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가 성적 대상으로 여겨질 때, 타자가 성적 대상으로 지각될 때, 부버가 말한 "근원거리"는 손상된다.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 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성적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 그러한 타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어지지 않는다. "근원거리"는 타자를 그의 다름 속으로 놓아주는, 그 속으로 멀어지게 하는 초월적인 예의를 창출한다. 그것은 바로 강한 의미에서 말 건네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성적 대상을 부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성적 대상에는 "얼굴"도 없다. 얼굴은 타자성, 즉 거리를 요구하는 타자의 다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 P42

성과 원리는 오늘날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사랑과 성애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베스트셀러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여주인공은 그녀의 파트너가 자신과의 관계를 마치 "정해진 근무 시간, 명료하게 정의된 업무, 성과의 질을 보장해주는 철저한 방법을 갖춘 일자리"처럼 생각하는 것에 대해 어리둥절해한다. 성과 원리는 극단 또는 위반의 부정성과 양립하지 못한다. 따라서 예속된 주체인 "서브미시브(submissive, 순종적인, 고분고분한)"가 이행해야 할 "합의 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충분한 운동, 건강한 식사, 넉넉한 수면. 간식으로 과일 외에 다른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된다. "서브미시브"는 과음을 피해야 하고, 흡연이나 마약을 해서도 안 된다. 섹스조차 건강의 계율에 종속된다. 모든 형태의 부정성이 배제된다. 금지된 행동의 목록에는 배설물의 사용도 들어 있다. 상징적인 더러움도, 실제 더러움도 제거되어야 할 부정성이다. 여주인공은 언제나 청결함을 유지하고 깨끗이 면도하거나 왁싱을 해야 할 의무를 진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사도마조히즘은 성행위 중의 기분전환용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바타유적인 위반의 에로티즘을 특징 짓는 부정성, 즉 위반과 일탈의 부정성이 전혀 없다. 따라서 사도마조히즘 놀이는 절대로 사전에 합의한 "하드 리미트"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이른바 "세이프워드"의 사용은 사도마조히즘이 극단적 형태로 나아가는 것을 방지해준다. 과도하게 반복 사용되는 "감미로운"이라는 형용사는 긍정성의 명령이 모든 것을 향유와 소비의 공식으로 바꾸어버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는 심지어 "감미로운 고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러한 긍정성의 세계에서는 소비 가능한 것만이 허용된다. 고통조차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통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헤겔의 부정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P44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삶과 죽음을 건 싸움을 묘사한다. 뒤에 가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와 인정, 독립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초월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로 인해 타자에게 굴종하고 결국 노예가 된다. 그는 죽음의 위험 대신 노예 상태를 선택한다. 그는 벌거벗은 삶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신체적 우위에 있는 쪽이 꼭 투쟁의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오히려 "죽음의 능력"이다. 죽음을 향한 자유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걸지 못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데리고 죽음까지 가는" 대신에 "죽음의 내부에서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노예가 되고 일을 한다. - P52

노동과 벌거벗은 삶은 죽음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벌거벗은 삶을 지키려는 경향은 더욱 첨예화되어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치닫고 있다. 현대의 노예는 자주성과 자유보다 건강을 더 중시한다. 그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 즉 건강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과 흡하사다. 건강은 최후의 인간에게 "위대한 여신"으로 떠받들어진다. "사람들은 건강을 추앙한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꿈뻑거린다." 벌거벗은 삶이 신성시될 때, 신학은 치료법으로 대체된다. 아니면 치료법이 신학화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벌거벗은 삶의 성과목록 속에 죽음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런데 노예로 남아 벌거벗은 삶에 매달리는 한, 인간은 주인에 대한 굴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싸우는 자에게나 승자에게나 똑같이 혐오스러운 대상은 너희의 비죽거리는 죽음이다. 죽음은 도둑처럼 살금살금 다가오지만 결국 주인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 P52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적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순수한 영리 행위는 좋은 삶이 아니라 단순히 삶 자체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영리를 가정 관리의 과업이라고 여기고, 화폐 자산을 잘 보존하든가 무한히 증식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줄기차게 옹호한다. 이러한 신념의 기반은 부지런히 삶을 돌보려는 노력이지만, 그것은 좋은 삶을 위한 노력은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버림으로써 무한한 가속화 과정에 빠진다. 방향을 상실한 운동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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