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가 생각했다. 관념의 여행도 이렇게 충만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올레길의 힘은 처음 제주를 찾은 사람에게도 오래된 친근함과 감춰진 놀라움을 펼쳐놓은데 있다. 올레는 만남과 치유, 그리고 감사의 길이다. 

부서지는 파도에서 그리고 부딪히는 마파람에서 나는 희망을 찾았다. 얼기설기 실타래처럼 꼬인 삶의 문제는 실은 이 올레길처럼 여유를 찾게하는 특별하게 마련된 소풍길일 수도 있다. 올레길이 단지 평탄하다면 바람 한 점 없는 진공이라면 이런 생동함을 느끼지 못하리라.   

관념에 바람이 불게하라. 관념에 사려깊음이 배게 하라. 먼저 길을 간 나그네들이여.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더 명쾌하고 따듯한 표지판을 남겨다오. 얼마나 힘들게 여기 다다랐는가 하는 좁은 마음을 버리시라.  

2. 최근에 이중텐, 법정, 오강남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올레길을 떠올렸다. 글은 친근하며 구체적인 일상의 체험과 맞닿아 있으나 자유롭고 여유로와서 한바탕의 소풍과 같았다. 늘상 곁에 있는 단순한 단어지만 깊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물론 이런 대가들 또는 스승들의 글쓰기를 쫒기는 불가능하다. 근원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은 쉽게 읽히지만 쉽게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직업적인 학자들의 글쓰기가 명확하고 간결한 학술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라면 평 범한 생활인의 글쓰기는 일상어의 나열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 일상어는  절절한 일상의 체험과 맞닿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며 그렇게 느끼지 않는 이의 글쓰기란 덧없는 관념의 놀이거나 삶과 하나되지 못한 분열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일상어의 사용은 모든 사람의 삶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신념에 뿌리내리고 있다. 또 때로는 절망적이고 궁핍한 이 삶이 모든 가치를 품어주는 터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리고 관념의 벽을 치고 특권적인 권위를 지닌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는 그릇된 관습에 반대한다.   

그 처음이자 나중은 이거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면적이기에 결코 분야별로 살 수 없으므로 우리의 생각 역시 경계가 없다고. 그러니 이미 멋대로 그려놓은 관념의 울타리는 사기에 불과하다. 다만 검색의 편의만을 인정할 수 있으리라.

 3. 배암발 : 제주도 올레길도 걷고 200km 마라톤을 통해서 제주도 일주도 이루었다. 33시간 마라톤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어둠이었던 것 같다. 특히 70km이후부터 발의 통증으로 발을 절며 뛰어야 했기에 무척 고통스러웠다. 누군가 울트라 마라톤의 매력은 깊은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기어나오는 느낌 때문이라고 했다. 조금 그 느낌을 알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울트라의 매력은 내가 겪는 기쁨과 고통이 거짓이 아닌가 질문하는 것이 어느 순간 멈춘다는 거다. 그만큼 고통이 절절한 그 순간이 온다. 반면 그 한계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불꽃같은 자신을 만난다는 것도 놀라운 경험이다. 이제 울트라는 그만 둔다고 이를 갈고 들어왔지만 지금은 다음 대회를 준비 중이다.  참 이상하기도 하다. 고통 속에서 터득한 길의 느낌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고 황홀하기만 하다. 이제 전보다는 여유롭게 달릴 것 같다.  

끝으로, 내가 말하는 길은 말할 수 없다는 그 道가 아니다. 다만 달리고 걸을 때 느껴지는 땅의 굽이 속에 난 바로 그 밟을 수 있는 길을 말한다. 나는 일상인이고 일상 속에서 경계를 넘는 울트라 마라토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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