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 신경을 긁는 것부터 가슴 깊숙이 훅을 날리는것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싸웠다. 이 정도면 다 싸웠겠지 싶은데도 싸울 일이 계속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싸우면서도 관계가 나빠지기는커녕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점이다. 싸움을 통해서 해결된 것도 있지만 끝까지 해결되지 못한 것들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다. 그리고 싸움을 통해 건드려지지 않았다면 몰랐을 자신의 다른 모습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 계획대로라면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야 할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싸움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친구랑 싸우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대개는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거나 살면서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존중받지 못할 때 싸우고는 했다. 나는 자유로운 표현을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반면, 친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배려를 중요하게 여기며 ‘우리‘라는 주어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우리가 싸울 때는 ‘존중‘이라든가 ‘배려‘ ‘가치‘ 같은 단어를 많이 썼지만, 정작 싸움의 이유는 함께 먹는 밥상에서 둘 다 좋아하 13 는 계란말이 반찬을 내가 다 먹어버린다거나,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거나,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놀지 않는다거나 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때로는 유치한 혹은 아예 답이 없는 것들 때문이었다. 반응에 반응을 하면서 싸움은 증폭되고, 시작은 미약했으나 결과는 늘 창대했다.
싸움을 하다 보면 언젠가 더 이상 싸우지 않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으나 그런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싸움도 자꾸 하다보니 늘어서 싸움의 언어와 싸움의 기간에 효율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더 직접적인 언어를 쓰자 싸움이 간결해지고 시원해졌다. 더이상 ‘존중‘이나 ‘배려‘나 ‘가치‘ 같은 고차원적인 단어를 쓰지 않고, ‘계란말이‘와 ‘약속 시간과 ‘놀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는 결국 "너는 왜 네 맘대로만 해?" "나랑 놀기 싫어?" "내가 얼마나 착한데 나한테 그래?" 같은, 쓰기에도 민망하고 다른 사람에게옮기기에도 너무 유치한 수준으로 말하면서 싸웠다.
더군다나 여러 전통의 대화법들에서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가르치는 ‘나 전달법I statement‘("나는 ~하게 느껴")이 아니라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너 전달법you statement‘("네가 나한테 그랬잖아")을 쓰기 시작하면서 직접적이고 날것의 언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네가 그랬잖아"라는 식의 말은 평화의 언어와는 거리가 멀지만, 교묘한 남 탓을 하면서 자신은 화를 안 냈는데 상대방이 격하게 반 14 응하더라는 식의 ‘남 탓‘과 ‘책임 전가‘를 할 수 없게 했다. 누가 봐도 내 화는 나의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싸움은 쉽거나 편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터질 것 같던 답답함은 없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적인 언어로 싸우니, 싸우다가 멈추게도 되고, 서로의 모자람을 덮어주기도 하고, 알면서도 모른 척 지켜주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아가 우리가 내뱉는 언어는 물론 표정이나 태도 같은 비언어적 표현 속에 비난과 판단의 화살을 미묘하게 숨겨놓고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평화로운 사람인 양 이야기해 왔다는 사실도, 그 화살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도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무죄 선함을 주장하면서 공격과 반격을 번갈아하는 동안 실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피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싸움을 통해 서로가 지키려한 정체성이 무엇이었는지를 거울삼아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니 많은 현자들이 이미 수도 없이 말했던 것, 분노를 자극하는 것과 분노의 원인은 다르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상대방으로 인해 내가 분노했다면 그건 이미 내 안에 있는것을 그가 건드린 것(즉 자극한 것)뿐이요 그가 곧 내 분노의 원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지만 내가 정말 이러고 있었다는 것을 친구가 우정을 걸고 끝까지, 끈질기게 15 싸워줘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싸우고 또 싸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성장해 갔다. 더이상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누가 이기고 졌는지, 누가 더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 덕분에 싸움은 해결을 통해 갈등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넘어서 성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 P12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 나를 속상하게 했기 때문에 그냥 화난 상태로 머물러 있고 싶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내가 새롭게 가까워진 사람들을 통해서 이전에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다시 만나고는 한다. 마치 삶이 나에게 이것을 이해하고 풀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비주의자들에 따르면 이것은 삶이 또는 신神이 내게 이번 생에서 풀라고 내준 숙제를 풀지 못해서이고, 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아직 내가 해결하지 못한 이슈를 가지고 있는 유형의 사람들을 자꾸 알아보고 그들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나는 마을 친구와 싸움을 계속하면서, 이 싸움이 그 친구 한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내가 삶을 통틀어 애매하게 싸웠거나 피해온 모든 싸움을 대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 친구와의 싸움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가 싸워온 모든 사람 16 들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평등하고 가까운 위치에 있는 두 성인 사이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그 두 사람은 친구나 동료일 수도 있고 연인이나 부부일 수도 있다. 이렇게 가까운 관계에서 싸움의 목표는 잘잘못을 따져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밝히거나,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 서열을 가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어쩔 수 없는 부분들 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많으며, 결국 사람을 개조할 수 없고 가족을 바꿀 수 없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만약 잘잘못을 따져서 누가 잘못을 했는지 밝히게 되더라도 관계가 편하지 않을 것이며, 가까운 사이에서 싸움이 해결된다고 해서 그것이 싸움의 끝이나 완결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살면서 서로를 자극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지 갈등 요소를 해결했다고 해서 다른 갈등 요소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며,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서 갈등이 없는 완벽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도 아니다.
싸움은 매우 불편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는 싫다, 불편하다는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신호만 있을 뿐, 무엇 때문에 그런 불쾌한 느낌이 드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는 자 17 신의 욕구를 뒤에 숨기고 살도록 교육받기 때문에 자신이 불편한 이유를 세세하게 모르기 십상이다. 그러다가 싸우는 과정에서 ‘하악질‘(고양이가 공격을 하기 전에 보이는 경고 신호로, 이빨을 내보이며 하악 소리를 내는 것)과 함께 불편한 마음을 일으키는 내면의 깊은 욕구가 드러나게 된다.
또 우리는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을 때조차 좋은 말을 하려고 하고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홧김에 펼쳐놓게 되는데, 대부분은 아주 유치하고 치졸하며 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스스로 허락하지 않아서 또는 표현하지 않아서 잘 모르고 있던 내면의 깊은 바람이나 욕구가, 싸움이라는 거친 방식으로나마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욕구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고, 보살핌의 에너지로 바라봐 주면, 그 욕구는 잠시 머물다가 사라질 수도 있고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 P15

본격적으로 싸움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싸움‘이지 ‘폭력‘이 아니다. 폭력은 자신은 다치지 않고 상대방만 일방적으로 다치게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폭력은 많은 경우 힘의 불균등에서 시작한다. 공격을 당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서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는, 힘의 위치가 낮은 자에게 폭력이 가해지고, 폭력에 대한 반격으로 폭력이 더 커지고는 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자는 문제나 갈등이 해결되어도 멈추지 않고 상대방을 끝까지 굴복시키고자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싸움‘은 두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에 해를 가할 수 없을 뿐더러, 이미 관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므로 일방적으로 한 사람만 다칠 수도 없다. 또한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항복시키는 것 19 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펼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조정하며 갈등을 표면화해 꼬이고 얽힌 부분을 푸는 것이 목표이다.
고릴라는 자신의 영토임을 밝히기 위해서 침입자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가슴을 치며 소리를 지르지만,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면 더 이상 쫓아가 물거나 하지 않는다. 인류도 오랫동안 이렇게 싸움을 했었다고 한다. 또한 싸움을 하고 나서 입을 맞추고 털 고르기를 해주며 적극적으로 화해를 하는 침팬지처럼, 싸움은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싸움을 잘 펼칠 수만 있다면, 싸움이 서로의 의사를 조정하고, 자기 표현을 돕고, 갈등의 요소를 명료하게 하고, 관계를 증진시키는 방법으로 쓰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는 싸움을 일으키는 갈등을 넘어서는것, 즉 관계의 성장과 자기 이해이다.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화살을 들이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가 스스로를 바라보도록 거울을 내미는 것이다. 이 거울은 들키기 싫고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아주 불편하고 거친 방식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내 안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내면 아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떼를 쓰고 있지만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 말이다.
우리는 수만 가지 이유로 싸우지만, 싸움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20 잘 들어보면,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안전하고 싶은,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욕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또한 싸움은 자기 내면에 있는 미해결 과제와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게 하기 때문에, 서로의 가장 여린 부분을 보듬을 기회를 주기도 한다. 모든 싸움은 사랑 이야기이다. - P18

백 번을 싸워야
친구다

내가 상담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삶에서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그러면서도 우울하거나 불안해했고 삶이 이게 다인가 싶은 허망함에 괴로워하고는 했다. 그리고 진심을 나눌 친구가 없거나 친구들과 멀어져 있는 경우가 흔했다.
치료사는 질문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대화를한다. 스승이나 멘토와는 달리 조언을 해주는 것은 우리 치료사 24 의 주된 역할이 아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세요?"라는 식으로 되돌려 물어보면서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다.
그런데 때때로 나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상대방이 되묻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에헴 하고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 나름대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비법을 내놓는다. 가끔은 너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무릎을 치면서 말한다. "아, 그러면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그러면 상대방도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아,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한다. 문제의 답을 찾은 것 같아서 신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그 좋은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내가 농담하는 줄 안다.
핸드폰 때문에 자꾸 말썽을 일으키는 자녀 문제로 상담을 온분에게 나는 "핸드폰이 안 터지는 작은 섬으로 이사 가시면 안 돼요?"라고 말하고, 유산 때문에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긴 사람에게는 "돈을 다 기부하고 모두가 가난해지면 어때요?"라고 했다. 또 인스턴트 음식만 먹는 초등학생 아들 때문에 속상하다는 분에게는 "먹을거리가 없는 인도 오지 마을 여행을 가면 문제가 해결될 거예요!"라고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제안이 씨도 안 먹히고, 내가 별로 도움 되는 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 제안을 따라했다는 사람도 본 25 적이 없는데, 상담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점점 건강해지고 좋아진다는 점이다. 심지어 나중에 물어보면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를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좋아지는 것일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아무런 행동이나 상황의 변화가 없는데도 사람들 표정이 밝아질까? 그들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슨 좋은 일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도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상담을 받으면서 그냥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좋아졌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내담자와 친구가 되는 것은 심리 치료사에게 금기시되는 일이다. 치료사는 타인의 삶에 개입하면 안 되고 그저 들어주고 반영해 줌으로써 그 사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돌아보게끔 도와야 한다. 치료사에게 기대게 해서도 안 되고, 관계에 대한 거짓된 환상을 심어주어서도 안 된다. 또 치료사 자신이 풀지 못한 내면의 문제를 내담자에게 투사하거나 자신의 문제와 타인의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면 많은 문제들이 생기기 때문에, 내담자와 서로 친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담자와 만남이 반복되다 보면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희망을 같이 느끼게 된다. 내 경험으로는 이런 감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어쩌면 ‘친구‘가 될 때, 그 사람이 건강해지고는 했다.
심리학에 ‘도도새 효과라는 것이 있다. 모든 심리 요법은 각각 26 의 이론과 무관하게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는 연구 결과를 가리킨다. 우울증에는 인지 치료가 좋고, 자폐에는 음악 치료가 좋고, 정신분열증에는 무용 치료가 좋고, 아이들에게는 미술 치료가 좋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연구들을 종합하여 분석하는 메타 분석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결과는 어떤 치료 기법을 어떤 대상에게 쓰는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치료사의 철학적 관점이나 학문의 바탕이 프로이트 학파냐, 융 학파냐, 아들러 학파냐 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단지 치료사의 공감적인 태도뿐이며, 그 태도를 전달하는 방법은 무관하다는 것이다. 심리 치료가 효과가 있는 이유는 어쩌면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의 존재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사람이 꼭 치료사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내담자와 치료적 관계를 끝낼 때 자신을 계속 응원하고지지해 주는 친구를 꼭 만들라는 조언으로 마무리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 말이 내담자에게는 빈껍데기 말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진정한 친구를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이제 자기 할 일 다 했다고 손 털면서 하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울과 고립과 절망이 만연한 어두운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치료사가 아니라 친구라고 믿는다. 27 물론 친구를 갖기는 치료사를 찾기보다 훨씬 더 어렵다. 치료사의 경우 돈으로 그의 시간과 경험을 살 수 있지만, 친구는 돈으로 살 수 없다. 친구는 정성으로 값을 치르고 마음을 열어서 기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에만 관계가 만들어지고 가까워질 수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친구 만드는 것을 정말 어렵게 하는데) 가까워지면 서로를 건드리게 된다. 그리고 누구나 정말 가까운 친구나 애인이나 부부가 되면 아마도 싸우게 될 것이다. - P23

자유롭지만
홀로인 그대

우리에게는 타인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존재로 살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에게 중요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와 만나고는 싶지만 참견받는 것은 싫고 개입하거나 개입받는 것도 싫다는 사람들이 요즘 들어 부쩍 늘고 있다. 어쩌면 이전 세대의 지나치게 밀착되고 개입적인 가족 관계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싶다. 이들은 개입이 적은 삶을 살고 싶어 자신들이 자유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유 대신 ‘자유 + 고립‘이라는 세트 28 를 받게 되고, 그 결과 이 중에서 원치 않았던 ‘고립‘을 처리하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된다. 개입이 적은 SNS 친구를 맺거나, 사람이 많은 카페에서 혼자 있거나, 일회성 만남을 갖거나...... 여기에 맞춰 상업주의는 새로 생겨난 이들 1인 소비자를 위한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이것은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 사회》라는 책을 열며 쓴 첫 마디이다. 그는 이전의 규율 사회의 그늘에는 광인狂人과 범죄자가 있었다면, 지금의 성과사회에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내면으로 향한 분노라고 했으나, 한병철은 과잉의 시대에 발생하는 우울증은 성과 사회의 그림자라면서 그 요인 중의 하나로 유대감의 부재를 들었다. 유대감의 부재는 심리적 건강뿐만 아니라 신체의 건강에도 매우 위험하다. 건강한 노년기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인은 ‘관계‘이며, 외로움과 고립은 실제로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고, 타인들에게 인정받고자 하고, 직장에서 승진하려 하고, 경쟁에서 이기려고는 하지만, 세상의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에서는 갈등이 생기면 너무 쉽게 그 관계를 포기해 버린다.
한 마을에서 태어나서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살다가 생애를 마감하는 예전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설령 갈등이 생겼다고 해도 29 어지간해서는 그 관계를 단절하고 어디로 가버리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더 흥미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 사이를 기웃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디로 찾아 나서기도 쉽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고, 만족 가능성도 높아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 선택의 자유가 많아졌다고 해서 만족감이 커졌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되레 어딘가 더 큰 만족이 있을 것 같은 곳을 찾아 늘 헤매는 듯한 느낌이 있다. 찾고 추구하고 기대하는 목소리는 큰 데 비해 그곳에 도착하는 경험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물론 스치듯 지나간 만족의 순간들은 수도 없이 많다. 어려운 과제를 끝내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킬 때,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떠 있을 때, 아침에 정성껏 내린 커피가 유난히 향기로울 때, 눈 쌓인 숲에서 새 발자국이나 노루 발자국을 따라걸을 때...… 정말 살면서 그런 순간들은 너무도 많다. 그런데 그런 순간적인 만족 말고, 정말로 완전한 만족에 머물렀던 적이 있는가?
인터넷과 SNS와 텔레비전에서는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갈망하 30 지만 갖지 못한 만족이 완결적인 만족이 있다고 자꾸 말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찾았다고도 한다. 영화와 소설과 드라마에서도 마치 주인공이나 화자가 지금 절대적인 만족감 속에 있는 것처럼 상황을 묘사한다. 드라마 속의 애인과 친구는 늘 다정하고 유쾌하며, 상대방이 말할 때 피곤하거나 지루해하지 않는다. 여행지는 늘 아름답고, 식당은 늘 맛집이며, 행복은 무지개 같고, 심지어 갈등조차도 지루하지 않고 스펙터클하다. 그리고 마치 그 순간들이 영원한 것 같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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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싸워준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 P4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화살을 들이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상대가 스스로를 바라보도록 거울을 내미는 것이다.
싸움은 자기 내면에 있는 미해결 과제와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게 하고,
서로의 가장 여린 부분을 보듬을 기회를 주기도 한다.

모든 싸움은 사랑 이야기다." - P5

내가 싸움에 관한 책을 쓰다니 나로서도 의외이다. 싸움을 진짜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누가 큰소리로 뭐라고 하면 눈물부터 글썽글썽 맺히고, 주먹을 꽉 쥐고 할 말을 하려고 해도 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톡 쏘는 말을 듣고서도 반격을 못하다가 몇 시간 뒤에나 답답한 가슴을 치는 일이 평생 있어왔다. 벼르고 벼르다가 큰소리를 내거나, 순간 참지 못하고 욱해서 큰소리를 낼 때도 물론 있었는데, 그럴 때는 숨고르기 없이 갑작스럽게 으르렁대거나 너무 심한 말을 하고는 바로 죄책감이 들거나 부끄러워져서 두고두고 후회하고는 했다. - P9

어른이 되어 돌이켜보니 그 허전한 감정이란 싸우지 않고 경쟁 11 하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된 대신 관계의 중심에는 들어가 있지 못하는 데서 오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싸우지도 않고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깍두기‘(깍두기란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 같은 놀이를 할 때 놀이에 참여는 할 수 있지만 점수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 아이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를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런 기대도 받지 못한다. 놀이를 잘 못하는 친구나 나이가 어린 동생을 놀이에서 제외시키지 않고 ‘깍두기‘로 있는 듯 없는 듯 끼워서 같이 놀았다)가 된 것이다. - P10

바다가 가깝고 숲이 가까워서 살기로 선택한 마을에서 나는 정말 좋은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었던 마을 친구가 생기다니!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언젠가는 친구에 대한 책을 쓰리라 생각했다. 우리가 경험한 우정에 대하여 나누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우정을 알기를 바랐다. 그런데 내가 우정에 대하여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나 섣부른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크고 작은 일들로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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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유학자들의 순진함이요, 유학이론의 허점이자 비애이다. 그런데 송명 이후의 유학, 즉 주자학이니 양명학이니 혹은 퇴계학이니 율곡학이니, 모두 무엇을 말하는가? ‘격물궁리’나 ‘거경궁리’만을 외친다. 그냥 계속 순진하게 ‘수기’하면 ‘안인’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게다가 더욱 심각하게도, 유학의 최종 목표인 ‘안인’ ‘외왕’은 거의 도외시했다. 이것은 도교와 불교의 나쁜 영향이 아닐 수 없다. ‘수기’와 ‘내성’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외부세계를 간과하게 만들고, 마침내 객관적 학문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동아시아 사회가 서구 열강의 먹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일본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학문적 수준이 매우 낮아서 오히려 서구의 학문을 쉽게 받아들였고(전통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했으니까!), 그 결과로 객관적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다. - P54

안연과 자로가 공구를 모시고 있었다. 공구가 "너희들의 꿈을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떠냐?" 하고 물었다. 자로는 "친구들과 수레와 말 그리고 옷을 함께 쓰고 입다가 망가져도 섭섭해 하지 57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안연은 "장점을 자랑하지 않고 공로를 과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로가 "선생님의 꿈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다. 공구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하고 친구들이 믿게 하며 젊은이들을 품어 주고 싶다"고 대답했다. - P56

이런 문제는 사실 예의 올바른 기준을 묻는 것이다. 공구는 이런 문제를 고려했을까? 당연히 고려했다. 공구는 철학자 아닌가! 철학자는 사상가와 다르다. 사상가는 단지 어떤 특정한 분야에 깊이 있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철학자는 전 우주로부터 구체적인 인생에 이르기까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와 사상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철학자인 공구가 제시한 기준이란 바로 ‘의義’이다. - P83

위의 기사는 학자들 사이에서 내재덕성으로서의 ‘인’의 근거를 찾는 중요한 내용으로 인식된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 ‘마음의 편안함 여부’가 바로 도덕 실천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구가 재아에게 마음이 편안하냐고 물었던 것이다. - P132

두 번째 기사는 또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직함이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구는 이를 부정하고 부모자식 간의 정감을 우선시했다. 언뜻 보기에 그의 이런 태도는 결코 정직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듯하다. 오히려 ‘패거리 문화’를 조장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률에서도 ‘불고지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바로 직계가족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아버지가 실수로 혹은 어쩔 수 없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범죄사실을 고발할 것인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범죄는 용납될 수 없겠지만, 아버지와 같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이는 ‘인지상정’에 의한 ‘불편한 마음’ 때문에 고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에 정직한 것이지, 그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고 고발하는 것이 정직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구는 정직함으로 원수를 갚아야 하며, 부모님의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공구의 유학은 기본적으로 ‘인지상정’에 근거하여 ‘불편한 마음’을 더 이상 불편하지 않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학문이다. 효제 또한 이런 ‘인지상정’과 ‘불편한 마음’의 제거에 근거한다. 물론, ‘인지상정’에 근거한 원리들은 여러 가지 보조적인 장치들이 반드시 구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하기도 싫은 ‘패거리 문화’가 재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지상정’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입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지만, 지나치게 전문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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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해서 말해 보면, 요즘 과학계는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반 교양인들에게 친절히 설명하고 안내하는 저서들을 내놓고 있다. 물론 아직 충분히 친절하지 못한 것들도 있고 무리하게 자신의 주장을 확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어쨌든 그런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저서들에서 설명한 과학적 지식들이 이 세계와 사회, 그리고 인간 개개인까지 이해하는 ‘신념체계’(앎이란 기실 그렇게 믿는 것이다)를 이루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나도 크게 염려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과학이 담당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월권을 행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가치나 윤리에 관한 문제는 과학에서 다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문제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과학을 지도할 수 있는 지침과도 같다. 그런 가치나 윤리에 관해 서양에서는 종교가, 동양에서는 철학이 주요 영역으로 다루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 특히 동양철학도들도 분발 매진하여 능력껏 교양서들을 저술해야 한다. 공부를 시작할 때 지녔던 거창한 이상과 포부가 점차 줄어들어 결국 개인적 만족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최선을 다해 저술해야 한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썼다. - P13

나는 결코 유학의 전도사가 아니다. 물론 사십대가 기울기 시작한 지금까지 유학을 학습하고, 또 한때는 진정한 유학 27 자라는 것도 되고 싶었지만, 그것이 사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21세기에 ‘공자왈’ ‘맹자왈’을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단순하다. 하나의 믿음 때문이다. 즉, 전체 인류의 역사를 살펴볼 때, 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발휘되었을 때가 바로 인류의 발전기였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의 다양성 혹은 문화의 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구 등이 주창한 유학도 인생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우리의 세상이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정치적으로도 어느 하나의 믿음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 P26

나는 청소년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인격적으로 독립했으며, 마흔에는 판단을 함에 있어 흔들리지 않았고 쉰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예순에는 다른 이들의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고 일흔에는 마침내 내 스스로 세상 이치와 하나가 되어 행위에 어떤 어그러짐도 없었다.

이런 경지가 누구나 나이만 먹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턱도 없다. 나름 동양학을 전공한 철학박사라는 나부 32 터도 아니다. 하나의 확실한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ㅡ공구 같은 사람만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도 어떤 잘못이 없는 경지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고 오직 도덕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도덕적 완벽은 곧 자유의 경지를 의미하며(자기 마음대로 해도 괜찮으니까!),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전문적인 용어로 ‘공부工夫’가 필요하다. - P31

성인: 그의 자유와 공부
‘공부’란 한때 우리가 이소룡의 무술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쿵후’,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하는 ‘공부’, 그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 등 그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 ‘공부’에 속한다. 그러나 공구와 같은 자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로 도덕적 수양을 공부로 한다. 도덕적 수양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내가 먼저 닭살이 일어나게 되는(물론 감동적이어 33 서) 공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도덕 수양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늘을 원망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며, 아래에서 배워 위에 도달하니 나를 아는 이 하늘이로고!

이 이야기는 사실 공구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며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의역하면 이렇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책임이나 결과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하여 결국에는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 - P32

운명과 남 탓을 안 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으로,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뜻이다. 주체성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줏대를 갖고 자신을 확실하게 정립한다는 의미이다. 풀어서 말해 보자. 사람에게는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운명이다. 나는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에서 1964년에 ‘상자 운자를 쓰시는 아버님’과 ‘최씨 성을 가진 어머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대체 왜 그렇게 태어났을까? 그 까닭은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고, 싫다고 바꿀 수도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재할 수 있는 측면이 아니다. 그리고 생명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서 자라고, 그러다 늙고, 결국 죽는다. 이와 같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현상도 우리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 있어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초탈하려고, 즉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 공구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가 귀신이나 죽음에 관심을 갖지 않 35 았다는 것은 바로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측면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노력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바로 초탈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혹은 더 나은지에 관해서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선택의 문제이다. 제발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않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다시 돌아오자.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말은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말과 같다. 주체성이 확립되면 진정한 자아를 둘러싼 잡스런 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한 운명이나 물리현상에 함몰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참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고 해서 곧바로 멋대로 할 수 있는, 즉 성인의 자유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서 공구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한다"고 말한 것이다.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한다." 이 말은 우선 ‘공부’를 위해서 산속으로 들어간다던지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처박혀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많은 사람이 성인하면 신선과 같은 이를 떠올리고, 신선을 학 타고 이슬 먹고 사는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인간이 동서고금 어느 시대에 존재했었을까? 절대 없다. 그냥 우리처럼 차 타고 다니고(있다면) 밥 먹고 똥 싸고, 그렇게 살 뿐이다. 다만, 도덕적인 측면에서 완벽하여 자유를 구가하는 점만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성인을 성인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완벽을 통한 자유가 바로 성인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도덕적 완벽’은 산속에서 혹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여러 도덕적 정황, 즉 사람들 간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부모님의 장남이고 내 부인의 남편이며, 내 자식들의 아버지이고 내 동생들의 형이다. 나는 이처럼 여러 관계 안에서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따른 덕목이 있다. 이것들을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완벽’이다. 맨 앞에서 공구가 귀신과 죽음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설명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엄청나게 힘겨운 일이다. 그래서 공구의 제자 중에서 가장 어리고 총명했던 증삼(증자)조차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편안해졌다고 좋아했던 것이다.
37 그런데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터득하는 이치는 결과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지만, 결코 인간세계의 도덕적인 정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아가 우주 운행의 원리와 상통하게 된다. 정말 그런가?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적 신념이다. 공구와 그의 후학들, 그리고 거의 모든 유학자는 전부 그런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은 공구보다 훨씬 앞선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가장 주요하고 훌륭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었고 그래서 또한 우주의 총체적인 원리가 인간에게 입력되었는데, 그렇게 입력된 원리가 인간의 잠재된 본성(潛在性, 즉 있긴 분명히 있어서 조건만 충족되면 나타나지만 물에 잠겨 있듯 현실적으로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본성)을 이루었으며 그 잠재된 본성을 언제 어디서나 온전히 표현해 내는 이가 바로 요순과 같은 성인이다. 그런데 성인은 우리와 다른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도덕적 완벽을 이루어 자유로운 사람이다. 결국 인간에게 잠재된 본성의 내용이란 바로 도덕이며, 나아가 인간의 잠재성과 우주의 원리는 도덕을 매개로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 38 서 공구는 자신이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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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에 살고 있는 유명한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사는 데 굉장히 어려움을 겪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인간의 모든 실패는 바로 이런 유형의 인물에서 비롯된다."
심리학 책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우리 모두에게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글을 찾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그만큼 아들러의 말은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기에 다시 한번 되풀이해 음미할 가치가 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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