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말하는 적에 대한 사랑도 [교환]경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주라는 요구는 성스러운 경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이 보상해주기를 기대하기 떄문입니다. "잘 돌려주는 사람들에게만 무엇인가를 빌려주면서 그대들은 왜 보상을 기대합니까? 빌려주면서 돌려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신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대들은 적도 사랑해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빌려주십시오! 그러면 그대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습니다. [...] 선사하십시오. 그렇다면 신이 그대들에게 선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은 그대들이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많이 선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넉넉한 기준을 사용하십시오. 신은 그대들에게 동일한 기준을 사용할 것입니다."(「누가복음」6장 32-38절) 그와 반대로 선불교에는 더 높은 차원의 경제를 재건할 신과 같은 판관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혀 경제[가계]적으로 계산하지 않은 채 주고 나누어 줍니다[용서해줍니다]. 가계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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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정도의 민감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고 확신할 때도 대부분 속임수를 쓰거나, 규칙을 어기거나, 이기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이런 어린이들은 도덕적인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사회적으로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시했다(코찬스카 & 톰프슨, 1998).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은 대체로 양심적이고 모든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주변에 대해 예민하게 느끼고, 불안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 P39

민감한 사람들은 남에게 고통이나 불편을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피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덜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이것은 민감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남들의 무신경한 말 때문에 상처 받는 민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그들은 남들도 그들처럼 인간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신경을 쓸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민감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지 않도록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민감한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반응이 느리고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그들은 논쟁에서 대부분 패배하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뒤늦게 자기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옳았는지 깨닫고 후회한다.
민감한 사람들이 항상 양심적이고, 주의 깊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도 과도한 자극을 받거나 당황하면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때로는 굉장히 까다로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 P41

누구보다 풍부한 내면의 삶
높은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풍요롭고 이상적인 삶, 창의적인 내면세계,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지루하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으므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충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많은 활동을 하며 분주한 삶을 살던 사람이 실직하거나 은퇴하면 위기에 빠지는 사례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들은 그것을 새롭게 발견한 자유로 받아들이고 환영한다. 그 시간을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기회로 삼고, 삶을 더 느린 속도로 즐기며 살아간다.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영감을 받을 때 즉각 그 일을 시행하라는, 외면할 수 없는 내면의 강렬한 요구로 느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때로는 그 일이 무거운 짐 같아요. 새로운 이미지가 떠오르면 최대한 빨리 그 이미지를 캔버스 위에 옮겨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니까요."
- 리사, 30세

강렬한 영감을 느끼는 건 매우 소중한 경험이지만, 영감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된다. 높은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강렬한 영감을 자주 느낀다. 그들 중에 여러 장르의 예술적인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밤 10시 이후에는 아예 영감의 근원을 차단하는 편이다. 한밤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밤새 잠을 못 이루기 때문이다.
민감한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얇은 칸막이가 놓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재의식의 재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을 창조적인 표현과 꿈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 P43

두 번째는 민감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전략이다. 그들은 말을 하거나 행동을 취하기 전에 자세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한다. 당신은 아마도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몇 단계 앞서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거야. 그리고 그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면 나는 이렇게 행동할 거야‘라는 식으로. 그리고 당신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생길 수 있는 모든 결과를 머릿속으로 그려볼 것이다.
높은 민감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을 예상할 뿐 아니라 부정적인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그 상황의 세세한 부분을 미리 검토하고 준비한다. 이것은 당신이 실수할 위험을 미리 막아준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행동이 느리고 위험에 대해 걱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 P47

하루 종일 심리치료 훈련을 강행하고 나면, 내 에너지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다. 나는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나 문제가 터졌을 때 끌어낼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전에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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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무서운 일 아닌가? 없을 때는 찾게 되고 있을 때는 서로 무관심한 관계, 즉 가구와 같은 관계라면 말이다.
(주 : 도종환「가구」) - P86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맥락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 규칙을 따른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하루하루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외국인들을 만날 때는 그래도 상황은 좋은 편이다. 우리는 외국인들이 그들만의 삶의 규칙에 따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같은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때 발생하기 쉽다. 겉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은 지역, 가족, 학교, 전공 등등에 의해 나의 문맥과는 일치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식당에서 느끼기 쉬운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문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섬세하게 읽어내야 한다. 자신의 문맥에 따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단하는 순간, 오해와 갈등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 P104

표면적으로 피의자의 입장에서 검사는 비인간적으로, 그리고 변호사는 인간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검사는 피의자가 100퍼센트 자유롭게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면, 변호사는 피의자가 다른 원인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간단히 말해 검사는 피의자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변호사는 피의자가 부자유스러운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재판은 범죄 행위에 대해 피의자가 어느 정도 자유로웠는지를 따지는 행위인 셈이다. 만약 자유의 정도가 결정된다면, 피의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재판정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항상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따진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칸트의 후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인간이 자유로울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 P121

과거 사람들은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국가에서든 조화를 최고의 이념으로 생각했다.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조화라는 이념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가정이 화목하다고 뿌듯해하는 여인이 있다고 하자. 그렇지만 이것은 그녀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실제로는 그녀가 가족들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고 있거나, 아니면 가족들이 그녀의 욕망에 맞추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화의 이념 속에서는 타자와 차이에 대한 경험이 발생할 수 없다. - P127

만약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까? 당연히 우리는 그와의 만남을 지속하려고 할 것이다. 그와 만났을 때 발생하는 기쁨과 유쾌함 때문이다. 반대로 타자가 슬픔을 준다면 우리는 어떨까? 아마 그를 떠나려고 할 것이다. 자신에게 고통과 우울함을 주는 타자와 같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도 기쁨이나 슬픔에 빠져 있는 인간의 행동 양식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던 것이다.
정신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가능한 한 생각하고자 한다. 반면 정신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런 것의 존재를 배제하는 사물을 가능한 한 생각하게 한다.
-『에티카』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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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금지나 파괴 같은 방식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권력은 커뮤니케이션 매체이며 커뮤니케이션이 특정한 방향으로 원활히 흘러가게 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권력자의 결정을, 곧 그의 행위 선택을 받아들이도록 유도된다(그것이 반드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본래] "비개연적 선택이 일어날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기회"이다. 권력은 권력자와 권력에 복종하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행위 선택의 편자를 없앰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거나 조정한다. 이를 통해 권력은 "누군가의 행위 선택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이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시킨다. 권력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적 지도가 반드시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억압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권력은 구성적으로 기능한다. 이런 점에서 니클라스 루만은 권력을 "촉매"라고 정의한다. 촉매는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사건의 발생을 촉진하거나 특정한 과정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촉매는 "시간"을 얻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권력은 생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 P23

각주) 니체의 과장된 수사학이 특히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수용소 거주자 ‘무젤만‘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는 끔찍한 방식으로 순수한, 나아가 절대적인 명령으로 축소되어버린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무젤만은 수용소 관리의 명령과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타자라는 단어는 상처 입힘 혹은 고통스러운 파고듦으로 육체적으로 체감되고 있다. 물리적 고통과 언어 사이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는 상처로서의 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P53

푸코가 감옥, 군대 또는 병원에서 찾아내는 정형외과적 권력은 무엇보다 신체에 집중되어 있다. 푸코는 신체에 시선을 고정시킨 나머지 상징적 차원에서 관습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권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아비투스는 한 사회 집단의 경향이나 관습을 지칭한다. 그것은 특정한 지배 질서를 관철시키는 데 기여하는 가치나 지각 형태를 내면화함으로써 생겨난다. 반성 이전에 작동하면서 신체적으로 작용하는 아비투스는 현존하는 지배 질서로의 편입을 가능하게 하는 습관의 자동주의를 산출해낸다. 그로 인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배제했던 지배 질서를 공고화하는 태도 전범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아비투스는 신체적인 것에서도 작동하는 지배 질서를, 의식하기도 전에 긍정하고 승인하게 해준다. 우리가 사회적 위치 때문에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도 이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취향이라고 양식화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운명이 자유로운 선택인 양 체험되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자신의 상태를 자기 취향으로 삼게 된다. 빈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되고, 강제나 억압이 자유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지배전 권력관계가 합리적인 근거들과 무관하게 거의 마법적 방식으로 재생산되도록 만든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은 강제라는 모습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의 감정을 불러내는 곳에서, 어떠한 폭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안정적이다. 이때의 자유는 사실일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권력을 안정시키고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 P73

왜 인간은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철학은 어떤 대답을 줄 수 있는가.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로울수록 타자의 태도를 규정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느낀다. 타자의 태도를 유도할 때 얻는 유희가 다양하고 자유로울수록 쾌락은 더 커진다. 그에 반해 이러한 유희 가능성이 없는 사회에서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쾌락도 줄어든다.
권력은 행위의 유희/여유 공간을 전제한다. 이것이 없다면 폭력과 강제만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 푸코가 도입한 쾌락주의적 권력 개념은 권력을 지나치게 유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권력은 악이 아니다. 권력이란 전략적 유희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권력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쾌락 관계를 보라. 열려 있는 전략적 유희 속에서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 나쁜 점이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사랑과 열정, 성적 쾌락의 일부분이다."
권력은 유희에 속할 수도, 또 유희의 요소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유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희는 권력의 대립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권력의 특징이라고 보는, 더 많은 것을 향한 의욕은 유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권력은 그 이상의 권력이 되려고 의욕하는 한에서만 권력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의지가 중단되면, 원래 지배하던 것이 아직 자기 힘의 테두리 안에 있을지라도 권력은 이미 더 이상 권력이 아니다." 생명이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주장이다. "생명은 다윈이 이야기하듯이 자기보존을 향한 충동뿐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자기주장이다. 보존하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 위에서 자신을 경직시키며, 그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해 무지해지고 만다." 하이데거는 늘 니체의 말로 되돌아온다. "인간이라면, 아니 살아 있는 유기체라면 그것이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더 많은 권력을 의욕한다." - P87

스스로 고백하듯이, 푸코는 인간학이나 인간 영혼에 정통하지 못하다. 권력의 인간학적 토대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쾌락적인 유희가 아니다. 이 점에서는 푸코보다 니체가 인간의 영혼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니체는 이렇게 쓴다. "권력의 쾌락은 우리가 수백 번이나 경험했던 의존성과 무력에 대한 불쾌함을 통해 설명된다. 이 경험이 없다면 쾌락도 없다." 권력을 행사할 때 생기는 쾌락은 부자유와 무력이라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권력을 얻었을 때 생기는 쾌락의 감정은 자유의 감정이다. 무력은 타자에게 내맡겨졌다는 것이며, 타자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권력이란 그와 반대로 타자에게서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의 강도는 유희의 자유로움이나 다양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쾌락은 권력과 더불어 자라나는 자아의 연속성에서 기인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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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이 악성종양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암세포"처럼 "무한정한 창궐, 과잉성장, 전이를 통해 확산된다. 그는 세계적인 것을 면역 모델로 설명한다. "면역성, 항체, 이식, 객혈이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바이러스에 의한 폭력, 네트워크와 가상적인 것의 폭력"이다. 가상성은 바이러스와 같다. 이렇게 네트워크화를 면역 모델로 서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면역성은 정보와 소통의 순환을 억제한다. ‘좋아요‘는 면역 반응이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으로서의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탈면역적이다.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질서, 신자유주의 질서에 핵심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간과한다. 면역성은 지상의 질서에 속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는 제니 홀저의 구호는 긍정성의 폭력이 지닌 탈면역적인 성질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 P27

신자유주의는 절대 계몽주의의 종착지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이성에 의해 인도된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광기가 테러리즘과 민족주의의 형태로 분출되는 파괴적 긴장을 산출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자유로 내세우지만, 이 자유는 광고다. 세계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 가치들까지 잠식하고 있다. 그 결과 자유 자체가 착취당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는 망상에 빠져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착취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기본 논리다. - P28

세계적인 것의 폭력에 맞서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단독적인 것에도 자신을 열어놓는 보편적 질서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세계적인 것의 시스템에 폭력적으로 침입하는 단독적인 것은 대화를 허락하는 타자가 아니다. 테러리즘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악마적이다. 멂과 다름이 허용된 가까움 속에 머무르는 화해된 상태에서만 단독적인 것은 악마성을 버릴 것이다. - P29

오늘날의 난민 위기는 유럽연합이 이기적 목적을 좇는 경제적 상업연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한다. 유럽의 자유 상업지역, 개별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부들 사이의 계약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을 칸트는 이성적 구성물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국가연맹"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공동체만이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공동체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 P31

진정성의 강제는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다.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
오로지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 같게-만들기의 논리는 다름을 같음으로 바꾼다. 그 결과 다름의 진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킨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을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서의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런 잡다함은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과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다름의 진정성은 오히려 억압적인 획일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동형성을 관철시킨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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