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백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현정이는 우리 사이에 우연과 낭만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어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따분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전 연애를 우연히 이루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는 질문이고, 누군가의 일상을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는 일이에요. 전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았어요. 대단한 영감으로 순식간에 걸작을 써내는 작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트루먼 커포티는 [인 콜드 블러드]를 쓰는 데 육년이나 걸렸어요. 그런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우연히 벌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 하기 위해 철저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예요."

 

백영옥 작가를 좋아한다. 적어도 내게 그녀는 늘 궁금한 소재를 들고 나온다. 패션, 다이어트 그리고 이번엔 실연이다. 어느 순간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는- 적어도 '연애'를 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헤어진다는 끝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 서로에게 빠져들고 주변이 보이지 말아야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렇게 달콤한 순간들은 나중에 끝이 왔을 때 나를 더 괴롭힐 것이라 생각하고, 무서워하고 자꾸 내 자신을 단단하게  싸잡으려고 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참 긴 제목이다. 정말 이런 모임이 있을까? 이 책 속에는 있다. 그리고 이 제목은 그러한 모임이 진행되는 식당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식사를 하고 실연을 주제로 한 영화 연속으로 3~4편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모임에 참석하는 3명의 주인공, 사강, 지훈, 정미. 셋은 각각 실연을 하고 각각 다른 이야기를 안고 이 모임을 찾아온다. 나름의 사랑이었지만, 나름의 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궁금했다. 셋은 또 어떻게 얽힐지도- 의외로 이 들은 아무 약한 끈으로만 묶여있을 뿐이고, 각각의 이야기가 이 책의 큰 줄거리이다. 그들 각각의 실연. 아무래도 제일 공감이 가던 인물은 사강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자신을 사랑해야하는지 잊어버리고, 결국 실연을 맞이하는 여자.

 

사강은 점차 누군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말하지 않게 되자, 점점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사강은 원하는 것을 말하는 능력을 잃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녀를 유능한 회사원으로 만들어주었는데, 불만 없이 자족하는 사람이 귀한 시대에 그것은 거꾸로 보기 드문 재능으로 승화되었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짜거나 싱겁다고 소리를 지르며 매니저를 불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사강은 경외감을 느꼈다. (중략)

 

사강이 잃어버린 승객의 콘택트렌즈를 찾아주고, 보드카를 생수병에 넣어 몰래 반입한 시끄러운 러시아 사람들을 상대하고, 불편한 자기 자리 대신 텅 빈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할아버지 승객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고객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나도 실연을 맞이하게 될까? 호되게 인생의 실패 중 하나를 경험해 보게 될까? 아직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평소 하지 않던 나답지 않은 일을 하게 만드는 이 현상이 이해되지도 않는다. 나에게 실연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고 가능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기도 하다. 감정에 그렇게 휘둘리긴 아직 싫다. 다만,이 책을 통해 좀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보다 알차게 실연 하는 법을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생각하던 실연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사강과 지훈의 실연- 만약 언젠가 내가 실연을 하게 된다면, 그들의 모습을 반만이라도 닮아있었으면 싶다. 뭔지 모르겠지만 늘 나를 이끄는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처럼, 백영옥 작가님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역시 그녀구나 싶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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