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금지나 파괴 같은 방식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권력은 커뮤니케이션 매체이며 커뮤니케이션이 특정한 방향으로 원활히 흘러가게 한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권력자의 결정을, 곧 그의 행위 선택을 받아들이도록 유도된다(그것이 반드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본래] "비개연적 선택이 일어날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기회"이다. 권력은 권력자와 권력에 복종하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행위 선택의 편자를 없앰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거나 조정한다. 이를 통해 권력은 "누군가의 행위 선택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이전"시킴으로써 "인간의 행위 가능성의 불확정적 복잡성을 감소"시킨다. 권력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적 지도가 반드시 억압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억압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권력은 구성적으로 기능한다. 이런 점에서 니클라스 루만은 권력을 "촉매"라고 정의한다. 촉매는 자신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사건의 발생을 촉진하거나 특정한 과정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촉매는 "시간"을 얻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권력은 생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 P23

각주) 니체의 과장된 수사학이 특히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수용소 거주자 ‘무젤만‘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는 끔찍한 방식으로 순수한, 나아가 절대적인 명령으로 축소되어버린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무젤만은 수용소 관리의 명령과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타자라는 단어는 상처 입힘 혹은 고통스러운 파고듦으로 육체적으로 체감되고 있다. 물리적 고통과 언어 사이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는 상처로서의 언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P53

푸코가 감옥, 군대 또는 병원에서 찾아내는 정형외과적 권력은 무엇보다 신체에 집중되어 있다. 푸코는 신체에 시선을 고정시킨 나머지 상징적 차원에서 관습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권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아비투스는 한 사회 집단의 경향이나 관습을 지칭한다. 그것은 특정한 지배 질서를 관철시키는 데 기여하는 가치나 지각 형태를 내면화함으로써 생겨난다. 반성 이전에 작동하면서 신체적으로 작용하는 아비투스는 현존하는 지배 질서로의 편입을 가능하게 하는 습관의 자동주의를 산출해낸다. 그로 인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배제했던 지배 질서를 공고화하는 태도 전범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아비투스는 신체적인 것에서도 작동하는 지배 질서를, 의식하기도 전에 긍정하고 승인하게 해준다. 우리가 사회적 위치 때문에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도 이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취향이라고 양식화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운명이 자유로운 선택인 양 체험되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자신의 상태를 자기 취향으로 삼게 된다. 빈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되고, 강제나 억압이 자유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지배전 권력관계가 합리적인 근거들과 무관하게 거의 마법적 방식으로 재생산되도록 만든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은 강제라는 모습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의 감정을 불러내는 곳에서, 어떠한 폭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안정적이다. 이때의 자유는 사실일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권력을 안정시키고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 P73

왜 인간은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철학은 어떤 대답을 줄 수 있는가.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로울수록 타자의 태도를 규정하는 데서 더 큰 쾌락을 느낀다. 타자의 태도를 유도할 때 얻는 유희가 다양하고 자유로울수록 쾌락은 더 커진다. 그에 반해 이러한 유희 가능성이 없는 사회에서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쾌락도 줄어든다.
권력은 행위의 유희/여유 공간을 전제한다. 이것이 없다면 폭력과 강제만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 푸코가 도입한 쾌락주의적 권력 개념은 권력을 지나치게 유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권력은 악이 아니다. 권력이란 전략적 유희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권력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쾌락 관계를 보라. 열려 있는 전략적 유희 속에서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일에 나쁜 점이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사랑과 열정, 성적 쾌락의 일부분이다."
권력은 유희에 속할 수도, 또 유희의 요소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유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희는 권력의 대립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권력의 특징이라고 보는, 더 많은 것을 향한 의욕은 유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권력은 그 이상의 권력이 되려고 의욕하는 한에서만 권력으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의지가 중단되면, 원래 지배하던 것이 아직 자기 힘의 테두리 안에 있을지라도 권력은 이미 더 이상 권력이 아니다." 생명이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주장이다. "생명은 다윈이 이야기하듯이 자기보존을 향한 충동뿐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자기주장이다. 보존하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 위에서 자신을 경직시키며, 그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해 무지해지고 만다." 하이데거는 늘 니체의 말로 되돌아온다. "인간이라면, 아니 살아 있는 유기체라면 그것이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더 많은 권력을 의욕한다." - P87

스스로 고백하듯이, 푸코는 인간학이나 인간 영혼에 정통하지 못하다. 권력의 인간학적 토대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쾌락적인 유희가 아니다. 이 점에서는 푸코보다 니체가 인간의 영혼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니체는 이렇게 쓴다. "권력의 쾌락은 우리가 수백 번이나 경험했던 의존성과 무력에 대한 불쾌함을 통해 설명된다. 이 경험이 없다면 쾌락도 없다." 권력을 행사할 때 생기는 쾌락은 부자유와 무력이라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권력을 얻었을 때 생기는 쾌락의 감정은 자유의 감정이다. 무력은 타자에게 내맡겨졌다는 것이며, 타자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권력이란 그와 반대로 타자에게서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의 강도는 유희의 자유로움이나 다양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쾌락은 권력과 더불어 자라나는 자아의 연속성에서 기인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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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이 악성종양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암세포"처럼 "무한정한 창궐, 과잉성장, 전이를 통해 확산된다. 그는 세계적인 것을 면역 모델로 설명한다. "면역성, 항체, 이식, 객혈이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바이러스에 의한 폭력, 네트워크와 가상적인 것의 폭력"이다. 가상성은 바이러스와 같다. 이렇게 네트워크화를 면역 모델로 서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면역성은 정보와 소통의 순환을 억제한다. ‘좋아요‘는 면역 반응이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으로서의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탈면역적이다.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질서, 신자유주의 질서에 핵심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간과한다. 면역성은 지상의 질서에 속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는 제니 홀저의 구호는 긍정성의 폭력이 지닌 탈면역적인 성질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 P27

신자유주의는 절대 계몽주의의 종착지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이성에 의해 인도된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광기가 테러리즘과 민족주의의 형태로 분출되는 파괴적 긴장을 산출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자유로 내세우지만, 이 자유는 광고다. 세계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 가치들까지 잠식하고 있다. 그 결과 자유 자체가 착취당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는 망상에 빠져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착취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기본 논리다. - P28

세계적인 것의 폭력에 맞서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단독적인 것에도 자신을 열어놓는 보편적 질서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세계적인 것의 시스템에 폭력적으로 침입하는 단독적인 것은 대화를 허락하는 타자가 아니다. 테러리즘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악마적이다. 멂과 다름이 허용된 가까움 속에 머무르는 화해된 상태에서만 단독적인 것은 악마성을 버릴 것이다. - P29

오늘날의 난민 위기는 유럽연합이 이기적 목적을 좇는 경제적 상업연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한다. 유럽의 자유 상업지역, 개별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부들 사이의 계약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을 칸트는 이성적 구성물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국가연맹"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공동체만이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공동체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 P31

진정성의 강제는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다.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
오로지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 같게-만들기의 논리는 다름을 같음으로 바꾼다. 그 결과 다름의 진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킨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을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서의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런 잡다함은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과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다름의 진정성은 오히려 억압적인 획일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동형성을 관철시킨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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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가 성적 대상으로 여겨질 때, 타자가 성적 대상으로 지각될 때, 부버가 말한 "근원거리"는 손상된다.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 하는 초월적인 예의를 창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한 의미에서 말 건네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얼굴은 타자성, 즉 거리를 요구하는 타자의 다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 P42

성과 원리는 오늘날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사랑과 성애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베스트셀러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여주인공은 그녀의 파트너가 자신과의 관계를 마치 "정해진 근무 시간, 명료하게 정의된 업무, 성과의 질을 보장해주는 철저한 방법을 갖춘 일자리"처럼 생각하는 것에 대해 어리둥절해한다. 성과 원리는 극단 또는 위반의 부정성과 양립하지 못한다. 따라서 예속된 주체인 "서브미시브(submissive, 순종적인, 고분고분한)"가 이행해야 할 "합의 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충분한 운동, 건강한 식사, 넉넉한 수면. 간식으로 과일 외에 다른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된다. "서브미시브"는 과음을 피해야 하고, 흡연이나 마약을 해서도 안 된다. 섹스조차 건강의 계율에 종속된다. 모든 형태의 부정성이 배제된다. 금지된 행동의 목록에는 배설물의 사용도 들어 있다. 상징적인 더러움도, 실제 더러움도 제거되어야 할 부정성이다. 여주인공은 언제나 청결함을 유지하고 깨끗이 면도하거나 왁싱을 해야 할 의무를 진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사도마조히즘은 성행위 중의 기분전환용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바타유적인 위반의 에로티즘을 특징 짓는 부정성, 즉 위반과 일탈의 부정성이 전혀 없다. 따라서 사도마조히즘 놀이는 절대로 사전에 합의한 "하드 리미트"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이른바 "세이프워드"의 사용은 사도마조히즘이 극단적 형태로 나아가는 것을 방지해준다. 과도하게 반복 사용되는 "감미로운"이라는 형용사는 긍정성의 명령이 모든 것을 향유와 소비의 공식으로 바꾸어버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는 심지어 "감미로운 고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한 긍정성의 세계에서는 소비 가능한 것만이 허용된다. 고통조차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통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헤겔의 부정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P44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을 묘사한다. 뒤에 가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정, 독립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초월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로 인해 타자에게 굴종하고 결국 노예가 된다. 그는 죽음의 위험 대신 노예 상태를 선택한다. 그는 벌거벗은 삶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신체적 우위에 있는 쪽이 꼭 투쟁의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오히려 "죽음의 능력"이다. 죽음을 향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데리고 죽음까지 가는" 대신에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 P52

노동과 벌거벗은 삶은 죽음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벌거벗은 삶을 지키려는 경향은 더욱 첨예화되어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치닫고 있다. 현대의 노예는 자주성과 자유보다 건강을 더 중시한다. 그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 즉 건강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과 흡하사다. 건강은 최후의 인간에게 "위대한 여신"으로 떠받들어진다. "사람들은 건강을 추앙한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꿈뻑거린다." 벌거벗은 삶이 신성시될 때, 신학은 치료법으로 대체된다. 아니면 치료법이 신학화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벌거벗은 삶의 성과목록 속에 죽음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런데 노예로 남아 벌거벗은 삶에 매달리는 한, 인간은 주인에 대한 굴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싸우는 자에게나 승자에게나 똑같이 혐오스러운 대상은 너희의 비죽거리는 죽음이다. 죽음은 도둑처럼 살금살금 다가오지만 결국 주인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 P52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영리를 가정 관리의 과업이라고 여기고, 화폐 자산을 잘 보존하든가 무한히 증식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줄기차게 옹호한다. 이러한 신념의 기반은 부지런히 삶을 돌보려는 노력이지만, 그것은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버림으로써 무한한 가속화 과정에 빠진다. 방향을 상실한 운동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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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성과 지속성은 소비에 적합하지 않다. 소비와 내구성은 서로를 배제한다. 유행의 가변성과 휘발성이 소비를 가속화한다. 그래서 소비문화는 내구성을 감소시킨다. 개성과 소비는 서로 대립한다. 이상적인 소비자는 개성이 없는 인간이다. 이 개성 없음이 무차별한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 P75

슈미트에 따르면 "하나 이상의 진정한 적을 가지는 것"은 "내면적 분열의 신호"다. 견고한 개성은 "적의 중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척도, 자신의 경계, 자신의 형상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적과 "투쟁하면서" 대립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적은 "형상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문제"다. 또한 단 한 명의 유일한 친구를 갖는 것도 어떤 인간이 견고한 개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슈미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이 개성이 없고 형상이 없을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 된다. 페이스북은 개성 없음의 시장이다. - P75

칸트는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에서 "재치"를 "두뇌의 사치"라고 불렀다. 재치는 곤궁과 필연성에서 해방된 자유의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재치는 "화사하다." "자연이 꽃을 가지고 주로 놀이를 하는 듯 보이는 것처럼. 이에 반해 자연은 열매를 가지고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꽃의 아름다움은 모든 경제로부터 자유로운 사치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강제나 목적이 없는, 자유로운 유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노동과 작업에 대립한다. 강제와 욕구가 지배하는 곳에는 유희를 위한 자유공간이 없는데, 유희는 미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는 사치의 현상이다. 다만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줄 뿐인, 필요한 것은 아름답지 않다. - P87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유로운 남자란 삶의 욕구와 강제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남자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들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삶의 방식들과 다르다. 예컨대 돈벌이에 집중하는 상인의 삶은 자유롭지 않다. "이 세 가지 삶의 방식은 [......] 모두 ‘아름다움‘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것들, 나아가 어떤 특정한 것에도 유용하지 않은 것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이루어진다." 아름다운 사물들을 향유하는 데 집중하는 삶과 폴리스에서 아름다운 행위들을 산출하는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연구하면서 영구적인 미의 영역에 머무르는 철학자의 관조적 삶이 여기에 속한다. - P88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름다움을 미적 감각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의 윤리학은 미의 윤리학이다. 정의 또한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추구된다. 플라톤은 정의가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행복의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칼로카가티아, 즉 아름다운 선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도입한다. 여기서 선은 미에 종속된다. 혹은 미보다 하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선은 미의 광휘 속에서 완성된다. 이상적인 정치는 미의 정치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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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 어떤 센세이션도 일어나지 않는 텅 빈 간극. 반면 신화적 시간이나 역사적 시간은 어떤 공허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림과 선에는 간극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점들 사이에서만 비어 있는 사이공간이 생겨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간극들은 권태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때로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 의도가 무에 맞닥뜨리는 곳에는 바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점-시간은 비어 있는 간극을 제거하거나 단축하고자 하는 강박을 낳는다. 간극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독일어로 지루함은 ‘오랜 지속lange Weile‘이다ㅡ역자) 센세이셔널한 일들이 더 빨리 연달아 일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장면과 장면, 또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 히스테리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속화된다. 이러한 가속화의 힘은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원자화된 시간은 서사적 긴장이 없는 까닭에 사람들의 주의를 지속적으로 묶어두지 못한다. 그 대신 인간의 지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또는 노골적인 것을 공급받는다. 점-시간은 사색적인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 P43

원자화된 시간은 불연속적 시간이다. 그 무엇도 사건들을 서로 연결해주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연관성도 어떤 지속성도 정립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지각은 기대치 않은 것, 갑작스러운 것과 맞닥뜨리게 되고 거기서 불분명한 공포가 생겨난다. 원자화, 고립, 불연속의 경험은 또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연속성과 지속을 보장해주던 사회적 구조물들은 점차 허물어져간다. 원자화와 고립화의 경향이 사회 전반을 지배한다. 약속, 신의, 의무처럼 미래를 구속하고 하나의 지평으로 제한하여 지속성을 확립한다는 점에서 모두 시간 관행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회적 실천 양식들은 의미를 상실한다. - P44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frei, 평화friede, 친구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 P61

오늘의 삶은 받침대가 없는 까닭에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시간의 분산은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개인의 시간 살림살이에서 짐을 덜어줄 안정적인 사회적 리듬과 박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더 다양화되는 경향이 개개인을 과도한 부담으로 짓누르고 과민 상태로 몰아간다. 따라야 할 시간 규정이 사라진 결과, 자유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상실 상태가 초래된다. - P62

쫓긴다는 느낌이 ‘놓쳐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생겨난다는 것도 잘못된 가정이다. "(가치 있는) 뭔가를 놓쳐버릴 수 있다는 불안과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의 속도를 더 높여보고자 하는 소망은 [......] 근대에 발달해온 문화 프로그램의 결과이다. 이 문화 프로그램의 핵심은 세계의 가능성들을 더 빠르게 맛봄으로써ㅡ다시 말해 체험 속도의 증대를 통해ㅡ각자의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들고 더 풍부한 체험으로 채워가는 것, 바로 그렇게 해서 ‘좋은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 속에 가속화가 약속하는 문화적 희망이 담겨 있다. 그 결과 주체들은 더욱더 빨리 살려고 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더 빨리 살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결국 죽기도 더 빨리 죽고 만다.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들의 수가 아니라 지속성의 경험이다. 사건들이 빠르게 연달아 일어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것은 싹트지 못한다. 충족과 의미는 양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긴 것과 느린 것이 없이 빠르게 산 삶, 짧고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는 체험들로 이루어진 삶은 "체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 자체 짧은 삶일 뿐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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