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과 김길태 씨  

 

1. 요즘은 어른이 없는 시대라고 한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김대중, 김수환, 법정... 이런 분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조금 삼가는 마음이 든다. 내가 가까이서 뵌 분은 김수환 추기경 밖에 없지만 책을 통해 늘 가까이 계셨던 분은 법정 스님이시다. 군 복무 중에 초기 불교 경전을 읽게 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책들은 법정스님이 번역한 것이었다. 그 당시엔 난생처음 불교를 접하는데다가, <숫타니파타>는 이름부터 낯설었다. 그러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2. 법정 스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항상 그 전후에 또는 자막으로 함께 한 사람이 있다. 흉악범 김길태씨이다. 그런데 흉악범이란 성급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김길태씨는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신성한 스님의 임종의 자리에 결코 아름답지 않은 자막과 뉴스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왜 방송사는 큰 어른이 떠나시는 마당에 그런 작은 배려를 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김길태씨와 법정 스님은 무슨 인연일까?’였다. 신약성서를 보면 예수님과 극악범 바라바 또는 십자가형을 같이 받았다는 두 강도 이야기가 있다. 바라바는 예수님 덕택에 사형을 면하게 되었고, 예수님께 귀의한 강도는 구원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김길태는 예수님을 저주한 또다른 강도와 같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2010년 전의 사람살이와 지금의 사람살이가 연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3. 6.25 전쟁이라는 살인과 폭력에 회의를 느껴 자유와 진리를 찾아 출가를 하셨다는 55년전의 법정스님과, 욕망과 폭력에 물든 현재 사회를 대변하는 김길태씨, 또는 (김길태씨가 범인이 아닐 경우) 사회적인 약자일 김길태씨를 형벌을 통해 마녀사냥적인 방법으로 소거하려는 우리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에 사로잡힌 삶과,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삶의 극명한 대비..... 2010년의 십자가 주변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은 어찌 이렇게 닮을 수가 있는 것인지.....  

 

우리는 어떻게 이 오랜 문명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평행선으로 안고 가야하는 것인지...  

 

4. 스님의 죽음에서 조금 의외의 것이 있다. 스님께서 80도 채우지 못하고 폐암으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이다. 법정스님이 대체로 산속에서 맑은 공기를 쐬고 사셨고 맑은 차와 책 읽는 취미 외에 몸을 해칠 특별한 일을 하셨는지 의문이다. 또한 마지막 몇 년 간 글 속에 드러난 스님의 모습은 병과 친해지고 병을 품는 평온한 모습이셨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도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그분은 세속의 먼지구덩이 속에서 사시지 않았던가. 어쩌면 원래 스님의 명은 더 짧아서 그나마 간소한 삶 때문에 80에 가깝게 사셨는지 모른다. 또한 예로 부터 단명한 고승 대덕도 많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육체의 중력 중에 질병이란 녀석처럼 불가항력적인 것이 없구나 .'라는 사실이다.  

 

5. 우리는 깨달음이 궁극의 열쇠라고 생각하곤 한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조주스님처럼 120 정도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육체의 중력을 넘는 지고한 법력의 아우라를 내심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이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땡중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의 사리에 대해 노폐물일 뿐이라고 하셨던 도올 선생님처럼! 그러나 스님과 같은 맑음과 향기로움으로도 그놈의 깨달음 또는 깨침이 가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진리일 것이다.  

 

반면 법정 스님의 진리와 자유의 길이란 스님의 삶이라는 한정된 맥락에서 가치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다만 그 길은 심미적이고 현상학적이어서 그 길을 따라나서는 자에게 더 아름답고 귀하게 나타나는 무엇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비행기를 떠받쳐 준다. 즉, 비행이라는 행위를 할 때만 떠받드는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찌보면, 비행이라는 행위가 실제로 존재하는 힘, 양력을 창조해낸 셈이다. 마찬가지로 길은 있었지만 길을 직접 갈 때만 풍경을 만날 수가 있다. 또한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6. 법정 스님의 죽음에서 나는 사실 복잡한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다만 '말기 환자에게 맑은 공기와 좋은 물만 먹고 사랑과 행복이란 생각만 하면 그 긍정의 힘으로 누구나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왔던 낭만적인 생각을 버려야겠구나 .' 생각한다는 것이다.  새삼 삶과 죽음은 가장 큰 일이고 샛길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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