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6 일단 천재인의 돌진에 의해 어지러워진 사회적 균형은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독립적으로ㅡ그 운동량에 있어서나 방향에 있어서도 똑같은ㅡ돌진을 한다면 그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법일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조금도 무리나 긴장을 일으키지 않고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거의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창조적 천재의 출현을 요구하는 소리에 대해 그 같은 100%의 응답이 나온다는 것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역사상 어떤 사상ㅡ종교든 과학이든ㅡ이 널리 퍼져 있을 경우, 그 같은 사상이 영감을 받은 몇 명의 인간의 머릿속에서 그 사상이 독립하여, 거의 동시에 실제 형태를 이루는 사실을 나타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례 중 가장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 경우가 한 번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한 자릿수에 해당하는 인간들이 즉시 반응하였을 뿐, 그런 사상의 부름에 응하지 못한 인간의 수는 몇 만, 몇 백만의 많은 수를 헤아린다. 어떤 창조 행위라도 본질적으론 독특하고 개별적이라서, 이 본질의 모든 개인이 가능한 창조자이며, 또한 동일한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동일한 형태에 대한 경향으로 인해 독특하고 개별적인 본질이 저해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과 사소한 정도에서 멈춘다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창조자가 출현할 때는, 가령 다행히도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동료를 얻을 수 있더라도 항상 압도적으로 다수의 활기 없는 비창조적인 대중이 많음을 보게 된다. 사회적 창조 행위는 모두가 개인의 창조자나, 아니면 기껏해야 창조적 소수자에 의해 성취된다. 그리고 전진이 이루어질 때마다 사회 성원의 대다수가 뒤에 남게 된다. 오늘날의 세계에 현존하는 위대한 종교 단체, 즉 그리스도교·이슬람교·힌두교를 바라보면, 명목상의 신자인 그들 대다수는 혀끝으로만 신앙을 말하면서, 신조가 아무리 고원한 것일지라도 여전히 종교에 관한 한 단순한 이교 신앙과 거리가 멀지 않은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근년에 있어 우리의 물질 문명의 성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서유럽 사회의 과학 지식과, 그 지식을 실제로 응용하는 기술은 위험할 정도로 비교적이다. 민주주의와 산업주의라는 크고 새로운 사회적 세력은 몇몇의 창조적 소수자가 불러일으킨 것으로, 대다수의 인간은 표면적 민주주의와 산업주의 인식 수준에 남아 있어 여전히 이들의 거대하고 새로운 사회 세력이 출현하기 시작한 이전과 거의 같은 지적·도덕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땅의 소금‘을 자부하는 서유럽인이 오늘날 그 맛을 상실하는 위험에 빠진 주요한 이유는 서유럽 사회의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인간에게 전혀 소금이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성장이 창조적 개인 또는 창조적 소수자에 의해 성취되는 사업이라는 사실은, 결국 선구자가 있는 힘을 다해 전진할 때, 느린 후위 부대를 함꼐 끌고 가는 무슨 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한 비창조적인 다수자는 뒤에 남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점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그에 입각하여 작업을 진행시켜 온 문명과, 미개 사회의 차이에 대한 정의를 수정할 필요를 느낀다. 이 「연구」의 처음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원시 사회가 정지 상태로 있는 데 비해 문명ㅡ발육 정지 문명 이외의 문명ㅡ은 다이내믹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우리는 성장기의 문명은 그 사회체 안에 있는 창조적 개인의 다이내믹한(역동적인) 운동에 의해 행해진다는 점에서 정적인 원시 사회와 다르다고 바꿔 말해야 한다. 그리고 또 이런 창조적 인격은 그 수가 가장 많을 때라도 극히 약간의 소수자로 제한된다고 덧붙여야 한다. 대부분의 성장기 문명은 그 관여자의 대다수가 정적인 원시 사회의 성원과 마찬가지로 활발치 못한 휴지 상태에 있다. 게다가 성장기 문명의 관여자 중 대다수는 겉치레로 칠해진 교육의 도금을 벗기면 미개인과 똑같은 감정을 지닌 인간이다. 이 점, 인간의 성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속담에 일면의 진리가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뛰어난 인격ㅡ그것을 천재라 부르든 신비가라 부르든 혹은 초인이라 부르든 상관없으나ㅡ은 평범한 인간성 뭉치 속에 던져진 빵 종류에 불과하다. - P274
276-8 "이중의 노력, 즉 누군가가 새로운 발견을 하는 노려과, 남은 자 전부가 그것을 받아들여 그에 순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솔선적인 행위와 복종하는 태도가 어느 사회 속에서 동시에 발견되면 그 사회는 곧 문명이라 부를 수 있다. 실제의 문제로는 제2조건 즉 다수자의 인식력이 제1조건 즉 천재의 등장보다도 확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원시 사회가 뜻대로 할 수 없었던 불가결의 요소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뛰어난 인격은 아니다(자연이 언제나 어디서나 몇 사람의 그 같은 변종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결여되었던 요소는 오히려 이런 류의 인간이 그 우수함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했던 것이며 또한 다른 인간이 그의 지도에 따르려는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비창조적인 다수자를 실제로 창조적 소수자의 지도에 따르게 하는 데는 실제적이고 또 이상적인 두 가지 해결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훈련에 의한 방법이며······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에 의한 방법이다. ······첫째 방법은 비인격적인 습관으로 이루어진 도덕적 습성을 강제적으로 주입시킨다. 둘째 방법은 다른 인격을 모방하고 다시 그와 정신적으로 일체가 되어 많든 적든 완전히 그와 동일화되는 것이다."(베르그송)
영혼에서 영혼으로, 직접 창조적 에너지의 불을 붙여가는 일이 확실히 이상적인 방법이긴 하나, 거기에만 의존하는 것은 실행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한 방안이다. 비창조적인 대중에게 창조적 소수자와 동일 행동을 취하게 한다는 문제는 순전히 형식·구조·가치의 동시적 모방 즉, 미메시스적 능력ㅡ인간성은 냉정히 말해 그다지 고급이랄 수 없는 능력의 하나이고, 영감의 요소보다도 훈련의 요소 쪽이 많이 포함된다ㅡ을 발휘시키지 않는 사회적 규모에서는 실제로 해결할 수가 없다. 미메시스(모방)를 활성화하는 것이 당면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이유는 하여간 모방이 미개인의 통상 능력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모방은 미개 사회와 문명 사회를 통해 사회 생활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특성이지만, 두 종류의 사회에 있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작용한다. 정적인 미개 사회에 모방의 대상은 ‘습관의 굴레‘의 화신인 살아 있는 성원 중에서도 낡은 세대나 죽은 자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문명의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는 모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새로운 경지를 연 창조적 인격으로 향하게 된다. 능력은 같으나 각각 보수형과 첨단형이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습을 바꾼 원시적인 사회적 훈련, 즉 기계적이고 거의 자동적인 ‘우로 나란히, 좌로 나란히‘ 식의 훈련이 진정으로 플라톤이 한 인간으로부터 다른 인간에게 철학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디오니소스에 답한 제7서한」). ‘친밀한 개인적 교제와 용의주도한 지적 교제‘의 유효한 대용품 역할을 이행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해 오로지 대답할 수 있는 점은 지금까지 플라톤식의 방법을 사용해서 다수 인간의 타성을 실제로 극복한 일이 없다는 것, 활발치 못한 다수자를 활동적인 소수자 뒤에 따라오게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친밀한 영감을 준다는 이상적인 방법은 항상 많은 인간을 한 묶음으로 하여 사회적 훈련을 시킨다는 실제적 방법ㅡ그것은 미개인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으로, 새로운 지도자가 지휘를 하고 새로운 전진 명령을 내릴 때에는 사회의 진보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ㅡ에 의해 보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메시스의 신은 그 사회적 ‘자산‘ㅡ재능·감정·사상ㅡ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그는 자신의 자산을 획득한 인간에게보다는, 그 자산을 창조한 인간을 만나 그를 모방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 자산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을 인간들에게 줄 것이다. 사실 모방은 하나의 지름길이다. 이 지름길은 필요한 목적지에 달하기 위한 불가피한 길인지도 모르나, 동시에 마찬가지로 성장기의 문명을 불가피하게 쇠퇴의 위험에 봉착케 할 수도 있는 의심스러운 편법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 위험에 대해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 P276
278-282 은퇴와 복귀-개인 위에서 우리는 창조적 인격이 최고의 정신적 수준을 가진 신비가의 길을 선택한 경우에 받는 도적에 대해 고찰했다. 우리는 그들이 우선 행동에서 황홀 상태로 이행하고, 이어서 황홀 상태에서 새롭고 보다 높은 차원의 행동으로 이행하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은 창조적 운동은 창조적 인격의 심적 체험에 근거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창조적 인격이 소속된 사회에서 외면적으로 이루는 창조적 운동의 이중성을 표현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은퇴와 복귀라고 부를 수 있다. 은퇴는 창조적 인격이 한동안 사회적 노역과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다면, 잠든 채로 있었을지도 모를 능력을 그 자신의 내부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한다. 그와 같은 은퇴는 창조적 인격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수도 있으며, 또 어쩔 수 없는 사정에 몰려 부득불 강요되는 수도 있으나, 어느 경우나 다 은퇴자는 은둔자(anchorite)로서 변모하는 데 좋은 기회이며, 또한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anchorite(은둔자)‘는 그리스 어로 ‘이탈해 가는 자‘이다. 그러나 고독 상태에서 변모를 이룩해 봐야 그 변모한 인격이 처음에 나온 그 사회 환경으로 다시 한 번 되돌아가는 복귀의 서막이 되지 않는 한 아무짝에도 쓸 데 없으며, 또 십중팔구 아무런 뜻도 지니지 않는다. 사회 환경이야말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태어난 환경이며, 만일 영원히 그곳에서 떠나려고 한다면, 인간은 인간성을 버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짐승이든지 신‘ 중 어느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복귀야말로 이 운동 전체의 본질이며 목적이다. 모세가 홀로 시나이 산에 오르는 이야기를 전하는 시리아 사회의 신화에서 이상과 같은 점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 여호와를 만나기 위해 산에 오른다. 부름을 받은 것은 모세 한 사람뿐이며 다른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떨어져 있도록 명령받는다. 그러나 여호와가 모세를 산 위로 부른 목적은 산에 올라 신과 직접 말을 나눌 수 없었던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규칙을 전하도록 다시 모세를 사자로서 산에서 내려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모세가 하느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법)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느님이 손가락으로 친히 쓰신 것이더라."(<출애굽기>) 19:3, 31:18).
14세기 아랍 사회의 철학자 이븐 할둔이 쓴 예언자의 경험 및 사명에 관한 기술도 역시 마찬가지로 강하게 복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불과 한 순간 눈 깜짝할 정도로 재빠르게 왔다 가는 한 순간에 인간 본성을 벗어버리고, 천사의 성질을 몸에 걸치는 천성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천사의 세계에서 영혼은 동료인 인간에게 전할 사명을 받은 다음에 다시 인간본성으로 되돌아간다."(「무카다마트」제2권)
이 이슬람 사회의 예언 교리에 대한 철학적 해석 중에 헬라스 사회 철학에 대한 유명한 구절은 즉,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국가」)의 방향이 인정되리라 생각된다. 그 글에서, 플라톤은 보통의 인간들이 빛을 등 뒤에 지고, 그들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실재가 벽 위에 비치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동굴 속의 죄수로 비유하였다. 죄수들은 동굴 속 벽 위에 보이는 그림자를 궁극의 실재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은 그것밖에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 한 사람의 죄수가 갑자기 풀려나 뒤돌아서 빛을 향하여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정한다. 이처럼 갑자기 해방된 죄수는 처음에는 눈이 부셔 당황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의 눈은 차차로 시력을 회복하고 실재 세계의 본체가 그에게 인식된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동굴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번에는 어둠 때문에 아까 햇빛 속에 나갔을 때처럼 눈이 안보여 또다시 당황한다. 아까 햇빛 속에 나가게 된 일을 후회했듯이, 이번에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오게 된 일을 후회하나, 후회하는 이유는 전보다도 한층 더 강하다. 한번도 햇빛을 본 일이 없는 동굴 속에 있는 친구들 곁으로 돌아온 그는, 친구들에게 적대시 당할 위험에 봉착하게 된다.
"반드시 친구들에게서 조소를 받을 것이며, 그들로부터 지상에 나갔던 결과는 다만 눈을 완전히 버리고 돌아왔을 뿐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지상으로 나갈 생각을 하는 놈은 바보라는 교훈을 얻는다. <이렇게 해방시켜 높은 곳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참견을 하는 놈은 잡아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그렇게 하겠다.>"
로버트 브라우닝 시의 애독자는 여기서 그가 쓴 라자로의 환상을 떠올릴 것이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부활한 라자로는 마치 딴 사람이 되어 ‘동굴‘로 돌아갔으리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는 이 같은 진귀한 체험을 하고 나서 40년 후의 동일한 노인인 베다디 라자로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카르시시라는 사람이 자기가 속한 조합의 우두머리에게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쓰는 아라비아의 여행 중의 「편지문」을 빌려 묘사하고 있다. 카르시시에 의하면 베다니의 촌민은 불쌍한 라자로가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아무 쓸모 없는 마을의 백치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은 카르시시에게는 어쩐지 그렇게는 여겨지지 않는다. 브라우닝은 라자로의 ‘복귀‘를 효과적인 형태로 묘사하지 못했다. 라자로는 예언자도 순교자도 되지 못하고 그 대신 복귀한 플라톤의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편한, 내쫓기지는 않지만 완전히 무시당하는 그러한 운명을 감수했다. 플라톤 자신이 복귀의 시련을 묘사할 때, 매우 매력이 부족한 묘사법을 쓰고 있으므로 플라톤이 그의 선택된 철학자들에게 사정없이 복귀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뜻밖의 기분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들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사상 체계의 본질적인 점이라면, 선택된 사람들은 철학을 배운 뒤 단순한 철학자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또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점이다. 그들을 계발하는 일의 목적과 의의는 그들이 철인왕이 되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그들을 위해 설정하고 있는 길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이 걸어온 길과 같은 길이다. 그러나 길은 동일해도 그 길을 걸어간 헬라스 사회의 철학자와 그리스도교적 정신은 같지 않다. 플라톤의 생각에는, 해방되어 계몽을 받은 철학자의 개인적 이해와 욕구는 여전히 "암흑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도사리고 있으며 ······괴로움과 쇠사슬에 묶여 있는"(<시편> 107:10) 그의 많은 동료들의 몰이해와 당연히 부딪힐 것으로 단정지어진다. 플라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동굴 속 죄수들의 이해가 어떠한 것이든 철학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과 완성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인류의 필요에 봉사할 수가 없다. 일단 광명에 이르게 되면, 철학자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일은 동굴 밖의 빛 속에 머물며, 언제까지나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헬라스 사회 철학의 근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는, 가장 좋은 생활 상태는 관상(테오리아) 또는 ‘바라보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피타고라스는 관상 생활을 행동 생활의 상위에 두고 있으나, 이런 행동과 실천의 가르침이 헬라스 사회의 철학적 전통을 일관해서 흐르고 있었고, 헬라스 사회가 마침내 해체되려 하던 가장 후기 시대에 살고 있던 신플라톤파 철학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플라톤은 그의 철학자들이 단순한 의무 관념만이라도 세속적인 사업에 동의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철학자들의 거부라는 것이 플라톤의 1세대 전부터 시작된 헬라스 문명의 쇠퇴가 왜 플라톤 세대에 와서도 결국 회복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또한 왜 헬라스 사회의 철학자들이 ‘위대한 거부‘를 했는지 그 이유도 명백하다. 그들의 도덕적 한계는 잘못된 신념의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은 복귀가 아니라 황홀 상태야말로 그들이 개시한 정신적 편력의 전부이며 종국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실제로는 복귀야말로 그들이 하고 있는 운동의 목적이며 정점인데도 불구하고 황홀 상태로부터 고통을 수반하는 복귀로의 이행을 단지 의무의 제단 위에 희생물로 바치는 일이라고밖에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비적 체험에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덕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의 작용으로 높은 영적인 접촉 후 곧장 내려가게 하며 아직 구제되지 않은 속세와 도덕적이고도 물질적인 교제를 갖도록 했다. 이 ‘은퇴와 복귀‘의 운동은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인간 생활의 특유한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일반 생명의 특색이다.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여 식물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자, 이 운동이 식물의 생활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은 신화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상상력과 인간의 희망·불안이 농업과 관계가 있는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 이유이다. 매년 되풀이되는 곡물의 은퇴와 복귀가 제사나 신화 속에서 의인적인 표현으로 바꿔 놓여져, 이를테면 코레나 페르세포네의 약탈과 반환, 디오니소스·아도니스·오시리스 기타 고장마다 갖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보편적인 곡물의 정(精), 또는 시간의 신이 죽음과 부활이 되어 나타나 있고, 틀에 박힌 같은 인물이 갖가지 이름 아래 꼭 같은 비극적 드라마를 반복하는 데도 이런 신전의 제사와 신화는 농업의 관습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상상력은 또 식물의 생명에 나타나는 은퇴와 복귀의 현상 속에 인간 생활의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즉, 알레고리)하고, 이 알레고리에 의거하여 성장기의 문명에 있어서 걸출한 인물이 대중에게서 이탈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간은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죽음의 문제와 맞붙어 왔다. - P278
297 세력 균형은 한 사회가 몇 개의 서로 독립된 지방 국가로 분화할 때면 반드시 발동되는 정치 역학 계통 중 하나이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와는 다른 그리스도교 부분에서 분리한 이탈리아 사회는 동시에 지금 말한 대로의 정치 형태로 변화했다. 저마다 지방적·자치적 권리를 주장하기만 하는 다수의 도시 국가에 의해, 이탈리아를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이탈시키려는 운동이 이루어졌다. 즉 격리된 이탈리아 세계 창조와 이 세계 다수 국가의 분화는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세력 균형이 영토·인구·부에 있어서 낮은 수준에 머물게 하도록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어느 기준으로 보나 국가의 평균 규모는 정치적 세력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본다. 그 규모를 평균 이상으로 증대할 우려가 있는 국가는 거의 자동적으로 부근의 다른 국가로부터 도전을 받아 압력에 걸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압력은 당해 국가군의 중앙부에 최대로 가해지며 주변에서 최소로 된다는 것이 세력 균형의 여러 법칙 중 하나이다. 중앙부에서 어느 한 국가가 영토 확장을 목표로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면 주위의 모든 국가에서 빈틈없이 감시하여 기민하게 대항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겨우 수 평방 킬로미터의 토지 주권을 놓고 가장 집요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반대로 경쟁이 악화되고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는 경우가 있다.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타국을 침해하는 일 없이 영역을 팽창하였고, 러시아는 발트 해에서 태평양까지 팽창할 수 있으나, 프랑스나 독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알자스나 포젠 소유권을 도전받지 않고 영유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나 미국이 오늘날 서유럽의 낡고 비좁은 민족 국가들과 갖는 관계가 400년 전 이들 국가ㅡ루이 11세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탈리아화된 프랑스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이탈리아화된 에스파냐 및 튜더 가, 초기의 국왕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탈리아화된 영국 등ㅡ와 피렌체·베네치아·밀라노 같은 당시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와의 관계와 같다. - P297
303 영국인이 발명한 의회 정치라는 정치 제도가 나중에 산업주의를 위해 참으로 안성맞춤인 사회적 배경을 제공했다. 행정 담당자가 국민의 대표인 의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정치 조직이라는 의미로서의 ‘민주주의‘와, 공장에 집중한 ‘손‘(노동자)에 대한 대량 생산 조직이라는 의미로서의 ‘산업주의‘는 가장 주요한 현대의 두 가지 제도이다. 민주주의와 산업주의, 이 두 가지 제도가 널리 행해지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문화가 달성한 정치적·경제적 사업을 도시 국가적 규모에서 왕국적 규모로 옮기는 문제를 위하여 서유럽 사회가 당시 발견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해결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해결법은 다 함께 후세의 영국의 정치가 한 사람이 ‘영광스런 고립‘이라 부른 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시대의 영국에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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