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3 프롤레타리아 교회의 지배권을 쥐고 그 권력을 악용함으로써 교회를 지배적 소수자의 생각대로, 또한 그들의 이익이 되도록 운영하는 신관 계급은 반드시 지배적 소수자에게 소속되는 종전의 신관 계급 가문의 출신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실재로 프롤레타리아의 교회 자체의 지도적 인재가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로마 공화제 시대의 초기 정치사에서 서민 계급과 귀족 계급 사이의 ‘스타시스(계급전)‘가 종말을 고한 것은, 이들 비특권 계급인 서민의 지도자가 민중의 신뢰를 저버리고 민중을 죽게 내버려 둔다는 묵계 아래 귀족 계급이 서민 계급의 지도자를 한패로 끌어들이는 ‘거래‘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유대 민중은 그리스도 시대 이전에 그들의 옛 지도자였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 의하여 배반당하고 버림받았다.
이 유대의 ‘분리주의자‘들은 최초에 의도한 뜻과는 반대의 뜻으로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이름에 알맞은 행동을 하였다. 바리새 인은 원래 헬레니즘에 물든 유대인이 외래의 지배적 소수자 진영에 참가하였을 때 이들 변절자로부터 분리된 유대의 퓨리턴(청교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시대에 바리새인의 현저한 특징은 유대인 사회의 충실하고 또 신앙이 깊은 성원인 민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도 민중에 대하여 위선적으로, 자기들의 행동이야말로 유대인의 모범이라고 일컬었던 점에 있었다. 이것이 복음서의 여러 곳에 나오는, 바리새인에 대한 통렬한 비난의 역사적 배경이다. 바리새인은 유대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로마 인 지배자와 함께 유대를 종교적으로 지배한 유대인의 지배자였다. 실제로 그리스도 수난의 비극에 있어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로마의 관헌 측에 가담하여 그들을 욕보인, 그들과 같은 종족의 예언자를 죽이려고 꾀하였던 것이다. - P582

583-7 "놀라운 것은······ 이 새로운(즉 그리스도교의) 신화가 외국으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어로 저술한 그리스도 교 교부들의 신학과 철학이 본질적인 점에서 플라톤적인 것임이 밝혀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거의 수정을 가하지 않고 플라톤을 채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융합으로 미루어 플라톤이 옛날 신들의 이야기로 대체하려고 한 신화는 그리스도 교의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그리스도 교 자체였다는 점이 된다. ······ 그리고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암시를 통하여 플라톤 자신은 곧 오고야 말 새로운 신의 출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며, 그의 우화는 이것이 예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변명」 속에서 자신의 죽음 뒤에 출현하여 죽음에 보복할 영혼의 존재를 증언하는 다른 증인이 있음을 아테네 시민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철학이 아무리 추리를 하고, 고원한 상상을 전개시켜도 참다운 진리는 신의 은총에 의하여 인간에게 계시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철학이 종교에 몸을 맡기는 역사적 기록은 헬라스 사회에 매우 풍부하므로 우리는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계를 좇아 살펴볼 수 있다.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트라키아의 벤디스 여신 신앙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냉정한 지적 호기심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헤로도토스의 태도, 즉 그가 때때로 부수적으로 행하고 있는 비교 종교학적 고찰의 태도도 역시 그와 같았다. 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학문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에 의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이 무너진 뒤 그 후계 국가들의 헬라스 사회 출신 지배자는 잡다한 인종이 뒤섞인 민족들의 종교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의례를 정해야 했다. 동시에 지배적 소수자에 의하여 신학적 문제가 그때까지보다도 다소 큰 실제 관심사로 떠올랐다. 또한 스토아파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 창시자들이나 전파자들이 정신적 황야에서 절망하여 방황하는 인간 각자의 영혼에 어느 정도의 정신적 위안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 학파의 경향과 기푸을 이 시대 헬라스 사회 철학의 지배적 경향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제자들이 알렉산드로스 이후 200년 동안 점점 회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인 정세의 변화는 스토아의 문호를 크게 개방하여 민중의 종교적 신앙을 맞아들인 시리아의 그리스 인 스토아파 철학자와 아파미아(시리아의 지방)의 포세이도니오스(기원전 100년경 그리스의 천문학자)와 함께 일어났다. 그로부터 200년이 못 되어 스토아파의 지도권은 갈리오의 동생이며 성 바오로와 같은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로 옮아갔다. 세네카의 철학적 저작 중에는 바오로의 서한 중 여러 대목을 상기시키는 똑같은 글귀가 여러 군데 나오므로 후세의 멍청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와 그리스도교 전도자 바오로 사이에 서한 교환이 있었다고 상상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와 같은 억측은 사실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에 같은 사회적 체험에 의하여 촉진된 정신적 음악의 두 가지 작품에 이와 같이 가락이 일치되는 대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해체기 문명의 변경을 지키는 군인과 경계선 저쪽의 야만인 전투 단체와 관계를 고찰하였을 때, 우리는 제1기에 양자가 서로 접근함으로써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된다는 것, 다음에 제 2기에 양자가 다같이 같은 야만의 평면에서 합류함으로써 뒤섞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과 병행하는 지배적 소수자인 철학자와 프롤레타리아의 종교 신봉자가 서로 접근한 역사에서는 세네카와 성 바오로가 높은 평민에서 ‘접근함‘으로써 제1기를 마무리한다. 제2기에 철학은 자기보다 덜 계발된 종교의 영향에 굴복하여 성실한 신앙으로부터 미신으로 빠진다.
지배적 소수자의 철학적 말로는 이와 같이 가련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힘껏 노력하여 고등 종교의 온상이면서 보다 호젓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토양에 침입할 수 있었더라도 이 운명을 모면할 수는 없다. 철학도 그곳에서 간신히 꽃피지만 모처럼 꽃이 피었더라도 씨를 늦게 뿌려 마지못해 피는 이 꽃은 건전하지 못한 타락 상태에 빠진 나머지 철학에 위해를 끼치므로 아무런 쓸모가 없다. 문명의 사멸이라는 마지막 막이 오르면 철학은 사멸하는 데 반하여 고등 종교는 살아남아 장래의 지위를 확보한다. 그리스도 교는 합리성의 포기 가운데 불사의 영약을 발견하지 못한 신 플라톤 철학을 밀어젖히고 살아남았다. 실제로 철학과 종교가 만날 경우, 종교는 반드시 세력을 증대시키고 반대로 철학은 반드시 쇠퇴해 간다. 그러므로 양자가 만나는 데 대한 고찰을 마침에 있어 왜 철학의 패배가 기정 사실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종교와의 경쟁에서 처음부터 철학이 패배하도록 정해지게 하는 약점은 무엇일까? 다른 모든 약점의 근원이 되는 치명적이고 근본적인 약점은 정신적 활력의 결핍이다. 즉, 삶의 ‘엘랑(비약)‘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철학이 무능해진다. 이 결핍은 철학이 대중을 끄는 힘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철학에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이 철학을 펴서 전하는 사업에 모든 힘을 기울이려는 기력을 빼앗는다. 또한 실제로 철학은, 매출이 적은 것을 자기 시집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고답파 시인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지적 엘리트나 ‘소수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세네카보다 1세대 앞선 호라티우스는 「로마의 노래」의 철학적·애국적인 송시에서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하면서 조금도 부조화를 느끼지 않았다.

가거라, 너희들 속물들이여!
닥쳐라, 너희들의 더러운 혀로
신성한 노래의 의식을 방해하지 마라.
아홉 여신의 제사장인 나는
다만 젊은이와 소녀들만을 위해 새롭고 숭고한 노래를 만든다.

이 호라티우스의 말과 다음의 예수의 ‘큰 잔치의 비유(<누가 복음> 14:23)‘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물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호라티우스 「송시집」제3권)

이와 같이 철학은 최선을 다해도 도저히 전성기의 종교의 힘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 다만 열등한 신자의 결점을 졸렬하게 모방할 수 있었을 뿐이다.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시대에 겨우 잠시 동안 윤곽이 단정한 대리석상 같은 헬라스 사회 사람들의 지성에 생명을 불어 넣은 종교의 숨결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이후 급속도로 청신함을 잃고 숨 막히는 듯한 광적 신앙으로 떨어졌다. 철학적 전통의 계승자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얻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지성에 호소하는 것을 중지하였으나 달리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현인이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성인도 못 되고 기인이 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소크라테스에게 등을 돌리고 디오게네스를 그의 철학적 모범으로 삼았다. 주행자인 성 시메온을 비롯한 추종자인 고행자에게 있어 ‘그리스도 교적‘ 금욕주의의 원천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전설적인 디오게네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희비극적인 종막에서 플라톤과 제논의 마지막 유파들은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모방에 몸을 맡김으로써 그들의 스승으로 추앙하여 모범으로 삼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의 불충분함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앞서 호라티우스가 청중에게 한 말을 거부한, ‘저속한 민중‘과의 거짓 없는 영합이다. 최후의 신플라톤파 철학자였던 이암블리코와 프로클로스는 철학자라기보다는 공상적이고도 비실제적인 가공의 종교의 성직자이다. 성직자의 세력을 지지하고, 종교적 의례에 열의를 보인 율리아누스는 그들의 계획을 실행한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있었는데, 그의 사망과 동시에 국가에 의하여 지지받고 있던 그의 교회 조직이 와해한 것은 현대 심리학의 한 학파 창시자가 한 다음 판단이 옳음을 입중한다!

"위대한 혁신은 결코 위에서부터 내려오지 않는다. 언제나 어림없이 밑에서부터 올라간다. ······ 몹시 바보 취급을 받고도, 말을 하지 않는 지상의 민중ㅡ흔히 높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학문적 편견에 그다지 물들지 않은 사람ㅡ들로부터 일어난다." - P583

587-9 지배자가 나라의 종교를 결정한다?(일부)
우리는 앞 절의 끝에서 율리아누스가 철학자로서 심취한 사이비 종교를 황제로서 백성들에게 강요하다 실패한 데 대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더 좋은 상황 아래서였다면 지배적 소수자가 그들의 정신적 약점을 물리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서 보충하고, 부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효과적인 정치적 압력에 의존하여 그들의 피지배자에게 철학이나 종교를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약점을 메꿀 수 있겠는가 하는 일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이 편의 우리 연구에서 논점의 줄거리를 벗어난 문제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볼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기도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헬라스 사회의 동란 시대 중에 나타난 계몽기의 사회학설 중 하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학설에 의하면 종교적 관습을 위해서 하급 계층을 향해 계획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거니와 또 이례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실제로 문명의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 종교 제도의 정상적인 기원이다. 다음에 게재된 폴리비오스의 유명한 일절 중에 이 설이 로마의 종교 생활에 적용되었다.

"로마의 정치 체제가 다른 나라에 비해 가장 뛰어나게 우수한 점은 종교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로마는 다른 나라가 몹시 싫어하는 것, 즉 미신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한 기반으로 만들어 내었다. 로마는 미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에 극단적일 만큼 침투시켰기 때문에, 많은 관찰자는 이것이 부당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의견으로는, 로마 인은 일반 대중을 겨냥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현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선거민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기만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제로서 대중은 항상 불안정한 것이며, 또한 무한한 정욕과 비이성적인 기질과 광포한 분노에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유발과 그와 같은 연극을 꾸며대는 이외에 그들을 제어하는 방법이 없다. 나는 우리들의 선조가, 지금은 전통적인 것이 되어 있는 신학적 신앙이나 지옥에 관한 관념을 대중 속에 심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와 같은 일을 행함에 있어 우리들의 선조는 아무렇게나 그때그때의 방식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의식적·체계적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재 종교를 절멸시켜 버리려는 현대인이야말로 그 무분별과 무책임을 책망받아야 할 것이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 이론은 국가의 기원에 관한 사회 계약설과 거의 같은 정도로 진실에서 먼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정치 권력이 정신 생활에 주는 영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력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사정이 조성되었을 때뿐이며 그런 경우에도 작용 범위는 극히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성공하는 것은 예외이며 실패하는 것이 통칙이다. - P587

589
예외의 쪽을 먼저 보면, 때로 어떤 숭배가 참된 종교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고 종교의 가면을 쓴 어떤 정치적 감정의 표현인 경우에 실제로 그 숭배를 국교로 하는 데에 성공하는 수가 있다. 예컨대 동란 시대의 고배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회가 정치적 통일을 갈망하는 표현으로서 행하는 유사 종교적 의식이 그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이미 인간 구세주로서 피지배자의 마음을 장악한 지배자는 그들 자신의 지위와 그의 가계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숭배를 국교로 하는 데 성공한다. - P589

592-3 루이 14세의 야만적인 수법은 프로테스탄티즘을 프랑스의 정신적 토양에서 뽑아 버렸으나, 그것은 회의주의라는 대토작물을 위해 망을 비운 데 불과했다. 낭트 칙령(가톨릭이 앙리 4세가 1598년 국내의 신교파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 폐지 후 9년도 되기 전에 볼테르가 태어났고, 영국도 역시 청교도 혁명의 종교적 호전성의 반동으로 회의적인 풍조가 시작되었다. 이 절의 첫머리에 내건 폴리비우스(그리스의 로마사 역사가)의 인용 중에 명시된 것과 흡사한 새로운 계몽 사상과 종교 그 자체를 조소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사상 경향이 출현했다. 그래서 1736년에 버틀러 주교는 그의 저서 「자연 종교·계시 종교와 자연의 구조·진로의 유사성」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 교는 연구의 대상마저도 될 수 없으며, 이제 드디어 허구인 것이 판명되었다는 생각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이와 같은 견해가 현대의 모든 식자의 일치된 견해인 것처럼, 또 말하자면 오랫동안 이 세상의 즐거움을 방해받은 보복으로 조소와 우롱의 대표적인 대상으로 그리스도 교를 취급하고 있다."

광신을 근절하기는 했지만 그 대신 참다운 신앙의 불이 꺼져 버린 그와 같은 심적 태도는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계속되어, 서유럽화한 ‘대사회‘의 모든 면에서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제 겨우 그 본질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서유럽 사회체의 정신적 건강은 물론 물적 존재까지 위협하는 최대의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열렬하게 논의되고 시끄럽게 선전되는 우리들의 정치적·경제적 병폐의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이 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정신적 해악은 이제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라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병은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법을 처방하기는 어렵다. 신앙은 주문하면 곧 입수할 수 있는 표준화된 상품과는 다르다. 그럭저럭 2세기 반이나 계속되어 온 종교적 신념의 점진적 쇠퇴에 의하여 서유럽 인의 마음 속에 텅 빈 정신적 공허를 다시 채운다는 것은 실제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유럽은 아직도 16~17세기에 서유럽 조상이 범한 죄, 즉 종교의 정치 예속 때문에 후유증을 보이고 있다.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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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9 미국과 (구)소련의 우주 과학 예산을 합한 금액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10년마다 핵잠수함 두세 대를 생산하는 데 드는 경비와 비슷하며, 여러 무기 체계들 중에서 단 한 가지에 드는 연간 경비를 약간 넘는 미미한 액수이다. 1979년도 4·4분기에 F/A-18 전투기 사업에 들어간 예산은 51억 달러로, F-16 사업은 34억 달러로 각각 증액됐다. 그러나 행성들의 무인 탐사에 투자한 예산이 미국이든 (구)소련이든 미소한 액수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체적 비교를 위하여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을 예로 들어 보겠다. 미국은 1970년과 1975년 사이에 무려 7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예산을 캄보디아 폭격에 퍼부었다. 바이킹 우주선을 화성에 보내는 데에 든 경비나, 보이저 우주선을 외행성계로 보내는 데 필요한 총 예산이 1970~1980년에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데 소요한 경비보다 적다. 전문 기술 인력의 고용을 증대시키고 첨단 기술의 개발을 자극함으로써, 우주 탐사 계획은 투자한 액수의 몇 배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효과가 있다. 행성 탐사에 쓰인 1달러는 국가 경제에 7달러로 돌아온다는 연구 결과는 우리 모두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산 부족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우주 개발 계획이 여러 가지 있다. 이 계획들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기술적으로도 실현 가능한 것들이다. 화성 표면을 가로질러 움직일 수 있는 차량의 개발, 우주선과 혜성의 궤도 랑데부, 타이탄 위성 대기에 탐사선을 내려 보내려던 계획, 외계 문명권의 대규모 전파 탐색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 P678

707(옮긴이 후기) 저는 꿈, 사유의 지평, 우주와 인간의 관계 등 그가 제시하는 몇 마디 키워드에 그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인이 달나라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현대 과학과 공학의 눈부신 발달 때문만은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을 두고 노래한 시인들이 더 중요하고 큰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소망없이 이루어진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시인이 우리 가슴에 심어 준 꿈의 위력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달나라 여행을 설계하게 했을 것입니다. 외계 생명의 발견이야 가까운 장래에 기약할 수 없겠지만 어느새 140여 개에 이르는 외계 행성의 존재가 태양계 밖에서 확인되었으니 외계 생명의 존재도 언젠가는 밝혀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외계를 향한 인류의 끈질긴 외침이 언젠가는 외계 문명과의 교신으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온다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인류 역사를 바꾼 고전 중의 하나로 재평가될 것입니다. - P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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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8 지배적 소수자의 야만에 대한 조사를 끝내기에 앞서, 근대 서유럽 세계에도 이러한 사회적 현상의 징후가 인정되는지 어떤지 생각해 보자. 얼핏 생각하면 서유럽 사회는 전세계를 그 촉수 안에 끌어안고 있으며, 이미 서유럽을 야만화할 정도의 규모를 지닌 외적 프롤레타리아는 남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의하여 벌써 이 문제에는 최후의 회답이 주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유럽 인은 오늘날 서유럽 사회의 ‘신세계‘인 북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저지대 지방 출신으로서 프로테스탄트적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전통을 지니면서 사는데, 그들은 이미 유럽의 ‘켈트 외곽 지대‘에서 유배 생활을 끝마친 뒤 애팔래치아 산맥의 미개척지에서 고립 생활을 보냄으로써 분명 심하게 야만화된 상태로 광범한 지역에 다수의 인간이 퍼져 있다는 사실은 서유럽인을 몹시 당황케 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메리카 변경민이 야만화된 결과에 대하여 이 문제의 권위자인 아메리카의 한 역사학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아메리카의 식민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 유럽의 생활이 이 대륙에 들어왔는지, 또 아메리카가 그 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발전시켰으며 반대로 유럽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우리의 초기 역사는 유럽에서 온 씨앗이 아메리카의 환경 속에서 발전해 가는 과정의 연구이다. ······변경 지역은 아메리카화가 가장 빠르고도 효과적으로 행하여지는 선이다. 황야는 식민지 개척자를 지배한다. 최초에 개척자가 변경 지역에 오는 때, 그는 복장·생업·도구에 있어서도, 여행 방법이며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완전히 유럽 인임을 발견한다. 그런데 황야는 그를 철도 차량에서 끌어내려 자작나무 통나무배에다 태운다. 문명인의 의복을 벗기고 수렵용 셔츠에 모카신을 신게 한다. 황야는 그에게 체로키족과 이로쿼이족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살게 하고, 인디언식의 울타리를 주위에 두르게 한다. 이윽고 그가 옥수수(인디언 콘)를 심어,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가꾸게 한다. 또한 정통적인 인디언 방식에 따라 함성을 지르며 머리 가죽을 사냥하게 한다. 요컨대 처음 무렵의 변경 지역에서는 환경이 인간에게 너무나 강렬하다. ······ 그는 황야를 조금씩 변형시켜 간다. 그러나 결과는 자기자신도 절대로 본래의 유럽 인은 아니다. ······ 사실 이리하여 산출되는 것은 새로운 아메리카적 산물이다." - P567

571-2 언어 혼란의 전설은 이렇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가 최대의 장해로 간주되고 있는 점에서 진실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전례 없는 사회적 위기를 앞두고 사회적 행동을 통일하는 데 언어 혼란이 최대한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혼란과 사회적 마비와의 관련은 위에 확실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상의 몇 가지 현저한 예로써 입증할 수 있다.
현대 서유럽 사회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다양성이,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멸망한 도나우 합스부르크 왕국의 치명적인 약점의 하나였다. 또한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유능함을 발휘했던 오스만 파디샤의 노예 세대조차도, 이 제도가 성숙기에 이르렀던 1651년에 바벨의 저주가 투르크 궁전 안에서 술탄의 근신들 위에 내려져 궁정 혁명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을 완전히 무능한 상태로 빠뜨렸던 사실이 인정된다. 소년들은 매우 흥분한 나머지 그들이 인위적으로 배워 익힌 오스만어를 잊어버렸다. "놀라 이상하게 여기는 목격자의 귀를 울린 음향은 가지가지 소리와 언어의······떠들썩함이었다. 어떤 자는 그루지야 어, 어떤 자는 알바니아 어·보스니아 어·민그렐어·투르크어·이탈리아 어 등등 제각기 편리한 말로 소리쳤다." 오스만의 역사에 일어난 이 사건은 <사도행전> 제2장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 강림‘이라는 저 중대한 사건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일이다.
성서의 이 장면에서 나오는 말은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는 미지의 여러 가지 언어, 즉 그때까지 자기 나라말인 아람어 이외의 언어를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갈릴리 인으로서는 생소한 미지의 여러 언어였다. 그들이 돌연 그러한 방언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신이 내린 기적적인 능력 때문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수수께끼의 한 구절은 이제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점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도 행전>의 필자가, 여러 언어를 말하는 능력이야말로 새로이 계시된 ‘고등 종교‘에 온 인류를 귀의시키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진 사도들이 우선 첫째로 그 타고난 능력을 높여서 달성해야만 되는 필수 조건이라고 그 견해를 밝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도들이 태어났던 사회는 오늘날의 서유럽 세계에 비해 훨씬 ‘언어 혼란‘이 적었다. 갈릴리 인의 모국어인 아람어는 북쪽으로는 아마누스 산, 동쪽으로는 자그로스 산맥, 서쪽은 나일 강까지의 범위에서밖에 통용되지 못했지만, <사도행전>에 쓰여져 있는 그리스 어를 사용하면 그리스도교 전도자는 바다 건너 로마까지, 아니 더욱더 그 앞까지 가르침을 전할 수가 있었다. - P571

577-8 종교에 있어서의 통합주의(일부)
종교 분야에서는 통합주의, 즉 의식·제신·신앙의 혼합이라는 것이 사회 해체기에 있어 영혼의 분열에서 생기는 내면적인 혼효 의식의 외면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현상은 확신있게 사회 해체의 징후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성장기 문명의 역사에서는 일견 종교적 통합주의처럼 여겨지는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잘 살펴보면 겉보기뿐인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시오도토스나 그 밖의 고대 시인들이 기울인 노력에 의하여 수많은 도시 국가의 지방적 신화가 정리 통합되어 헬라스 전체에 공통되는 하나의 체계로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단순히 신들의 이름을 이리저리 주물럭거렸을 뿐 실제로 거기에 대응하는 다른 제식의 융합이나 여러 가지 종교적 감정의 혼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라틴 민족의 신들이 여러 올림포스의 신들과 동일시된ㅡ주피터는 제우스, 주노는 헤라라는 식으로ㅡ것도 요컨대 원시적인 라틴 민족의 애니미즘(정령 숭배)이 그리스 민족의 신인동형론에 의하여 대체된 것뿐이다.
또 한 가지는, 이들과 종류를 달리하는 신들의 이름을 동일시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해체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또한 확실히 혼효 의식을 입증하는 것인데, 잘 살펴보면 실은 진정한 종교적 현상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의 가면을 쓴 정치적 현상임을 알 수 있다. 해체기의 사회가 일찍이 성장기 동안 분화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다른 지방 국가 상호간의 정보 전쟁의 결과 정치 면에서 강제적으로 통일됨으로써, 서로 다른 지방신의 명칭이 동일시되는 것이 그것이다. 예컨대 수메르 사회의 역사 말기에 니푸르 주신(벨)의 엔릴은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에 병탄되었으며, 그 바빌로니아의 마르두크 벨은 다시 잠시 동안 카르베라는 이름을 바꾸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형태로 기념된 ‘팜믹시아(범혼합)‘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전자의 변화는 바빌로니아 왕조의 무력에 의하여 수메르 사회의 세계 국가가 재흥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며, 후자의 변화는 세계 국가의 캇시족(인도 메갈리아주 민족)의 무장들에게 전복당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 P577

578-9 헬라스 사회의 해체기에서 포세이도니오스(기원전 135~51) 시대는, 그때까지 활발하고 신랄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한 철학의 여러 유파가 단 하나 에피쿠로스파만을 예외로 하고 나머지 모두 일치하여 상호 간의 차이점보다는 오히려 공통점에 주목하여 그것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첫 100년이나 200년에는 마침내 에피쿠로스파를 제외한 헬라스 세계의 모든 철학자가 어느 파이건 간에 거의 동일한 절충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철학에서 이러한 혼효 경향은 중국 사회의 해체 역사에 있어 그 대응하는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 기원전 2세기라면 한 제국의 첫 100년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그 무렵 역시 제일 먼저 궁정에서 인기가 있었던 도교의 뒤를 이어 대체된 유교의 특색도 절충주의였다.
대립하는 철학 상호 간의 절충주의 현상은, 대립하는 ‘고등 종교‘ 상호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시리아 문명 세계에서도 솔로몬 왕(기원전 960~922. 고대 헤브라이 왕국의 제3대왕. 예루살렘 출생)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야훼 숭배와 이웃 시리아 제민족의 여러 지방적 주신과의 사이에 현저한 ‘접근‘의 경향을 볼 수 있는데, 이 연대는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솔로몬 왕의 사망이 시리아 사회 쇠퇴의 조짐이 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P578

580-1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고등 종교가 지배적 소수자와 마주칠 경우 그 고등 종교는 적응 과정에서 지배적 소수자의 예술 양식 중 외면적인 형식을 채용함으로써 지배적 소수자의 주의를 끌어 예비적인 단계에 머무는 수가 있다. 이를테면 헬라스 세계의 해체기에 그리스도교와 경쟁하여 패배한 모든 고등 종교들은 그들 신의 시각적 표현을 헬라스 사회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형태로 고침으로써 헬라스 사회 안의 전도 활동을 성공으로 촉진시키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외면뿐만이 아니고 내면적으로도 헬레니즘화하는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나타낸 종교는 하나도 없었다. 자기의 교리를 헬라스 사회의 철학 용어를 빌어 표현하는 데까지 간 것은 그리스도교뿐이었다.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본래 그 창조적 본질이 시리아로부터 유래되었던 이 종교가 사상적으로 헬레니즘화하는 운명은 아람 어가 아닌 아티카 어 ‘코이네‘가 ‘신약 전서‘의 언어로서 채용되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학자의 용어로 사용되어 온 이 언어의 어휘 자체가 이미 다분히 철학적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관 복음서(<요한복음>에 대하여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를 말함)의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런 신앙은 제4복음서(‘요한‘)의 본문에서도 지켜져 있을 뿐더러 한층 더 심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제4복음서의 서언에 보면 구세주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로고스(신학에서는 하느님의 말씀, 철학에서는 이성을 뜻함)라고 하는 사상이 쓰여 있다. 따라서 뚜렷이 언명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리에 하느님의 아들과 하느님의 로고스는 똑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로고스로서의 아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 및 목적과 동일시되고, 아들로서의 로고스는 아버지의 인격과 대응하는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서 실재화되어 있다. 로고스의 철학이 갑자기 종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 용어를 빌려 종교를 전도하는 방법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유산의 하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민이자 그리스도 교도였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가 2세기 후에 거둘 수 있도록 풍부한 수확의 종자를 뿌린 사람은 역시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이었다. 그리고 제4복음서의 필자가 육체화된 하느님과 동일시하고 있는 하느님의 로고스 사상을 얻은 것 역시 아마 같은 철학자로부터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선구자가 된 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학자는 그리스 어라는 문호를 통하여 그리스 철학의 길로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유대인이 「성서」를 이방인의 말로 번역한다는 모독적인 행위를 감히 해야 했을만큼 헤브라이 어는 물론 아람 어까지도 죄다 잊어버리고, 아티카 어인 ‘코이네‘를 자기들의 말로 삼고 있었던 마을에 필론이 살며 철학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 자체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 그리스도교 철학의 아버지가 된 유대인은 고립된 존재였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서 플라톤 철학을 끌어내려고 한 그의 능숙한 노력도 유대교로서는 아무 쓸모없는 곡예에 지나지 않았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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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7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붕괴할 시기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여성 학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나중에 신플라톤학파의 비조로 불리는 철학자 히파티아였다. 그녀는 철학자인 동시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였다. 어느 시대에서든 평생에 걸쳐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낼 수 있는 학자라면 그는 보통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히파티아야말로 이러한 범주에 드는 인물로서 37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여자가 하나의 소유물로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달랐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그녀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거침없이 활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뭇 남성의 구혼을 모두 거절했다. 히파티아가 살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미 멸망의 그림자가 알렉산드리아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노예 제도가 고대 문명의 생기를 완전히 죽여 놓은 상태였으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기독교가 이교도들의 영향과 문화를 뿌리째 뽑아내려고 하던 중이었다. 히파티아는 막강한 이 세력들의 진앙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당연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키릴루스가 그녀를 혐오할 만했다. 그녀가 로마 총독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이 혐오의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쨰 이유는 히파티아가 바로 이교도 과학과 학문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과학과 학문을 이교도의 사상이라고 폄훼했으니 키릴루스의 혐오감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자신에게 밀어닥치는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가르치고 글로 발표했다. 그녀는 자신의 일터로 가다가 키릴루스 교구 소속의 광신 폭도들이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때가 415년이었다. 폭도들은 그녀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옷을 벗기고 전복 껍데기로 만든 무기로 그녀의 살을 뼈에서 발라낸 다음, 남은 시신과 그녀의 저술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이름은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져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키릴루스는 나중에 성인의 반열에 올려졌다. - P666

667-8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한때 영화도 이제는 하나의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히파티아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 도서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책들마저 모두 파괴됐다. 인류 문명은 잘못된 뇌수술 때문에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총체적인 망각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인류의 위대한 발견과 사상 그리고 지식 추구의 열정이 모두 어디론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손실을 어떻게 숫자로 계량할 수 있겠는가? 파괴된 작품 중에는 작품의 제목만이라도 감질나게 알려진 운 좋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제목도 저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소포클레스가 썼다는 희곡 작품이 이 도서관에 123점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단지 일곱 편만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일곱 편 중 하나가 「오이디푸스 왕」이다. 이 도서관에는 아이스킬로스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도 소포클레스의 경우와 비슷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비유를 하나 들어 보자.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작가가 「햄릿」, 「맥베스」, 「줄리우스 카이사르」, 「리어 왕」,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썼고 이 작품들이 당대에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의 현존 작품은 「코리올라노스」와 「겨울 이야기」 단 두 편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고 애석한 일이겠는가? - P667

674-5 사람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와 조금이라도 다른 성격의 사회를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존재로 간주하며 심히 혐오하고는 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방outlandish‘이나 ‘외계alien‘라는 표현의 부정적 뉘앙스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잘 드러내 준다. 그렇지만 각기 다른 문명들이 보여 주는 문화와 유적의 다양성은 ‘인간으로 되어 감‘의 다른 방식들을 우리에게 시사할 뿐이다. 외계 문명인에게는 인류 사회의 차이가 유사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코스모스에는 지능을 갖춘 존재의 밀도가 예상외로 매우 높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윈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인간은 지구 이외의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지구에만 있다. 인간은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자그마한 행성에서만 사는 존재이다. 우리는 희귀종인 동시에 멸종 위기종이다. 우주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귀중하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와 다른 생각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거나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수천억 개나 되는 수많은 은하들 중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674

675-6 오늘날 우리는 인류도 더 큰 집단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과 가까운 가족에게, 다음에는 사냥과 채집 활동을 자기와 같이 하는 이들에게만 충성을 바치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충성의 대상을 자기가 속한 마을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도시 국가에서, 국가의 순으로 점차 넓혀 갔다. 사랑할 대상의 범주를 계속해서 넓혀 왔다는 이야기이다. 충성의 대상은 오늘날 초강대국이라 불리는 조직으로까지 확대됐다. 초강대국은 문화와 인종적 배경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어느 정도 함꼐 노력할 수 있는 사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화의 과정과 인격 함양을 경험하게 된다. 현대는 충성의 대상을 인류 전체와 지구 전체로 확대해야 할 시대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의 생물 종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설명한 우리 생각을 싫어하는 자들이 통치하는 나라도 지구상에는 많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배반자, 충성심이 없는 비애국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에게 자신들의 부를 나눠 줘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과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나와 좀 다른 맥락에서 한 이야기지만 H. G. 웰스의 주장대로, 인류가 우주를 얻느냐 아니면 공멸의 나락으로 빠지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 P675

676-7 돌이켜 생각하면 철저하게 모순되는 선택이 이루어진 셈이다. 행성에 탐사선을 보내는 데 쓰이는 로켓과 똑같은 로켓 추진체가 핵탄두를 적국으로 날려 보내는 데에도 쓰인다. 로켓 추진뿐 아니다. 바이킹과 보이저 탐사선에 전력을 공급하는 방사능 에너지도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알아낸 바로 그 기술에 힘입어 마련된 것이다. 모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유도하고 추적하거나 또는 적의 미사일 공격에서 자국을 보호하는 데 쓰이는 전파 기술과 레이더 기술이 행성 탐사용 인공 위성을 유도하고 제어하는 데 그대로 쓰일 뿐 아니라, 외계 문명으로부터의 신호를 검출하는 데에도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기술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파괴한다면 별과 행성의 탐사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그 반대의 상황도 물론 가능하다. 행성과 항성의 탐사가 계속될수록 인류 우월주의는 뿌리째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 대가로서 우리는 우주적 시야를 갖게 될 것이다. 우주 탐사는 지구에 사는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를 죽음과 파괴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이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구와 지구인을 이해하는 동시에 외계 생명을 찾는 데 써야 한다. 그것이 유인 탐사이든 무인 탐사이든 간에 우리의 우주 탐험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바로 그 기술과 바로 그 조직력 덕분에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우주 탐험도 전쟁에서 요구되는 바와 똑같은 수준의 전 국민적 각오와 용기를 각자에게 요구한다. 전 지구 규모의 핵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진정한 의미의 군축 시대가 온다면, 그때 비로소 인류의 우주 탐험 노력이 강대국들의 방대한 군수 산업을 흠결 없는 평화의 산업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준비 과정에서 얻는 것들을 코스모스의 탐사 준비에서도 비교적 수월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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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50 그래도 우리는 결정론적 철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자신에 가득 차고도 훌륭히 성공할 수 있는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이 된다고 추론해도 좋을까?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되리라는 신앙 때문에 이와 같이 커다란 자신과 자극을 부여받은 예정설의 신봉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 자신의 의사가 신의 의사나 자연의 법칙 또는 필연의 계율과 합치함으로써, 처음부터 틀림없이 승리를 거두기로 되어 있다는 대담한 가정을 세웠던 것 같다. 칼뱅주의자의 여호와는 그 선민을 옹호하는 신이고, 마르크스주의자의 역사적 필연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실현하는 수단인 비인격적인 힘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전쟁의 역사가 가르치듯이, 사기(士氣)의 원천의 하나인 필승의 신념을 주었고, 따라서 머리부터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결과를 달성하기 때문에 역시 옳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라는 말이 베르길리우스가 「아에네이스」 속에 그린 보트 경주에서 승리를 거둔 성공의 비결이었다. 요컨대 필연을 유력한 동맹자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유력한 동맹자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가정은 물론 하나의 ‘휴브리스‘(과거를 우상화함으로써 빠지는 오만)ㅡ그것도 가장 교만한 휴브리스의 행위여서 결국은 믿었던 사실이 논리에 의해 무참하게도 부정당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한다. - P549

551 표류 의식은 수동적인 감정이지만 그것과 한 쌍을 이루면서도 정반대의 능동적 감정인 것이 죄의식인데, 그것은 도덕적 패배의 자각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반응이다. 그 본질이나 정신에 있어서 죄의식과 표류 의식은 두드러진 대립을 보인다. 표류 의식이 마약 역할을 하여 표류자의 힘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외적 환경 속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악을 묵인하는 태도를 영혼 속에다 몰래 주입하는 데 비해, 죄의식은 자극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하여 악은 결국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것이므로, 신의 목적을 수행하고 신의 은총을 받을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의 의사에 따라 제어할 수 있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저 크리스챤(「천로역정」의 주인공)이 얼마 동안 바르작거렸던 ‘절망의 늪‘과 그를 ‘저 멀리 보이는 좁은 문‘을 향해 달리게 한 최초의 충동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굉장한 차이가 있다. - P551

554-5 죄의식은 분명히 근대 서유럽의 허약하고 왜소한 인간들에게 가장 익숙한 감정이다. 거의 강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의식은 우리가 이어받은 ‘고등 종교‘의 가장 주요한 특색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침은 멸시를 낳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이 경우 너무나 지나치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멸시 정도가 아니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근대 서유럽 세계의 기풍과 정반대인 기원전 6세기 헬라스 세계의 기풍을 대조해 보면 인간성 안에 있는 어떤 비뚤어진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야만적인 여러 신밖에 몰랐고, 빈약하고 시원치 않은 종교적 유산을 받아 그 생애를 시작한 헬라스 사회는 자기의 정신적 빈곤을 자각하고 오르피즘이라는 형태로 다른 몇 개의 문명이 선행 문명으로부터 이어받은 ‘고등 종교‘와 같은 종류의 종교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공허감을 메우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르페우스교의 의식과 교리의 성격상 죄의식이, 6세기 경의 헬라스 인이 우선 그 정상적인 배출구를 찾아내기 위해 열중한 것 같은 울적한 종교적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유럽 사회는 헬라스 사회와는 대조적으로 ‘고등 종교‘의 비호를 받아 세계 교회라는 번데기 속에서 성장하여 풍부한 유산을 이어받은 문명의 하나이다. 그리고 서유럽 인은 아마도 항상 그리스도교 유산을 이을 권리를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가끔 그 가치를 얕보아 거의 그것을 내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이후 헬레니즘(그리스 문화, 그리스 정신) 예찬이 서유럽 사회의 세속적 문화에 있어 대단히 유력한 구성 요소가 되었고 여러 방면에서 풍부한 성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헬레니즘 예찬이 육성되어 살아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헬레니즘이 근대 서유럽 사회의 모든 장점과 재능을 구비하고 있는데다가, 서유럽 인이 오늘날 열심히 그리스도교에서 이어받은 정신적 전통으로부터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죄의식에서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태어났던 때부터 헬레니즘을 지극히 멋있는 해방된 생활 태도라고 여지껏 여겨왔기 때문이다. 최근에 출현한 여러 프로테스탄트파가 천국의 개념을 보존하면서 지옥의 개념은 말없이 버렸고 악마의 개념을 풍자가와 희극 작가에게 양도해 버린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 P554

555-6 오늘날 헬레니즘은 자연과학 예찬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으며, 이런 사실로 죄의식의 회복 가능성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개량가와 자선사업가는 빈민 계급의 죄를 외면적 환경에 기인한 불운으로 간주하기 쉽다. "어쨌든 그 사람은 빈민굴에서 태어났으니 별 수 없지 않습니까?" 또 정신분석가도 마찬가지로 환자의 죄를 정신적 콤플렉스나 노이로제 등의 내면적 환경에 기인하는 불운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즉 죄를 설명하되 죄를 병으로 치고 발뺌하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선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새뮤얼 버틀러의 「에리휜」 속에 나오는 철학자들인데, 독자들도 기억하듯 불행한 노스니보어는 공금 횡령이라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단골 ‘교정사(straightener)ㅡ의사‘를 불러야 했다.
근대 서유럽 인은 ‘아테(만용)‘라는 보복을 받기 전에 ‘휴브리스(과거 생각에서 오는 오만)‘를 회개하고 그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예측할 수 없지만 우리는 현대의 정신 새왈을 바라보고, 어떡하든 지금까지 짓누르는 일에만 온통 기울여 오던 정신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는 희망을 품을 만한 징조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 P555

565-7 예민한 사람들의 정체성 찾기
4세기 중간 무렵에 로마군에 복무 중인 게르만인 병사들이 고유의 게르만 이름을 그대로 보존하는 새로운 관습이 시작된다. 급속히 일어난 듯한 이런 습관의 변화는 그때까지 무조건 로마 인의 흉내를 내는 데 만족을 느끼고 있던 야만인 ‘병사들‘의 영혼 속에 돌연 자부심과 자신감이 대두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새로운 야만족의 문화적 개성 주장에 대해, 로마인 측에서는 야만인을 배척하는 대항 수단을 쓰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마침 그 무렵부터 로마군에 복무 중인 야만인은 황제가 주는 최고 영예인 집정관직에 임명되기 시작했다.
야만인은 이와 같이 로마의 사회적 계급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로 올라간 데 비해, 로마 인 자신들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령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비속광이라기보다 야만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착적 취향에 골몰하여 야만인 풍의 의복을 걸치고 야만인의 야외 경기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나서 100년 뒤에는 지배에 복종하지 않는 야만인 대장이 독립적으로 이끄는 전투 단체에 로마 인이 입대하게 된다. 예를 들면 507년에 부이에에서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이 서로 갈리아 지방을 점유하려고 싸웠을 때, 서고트족의 전사자 중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의 손자가 전투에 가담했다. 조부 대에는 아직 이럭저럭 교양 있는 고전 문인의 생활을 보냈던 데 비하면 대단한 변화였다.
6세기 초엽 로마 속령 주민의 자손이 ‘퓌러(지도자)‘의 명령에 응하여 팔팔하고 힘찬 전투 태도를 보인 점에서, 이 시대로부터 과거 몇 세기 동안이나 전쟁놀이를 가장 큰 삶의 보람으로 여겨 온 야만족 자손보다 활기가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이 무렵에는 이미 양자 모두가 세련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대등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4세기 무렵부터 야만족 출신의 로마군이 야만족일 때의 이름을 그대로 보존하는 관습이 시작되었던 일을 서술한 바 있는데, 그 다음 세기에는 갈리아 지방에서 반대로 순수한 로마 인이 게르만 이름을 짓는 경향의 가장 초기적인 예가 나타나서, 이 관습은 8세기 말엽 이전에 이미 보편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샤를마뉴 시대의 갈리아 주민은 선조가 누구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득의양양하게 게르만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로써 로마 죄국 쇠망의 역사와 그와 유사한 중국 문명 세계의 야만화 역사ㅡ그 중요한 연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에 비하여 200년이 앞서 있다ㅡ를 비교하여 보면, 중국 문명의 경우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회에 세계 국가의 여러 후계 국가를 건설한 야만족은 그 야만스러운 소지를 감추고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올바른 형태의 중국 이름을 채용했다. 일견 하찮아 보이는 이 점에 있어 관습의 차이를 극복한 중국 사회의 세계 국가가, 그에 대응하는 샤를마뉴에 의하여 초청된 로마 제국의 ‘망령‘보다 훨씬 효과적인 형태로 재흥되었던 사실 사이에 연관을 찾아내는 일은 반드시 전혀 근거 없는 망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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