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이란?天文學, Astronomy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학문 중 하나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천체를 연구한다. 지금은 물리학, 화학, 지질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과 융합하며 빅뱅으로 시작하는 우주의 기원과 진화, 그리고 외계 행성과 생명 등으로 그 대상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천문학의 연구 대상은 태양과 태양계, 항성, 성간물질, 은하, 블랙홀과 같은 것이지만, 우주적 관점을 통해 인류의 미래와 인간의 정체성을 다른 차원에서 한층 더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빅뱅우주론(big bang theory)
138억 년 전 고온과 고밀도의 한 점으로부터 시작한 거대한 폭발을 통해 팽창하는 우주가 탄생했다고 말하는 이론으로서 우주가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말하던 ‘정상우주론’과 대척점에 놓여 있는, 현대 천문학의 중심이 되는 이론이다.

천동설(geocentric theory)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태양과 별은 지구를 공전한다고 믿었던 우주관이다. 지구중심설이라고도 불린다.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이어졌으나 여러 새로운 천문학적 발견에 의해 오류로 판명되었다.

지동설(heliocentric theory)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고 모든 천체는 태양을 공전한다고 믿었던 우주관이다. 태양중심설이라고도 불린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지동설은 꾸준히 제기되어왔지만 16세기 코페르니쿠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발견을 통해 정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자(electron)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기본 입자 중 하나로, 원자 안에서 음의 전하를 지닌다.

양성자(proton)
중성자와 함께 원자핵을 구성하는 입자로, 양의 전하를 가지고 있다. 양성자는 다시 기본 입자인 쿼크로 분해될 수 있다.

중성자(neutron)
양성자와 함께 원자핵을 구성하는 입자로, 전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중성자는 다시 기본 입자인 쿼크로 분해될 수 있다.

원자(atom)
원자핵 주변을 전자들이 둘러쌓고 있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일상적인 물질의 기본 단위다.

초신성(supernova)
쌍성계에 있는 백색왜성이나 태양보다 8배 이상 무거운 별이 죽어가는 순간 일어나는 거대한 폭발을 말한다. 이때 각종 원소들이 은하 혹은 별 사이의 공간으로 퍼져나가 성간물질이 된다. 이 성간물질에서 새로운 별들이 만들어지고, 이 과정은 반복된다.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
빅뱅 직후 뜨거웠던 초기 우주에서 분리된 채 자유롭게 움직이움직이던 양성자와 전자가 우주의 온도가 떨어지자 서로 결합했다. 이때 전자와 상호작용하면서 물질에 갇혀 있던 빛이 자유롭게 우주 공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는데, 이 빛을 우주배경복사라 한다. 우주 공간 어디에나 고루 퍼져 있으며, 빅뱅 직후 뜨거웠던 물질이 남겨놓은 흔적이다.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단위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수학적 단위를 천문학에서 사용하면 숫자가 너무 커지거나 복잡해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단위를 쓴다. ①켈빈(K): 물질의 특이성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온도, 0켈빈은 섭씨 -273.15도 ②광년(ly): 빛의 속도로 1년이 걸리는 거리, 1광년은 빛이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1년 동안 나아가는 거리 ③파섹(pc): 시차가 1초에 해당하는 거리, 1파섹은 3.26광년 등.

"인간은 별의 먼지에서 탄생했다. 인간의 몸 안에는 광활한 우주의 역사가 그대로 체현되어있다. 우주의 진리는 평범한 인간 안에 있다."

별과 행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천문학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진부한 질문이다. 근데 이 질문은 우리나라 말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해서 마음이 불편하다. 더 나아가 이 질문은 복잡한 세계를 한두 개의 잘 정의된 개념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의 한계 또한 보여준다.

우주가 시간에 따라 계속 진화한다는 사실은 현대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에 속한다. 우주의 정체성은 100억 년 전과 현재가 다르다.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기 시작한 것도 이 거대한 우주에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고대인들에게 우주는 이데아의 영역이자 신의 영역이었고,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우주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실제 우주는 정적이고 영원하며 무한한 공간이 아니며, 인간은 우연히 만들어진 우주 변방의 생명체일 뿐이다.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플라톤의 우주

영국의 과학사학자 존 헨리John Henry는 이렇게 말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최고 권위자인 파라오나 황제가 내리는 선언이 곧 법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모든 시민이 저마다 정부 내에서 또는 적어도 자신들이 바라는 통치 형태를 결정하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기 때문에, 법의 이념은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뚜렷한 실체로 간주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법은 독재자가 마음대로 부리는 변덕이 아니라 사회가 존재하면 으레 생기게 마련인 ‘자연적’ 요소로 여겨졌다. 법을 사회의 내재적 속성으로 본 것이다. 어쩌면 사회가 기능하는 방식과 이러한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법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가 자연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 듯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는 독특하게도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 이러한 자연법칙이 세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미국의 철학자 윌 듀란트Will Durant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는 세계라는 활동사진을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그림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는 다른 소심한 철학자들처럼 오직 질서만을 사랑했고, 아테네 민주정치의 소란에 놀라서 개인의 가치를 극적으로 무시했다. (···) 그의 국가는 정적이다. (···) 이 국가에는 과학만 있고 예술은 없다. 이 국가는 과학적 정신에 소중한 질서만을 찬양하고 예술의 정수인 자유는 전적으로 무시한다.

공전의 궤도는 영원과 완전의 상징인 ‘원’이며, 맨 바깥쪽 천구에는 별들이 박혀 있다.

이런 세계관의 요점은 이렇다. 자연의 본질은 완벽한 질서다. 자연의 기본 구성 요소는 정다면체와 같이 완벽한 대칭과 비율을 지니고 있다. 해와 달과 행성은 완벽한 원궤도를 그리며 하루에 한 번씩 하늘을 공전한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이렇게 질서 정연한 우주의 중심이다.

완벽하게 아름다운천동설에 균열을 일으키다
 
아름다운 천동설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이어졌던 우주관인 천동설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과 하늘의 별은 지구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 공전하고 있었다. 물론 천동설만이 고대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우주론은 아니었다.

시차의 발견은 독일의 천문학자 프리드리히 베셀Friedrich Bessel에 의해 1838년에 이루어진다. 베셀은 특수 망원경인 프라운호퍼 헬리오메터Fraunhofer heliometer로 지구에서 11.6광년 떨어진 백조자리Cygni 61번 별을 관찰해 0.314초에 해당하는 시차를 측정한 바 있다.

지구를 움직인 혁명의 시작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의 주창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에는 ‘혁명’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르곤 하지만 사실 그는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그다지 많이 벗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고려한 이유는 지동설이 당시 관찰된 우주의 현상을 더 잘 설명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원리로 우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고대의 이상에 지동설이 더 부합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점을 언급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작품은 의심의 여지없이 광대하도다!"라고 선언한다. 우주가 터무니없이 광활하다는 점은 지동설의 가장 큰 혁명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천문학의 발전과 인간 굴욕의 역사
 
"생각만 해도 끔찍한" 타원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고대의 그리스적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도 그중 하나였다. 케플러는 행성이 6개인 이유에 대한 답을 구하다 1595년 신의 ‘계시’를 받고 우주론 모델을 만들기 시작한다.

케플러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발견을 한다. 원궤도를 포기한다면, 즉 행성이 찌그러진 타원궤도를 따라 운동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경우 행성의 운동은 지동설의 틀 내에서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었다. 케플러의 표현을 따르면 타원궤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케플러는 고뇌 끝에 이 끔찍함을 받아들인다.

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케플러는 관측이 보여주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사랑하던 이데아적 질서를 포기한다. ‘원’이라는 아름다운 이상은 관측 데이터가 보여주는 추한 사실 앞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는 고대와 중세에서 근대 과학으로 향하는 과학사의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다.

긴반지름의 세제곱이 공전주기의 제곱에 비례함을 보인 것이다. 이 관계는 케플러의 제3법칙으로 알려져 있고, 흔히 조화의 법칙harmonic law이라 부르기도 한다. 타원궤도라는 추함 이면에 숨겨져 있던 신성한 하모니의 발견은 분명 케플러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조화의 법칙은 후에 뉴턴이 중력에 관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 금성의 위상 변화를 관찰해낸다. 달의 위상이 변하듯이 금성 또한 그 모습이 초승달이나 보름달처럼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에게 "당신이 쓴 책에는 왜 신에 관한 언급이 없는가"라고 묻자 "내게는 그런 가설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당시 과학자들의 자신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에게 "당신이 쓴 책에는 왜 신에 관한 언급이 없는가"라고 묻자 "내게는 그런 가설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당시 과학자들의 자신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성운을 ‘섬우주Island Universe’라 부르며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또 다른 우주라고 생각한 바 있다. 유한한 우주는 신의 무한한 속성을 반영할 수 없다고 생각한 칸트는 우리 은하와 같은 우주가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섀플리는 우주의 끝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는 주장을 쉽게 굽히지 않았다.

안드로메다은하와 우리 은하는 중력에 의해 서로 다가가고 있는 중이며 45억 년 후에는 둘이 충돌해 하나의 은하로 합쳐질 것으로 보인다.

지구는 신의 보살핌을 받는 에덴동산이 아닌 차디찬 암흑의 공간을 떠도는 외톨이었다. 우리 옆에는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문학의 발달 과정은 사실상 인간 굴욕의 역사였다.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뜨겁고 조밀한 점이었던 태초의 우주는 빅뱅을 통해 138억 년이라는 긴 역사를 시작한다. 빅뱅은 우연적이고 단회적인 사건으로부터 우주와 지구, 생명이 탄생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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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3화 | 미야베 미유키 저/이규원 역


혹시 언니에게 애인이 생긴 거 아냐? 하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다. 패션잡지를 사 오질 않나 화장품을 바꾸질 않나 면도기 들고 정성스레 제모하질 않나.

“미노리는 왜 이렇게 성미가 급할까.”

“노리카가 미노리를 나보다 더 잘 아는구나. 엄마만 갔으면 어떡할 뻔했니.” 

“반차 내시게 해서 죄송해요.”

언니와 다쓰야 씨의 관계는 순조롭게 발전 중인지, 황금연휴 즈음에는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더니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8월이 되자 처음으로 아침에 귀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쓰야 씨가 그렇게(이상하다고 할까 별나다고 할까 위험하다고 할까) 변한 것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직후부터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다정한 신사였지만 질투가 너무 심하고 금세 화를 내고 불만이 많고 언니를 깔보고 멸시하고 툭하면 비난하고 비웃는 위험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언니가 (뭔가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 완곡하게) 한 마디라도 대꾸하면 금세 발끈해서 손을 쳐들거나 때리는 시늉을 한다. 큰소리로 화를 낸다.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부수거나 의자를 발로 차기도 한다.

“쉴 새 없이 라인을 보내서 내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확인하려 들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다.

악마다. 악령이다. 그래서 유리 따위는 그냥 투과하여 이쪽을 공격할 거다─.

나는 달님의 한탄을 들었다.

이 빛으로도 정화할 수 없는 게 있단다.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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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8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양이준1174859

2024-01-28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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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달리 교육을받지 않는 한 누구나, ‘지구는 커다란 집과 같다. 그 위를 덮고 있는 둥근 천장이 하늘이고 집과 천장은 고정되어 있다. 천장 안에서 매우 작은 태양이 새가 허공을 누비며 날아다니듯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지나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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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쿠 문집南郭文集』 첫째 편 4장에 이때 지은 시 두 수가 실려 있는데 이는 그중 하나다.

이 한 몸 뉘일 초가집 조릿대 물가 그늘에 두었으니

가을바람이 쉬어가라며 긴 옷자락을 잡아끄네

재주는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기나긴 세월 눈물을 흘렸도다

사통팔달 편리한 고을에서 오래오래 책을 쓰고자 하니

저녁 무렵 숲속은 무수한 까마귀로 검다

세월이 흘러 강이며 수목이며 자연은 깊어만 가고

사람의 마음은 호수 바다 하늘 먼 곳을 떠다닌다

머나먼 타향에서 온 손님이라 방종함을 절제하게 되누나

산책하러 가자는 친구가 오면 나는 무코지마 백화원(에도시대에 센다이 출신 골동품상 사와라 기쿠가 스미다 강 인근 토지를 매입해 조성한 화원이며 현재는 도립)으로 향한다.

노인이 돋보기의 힘을 빌리 듯, 나는 전차와 승합자동차를 타고 무코지마로 간다.

"꽃이 피지 않을 무렵에 와보고 또 꽃이 지고 난 무렵에 와보는 일은 두번천(杜樊川 당나라 시인 두목의 별칭)이 녹음 드리운 가지에 열매만 가득하누나(옛 여인을 찾아가니 이미 시집 가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안타까움을 토로한 시)라고 탄식한 것과 비슷하지. 이게 바로 진정한 풍류가 아니겠나."

"화단에 꽃이 없음은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일인진대 이걸 보고 기뻐하다니, 이보다 괴상한 짓은 다시없을 걸세. 풍류는 알지 못해도 괴상함은 아는 자가 세상에는 더러 있나보더군." 하고 받아치는 바람에 모두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떴다.

나카스(中洲 강 가운데 모래톱이란 뜻으로, 스미다 강 중간쯤인 니혼바시나카스를 이르며 옛날에는 달맞이 명소로 뱃놀이 인파가 붐볐다) 강가에 옛 친구가 병원을 차렸다는 얘기는 『주오코론中央公論』에 연재하는 글에도 쓴 적이 있다.

언덕이 많은 야마노테에 오래 산 나는 이따금 유유히 흐르는 스미다 강을 볼 때마다 괜스레 건너고 싶다. 비가 올 듯한 날에는 안개 자욱한 강줄기 보는 즐거움에 산책이 한결 흥겹다.

어느 날 나카스 강가에서 기요스바시를 건널 때였다. 문득 만넨바시 부근에 있던 바쇼의 암자 터와 맛사키 이나리 신사는 대지진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가보니 기요스바시 건너 남쪽 아사노시멘트 제조공장은 여전하여 예의 그 무시무시한 건물과 굴뚝이 솟아 있다.

한편으론 물가 옆에 바쇼 암자 터가 신사로 보존되고 길 건너 맛사키이나리 사당에 새로운 돌기둥이 우뚝 솟은 모습에, 도쿄 생활이 아무리 바빠져도 옛 풍류가의 흔적을 아직 없애지는 않는구나 싶어 안도했다.

오히사의 샤미센 연주에 맞춰 누군가 오치우도(落人 도망가는 사람이라는 뜻의 가부키 곡명, 밀회를 하다 도망가는 남녀를 다룬 노래)를 읊고, 오히사는 세이신(清心 가부키 곡 십육야세이신을 이름, 성문에 목이 매달린 도적을 다룬 노래)을 읊었다.

나는 요가라스가 유칸바 오쿠보의 뒷골목 나가야에 은거하며 문단이나 세상과 교류하지 않은 채 초연히 홀로 좋아하는 곳에서 하이쿠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야말로 진정으로 에도시대 고유의 하이쿠 시인 기질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며 마음 깊이 존경했다.

야마노테에 사는 사람들이 의미 없는 체면에 사로잡혀 허황된 명성을 얻으려 안달하는 반면 요가라스는 뒷골목 나가야의 빈민 생활이 훨씬 청렴하고 자유롭다며 기뻐했다.

때는 다이쇼 2년(1913), 본명 나가이 소키치永井壮吉, 즉 나가이 가후는 미타에 위치한 게이오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면 쓰키지에 있는 셋집으로 향했다.

가후의 글은 급격히 변화하는 도쿄의 틈새를 다룬다.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한 극장 뒷길에 낡아 누르스름해진 얼음가게의 깃발. 가후의 관심은 이렇게 사라져가는 에도의 유산에 쏠렸다. 가게 안쪽 소녀는 샤미센을 들고 기요모토를 연습한다. 기요모토는 가부키의 반주음악으로 발달한, 특유의 샤미센 곡조에 애달픈 가사가 아우러진 노래다. 에도시대 말기에서 메이지시대까지, 시타마치 소녀들이 흔히 배웠다.

요쓰야와 아카사카는 오늘날 도쿄의 중심이다. 고층빌딩과 고급호텔이 즐비하다. 당시 가후는 에도부터 이어져온 가난한 서민의 생활을 바라봤다. 분뇨糞尿를 가득 실은 배들이 오가고, 공장 사이사이 집들이 끼어 있고, 무덤가 옆에 기다란 집이 늘어선 모습은 문명개화와는 동떨어진 생활이었다. 펄럭이는 빨래처럼 초연히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모습을, 가후는 그려내고 있다.

가후는 한손에 에도지도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그의 산책로는 오늘날 도쿄순환선 야마노테센 안쪽을 총망라한다. 그러나 에도지도에도 메이지, 다이쇼지도에도 없는, 직접 걸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부분들이, 사실 가후의 산책길에 중요한 포인트였다.

아무리 정밀한 도쿄 시내 지도라 해도 골목은 그리 선명히 나와 있지 않다.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나올지 혹은 어디로도 나올 수 없는 막다른 길인지는, 그 골목에 살 때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두 번 골목을 걸었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

현대 도쿄도 ‘어슬렁어슬렁 걷기’를 나서면 옛 에도를 느낄 수 있다. 공터는 공원이 되고 강을 메워 도로를 만들어도 지명에는 옛 모습이 남아있다.

우에노上野는 높은 땅을 이루고 시부야渋谷는 골짜기를 이룬다. 니혼바시日本橋에는 다리가 있고 고코쿠지護国寺에는 절이 있다.

도쿄가 도쿄답게 존재하려면, 도쿄 사람이 도쿄 사람답게 존재하려면 에도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도쿄라는 도시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긴 역사와 문화 속 뿌리를 상실하고 만다면 얼마나 빈약해질 것인가. 그 까닭에 가후는 붓을 들었다. 도쿄에 남겨둬야 할 것들을 기록하기 위하여.

오토와 베니코音羽紅子

일찍이 에도는 시골이었다. 가마쿠라막부가 들어설 즈음 정권의 중심에서 가까웠지만, 가마쿠라시대(1180~1333) 이전이나 이후 에도시대(1603~1868)가 막을 열기까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 교토와 오사카가 있는 간사이(관서) 지방에 편중해 있었다.

알지 못하는 땅이자, 알 수 없는 힘이 서린 귀신들의 땅이라 업신여기면서도 간사이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는 이 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동쪽의 땅 가운데 풍요롭게 작물이 자라는 간토에 정치의 중심을 두었고, 이후 많은 사람이 에도에 정착해 이윽고 에도는 백만 인구가 사는 도시가 된다.

이렇듯 에도시대가 내란 없이 삼백 년 넘게 번영을 누린 데에는 참근교대 제도의 영향이 컸다. 다이묘는 거액의 여비를 지출해야 했지만, 주요 도로 역참 마을과 에도의 주민에겐 다시없는 비즈니스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이 대거 에도로 이주한 요인으로 3대 세이이다이쇼군 이에미쓰가 제정한 참근교대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제도는 각 번藩의 우두머리인 다이묘大名가 2년에 한 번씩 반드시 에도 성을 방문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에도를 오고가는 여비는 모두 다이묘가 부담했다.

요시와라는 오늘날 매춘업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매우 고급스러운 기모노를 걸치고, 문학을 이해하며, 악기를 다루고, 다도와 꽃꽂이에 능한 ‘오이란花魁’이란 고급 유녀를 중심으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세간에는 삼대가 살면 에돗코(에도 토박이, 도쿄 토박이)라는 말이 있다. 삼대쯤 에도에 터 잡고 살면 에돗코가 됐으니, 그만큼 새로 정착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간사이에서는 턱도 없는 이야기다. ‘오백 년, 천 년쯤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았다’라는 확실한 가계도가 있을 때 비로소 토박이라 불렀기에 시간적 구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에도와 도쿄 모두, 도시가 비대해지다가는 파멸하고, 다시 비대해지기를 반복했다. 거리 풍경은 변모를 거듭했으며, 이주자가 끊이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도쿄를 방문한다면, 부디 고층빌딩에서 내려와, 가후처럼 어슬렁어슬렁 지상을 걸어보길 바란다. 눈이 핑핑 돌 만큼 정신없이 바쁜 이 거리가 당신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고즈넉한 골목길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 잎사귀가 속삭이는 소리에, 빨간 턱받침을 한 돌부처가 건네는 이야기에, 졸졸졸 흐르는 도랑이 들려주는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그 산책길에서 도쿄가 품어온 ‘생’을 만끽할 수 있기를.

오토와 베니코

일본은 오늘날에도 서력만큼 연호를 중시하는 나라로 천황이 바뀔 때마다 연호가 바뀐다. 메이지시대(1868~1912) - 다이쇼시대(1912~1926) - 쇼와시대(1926~1989) - 헤이세이시대(1989~)

통학로인 한조몬, 다이칸초도리, 히토쓰바시, 간다를 중심으로 고지마치, 구단, 이치가야 등 이리저리 먼 길을 돌아 야마노테 마을 풍경을 즐겼다.

학교를 마치고 간다 강을 따라 간다, 야나기바시, 교바시, 하마초를 걸으며 강에 걸린 작은 다리와 강가 주변을 산책했다.

소토보리도리를 따라 이다마치(현 이다바시), 스이도, 오차노미즈를, 와세다도리를 따라 우시고메의 가구라자카, 오쿠보까지 산책했다.

고이시카와 저지대에서 혼고 고지대를 거쳐 네즈, 센다기, 야오이의 언덕 위를 걸어 올라가며 시가지를 내려다보길 즐겼다. 특히 모리 오가이의 저택 간초로가 있던 언덕길을 도쿄 제일가는 풍경이라며 좋아했다.

오쿠보 요초마치 집에서 게이오 대학이 있던 미타까지 전철을 타고 시나노마치, 아오야마를 구경했다. 때론 한가로이 걸어 다니면서 공터나 도랑을 찾아내어 좋아하는 잡초를 감상하곤 했다.

쓰키지 해안을 따라 가깝게는 신토미나 아카시초, 멀게는 쓰키시마까지 산책하며 강가 마을 풍경에 감흥을 받았다.

편기관을 거점으로 아카사카, 아자부, 시바, 미타까지 발길을 옮기며 오랜 절을 둘러봤다. 이해 처음으로 아라카와 방수로를 찾았다.

신풍속에 관심을 갖고 여름부터 긴자 카페 타이거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가운데 짬을 내어 친구 고지로 소우요 등과 긴자나 니혼바시 같은 번화가를 주로 다니며 서양 영화를 즐겼다.

니혼바시 나카스에 있는 친구 병원을 들릴 때마다 위쪽으로 고토부키, 아즈마바시를 건너 무코지마 주변까지, 아래쪽으로 기요스바시를 건너 후카가와, 스나마치까지 강가 마을을 누볐다.

『강 동쪽의 기담』 집필을 위해 사창가가 있는 다마노이(현 히가시무코지마)를 여러 차례 산책하며 마을을 스케치하고 거리 지도까지 손수 제작했다. 1948년 또다시 다마노이를 찾았지만, 전쟁으로 모든 것이 불타버린 상태였다.

이치카와로 터전을 옮긴 뒤 마마 강을 따라 고노다이, 스가노, 야와타 등지를 돌며 오랜 절과 시골길을 감상했다. 특히 봄이면 마마 강의 벚꽃을 즐겼고, 이치카와 세무서가 있던 고노다이 언덕에 자주 올라 에도 강을 바라봤다.

도보뿐만 아니라 버스나 전철 등 대중교통을 타고 이치카와 시내를 벗어나 우라야스나 후나바시까지 점점 산책로를 넓혀 나갔다. 

직접 쓴 각본이 잇달아 아사쿠사 극장에서 상영되자 매일같이 아사쿠사를 찾아 외식을 즐기고 영화를 감상했다. 단골집도 생겨났는데, 이해 처음 간 ‘아리조나 키친’에서는 10년 동안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조칸지가 있는 미노와, 요시와라 신사가 있는 센조쿠, 산야보리가 있는 이마도를 종종 찾아가 옛 에도의 향수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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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도시 중에서도 나는 뉴욕의 평탄한 5번가보다 콜롬비아의 고지대로 오르는 돌계단을 좋아했고, 파리의 널따란 대로보다 몽마르트르 언덕을 훨씬 사랑했다.

그즈음 나는 아직 서른 전이었다. 독신으로 정처 없이 떠돌며 이국의 고독한 객을 자처했고, 세상은 넓고 인간은 발길 닿는 곳마다 청산, 즉 무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세 좋게 돌아다녔다.

"풍류가 없어도 고통은 덜하고, 비루하고 조그만 오두막에도 달빛은 비추네"란 구절이 있듯 쓸데없이 슬퍼하고 분개하며 자길 괴롭히는 건 현인賢人이 갖출 행동이 아닐 터.

우리가 사는 도쿄가 아무리 추하고 더럽다 해도 여기 살면서 아침저녁을 보내는 한은 그 추악함 속에서 약간의 아름다움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더러움 속에서 멋을 발견해 억지로라도 마음 편히 살도록 스스로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본래 나의 히요리게다 산책에 조금이나마 주의 아닌 주의를 기울이고픈 부분이다.

도쿄 시내의 훌륭한 모습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제일 잘 보인다.

옛 풍경 가운데 명성 높은 곳은 아카사카 레이난자카 위에서 시바 서쪽 구보로 내려가는 에도미자카다.

이들 돌층계 길을 보면 나는 나가사키 마을이 떠오른다. 그 까닭에 히요리게다 신고 딸깍딸깍 모서리가 마모된 돌층계를 위태롭게 한 계단씩 밟으며 부디 도쿄 토목공사가 이곳을 통행에 편리한 보통 언덕길로 만들지 않기를 남몰래 빌곤 한다.

에도의 서쪽 외곽 메구로에는 유히가오카 (夕日ヶ岡 석양 언덕)가 있고, 오쿠보에는 니시무키텐진(西向天神 서쪽 천신)이 있다. 둘 다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에도 때의 일이고, 오늘날 일부러 벽촌 언덕까지 지팡이를 짚으며 석양을 보러 가는 우매한 이는 없을 터다. 하지만 나는 요즘 빈번히 도쿄 풍경을 탐색하며 걸으면서 이 도시의 미관이 석양과 꽤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쿄의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새잎이 돋는 5월과 6월, 만추에 젖은 10월과 11월이다. 야마노테는 정원이든 울타리든 가는 곳마다 신록의 싱그러움이 흘러넘친다. 노을이 질 때면 그 나무들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붉게 물든 하늘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노을 지는 그늘 아래로 낙엽 밟고 걸으면 강호에 묻혀 사는 시인이 아니더라도 얼마간 감개를 얻을 수 있으리라.

석양의 아름다움과 함께 논할 것이 시내에서 바라보이는 후지 산 원경이다. 석양이 지는 서쪽 거리에서는 대체로 후지 산뿐만 아니라 그 기슭으로 이어지는 하코네, 오야마, 지치부의 산맥까지 바라볼 수 있다.

분세이시대(1818~1830)에 호쿠사이가 『후지 36경』에 그린 니시키에 가운데 에도 시내에서 후지 산을 볼 수 있는 곳은 열 군데가 넘는다.

호쿠사이나 그 문하생인 쇼테이 호쿠주, 또 히로시게의 판화는 오늘날까지도 도쿄와 후지 산의 회화적 관계를 찾아나서는 이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후지 산 풍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우키요에의 색채에서 보듯 초여름과 늦가을 석양에 비친 구름과 안개가 오색으로 빛나고, 산은 자줏빛으로, 하늘은 붉은 색으로 온통 물들었을 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탈리아 밀라노는 알프스 산맥이 있기에 한층 더 아름답고, 나폴리는 베수비오 화산 연기로 인해 여행자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지 않는가.

도쿄의 도쿄다움은 후지 산을 조망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 애국은 고향의 미를 영원히 보호하고, 국어를 순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의무라 하겠다.

밝은 달 뜨니 후지 산 바라볼까 쓰루가 마을 
  소류

반쪽만 보면 에도의 물건이니 녹지 않는 눈 
  류시

후지 산 보며 잊지 않으려 하네 세밑이구나
호마

봄이 가누나 후지 산도 절하며 잘 가라 하네

자네는 오늘   학을 타고 가려나   후지 산엔 눈

가후 / 다이쇼 4년(1915) 4월

백성들 모두 이곳을 즐기어 아무리 걸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도읍에 사는 이의 행락지로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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