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금지나 파괴 같은 방식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권력은 커뮤니케이션 매체이며 커뮤니케이션이 특정한 방향으로 원활히 흘러가게 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권력자의 결정을, 곧 그의 행위 선택을 받아들이도록 유도된다(그것이 반드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본래] "비개연적 선택이 일어날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기회"이다. 권력은 권력자와 권력에 복종하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행위 선택의 편자를 없앰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거나 조정한다. 이를 통해 권력은 "누군가의 행위 선택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이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시킨다. 권력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적 지도가 반드시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억압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권력은 구성적으로 기능한다. 이런 점에서 니클라스 루만은 권력을 "촉매"라고 정의한다. 촉매는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사건의 발생을 촉진하거나 특정한 과정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촉매는 "시간"을 얻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권력은 생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 P23
각주) 니체의 과장된 수사학이 특히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수용소 거주자 ‘무젤만‘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는 끔찍한 방식으로 순수한, 나아가 절대적인 명령으로 축소되어버린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무젤만은 수용소 관리의 명령과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타자라는 단어는 상처 입힘 혹은 고통스러운 파고듦으로 육체적으로 체감되고 있다. 물리적 고통과 언어 사이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는 상처로서의 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P53
푸코가 감옥, 군대 또는 병원에서 찾아내는 정형외과적 권력은 무엇보다 신체에 집중되어 있다. 푸코는 신체에 시선을 고정시킨 나머지 상징적 차원에서 관습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권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아비투스는 한 사회 집단의 경향이나 관습을 지칭한다. 그것은 특정한 지배 질서를 관철시키는 데 기여하는 가치나 지각 형태를 내면화함으로써 생겨난다. 반성 이전에 작동하면서 신체적으로 작용하는 아비투스는 현존하는 지배 질서로의 편입을 가능하게 하는 습관의 자동주의를 산출해낸다. 그로 인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배제했던 지배 질서를 공고화하는 태도 전범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아비투스는 신체적인 것에서도 작동하는 지배 질서를, 의식하기도 전에 긍정하고 승인하게 해준다. 우리가 사회적 위치 때문에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도 이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취향이라고 양식화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운명이 자유로운 선택인 양 체험되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자신의 상태를 자기 취향으로 삼게 된다. 빈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되고, 강제나 억압이 자유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지배전 권력관계가 합리적인 근거들과 무관하게 거의 마법적 방식으로 재생산되도록 만든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은 강제라는 모습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의 감정을 불러내는 곳에서, 어떠한 폭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안정적이다. 이때의 자유는 사실일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권력을 안정시키고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 P73
왜 인간은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철학은 어떤 대답을 줄 수 있는가.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로울수록 타자의 태도를 규정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느낀다. 타자의 태도를 유도할 때 얻는 유희가 다양하고 자유로울수록 쾌락은 더 커진다. 그에 반해 이러한 유희 가능성이 없는 사회에서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쾌락도 줄어든다. 권력은 행위의 유희/여유 공간을 전제한다. 이것이 없다면 폭력과 강제만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 푸코가 도입한 쾌락주의적 권력 개념은 권력을 지나치게 유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권력은 악이 아니다. 권력이란 전략적 유희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권력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쾌락 관계를 보라. 열려 있는 전략적 유희 속에서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 나쁜 점이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사랑과 열정, 성적 쾌락의 일부분이다." 권력은 유희에 속할 수도, 또 유희의 요소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유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희는 권력의 대립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권력의 특징이라고 보는, 더 많은 것을 향한 의욕은 유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권력은 그 이상의 권력이 되려고 의욕하는 한에서만 권력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의지가 중단되면, 원래 지배하던 것이 아직 자기 힘의 테두리 안에 있을지라도 권력은 이미 더 이상 권력이 아니다." 생명이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주장이다. "생명은 다윈이 이야기하듯이 자기보존을 향한 충동뿐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자기주장이다. 보존하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 위에서 자신을 경직시키며, 그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해 무지해지고 만다." 하이데거는 늘 니체의 말로 되돌아온다. "인간이라면, 아니 살아 있는 유기체라면 그것이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더 많은 권력을 의욕한다." - P87
스스로 고백하듯이, 푸코는 인간학이나 인간 영혼에 정통하지 못하다. 권력의 인간학적 토대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쾌락적인 유희가 아니다. 이 점에서는 푸코보다 니체가 인간의 영혼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니체는 이렇게 쓴다. "권력의 쾌락은 우리가 수백 번이나 경험했던 의존성과 무력에 대한 불쾌함을 통해 설명된다. 이 경험이 없다면 쾌락도 없다." 권력을 행사할 때 생기는 쾌락은 부자유와 무력이라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권력을 얻었을 때 생기는 쾌락의 감정은 자유의 감정이다. 무력은 타자에게 내맡겨졌다는 것이며, 타자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권력이란 그와 반대로 타자에게서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의 강도는 유희의 자유로움이나 다양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쾌락은 권력과 더불어 자라나는 자아의 연속성에서 기인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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