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 모자를 쓰지 않고 망토를 걸치지 않고 오로지 일본 옷만 입는다.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지 못해 누워서 쓰는 버릇이 있다. 한밤중인 한두 시부터 아침 여덟아홉 시까지 글을 쓰고 읽기에 오후 두세 시께 일어나는 날이 잦다.

취미: 바둑 2단으로 두세 점 놓고 둔다. 장기 8단으로 차와 포를 떼고 둔다. 마작 0단. 카페나 요릿집 순례, 여행, 경마(싫어하는 사람이 있나).

생활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하야시 후미코는 자전적 이야기인 『방랑기』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됐지만 늘 순문학 작가를 꿈꿨다. 「청빈의 서」, 「울보 아이」 같은 단편이 좋은 반응을 얻긴 했어도 동시에 ‘가난을 팔아 먹고사는 작가’라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세간의 비난에 지치고 글을 쓰다 막히면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다. 돈이 바닥날 때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돌아와선 글을 써 원고료를 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다 1935년 9월 단편 「굴」을 기점으로 자전적 사소설에서 사실주의 소설로 작풍을 바꾸고 마침내 순문학 작가로 인정받았다.
「생활」은 1935년 2월 『개조』에 실린 글이다.

뭐가 애타서 쓰는 노래인가
함께 열리는 매실이며 자두
자두의 파란 몸에 내리쬐는
시골 생활의 평화로움

무로 사이세이 씨의 이 노래가 참 좋아서 매일 흥얼거린다. "뭐가 애타서 쓰는 노래인가" 정말이지 이 노래대로 나는 뭐가 애타서인지 몰라도 거의 날마다 밤이 이슥도록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너절한 그날의 일상을 소설로 쓴다.

신문을 얼추 다 읽어갈 즈음 주전자에 담긴 물이 끓는다. 이 시간이 나에게는 그야말로 천국 같다. 안경알에 입김을 후후 불고 무두질한 가죽으로 깨끗이 닦는다. 그다음 차를 우리고 책상 위 여러 가지 물건을 매만진다. "잘 계셨나요?"라고 물어보듯. 펜은 만년필을 사용한다. 잉크는 마루젠의 아테나잉크. 3홉가량 들어 있는 큰 병을 사 와서 쓸 때마다 즐겁게 잉크를 채운다.

책상 위에는 늘 뭐가 뭔지 모르겠는 잡지와 책이 한가득 쌓여 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들면 겁쟁이인 나는 1층으로 내려가 문단속을 한 뒤 부엌에서 밤참거리를 챙겨 들고 2층으로 다시 올라온다. 염장 다시마와 가다랑어포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사실 생각해보면 시골 여학생 같은 생활이다. ‘나의 생활’을 써달라고 해서 이렇게 쓰고 있자니, 별 볼 일 없는 나의 일상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진다.

비.오늘도 비가 내렸다. 머리를 짜낸 끝에 마침내 「그녀의 비망록」 완성. 스물일곱 매짜리 원고를 『신조』에 보냄. 막과자를 10전어치 사 와서 혼자 먹었다. 작은 순무와 조롱박으로 절임을 만들어봤다. 이삼일 지나면 맛이 들겠지.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 머리가 아프다.
1932년 9월 20일

저녁에 보랏빛 꽃범의꼬리 10전, 개미취 5전을 주고 사 옴. 비에 젖어 개와 걷기. 즐거운 산책이었다. 건널목의 비, 밤의 비, 푸르게 빛나며 비에 젖어 달리는 교외 전차. 더없이 기분 좋다.

하지만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아등바등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나에게 종교가 있다면, 그저 꾸준히 쓰는 것이다. 그 삼매경에 빠져 있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결국 ‘만년 문학소녀’다.

다이묘 여행**

**관리나 의원 등의 시찰을 빙자한 관광 여행. 원래는 에도시대 지방 영주 ‘다이묘’의 유람에 빗대어 호화로운 여행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한다. 한 달에 두세 번은 기차를 탄다. 장거리 여행도 아무렇지 않다. 걷는 게 무척 즐겁다. 올 1월에는 나가노 시가고원으로 스키를 타러 갔다. 마루야마의 한 산장에 묵었는데, 운 좋게도 여자는 나 혼자라 눈 덮인 산 위에서 마치 소녀처럼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괘종시계가 1시를 쳤다. 다들 푹 자고 있겠지.
5만 리나 앞에 있는 눈사태처럼 숨소리가 들린다.
2시가 되어도 3시가 되어도 내 책상 위는 새하얀 채다.
4시를 치면 숯 바구니 속 숯이 사라진다.
나는 덧문을 열고 헛간으로 숯을 가지러 간다.
추워서 몸이 얼어붙는 듯하지만
글 쓰는 일보다 숯 집어 드는 일이 훨씬 즐겁다.
어딘가에서 기르는 휘파람새가 울기 시작한다.

"달 어두운 밤 기러기는 높이 난다"고 비참한 날이 와도 원래 몸뚱어리 하나뿐이니 어떻게든 되리라.

‘맑은 물처럼 아무 맛이 없는’ 글을 쓰고 싶다. 지금 내 글은 손짓이나 거짓말이나 꾸밈새가 도드라진다. 괴롭다. 힘이 모자라는지도 모른다.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도 모른다. 툇마루에서 햇볕을 쬐는 듯한 생활이 문제인지도 모른다.

버릇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요시카와 에이지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소질이 뛰어났음에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일찍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다 1926년 『나루토비첩』으로 거액의 인세를 받으며 가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궁핍한 시절부터 함께하며 절약이 몸에 밴 아내는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그 해결책으로 새집을 짓고 고향의 가족을 부르고 양녀를 들여 안정을 꾀했지만, 결국 1937년 이혼했다.
「버릇」은 1935년 출간된 수필집 『초사당수필』에 실린 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중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못 들은 척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어떤 책에서 읽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짜증을 잘 내기로 유명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통일한 왕이면서도 잔꾀를 부리던 소싯적 버릇을 못 고치고 귀엣말해서 당시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고 한다.

잉크병을 닦는다. 책꽂이를 훔친다. 외출할 때 모자를 솔질해서 건네줘도 한 차례 손가락을 튕겨 먼지를 털어낸다.

책상과 이불과 여자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기성 문학 전반에 비판적이던 ‘무뢰파’를 형성했다. 무뢰파는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주며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세 사람은 친분도 두터워서 좌담회를 함께 하거나 카페 ‘루팡’에 모여 술을 마시며 열띤 문학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루팡’은 1928년 긴자에 문은 연 이래 기쿠치 간, 나가이 가후, 가와바타 야스나리, 햐야시 후미코 등 문인들의 단골집이었다.
「책상과 이불과 여자」는 1948년 2월 잡지 『마담』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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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비밀은 죽음과 시간에 있다. 환경에 불완전하게 적응한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과 우연히 적응하게 된 조그마한 돌연변이를 유지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 말이다. 유리한 돌연변이 형태들이 서서히 축적되기 위한 긴 시간이 바로 진화의 비밀이다.  - P79

다윈과 월리스에게 퍼부어졌던 그 엄청난 반대의 목소리도 적어도 일정 부분은, 억겁의 영원은 고사하고 수천 년조차 상상하기 힘들어 하는 인간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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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마감 - 일본 유명 작가들의 마감분투기 작가 시리즈 1
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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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잘 드는 창 아래 정갈한 책상. 이것이 내 취향이리라. 한적함을 사랑한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호주머니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 밝은 것이 좋다. 따뜻한 것이 좋다.

햇빛 쏟아지는 미닫이창 아래서 쓰면 가장 좋지만, 이 집에는 그런 장소가 없으므로 종종 양지바른 툇마루에 책상을 꺼내 놓고 머리에 햇빛을 흠뻑 받으며 펜을 든다. 너무 더우면 밀짚모자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글이 잘 써진다. 결국 밝은 곳이 제일이다.

필기도구는 처음엔 금색 G펜을 사용했다. 대여섯 해쯤 썼던가. 이후 만년필로 바꿨다. 지금 사용하는 만년필은 2대째로 ‘오노토’다. 특별히 좋아서 사용하는 것도 뭣도 아니다. 마루젠서점의 우치다 로안 군이 선물로 줘서 사용할 뿐이다. 붓으로 원고를 쓴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다.

작가의 마감 | 나쓰메 소세키 외,안은미 편역

나쓰메 소세키 “문인의 생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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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종의 기원 The Origin of Species』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변종을 바로 만들지는 못한다. 사람은 유기 생물들에게 삶의새로운 조건들을 접하게 할 뿐이다. 그 후에 자연이 유기체에 작용함으로써 변이성을 발현케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통해 주어지는변이성들을 선택할 줄 알고, 변이성을 자신이 원하는 형식으로 축적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줄 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동물과식물을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에 봉사하도록 할 수 있다. - P74

19세기에 진화론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한 토머스 헉슬리 Thomas Huxley가 다음과 같이 한탄한 적이 있다. "다윈과 월리스의 저작물들은 어두운 밤에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한 줄기의섬광이었다. 그 섬광으로 드러난 길은, 그 길이 집으로 향하고 있든 말든, 무조건 따라가게 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었다..……… 내가 『종의 기원』의 핵심 사상을 완전히 이해했을 때, 나는 참담했다. 바보같이 왜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콜럼버스와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도같은 소리를 중얼거렸을 것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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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국화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1879년 도쿄도 출생. 학창 시절부터 에도시대 통속소설을 탐독했다. 1900년 가부키 극장 전속 작가로 들어가 야학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며 에밀 졸라에 심취했다. 1902년 장편 『지옥의 꽃』을 발표해 모리 오가이에게 극찬받았다. 1903년 미국을 거쳐 프랑스에 머물다가 1908년 귀국, 이듬해 출간한 『프랑스 이야기』가 풍기 문란이란 이유로 판매 금지당했다. 1910년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대 문학과 교수가 되어 『미타문학』을 창간하고 편집했다. 이후 동시대 문명에 대한 혐오감을 토로하며 탐미주의 화류소설 『묵동기담』, 산책 수필 『게다를 신고 어슬렁어슬렁』 등을 남겼다. 1952년 문화훈장을 받은 그는 1959년 4월 30일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
「때늦은 국화」는 1923년 11월 잡지 『여성』에 실린 글이다.

조루리는 일본 전통 악기인 샤미센 반주에 맞춰 읊는 이야기 또는 노래. 고하루와 지헤에, 우라자토와 도키지로 모두 조루리 작품의 남녀 주인공들이다.

나는 초고를 반드시 세키슈 생지*****에다 쓴다. 서양지가 아닌 생지에 쓴 초고는 못 쓰게 되면 집 안 먼지를 털어내는 먼지떨이를 만들기에 좋고 마구 구겨 부드럽게 해서 뒷간으로 가져가면 아사쿠사 종이보다 훨씬 낫다. 휴지의 유용, 가치 없는 글자가 죽 적힌 초고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내가 평소 문학에 뜻을 둔 사람에게 서양지와 만년필을 사용하지 말라고 설파하는 것은 이 폐물 이용법을 알게 하려는 노파심이나 다름없다.

*****시마네현의 서부 이와미 지방의 옛 이름으로 옛날부터 종이 생산지로 유명하다.

『명성』에 실린 모리 오가이가 만년에 쓴 초고를 본 적 있는데, 괘선 없는 반지에 붓으로 해서와 행서를 섞어 써 내려간 서체가 티 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거침없이 쑥쑥 뻗어나간 것이 곧바로 그의 글임을 알게 했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날 마당에서 둥지로 서둘러 돌아오는 작은 새의 소리를 들으며 치자를 따서, 추운 밤 고즈넉이 홀로 켜진 등불 아래 얼어붙은 손끝을 녹이며 깨진 질냄비에 넣고 끓일 때의 정취란,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만든 치자즙을 짜서 괘선을 그려 넣은 종이에 붓을 갖다댈 때의 마음과 비교하면 훨씬 맑고 깨끗하리라. 하나는 완전히 무심한 시간이고, 하나는 세밀한 작업의 고통과 퇴고의 어려움으로 자주 긴 탄식이 흘러나온다.

올가을 이상하게도 재해를 피한 우리 집 마당에 겨울이 재빨리 찾아왔다. 붓을 내려놓고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니 마당을 반쯤 비춘 석양에 잘 익은 치자가 불타올라 사람이 와서 따기를 기다린다.

나의 가난 이야기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1886년 도쿄도 출생. 1908년 도쿄대 국문과에 입학, 「문신」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1911년 학비 미납으로 퇴학당한 뒤 「소년」, 「비밀」 등을 써서 나가이 가후로부터 극찬받았다. 이후 탐미주의적 색채로 에로티시즘과 마조히즘을 그려낸 작품을 다수 선보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1933년 수필집 『음예예찬』을 출간한 이듬해부터 고전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들어가며 작품 역시 고전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1943년부터 1948년에 걸쳐 오사카의 자매 이야기 『세설』을 완성했으며, 1958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이래 일곱 차례 후보에 올랐다. 고혈압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꾸준히 글을 쓰던 그는 1965년 7월 30일 일흔아홉 살에 생을 마감했다.
「나의 가난 이야기」는 1935년 1월 잡지 『중앙공론』에 실린 글이다.

내가 가난한 가장 큰 이유는 글 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원고를 재촉하는 편집자들에게 늘 호소하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함께 사는 가족뿐이다. 편집자들은 적당히 흘려듣는 것 같아 억울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일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린다거나 아주 고심해서 문장을 다듬는다거나 하는 점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게 싫어서 나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맞게 시간을 나눠 쓰지 못하기에 조금 긴 글을 집필하기 시작하면 놀기는커녕 관혼상제의 의리마저 저버린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지내다 보면 세상과 아예 접촉 없이 살아갈 순 없는 노릇이니, 여러 가지 방해가 들어오고 이윽고 일이 늦어진다. 그러면 이번에는 겨우 일을 마무리하고도 노는 시간조차 가질 틈 없이 곧바로 다음 일에 달려들어야 한다.

신문소설의 어려움

기쿠치 간菊池寛
1888년 가가와현 출생. 1910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구메 마사오와 친구가 되지만 졸업 직전 퇴학당했다. 졸업자격 검정시험을 거쳐 교토대 영문과에 진학, 졸업 후 도쿄로 올라와 시사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1916년 「아버지, 돌아오다」를 발표했다. 이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1920년 마이니치신문에 『진주부인』을 연재해 인기 작가가 됐다. 1923년 1월 『문예춘추』를 창간해 신진 작가 발굴에 나섰다. 1935년 세상을 떠난 두 명의 친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나오키 산주고를 기리며 아쿠타가와상(순수문학 대상)과 나오키상(대중문학 대상)을 만들었다. 또 『육지의 인어』, 『두 번째 키스』 등 쉰 편에 이르는 통속소설을 남겼다. 1948년 3월 6일 예순 살에 협심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신문소설의 어려움」은 1925년에 발표된 글이다.

바둑을 두든 장기를 두든 직업이 되면 전혀 재미있지 않은 모양인데, 작가도 창작할 때는 상당히 고통스럽다. 원고지 열 매나 스무 매짜리 단편을 쓰느라 시작하기 전에 사나흘, 끝낸 후에 사나흘은 헛되이 흘려보낸다.

독서와 창작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나쓰메 소세키는 1907년부터 도쿄대 교수를 그만두고 아사히신문에 전속 작가로 들어가 집에서 신문소설을 집필하며 책 읽기에 몰두했다.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가난한 유학생에게 최고의 위안은 독서라며 밥값을 아껴 책을 사서 밤새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아울러 매주 목요일마다 그를 흠모하는 문학청년들이 집으로 찾아와 서재에서 밤새도록 자유롭게 문학을 토론했다. 이른바 ‘목요회’로 나쓰메 소세키가 죽을 때까지 계속 열렸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구메 마사오 등도 참여한 바 있다.
「독서와 창작」은 1909년 2월 잡지 『중학세계』에 실린 글이다.

도무지 시간이 없어 독서를 못 하니 곤란하다. 신문소설을 쓰는 동안은 바빠서 당연히 책을 읽지 못하고, 겨우 다 쓰고 나면 이번에는 그때까지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서양 잡지 서너 종과 일본 잡지 그리고 외국에서 주문해 받은 책이 쌓여 있다. 그것도 읽어 보고 싶은데, 고새 젊은 친구들이 자신이 쓴 작품을 들고 와서 읽어봐달라, 비평해달라 조른다. 또 편지가 오면 답장을 쓰거나 손님이 오면 응대를 하느라 바쁘기 그지없다.

말할 것도 없이 드러누우면 금세 잠들기에 잠자리에서 책을 읽는 일도 없다. 정말이지 하루에 책을 읽을 시간이 얼마 안 된다.

메모

호리 다쓰오堀辰雄
호리 다쓰오의 만년 대표작으로 한 소설가를 사랑했던 어머니와 딸인 ‘나오코’의 인생을 다룬 『나오코』는 단편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4년 『문예춘추』 10월호에 프롤로그격인 「이야기 속 여인」(후에 「느릅나무 집」 1부)을 발표한 이후 후속편을 쓰지 못하다가 1939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941년 『중앙공론』 3월호에 본편인 「나오코」를, 이어 『문학계』 9월호에 「자각」(후에 「느릅나무 집」 2부)을 발표했다. 7년여 만에 『나오코』를 완성한 호리 다쓰오는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작가인 나로선 태어나 처음으로 정말로 소설다운 소설을 쓴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밝혔다.
「메모」는 1940년 4월 잡지 『문학계』에 실린 글이다.

뭔가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이것저것 궁리해도 무심코 게으름을 피워서(게으름만큼 내 건강에 좋은 것은 없기에) 좀처럼 계획한 대로 글이 써지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잠시 고바야시의 소설론을 소개하고 싶어서 이 메모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말로 번역하면 결국 내가 받아들인 이데아밖에 나오지 않을 게 뻔하니 그만두련다. 대신 고바야시에게 언젠가 써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해야겠다. 베란다에서의 잡담은 9시까지 이어졌다. 자, 이제 바깥 공기를 꽤 마셨으니 그만 나의 나오코한테로 돌아가야겠다.

세 편의 연재소설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
1894년 미에현 출생. 1916년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헌책방 주인, 편집기자를 거쳐 1923년 「2전짜리 동전」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필명 에도가와 란포는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다. 1925년 「D언덕의 살인 사건」에 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처음 등장시키며 「심리시험」, 「다락방의 산책자」 등을 발표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추리, 탐정, 환상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는데, 1931년 첫 전집이 출간되자 24만 부나 팔렸다. 1936년 검열이 심해지자 소년용 탐정물로 전향해 걸작을 다수 남겼다. 만년에는 ‘탐정작가클럽’을 조직해 평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에도가와란포상’을 제정해 신진 작가 발굴에 힘썼다. 1965년 7월 28일 일흔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세 편의 연재소설」은 1954년 11월에 출간된 『탐정소설 40년』에 실린 글이다.

어느 하루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1903년 후쿠오카현 출생. 어린 시절부터 행상하는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1922년 여학교 졸업 후 도쿄로 올라와 사무원, 카페 여급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글쓰기에 몰두했다. 1930년 자신의 경험을 간결한 일기체로 고백한 『방랑기』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됐다. 그 인세로 1931년 11월 혼자 유럽으로 여행을 갔다 이듬해 돌아와 1933년 『삼등여행기』를 펴냈다. 1935년 사소설적 소설에서 벗어난 단편 「굴」을 발표하며 문단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여성 자립과 사회 문제를 파고드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인 결과 1948년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했다. 유명 작가가 됐음에도 원고 청탁을 거절 안 해서 1949년부터 1951년에 걸쳐 연재 아홉 편을 진행하며 건강을 해친 끝에 1951년 6월 28일 마흔여덟 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어느 하루」는 1937년 1월 30일에 쓴 일기다.

저녁 무렵부터 가랑비가 내리다가 말다 한다. 신문을 읽으면 우울해서 견딜 수 없다. 무엇보다 시국이 불안하다. 하야시 센쥬로 대장에게 총리라는 임무가 주어졌단다. 어찌 됐든 나는 오늘도 아등바등 글을 써 내려간다.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없는 신세니.
1937년 1월 30일

문인의 생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나쓰메 소세키가 1907년 당시 아사히신문의 전속 작가가 되면서 받은 월급은 200엔. 거기에 1년에 두 번 상여금 200엔이 나왔다. 당시 기자 초임 월급이 30엔쯤, 도쿄대 교수 월급이 150엔쯤 했다. 그리고 와세다 미나미초로 이사해 19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소세키산방’이라 불리던 이 집은 원래 의원으로 지어진 탓에 주거 공간 외에 진료실이 있었는데, 그는 진료실에 마루를 깔고 앉은뱅이책상과 책장을 놓아 서재로 꾸몄다. 그 서재에서 『산시로』, 『그 후』, 『마음』 등을 썼다.
「문인의 생활」은 1914년 3월 22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글이다.

내가 막대한 부를 쌓았다느니 굉장한 저택을 지었다느니 땅과 집을 사고팔아 돈을 벌었다느니, 갖가지 소문이 세간에 떠도는 모양이지만 다 거짓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면 이런 더러운 집에서 살 턱이 없다. 땅과 집을 어떤 경로로 사들이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집도 내 집이 아니다. 셋집이다. 매달 집세를 내고 있다. 세상의 소문이란 게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기존 국판본 외에 요사이 따로 작게 인쇄한 문고본이 나왔다. 양쪽을 합쳐 35판을 찍었고 부수는 초판이 2천 부, 재판부터는 거의 1천 부였다. 무엇보다 이 35판은 상권이 그렇다는 얘기고 중권과 하권은 훨씬 판수가 적다. 여하튼 얼마의 인세를 받는 탓에 내가 책을 팔아 돈을 벌어들인다고 알려진 셈이다.

애초 나는 책을 써서 파는 일을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팔게 되면 크든 작든 욕심, 그러니까 평판을 높이고 싶다거나 인기를 얻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생긴다. 그러다 보면 품성과 책의 품위가 얼마간 비루해지기 십상이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자비로 출판해 동호인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는 것이 제일 좋지만, 나는 가난뱅이이기에 불가능하다.

더 밝은 집이 좋다. 더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 서재 벽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천장은 빗물이 새서 얼룩이 졌다. 상당히 지저분하지만 천장을 올려다보는 사람은 그다지 없으니까 이대로 놔둘 생각이다. 무엇보다 다다미가 안 깔린 마루가 문제다. 널빤지 사이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겨울이면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 채광 상태도 나쁘다. 여기에 앉아 읽고 쓰는 일이 괴로워도 신경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에 개의치 않으려 한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천장을 도배할 종이를 보내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특별히 내가 이런 집을 좋아해서 이렇게 어둡고 더러운 집에 사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살 뿐이다.

오락이란 것에는 별로 욕구가 없다. 당구는 물론 바둑도 장기도 아무것도 모른다.

햇빛 잘 드는 창 아래 정갈한 책상. 이것이 내 취향이리라. 한적함을 사랑한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호주머니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 밝은 것이 좋다. 따뜻한 것이 좋다.

햇빛 쏟아지는 미닫이창 아래서 쓰면 가장 좋지만, 이 집에는 그런 장소가 없으므로 종종 양지바른 툇마루에 책상을 꺼내 놓고 머리에 햇빛을 흠뻑 받으며 펜을 든다. 너무 더우면 밀짚모자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글이 잘 써진다. 결국 밝은 곳이 제일이다.

필기도구는 처음엔 금색 G펜을 사용했다. 대여섯 해쯤 썼던가. 이후 만년필로 바꿨다. 지금 사용하는 만년필은 2대째로 ‘오노토’다. 특별히 좋아서 사용하는 것도 뭣도 아니다. 마루젠서점의 우치다 로안 군이 선물로 줘서 사용할 뿐이다. 붓으로 원고를 쓴 적은 이제껏 한 번도 없다.

나의 이력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
1891년 오사카부 출생. 1911년 와세다대 영문과에 입학했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중퇴했다. 와세다미술연구회 기자, 잡지 편집기자 등을 거쳐 1923년 『문예춘추』 창간과 동시에 가십난 ‘문단 유머’를 맡아 독설로 화제를 모았다. 간토대지진 이후 오사카 플라톤사에서 일하며 시대소설을 발표하는 한편 ‘일본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노 쇼조 집에 살며 영화판에 발을 들였다. 직접 영화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그의 작품 또한 쉰 편 가까이 영화화됐다. 이후 영화판에서 나온 뒤 『청춘행장기』, 『남국태평기』 등을 쓰며 대중작가로 자리 잡았다. 1934년 2월 24일 마흔세 살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나의 이력」은 서른다섯 살 때 쓴 글로 보이지만 실제로 발표된 것은 마흔 살 때인 193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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