세울 능력이 없어서 짓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건축가들이 새로운 비잔틴 양식을 채용한 것은 구양식이 이미 사멸하여 썩어 없어져 가는 과거의 잔해와의 연상을 불러일으키므로 그들의 기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사 결과는 전통적인 예술 양식의 포기는 그 양식과 결부되어 있는 문명이 훨씬 이전부터 쇠퇴하여 이제 해체의 도상에 있음을 보이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기술이 쓰이지 않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쇠퇴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닌 것이다. - P326

340-1 헬라스 사회 이외의 어느 사회를 조사해 보아도, 문명 쇠퇴의 원인은 외래 세력의 침입이라는 사실로써 추측할 수 있는 인간적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는 면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외적이 이룩한 일은 기껏해야 막 숨을 거두려는 자살자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일이었다. 외래 세력의 침입이 무력에 의한 공격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 공격을 받은 문명이 역사의 최종 단계, 즉 죽음의 순간에 있을 때 외에는 파괴적이 아니라 분명히 자극적인 정도일 뿐이다. - P340

344-5 지도자의 임무는 그의 동료로 하여금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전체를, 인류를 초월한 저편에 있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원시적이며 보편적인 모방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모방은 일종의 사회적 훈련이다. 이 세상의 소리 같지 않은 영묘한 오르페우스의 하프 선율이 들리지 않는 둔한 귀에도 훈병계 하사관의 호령은 잘 들린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람이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의 소리를 흉내내면, 그때까지 멈춰 서 있던 대중은 갑자기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대중을 유인하여 따르도록 시키는 운동으로 대중을 따라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은 질러가지 않으면 지도자를 따라갈 수가 없으므로 파멸에 이르는 넓은 지름길 위에 몰려서야 비로소 대오를 정비하여 행진하는 여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파멸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면, 이런 식의 추구가 흔히 불행한 결과로 끝난다고 해도 놀랄 것이 못 되리라. 또한 모방의 능력을 이용하는 방법과는 별도로 모방을 실제로 이행하는 데는 하나의 약점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모방은 일종의 훈련 과정일 뿐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상황이 적용되지 않은 비창조적 모방은 인간 생활과 운동의 기계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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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60 좀 더 최근으로 오면서 책이, 특히 값이 싼 문고판 책이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평범한 식사 한 끼의 비용이면 로마 제국의 흥망, 종의 기원, 꿈의 해석 등 모든 사물의 본질과 정체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책을 사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책은 씨앗과 같다. 수세기 동안 싹을 틔우지 않은 채 동면하다가 어느 날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도 갑자기 찬란한 꽃을 피워 내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책인 것이다. - P559

560 -1 책을 1주일에 한 권씩 뗄 수 있다면 한 사람이 평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총수는 대략 수천 권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대 도서관이 소장한 장서의 기껏해야 1,00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양이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몇 권을 읽는가보다 어떤 책을 읽는가에 달려 있다. 책에 기술할 수 있는 정보는 그 정보가 태어날 떄부터 완전히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며 새로운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정보의 내용 역시 점차 수정돼야 한다. 이것이 정보가 갖는 속성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건립된 지 이미 2,300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인류사에서 책이 없었다면, 다시 말해서 문자 기록이 없었다면 지나간 23세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길었을까? 100년을 4세대로 친다면 23세기는 거의 100세대에 해당하는 긴 기간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정보가 입에서 입으로 말로만 전해졌다면 우리가 과거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우리의 진보가 또 얼마나 느렸을까! 선대가 알아냈던 지식 중에서 어쩌다 얻어 들을 수 있었던 몇 마디의 이야기들만 후대에 전해졌을 것이다. 비록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의 정확도는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주어진 정보를 한때는 귀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같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세대를 거쳐 반복해서 구전하는 동안에 점차 변질되게 마련이고, 결국에 가서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퇴색되거나, 아니면 우리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책은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다. 책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조상의 지혜를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이렇게 해서 도서관은 인류가 이룩한 거대한 지식 체계와 위대한 통찰의 세계를 우리와 연결시켜 주는 고리의 구실을 한다. 도서관이 전해 주는 통찰과 지식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자연으로부터 숱한 고생 끝에 힘들여 발굴해 낸 고귀한 보물이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우리에게 큰 교훈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가 고유의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오늘날 공공 도서관의 설립과 유지는 거의 전적으로 대중의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키워 온 문명이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냐는 우리 각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공공 도서관을 지원하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공공 도서관이 인류 문화 창달의 버팀목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이 숙고해 봐야 한다. 지구 문명의 지속성 여부는 전적으로 공공 도서관에 제공하는 우리의 기부 규모에 달려 있는 것이다. - P560

561 행성 지구가 태어날 당시와 똑같은 상태에서 똑같은 물리적 특성을 가진 또 다른 지구가 은하수 은하 어디에선가 다시 만들어진다면 거기에도 우리 인류와 흡사한 어떤 생물이 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그럴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진화의 과정에서 우연이 휘두르는 폭력의 위력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선 입자가 유전자 중에서 어떤 것을 때릴지 전혀 알 수 없으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돌연변이 역시 제각각일 것이다. 진화의 초기에는 돌연변이의 작은 차이가 크게 문제될 바 아니지만 긴 진화의 과정을 통해 돌연변이의 작은 차이들이 누적된 결과는 엄청난 규모의 변화를 가져온다. 오래전에 생긴 사건일수록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지대하기 마련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생물 현상에서도 우연이 결정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 P561

567 기후 변동의 실제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인간 생존의 근본 문제는 천문학 내지 지질학적 우연성에 이렇게 민감하게 의존한다. - P567

567 인류의 조상이 나무에서 내려온 이후 직립 보행을 하게 됐으며 그 결과로 앞발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손으로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두 눈이 훌륭한 쌍안경의 기능을 갖게 됐다. 즉 도구 제작의 선결 과제가 모두 해결된 셈이다. 큰 두뇌와 복잡한 의사를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의 장점을 이제 십분 발휘하게 됐다. 다른 동물들과 여타의 조건이 동일하다면 어리석은 머리보다 명석한 두뇌를 갖는 것이 살아가는 데 월등하게 유리하다. 지능이 높은 존재들은 문제를 남보다 더 잘 해결할 줄 알고, 더 오래 살 수 있으며 새끼도 더 많이 낳는다. 핵무기의 발명이 있기까지는 지성이야말로 생존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것이다. 핵무기의 출현 이후 지적 능력이라는 것을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게 됐지만 말이다. - P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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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지금까지 많은 걸 언급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빼놓았다. 과학은 관찰을 통해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심판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이디어는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진보는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검증된 아이디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아이디어가 어떻게 탄생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중세 시대에는 사람들이 ‘많은 관찰을 수행하다 보면 그 관찰 결과 자체가 법칙을 제안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법칙을 찾아낼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그보다 좀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다음 문제가 바로 ‘새로운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다. 사실 어디서 나오든지 나오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 모든 아이디어는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어떤 아이디어가 옳은지 그른지 검증하는 과학적 절차는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든 다 똑같다. 관찰을 통해 예측한 값과 측정된 값을 비교해서 검증할 뿐이다. 그래서 과학에선 아이디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에 대해 사실 별 관심이 없다. - P34

36 물리학 분야에서는 지금까지 쌓아 온 관찰 데이터들이 너무 많아서, 이 모든 관찰 결과들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한 번도 제안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누구한테서 나왔든 어디서 나왔든지 간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안되면 이를 환영하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논쟁을 걸려고 하진 않는다.
다른 과학 분야에서는 물리학만큼 관찰 데이터들이 많지 않아서 물리학의 초창기처럼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진실을 판단할 독립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면 사람들 간에 굳이 논쟁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 P36

36-7 놀랍게도 과학자들은 아이디어 자체에만 관심을 가질 뿐,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의 과거 경력이나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이디어를 들어보고, 그것이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판단되고, 시도해 볼 수 있으며, 지금까지의 생각들과는 확실히 다르고, 또 지금까지의 관찰 데이터들과 명백히 상반되지 않는다면, 과학자들은 기꺼이 아이디어를 테스트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일 것이다.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연구했는지, 아니면 왜 이 사람이 이런 아이디어를 제안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오든 달라질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디어의 실질적인 근원은 ‘미지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걸 인간 두뇌의 상상력, 혹은 창조적 상상력이라 부르지만,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치 ‘움프‘처럼. - P36

37-8 나는 사람들이 ‘과학에는 상상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사실 과학에는 예술가의 상상력과는 다른, 아주 재미있는 종류의 상상력이 존재한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관찰 결과들을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지금까지 제안된 다른 아이디어와는 매우 다른 것이어야 하며, 검증 가능할 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검증할 수 있는 규칙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도 일종의 기적에 가깝다. 아무런 실마리도 없는 상황에서 ‘중력이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한다‘는 규칙을 찾는 일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라. 그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 법칙을 통해 우리는 아직 시도하지 않은 수많은 실험들에 대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다. - P37

38-9 자연을 묘사하는 규칙들은 매우 수학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관찰이 가설을 심판한다‘는 과학의 원리에 기반한 것은 아니며, 모든 과학이 수학적일 필요도 없다. 단지, 적어도 물리학에서는, 규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면 현상을 좀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자연의 법칙은 왜 정교하게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가 또한 아직 풀지 못한 미스테리이다. - P38

39 자, 이제 가장 중요한 대목에 다다른 것 같다. 과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관찰을 통해 검증된 규칙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관찰이 잘못된 규칙을 도출할 수 있는가? 제대로 성실하게 검증만 했다면 어떻게 틀릴 수 있단 말인가? 왜 물리학자들은 항상 법칙들을 바꿔야만 할까? 이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내 대답을 먼저 들려드리자면, 규칙은 관찰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틀릴 수 있으며, 관찰이라는 실험 과정은 항상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규칙은 그저 추측된 법칙이며 외삽의 결과일 뿐, 관찰에 잘 부합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 규칙이 성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관찰이라는 그물망에 걸러지지 않은채 "꽤 쓸만한 추측"으로 남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물망의 코가 예전에 쓰던 것보다 점점 작아지면 - 다시 말해 관찰의 정확도가 점점 더 높아지면 - 때론 그 규칙도 그물망에 걸러지게 될 수도 있다. 규칙은 그저 추측일 뿐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외삽인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추측을 하는 것이다. - P39

41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추측한 대로 일이 벌어지게 될 거라는 원리, 그것뿐이다. 지식이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알려 주는 원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재미있다. 이를 얻기 위해 우리에겐 그저 무모한 짓이라도 시도할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 P41

41 모든 과학 법칙과 모든 과학적 원리, 그리고 관찰을 통해 얻은 결론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들을 빼놓은 ‘단순 명제‘ 가 되기 십상이다. 그것은 어떤 법칙도 완벽히 정확하게 진술할 순 없기 때문이다. 실험자는 자신의 질량 법칙을 기술할 때 질량은 물체의 속도가 아주 높지 않다면 많이 변하지 않는다‘ 라고 법칙을 서술했어야 옳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처럼 과학은 구체적인 규칙을 만들어서 관찰의 그물망을 통과하는지 알아보는 일종의 게임이다. 한 과학자는 ‘질량이 항상 불변한다‘ 라는 구체적인 규칙을 내놓았고 이 재미있는 가능성은 결국 틀린 것으로 판정되었지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진 않았다. 그저 불확실했을 뿐인데, 불확실하다고 해서 위험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무엇이든 구체적인 주장을 하되 확신을 하지는 않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 - P41

42 우리가 과학을 통해 얻어 낸 모든 결론들은 그저 반증되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는 ‘잠정적인 결론‘이며, 불확실함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추측을 할 뿐이며, 완벽한 실험을 하진 못했기에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팽이가 회전할 때 질량이 늘어나는 효과가 너무 작기 때문에 "아, 아무런 차이가 안 나는구나."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올바른 법칙‘, 다시 말해 관찰이라는 정교한 그물망을 수없이 통과하고 끝내 살아남을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지적 능력과 상상력,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만큼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상대성이론이다. 과학 분야에서 아주 작은 성과라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 P42

42-3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의심과 불확실성을 다루는 데 익숙해 있다. 모든 과학적 지식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의심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과학 지식을 다루어 본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가치있는 일이며 과학을 벗어나 다른 분야에서도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믿는다. 아직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한다.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지금 알고 있는 해답을 법칙이라 굳게 믿고 있으면, 영영 문제를 못 풀 수도 있다. - P42

43 만약 과학자가 어떤 문제에 대해 답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그는 정말 그 답을 모르는 것이다. 만약 그가 "해답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짚이는 구석이 있기는 해." 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직 그 문제를 명확히 파악한 것은 아니다. 그가 설령 해답이 무엇인지 확신을 갖고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이야. 내기를 해도 좋아." 라고 확신에 찬 말을 할 때에도 머릿속엔 여전히 조금의 의심이 남아 있다. 과학자의 머리에서 의심을 몰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이 진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지함과 의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의 해답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기에 내일의 더 나은 해답을 찾아 새로운 탐색의 길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관찰 방법이 개발되는 것뿐만 아니라,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새로운 가설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 P43

43-4 만약 새로운 길을 탐색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또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거나 무지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 확신하고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힘들여 검사해 볼 생각을 안 할 테니까. 지금 우리가 ‘과학적 지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확실한 정도가 제각기 다른 여러 진술들의 집합체‘ 라고 볼 수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매우 불확실하며 또 거의 확실한 것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다. 과학자들은 이 점에 매우 익숙해 있다. 모르는 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혹자는 "어떻게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가 있죠?"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도무지 이런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가? 내 경우 대부분을 정확히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 쉬운 일이다.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점점 알아가게 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 P43

44-5 의심을 할 수 있는 자유는 과학에서 중요한 문제이며,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이 자유는 오랜 투쟁의 결과로 얻게 된 것이다. 의심할 수 있도록, 확신하지 않도록 허락받은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 나는 우리가 이 투쟁의 고귀함을 잊어버려 많은 가치를 잃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나는 우리 자신의 무지함을 떳떳이 인정하는 철학과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얻어 낸 진보의 가치를 아는 과학자로서이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유의 가치를 알리고, 의심이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며, 인류의 새로운 잠재 능력을 가능케 하는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을 느낀다. 무엇이든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개선의 여지는 언제든지 열려 있다. 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바로 이 자유를 요구하고 싶다.
과학에 있어 의심은 분명한 가치를 지닌다. ‘다른 분야에서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마도 대답 없는 질문이 될 것이다. 다음 두 강연에서는 바로 이 점에 대해 좀 더 깊이 논의하면서, 다른 분야에서도 의심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의심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매우 가치 있는 것이란 점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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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6 일단 천재인의 돌진에 의해 어지러워진 사회적 균형은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독립적으로ㅡ그 운동량에 있어서나 방향에 있어서도 똑같은ㅡ돌진을 한다면 그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법일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조금도 무리나 긴장을 일으키지 않고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거의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창조적 천재의 출현을 요구하는 소리에 대해 그 같은 100%의 응답이 나온다는 것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역사상 어떤 사상ㅡ종교든 과학이든ㅡ이 널리 퍼져 있을 경우, 그 같은 사상이 영감을 받은 몇 명의 인간의 머릿속에서 그 사상이 독립하여, 거의 동시에 실제 형태를 이루는 사실을 나타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례 중 가장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 경우가 한 번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한 자릿수에 해당하는 인간들이 즉시 반응하였을 뿐, 그런 사상의 부름에 응하지 못한 인간의 수는 몇 만, 몇 백만의 많은 수를 헤아린다.
어떤 창조 행위라도 본질적으론 독특하고 개별적이라서, 이 본질의 모든 개인이 가능한 창조자이며, 또한 동일한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동일한 형태에 대한 경향으로 인해 독특하고 개별적인 본질이 저해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과 사소한 정도에서 멈춘다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창조자가 출현할 때는, 가령 다행히도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동료를 얻을 수 있더라도 항상 압도적으로 다수의 활기 없는 비창조적인 대중이 많음을 보게 된다.
사회적 창조 행위는 모두가 개인의 창조자나, 아니면 기껏해야 창조적 소수자에 의해 성취된다. 그리고 전진이 이루어질 때마다 사회 성원의 대다수가 뒤에 남게 된다.
오늘날의 세계에 현존하는 위대한 종교 단체, 즉 그리스도교·이슬람교·힌두교를 바라보면, 명목상의 신자인 그들 대다수는 혀끝으로만 신앙을 말하면서, 신조가 아무리 고원한 것일지라도 여전히 종교에 관한 한 단순한 이교 신앙과 거리가 멀지 않은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근년에 있어 우리의 물질 문명의 성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서유럽 사회의 과학 지식과, 그 지식을 실제로 응용하는 기술은 위험할 정도로 비교적이다. 민주주의와 산업주의라는 크고 새로운 사회적 세력은 몇몇의 창조적 소수자가 불러일으킨 것으로, 대다수의 인간은 표면적 민주주의와 산업주의 인식 수준에 남아 있어 여전히 이들의 거대하고 새로운 사회 세력이 출현하기 시작한 이전과 거의 같은 지적·도덕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땅의 소금‘을 자부하는 서유럽인이 오늘날 그 맛을 상실하는 위험에 빠진 주요한 이유는 서유럽 사회의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인간에게 전혀 소금이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성장이 창조적 개인 또는 창조적 소수자에 의해 성취되는 사업이라는 사실은, 결국 선구자가 있는 힘을 다해 전진할 때, 느린 후위 부대를 함꼐 끌고 가는 무슨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한 비창조적인 다수자는 뒤에 남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점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그에 입각하여 작업을 진행시켜 온 문명과, 미개 사회의 차이에 대한 정의를 수정할 필요를 느낀다.
이 「연구」의 처음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시 사회가 정지 상태로 있는 데 비해 문명ㅡ발육 정지 문명 이외의 문명ㅡ은 다이내믹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우리는 성장기의 문명은 그 사회체 안에 있는 창조적 개인의 다이내믹한(역동적인) 운동에 의해 행해진다는 점에서 정적인 원시 사회와 다르다고 바꿔 말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런 창조적 인격은 그 수가 가장 많을 때라도 극히 약간의 소수자로 제한된다고 덧붙여야 한다.
대부분의 성장기 문명은 그 관여자의 대다수가 정적인 원시 사회의 성원과 마찬가지로 활발치 못한 휴지 상태에 있다. 게다가 성장기 문명의 관여자 중 대다수는 겉치레로 칠해진 교육의 도금을 벗기면 미개인과 똑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이다. 이 점, 인간의 성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속담에 일면의 진리가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뛰어난 인격ㅡ그것을 천재라 부르든 신비가라 부르든 혹은 초인이라 부르든 상관없으나ㅡ은 평범한 인간성 뭉치 속에 던져진 빵 종류에 불과하다. - P274

276-8 "이중의 노력, 즉 누군가가 새로운 발견을 하는 노려과, 남은 자 전부가 그것을 받아들여 그에 순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솔선적인 행위와 복종하는 태도가 어느 사회 속에서 동시에 발견되면 그 사회는 곧 문명이라 부를 수 있다. 실제의 문제로는 제2조건 즉 다수자의 인식력이 제1조건 즉 천재의 등장보다도 확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원시 사회가 뜻대로 할 수 없었던 불가결의 요소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뛰어난 인격은 아니다(자연이 언제나 어디서나 몇 사람의 그 같은 변종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결여되었던 요소는 오히려 이런 류의 인간이 그 우수함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며 또한 다른 인간이 그의 지도에 따르려는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비창조적인 다수자를 실제로 창조적 소수자의 지도에 따르게 하는 데는 실제적이고 또 이상적인 두 가지 해결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훈련에 의한 방법이며······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에 의한 방법이다. ······첫째 방법은 비인격적인 습관으로 이루어진 도덕적 습성을 강제적으로 주입시킨다. 둘째 방법은 다른 인격을 모방하고 다시 그와 정신적으로 일체가 되어 많든 적든 완전히 그와 동일화되는 것이다."(베르그송)

영혼에서 영혼으로, 직접 창조적 에너지의 불을 붙여가는 일이 확실히 이상적인 방법이긴 하나, 거기에만 의존하는 것은 실행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한 방안이다. 비창조적인 대중에게 창조적 소수자와 동일 행동을 취하게 한다는 문제는 순전히 형식·구조·가치의 동시적 모방 즉, 미메시스적 능력ㅡ인간성은 냉정히 말해 그다지 고급이랄 수 없는 능력의 하나이고, 영감의 요소보다도 훈련의 요소 쪽이 많이 포함된다ㅡ을 발휘시키지 않는 사회적 규모에서는 실제로 해결할 수가 없다.
미메시스(모방)를 활성화하는 것이 당면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이유는 하여간 모방이 미개인의 통상 능력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모방은 미개 사회와 문명 사회를 통해 사회 생활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특성이지만, 두 종류의 사회에 있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작용한다. 정적인 미개 사회에 모방의 대상은 ‘습관의 굴레‘의 화신인 살아 있는 성원 중에서도 낡은 세대나 죽은 자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문명의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는 모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새로운 경지를 연 창조적 인격으로 향하게 된다. 능력은 같으나 각각 보수형과 첨단형이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습을 바꾼 원시적인 사회적 훈련, 즉 기계적이고 거의 자동적인 ‘우로 나란히, 좌로 나란히‘ 식의 훈련이 진정으로 플라톤이 한 인간으로부터 다른 인간에게 철학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디오니소스에 답한 제7서한」). ‘친밀한 개인적 교제와 용의주도한 지적 교제‘의 유효한 대용품 역할을 이행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해 오로지 대답할 수 있는 점은 지금까지 플라톤식의 방법을 사용해서 다수 인간의 타성을 실제로 극복한 일이 없다는 것, 활발치 못한 다수자를 활동적인 소수자 뒤에 따라오게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친밀한 영감을 준다는 이상적인 방법은 항상 많은 인간을 한 묶음으로 하여 사회적 훈련을 시킨다는 실제적
방법ㅡ그것은 미개인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으로, 새로운 지도자가 지휘를 하고 새로운 전진 명령을 내릴 때에는 사회의 진보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ㅡ에 의해 보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메시스의 신은 그 사회적 ‘자산‘ㅡ재능·감정·사상ㅡ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그는 자신의 자산을 획득한 인간에게보다는, 그 자산을 창조한 인간을 만나 그를 모방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 자산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을 인간들에게 줄 것이다. 사실 모방은 하나의 지름길이다. 이 지름길은 필요한 목적지에 달하기 위한 불가피한 길인지도 모르나, 동시에 마찬가지로 성장기의 문명을 불가피하게 쇠퇴의 위험에 봉착케 할 수도 있는 의심스러운 편법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 위험에 대해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 P276

278-282 은퇴와 복귀-개인
위에서 우리는 창조적 인격이 최고의 정신적 수준을 가진 신비가의 길을 선택한 경우에 받는 도적에 대해 고찰했다. 우리는 그들이 우선 행동에서 황홀 상태로 이행하고, 이어서 황홀 상태에서 새롭고 보다 높은 차원의 행동으로 이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은 창조적 운동은 창조적 인격의 심적 체험에 근거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창조적 인격이 소속된 사회에서 외면적으로 이루는 창조적 운동의 이중성을 표현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은퇴와 복귀라고 부를 수 있다.
은퇴는 창조적 인격이 한동안 사회적 노역과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다면, 잠든 채로 있었을지도 모를 능력을 그 자신의 내부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한다. 그와 같은 은퇴는 창조적 인격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수도 있으며, 또 어쩔 수 없는 사정에 몰려 부득불 강요되는 수도 있으나, 어느 경우나 다 은퇴자는 은둔자(anchorite)로서 변모하는 데 좋은 기회이며, 또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anchorite(은둔자)‘는 그리스 어로 ‘이탈해 가는 자‘이다.
그러나 고독 상태에서 변모를 이룩해 봐야 그 변모한 인격이 처음에 나온 그 사회 환경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는 복귀의 서막이 되지 않는 한 아무짝에도 쓸 데 없으며, 또 십중팔구 아무런 뜻도 지니지 않는다. 사회 환경이야말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태어난 환경이며, 만일 영원히 그곳에서 떠나려고 한다면, 인간은 인간성을 버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짐승이든지 신‘ 중 어느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복귀야말로 이 운동 전체의 본질이며 목적이다.
모세가 홀로 시나이 산에 오르는 이야기를 전하는 시리아 사회의 신화에서 이상과 같은 점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 여호와를 만나기 위해 산에 오른다. 부름을 받은 것은 모세 한 사람뿐이며 다른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떨어져 있도록 명령받는다. 그러나 여호와가 모세를 산 위로 부른 목적은 산에 올라 신과 직접 말을 나눌 수 없었던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규칙을 전하도록 다시 모세를 사자로서 산에서 내려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모세가 하느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법)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친히 쓰신 것이더라."(<출애굽기>) 19:3, 31:18).

14세기 아랍 사회의 철학자 이븐 할둔이 쓴 예언자의 경험 및 사명에 관한 기술도 역시 마찬가지로 강하게 복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불과 한 순간 눈 깜짝할 정도로 재빠르게 왔다 가는 한 순간에 인간 본성을 벗어버리고, 천사의 성질을 몸에 걸치는 천성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천사의 세계에서 영혼은 동료인 인간에게 전할 사명을 받은 다음에 다시 인간본성으로 되돌아간다."(「무카다마트」제2권)

이 이슬람 사회의 예언 교리에 대한 철학적 해석 중에 헬라스 사회 철학에 대한 유명한 구절은 즉,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국가」)의 방향이 인정되리라 생각된다.
그 글에서, 플라톤은 보통의 인간들이 빛을 등 뒤에 지고, 그들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실재가 벽 위에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동굴 속의 죄수로 비유하였다.
죄수들은 동굴 속 벽 위에 보이는 그림자를 궁극의 실재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은 그것밖에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 한 사람의 죄수가 갑자기 풀려나 뒤돌아서 빛을 향하여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정한다. 이처럼 갑자기 해방된 죄수는 처음에는 눈이 부셔 당황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의 눈은 차차로 시력을 회복하고 실재 세계의 본체가 그에게 인식된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동굴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번에는 어둠 때문에 아까 햇빛 속에 나갔을 때처럼 눈이 안보여 또다시 당황한다. 아까 햇빛 속에 나가게 된 일을 후회했듯이, 이번에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오게 된 일을 후회하나, 후회하는 이유는 전보다도 한층 더 강하다. 한번도 햇빛을 본 일이 없는 동굴 속에 있는 친구들 곁으로 돌아온 그는, 친구들에게 적대시 당할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반드시 친구들에게서 조소를 받을 것이며, 그들로부터 지상에 나갔던 결과는 다만 눈을 완전히 버리고 돌아왔을 뿐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지상으로 나갈 생각을 하는 놈은 바보라는 교훈을 얻는다. <이렇게 해방시켜 높은 곳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참견을 하는 놈은 잡아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그렇게 하겠다.>"

로버트 브라우닝 시의 애독자는 여기서 그가 쓴 라자로의 환상을 떠올릴 것이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부활한 라자로는 마치 딴 사람이 되어 ‘동굴‘로 돌아갔으리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는 이 같은 진귀한 체험을 하고 나서 40년 후의 동일한 노인인 베다디 라자로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카르시시라는 사람이 자기가 속한 조합의 우두머리에게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쓰는 아라비아의 여행 중의 「편지문」을 빌려 묘사하고 있다. 카르시시에 의하면 베다니의 촌민은 불쌍한 라자로가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아무 쓸모 없는 마을의 백치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은 카르시시에게는 어쩐지 그렇게는 여겨지지 않는다.
브라우닝은 라자로의 ‘복귀‘를 효과적인 형태로 묘사하지 못했다. 라자로는 예언자도 순교자도 되지 못하고 그 대신 복귀한 플라톤의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편한, 내쫓기지는 않지만 완전히 무시당하는 그러한 운명을 감수했다. 플라톤 자신이 복귀의 시련을 묘사할 때, 매우 매력이 부족한 묘사법을 쓰고 있으므로 플라톤이 그의 선택된 철학자들에게 사정없이 복귀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뜻밖의 기분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들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사상 체계의 본질적인 점이라면, 선택된 사람들은 철학을 배운 뒤 단순한 철학자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또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점이다.
그들을 계발하는 일의 목적과 의의는 그들이 철인왕이 되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그들을 위해 설정하고 있는 길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이 걸어온 길과 같은 길이다.
그러나 길은 동일해도 그 길을 걸어간 헬라스 사회의 철학자와 그리스도교적 정신은 같지 않다. 플라톤의 생각에는, 해방되어 계몽을 받은 철학자의 개인적 이해와 욕구는 여전히 "암흑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도사리고 있으며 ······괴로움과 쇠사슬에 묶여 있는"(<시편> 107:10) 그의 많은 동료들의 몰이해와 당연히 부딪힐 것으로 단정지어진다. 플라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동굴 속 죄수들의 이해가 어떠한 것이든 철학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과 완성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인류의 필요에 봉사할 수가 없다. 일단 광명에 이르게 되면, 철학자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일은 동굴 밖의 빛 속에 머물며, 언제까지나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헬라스 사회 철학의 근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는, 가장 좋은 생활 상태는 관상(테오리아) 또는 ‘바라보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피타고라스는 관상 생활을 행동 생활의 상위에 두고 있으나, 이런 행동과 실천의 가르침이 헬라스 사회의 철학적 전통을 일관해서 흐르고 있었고, 헬라스 사회가 마침내 해체되려 하던 가장 후기 시대에 살고 있던 신플라톤파 철학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플라톤은 그의 철학자들이 단순한 의무 관념만이라도 세속적인 사업에 동의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철학자들의 거부라는 것이 플라톤의 1세대 전부터 시작된 헬라스 문명의 쇠퇴가 왜 플라톤 세대에 와서도 결국 회복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또한 왜 헬라스 사회의 철학자들이 ‘위대한 거부‘를 했는지 그 이유도 명백하다. 그들의 도덕적 한계는 잘못된 신념의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은 복귀가 아니라 황홀 상태야말로 그들이 개시한 정신적 편력의 전부이며 종국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복귀야말로 그들이 하고 있는 운동의 목적이며 정점인데도 불구하고 황홀 상태로부터 고통을 수반하는 복귀로의 이행을 단지 의무의 제단 위에 희생물로 바치는 일이라고밖에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비적 체험에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덕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의 작용으로 높은 영적인 접촉 후 곧장 내려가게 하며 아직 구제되지 않은 속세와 도덕적이고도 물질적인 교제를 갖도록 했다.
이 ‘은퇴와 복귀‘의 운동은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인간 생활의 특유한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일반 생명의 특색이다.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여 식물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자, 이 운동이 식물의 생활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은 신화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상상력과 인간의 희망·불안이 농업과 관계가 있는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 이유이다. 매년 되풀이되는 곡물의 은퇴와 복귀가 제사나 신화 속에서 의인적인 표현으로 바꿔 놓여져, 이를테면 코레나 페르세포네의 약탈과 반환, 디오니소스·아도니스·오시리스 기타 고장마다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보편적인 곡물의 정(精), 또는 시간의 신이 죽음과 부활이 되어 나타나 있고, 틀에 박힌 같은 인물이 갖가지 이름 아래 꼭 같은 비극적 드라마를 반복하는 데도 이런 신전의 제사와 신화는 농업의 관습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상상력은 또 식물의 생명에 나타나는 은퇴와 복귀의 현상 속에 인간 생활의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즉, 알레고리)하고, 이 알레고리에 의거하여 성장기의 문명에 있어서 걸출한 인물이 대중에게서 이탈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간은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죽음의 문제와 맞붙어 왔다. - P278

297 세력 균형은 한 사회가 몇 개의 서로 독립된 지방 국가로 분화할 때면 반드시 발동되는 정치 역학 계통 중 하나이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와는 다른 그리스도교 부분에서 분리한 이탈리아 사회는 동시에 지금 말한 대로의 정치 형태로 변화했다. 저마다 지방적·자치적 권리를 주장하기만 하는 다수의 도시 국가에 의해, 이탈리아를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이탈시키려는 운동이 이루어졌다. 즉 격리된 이탈리아 세계 창조와 이 세계 다수 국가의 분화는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세력 균형이 영토·인구·부에 있어서 낮은 수준에 머물게 하도록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어느 기준으로 보나 국가의 평균 규모는 정치적 세력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본다. 그 규모를 평균 이상으로 증대할 우려가 있는 국가는 거의 자동적으로 부근의 다른 국가로부터 도전을 받아 압력에 걸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압력은 당해 국가군의 중앙부에 최대로 가해지며 주변에서 최소로 된다는 것이 세력 균형의 여러 법칙 중 하나이다.
중앙부에서 어느 한 국가가 영토 확장을 목표로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면 주위의 모든 국가에서 빈틈없이 감시하여 기민하게 대항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겨우 수 평방 킬로미터의 토지 주권을 놓고 가장 집요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반대로 경쟁이 악화되고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는 경우가 있다.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타국을 침해하는 일 없이 영역을 팽창하였고, 러시아는 발트 해에서 태평양까지 팽창할 수 있으나, 프랑스나 독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알자스나 포젠 소유권을 도전받지 않고 영유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나 미국이 오늘날 서유럽의 낡고 비좁은 민족 국가들과 갖는 관계가 400년 전 이들 국가ㅡ루이 11세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탈리아화된 프랑스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이탈리아화된 에스파냐 및 튜더 가, 초기의 국왕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탈리아화된 영국 등ㅡ와 피렌체·베네치아·밀라노 같은 당시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와의 관계와 같다. - P297

303 영국인이 발명한 의회 정치라는 정치 제도가 나중에 산업주의를 위해 참으로 안성맞춤인 사회적 배경을 제공했다. 행정 담당자가 국민의 대표인 의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정치 조직이라는 의미로서의 ‘민주주의‘와, 공장에 집중한 ‘손‘(노동자)에 대한 대량 생산 조직이라는 의미로서의 ‘산업주의‘는 가장 주요한 현대의 두 가지 제도이다.
민주주의와 산업주의, 이 두 가지 제도가 널리 행해지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문화가 달성한 정치적·경제적 사업을 도시 국가적 규모에서 왕국적 규모로 옮기는 문제를 위하여 서유럽 사회가 당시 발견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해결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해결법은 다 함께 후세의 영국의 정치가 한 사람이 ‘영광스런 고립‘이라 부른 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시대의 영국에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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