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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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나이를 별로 먹고 싶어하지 않았다. 빈말이라도 어른이 되고 싶어, 졸업하고 싶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렸고, 어느덧 별로 맞이하고 싶지 않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나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사랑' 이다. 어찌어찌 학교도 잘 다녔고, 괜찮은 직장에서 돈을 벌어 남들이 이야기하는 기준에 어지간히 맞춰 살고 있었는데, 지금 내 나이대에는 또다른 과제가 부과되어있다. 연애와 결혼. 마음이 끌리지 않아서인지 '과제'로 느껴지는 것들. 이런 나에게 '사랑'은 '안전한' 지대에 발디딛고 있어야 인정할 법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소위 '금지된 사랑들'은 공감은 커녕 이해하기도 힘든 지대였다. 그런데, 음울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회사 일로 우울해진 나의 기분 탓이었는지, '풀밭 위의 식사'에서 누경의 사랑은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는 무책임한 감정이나 감상으로 사랑을 발전시키지 않는다. 그렇게도 당당하게 비겁하고, 결벽하게 표명하고, 가차없이 현실적인 것이 서운하지만, 그가 옳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리는 이 현실에서 도망칠 수도, 극복할 수도, 초월할 수도 없다. 가장 순수한 의무란, 현실을 살아내는 것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불륜의 사랑이다. 거기다가 나이차이는 20살에 가까우며, 마지막 결정타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의 친척오빠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막장을 다 모아도, 이렇게 모을 순 없으리라고 나는 분명 생각을 했을텐데...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난 누경의 애절함에 빠져버렸다. 어떻게든 내버려 둘 수 없는 여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난 그녀에게 이끌려 기현이 내버려둘 수 없듯이, 나 역시 누경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또한가지, 읽으면서 아마 평생 이런 말을 하거나, 나눌 일이 생길까 싶은 대화가 많은 책이었다. 이런 말을 누가 한단 말야 싶은 대화와 독백들이 많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던 책이었다. 내가 쓸 말들은 아니었지만 그 말들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닭살스러운 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던 서늘한 느낌의 대화들. 

"대체 무엇을 원해?"
"나의 고유한 리듬."
누경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암호 같았다. 내 고유한 리듬…… 그 리듬이 어떻게 생겨나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천성대로 살기로 하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꼭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고 정해져 있는 법이 있는가. 천성대로 게으르고 천성대로 외롭고, 천성대로 불행하고 천성대로 가난하고 천성대로 만족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천성대로 고독한 것도.  

참, 다시 돌이켜 보아도, 내 취향은 아닌 책이었다. 소재도, 글의 느낌도- 빨려들어간다는 느낌보다는 젖어간다는 느낌이 강했던 책. 리뷰를 써놓고 보아도, 이 책은 내 취향이 아니오- 그런데 내 취향이오 라는 종잡을 수 없는 리뷰가 되어버렸다. 조금만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이 책은 나에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딱 맞는 시간에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이렇게 딱 맞는 시간에 읽었다고 생각할 만큼 즐기면서 읽은 내 자신이 조금은 어른스러워지지 않았나 괜시리 생각해본다. 

나같은 천방지축도 아련하게 만들어버린 '풀밭 위의 식사'. 있는 그대로의 그들마저도 사랑스럽다. 

 "세상도 삶도, 우리 마음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우
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심연의 외줄 위에서 안간힘을 다해 현재를 제어하려는 아둔하고 흐릿하고 갸냘픈 의식의 줄타기뿐이야. 야윈 불빛 깜박이는 그 가난 속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 그 가난 속에서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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