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로부터 아토포스(atopos, 부정의 접두어 a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결합된 말이다.)라고 불렸다. 내가 욕망하는 타인은 장소가 없다. 그는 어떤 비교로부터도 벗어난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타자의 아토포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타자는 아토포스로서 말을 전율시킨다. 우리는 이 타자를 말할 수도, 이 타자에 대해서 말할 수도 없다. 모든 수식어는 잘못된 것이고, 고통스럽고,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다. [……]" 욕망의 대상으로서 소크라테스는 비교할 수 없고 단독적이다. 단독성은 진정성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진정성은 비교 가능성을 전제한다. 진정한 사람은 타인들과 다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토포스, 즉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그는 타인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타인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다르다. - P36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개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율적인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명령은 상업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다.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것과는 무관한,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건강한 자기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타자는 에고가 이 타자 안에서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 왜곡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자신이 용해되어 불명료해진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에 반해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와 달리 과도하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연관은 공허감을 낳는다. - P37

오늘날에는 성적 에너지가 무엇보다도 자아에 투자된다.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인 축적은 대상 리비도, 즉 대상을 점유하는 리비도의 감소를 초래한다. 대상 리비도는 대상에 대한 결속을 낳으며, 그 대가로 자아를 안정화한다.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인 누적은 병을 초래한다. 이는 두려움, 수치감, 죄의식, 공허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낳는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매우 강력한 과정이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철회할 것을 강요하는 경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이 경우 나르시시즘적으로 변한 리비도는 대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을 수 없고, 이렇게 리비도의 가동성이 방해받으면 병이 생겨난다.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의 누적이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바뀌는 것 같다." 어떤 대상도 리비도로 점유할 수 없게 되면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 결과 세상은 공허하고 무의미해진다. 대상과의 결속이 사라짐에 따라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던져진다. 자아는 자신과 충돌하여 파괴된다. 우울증은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 누적으로 인해 생겨난다. - P38

모든 부정성의 제거가 오늘날 사회의 특징이다. 소통 또한 매끄러워져서 서로 만족감을 교환하는 행위가 된다. 슬픔처럼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언어도, 어떤 표현도 제공되지 않는다. 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모든 형태가 회피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상해로 부활한다. 타자의 부정성을 추방하면 자기파괴의 과정이 초래된다는 일반적인 논리의 정당성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 P41

알랭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 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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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헤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여기서 결론Schluss은 형식논리적 범주가 아니다. 헤겔이라면 아마도 삶 자체가 하나의 결론이라고 말할 것이다. 결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성급한 결론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 타자에 대한 폭력적 배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 결론은 타자 속에 한동안 머문 뒤에야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찾아온다. 변증법 자체가 끝맺고 열고 다시 끝맺는 운동이다.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면 정신은 타자의 부정성에 상처 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버릴 것이다. 모든 결론, 모든 끝맺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헤겔의 노예는 의식이 제한되어 있다. 그의 의식은 절대적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죽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 속을 통과한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우울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을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성과주체 역시 결론을 맺지 못하고, 완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더 많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바스러진다. - P57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도 사랑이란 타자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피치노는 사랑하는 자가 다른 자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만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심지어 "소유"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유는 곧 타자의 선물일 것이다. 타자가 우선한다는 점에서 에로스의 힘은 아레스의 폭력과 구별된다. 권력 관계, 혹은 지배 관계 속에서 나는 타자에 맞서 나 자신을 주장하고 관철하기 위해 타자를 내게 굴복시키려 한다. 반면 에로스의 힘Macht은 무력함Ohn-macht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 P59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나르시시즘적이고 상상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흘러넘치고, 그것의 경계를 해체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그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죽음의 충동으로 표출된다. 벌거벗은 삶의 끝이 죽음의 전부는 아니다. ‘나‘의 상상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도, ‘나‘에게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적 질서를 폐기하는 것도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어쩌면 벌거벗은 삶의 끝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갈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죽음의 근본적인 매혹이 작용한다. 에로티즘의 핵심은 언제나 구성된 형태들의 해체다. 다시 말하면, 뚜렷하게 구분된 개별자들의 불연속적 질서를 구성하는 사회적, 규칙적 형태들의 해체." - P60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반대된다. 자아의 충동과 성과의 충동이 전혀 억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질서 속에서 에로스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죽음의 부정성을 밀어내버린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 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생동성은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생동성은 벌거벗은 삶의 활력 또는 건강한 체력과 구별된다. 벌거벗은 삶의 활력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 생존하는 자는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 산송장과 비슷한 존재다. - P61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종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epithymia, 용기thymos, 이성logos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충동이 영혼의 쾌락 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용기를 동력으로 하는 행동은 드물어진다.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를테면 기존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또한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아마도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하지만 용기도, 에로스도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정치는 단순한 사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도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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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어 페어fair의 의미는 다차원적이다. 그것은 정의롭다는 뜻과 함께 아름답다는 뜻도 지닌다. 고고지독어의 파가르fagar라는 말도 아름다움을 뜻한다. 독일어의 페겐fegen, 즉 ‘쓸다‘라는 말은 원래 윤기가 나게 만든다는 뜻이다. 페어의 이중적 의미는 미와 정의가 원래 동일한 표상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정의는 아름다운 것으로 지각된다. 특별한 공감각이 정의를 미와 연결시켜준다. - P90

정의 이념의 기초이기도 한 대칭은 아름답다. 정의로운 상태는 반드시 대칭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완전한 비대칭은 추의 감정을 유발한다. 불의는 극단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실제로 플라톤은 선을 대칭적인 것의 아름다움에 근거하여 사유했다. - P91

스캐리는 주체를 탈나르시시즘화하고 탈내면화하는 미의 경험에 대해 지적한다. 미 앞에서 주체는 뒤로 물러난다. 주체는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어준다. 이렇게 타자를 위해 자신을 근본적으로 철수시키는 것은 윤리적 행동이다. "시몬 베유에 따르면 미는 우리에게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의 중심에 서 있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대상들에게 자발적으로 우리의 땅을 맡긴다." 미 앞에서 주체는 측면의 위치를 차지한다. 주체는 앞으로 밀고 나가는 대신 옆으로 물러난다. 주체는 측면의 형상이 된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후퇴시킨다. 스캐리에 따르면 미 앞에서 겪게 되는 이런 미적 경험은 윤리적인 것으로 이어진다. 주체의 후퇴는 정의에 본질적이다. 정의는 공존의 아름다운 상태다. 미적 기쁨은 윤리적인 것으로 넘어갈 수 있다. "‘모든 면에서의 대칭‘을 요구하는 윤리적 공정성이 미적 공정성에 의해 크게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적 공정성은 모든 참여자들이 스스로 측면에 자리 잡은 채 기쁨의 상태를 느끼도록 한다." - P92

관조적인 머무르기를 방해하는 것은 의지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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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소설의 핵심 체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보리수 꽃잎차에 담근 마들렌의 향과 맛(맛의 감각은 필연적으로 냄새와 향기를 포함한다. 특히 차의 맛 속에서 향기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입천장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냄새의 감각은 냄새의 원천과 후각기관 사이의 공간적 인접성으로 인해 특히 강렬해진다.)이다. 마르셀이 부드럽게 적셔진 마들렌 조각을 한 숟갈의 차 속에 담아 입술에 가져갔을 때, 그의 온몸에 강렬한 행복의 감정이 흘러 퍼진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그런 행복감이 내 온몸에 흘러 퍼졌다. 단번에 나는 삶의 굴곡에 무관심해졌고, 삶의 재앙도 그저 대수롭지 않은 불운이었으며, 삶의 짧음도 단순히 우리 감각의 기만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무언가가, 보통은 사랑만이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일어났고, 이와 동시에 나는 어떤 진미의 물질로 채워진 듯이 느꼈다. 아니, 이 물질이 내 속에 있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그 물질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다거나, 공연한 존재라거나, 죽어 없어질 몸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마르셀에게는 "소량의 순수한 시간"이 주어진다. 향기로운 시간의 정수는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마르셀은 시간의 우연성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느낀다. 시간의 연금술에 의해 감각과 기억이 결합하여 현재에서도, 과거에서도 벗어나 있는 시간의 수정이 만들어진다. - P76

냄새와 향기는 광대한 시간을 거치며 과거 속 매우 깊은 데까지 뻗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최초의 기억들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단 하나의 향기에서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유년의 우주가 깨어난다. - P79

"거의 비현실적일 정도로 미량에 불과한 차 한 방울"이 기억의 거대한 건물이 들어설 수 있을 만큼 광활하다. 맛과 냄새는 인간의 죽음과 사물의 파멸을 뛰어넘는다. 거세게 흐르는 시간의 물살 속에 떠 있는 지속의 섬들. - P79

『미디어의 이해』에서 맥루언은 마치 프루스트의 마들렌 경험을 생리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흥미로운 실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두뇌가 작동하는 동안 뇌 조직에 가해지는 여러 자극은 많은 기억을 일깨운다. 이때 기억들은 특수한 향기와 냄새에 흠뻑 적셔지고, 이를 통해 하나의 단위로 묶여 초기 경험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향기는 이를테면 역사가 깃든 장소와 같다. 향기는 이야기들, 서사적 이미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후각은 맥루언이 지적하듯이 "상징 이미지"처럼 작용한다. 후각은 서사적 감각, 이야기의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후각은 시간적 사건들을 결합하고 엮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하나의 서사적 형상으로 만들어낸다. 이미지와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향기는 해체의 위협에 직면한 자아를 하나의 동일성 속에, 하나의 자화상 속에 안착하게 해줌으로써 자아에게 안정성을 돌려준다. 향기가 지닌 시간적 연장성 덕택에 자아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 행복의 감정을 불러오는 것은 이러한 자기 귀환이다. 향기가 있는 곳에서 자아는 자신과 통합된다. - P80

향기는 느리다. 매체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향기는 조급성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향기를 시각적 이미지처럼 빠르게 연속적으로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각적 이미지와는 반대로 향기는 가속화되지 않는다. 향기가 지배하는 사회라면 아마도 변화나 가속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회는 추억과 기억을 자양분으로 하는 사회, 느린 것과 긴 것을 먹고사는 사회일 것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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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주어진 시간』 - P165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데라다가 선물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논점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선물을 주고서 주었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데리다는 그런 식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우리의 의지만이 선물을 선물로서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P166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데리다가 유언처럼 남긴 충고가 지금까지 모든 현명한 사람들이 남긴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체의 대가 없이 네가 가진 것을 주어야만 한다." "수확의 기대 없이 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이제 우리는 뇌물이 아닌 선물을 주는 지혜를 고민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는 설레는 사랑과 진정한 행복의 조그마한 가능성이 찾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 P168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다리는 죽은 다리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타인이 고통스러울 때도 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타인은 죽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결론이 도출된다. 그것은 삶이란 고통이자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통찰이다. 결코 희망찬 메시지는 아니다. 삶이 고통이라니 말이다. 마침내 정호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공자나 맹자가 가르치려고 했던 비밀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가 제자들로 하여금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 주려고 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P175

탄생은 태어나지 않음과 태어남이 공존하는 경계를 거쳐야만 하고, 사랑도 사랑하지 않음과 사랑함이 공존하는 경계를 넘어서야만 하고, 죽음도 살아 있음과 살아 있지 않음이 공존하는 경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성의 담화는 사랑에 망설이는 상대방에게 요구한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감수성은 현실이란 모순된 것의 공존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이것은 여성이 자신과 자신 아닌 것, 즉 타자의 공존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리가라이는 지금까지 여성을 위한 담화, 혹은 여성적 언어를 만들려고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노력을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언어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리가라이의 여성적 문화는 인류의 소망스러운 미래를 위한 문화,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188 탄생은 태어나지 않음과 태어남이 공존하는 경계를 거쳐야만 하고, 사랑도 사랑하지 않음과 사랑함이 공존하는 경계를 넘어서야만 하고, 죽음도 살아 있음과 살아 있지 않음이 공존하는 경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성의 담화는 사랑에 망설이는 상대방에게 요구한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감수성은 현실이란 모순된 것의 공존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이것은 여성이 자신과 자신 아닌 것, 즉 타자의 공존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리가라이는 지금까지 여성을 위한 담화, 혹은 여성적 언어를 만들려고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노력을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언어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리가라이의 여성적 문화는 인류의 소망스러운 미래를 위한 문화,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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