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와 고립시켜 통시적으로만 헤아려왔지,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공시적으로 이해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근간에 와서 ‘세계 속의 한국‘이란 구호는 버젓이 내걸었지만, 도대체 세계 속에서 한국이 차지하는위상은 어떠했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우리들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 즉 ‘한국 속의 세계‘ 가 과연 어떤 것인지는그 개념조차 낯설다. 그 결과 남들이 우리더러 ‘은둔국‘이라고 해도우리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냈으며, 스스로가 ‘닫힌 나라‘라는자학적인 사관에서도 헤어나지 못했다. - P5

사실 ‘세계 속의 한국‘은 바깥에서 세계와 만남이고, ‘한국 속의 세계‘는 안에서 세계와 만남이다. 이 두 개념은 ‘세계성‘에서 서로 접합된다. ‘세계성‘이란 한마디로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함께하는 정신을 말한다. - P5

우리에게 이러한 ‘세계성‘은 오늘과 내일에 필요한 정신일 뿐만 아니라, 어제부터 있어온 실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지못했을 뿐이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갈피마다 이러한 ‘세계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세계와 무관한 것이 없다. 가까이는 중국이나 일본, 멀리는 아랍이나 로마와도 서로 주고받으면서 역사와 문화를 함께 가꾸어왔다. 이를테면, 우리 속에는 일찍부터세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비로소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것이다. - P6

‘한국 속의 세계‘란 조금은 생소한 개념이지만, 실제로 지난날의현실이었고, 또 오늘과 내일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기에 감히 이개념을 가지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접근해봤다. 모난 돌도 자꾸 굴리다보면 둥글어지는 법이다. 첫 시도니만치 부족하거나 어설픈 점이없을 리 없으므로, 독자 여러분의 질정과 가르침을 바라 마지않는다. - P6

문명교류란 서로를 알아가는 현장이다. 인류는 실로 오랫동안 서로를 모르고 살아왔다. 13세기 마르고 뽈로는 동방에 와 직접 본 여러가지 문명 업적들을 동방견문록』이란 여행기에서 실감나게 소개했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당대는 물론, 그 후 수세기 동안 그 내용을 믿지 않았다. 뽈로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영혼의 평화를 위해 이 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회개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뽈로는 한숨을 몰아쉬며 회개는커녕 오히려 그가 본 동양의 놀라운 일들을 절반도 기술하지 못했다고 못내 아쉬워하면서 눈을 감았다.  - P15

그런가 하면 그로부터 500년이나 지난 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자부한 철학자 헤겔조차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중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자인했다. - P15

문명교류는 서로의 삶을 소통시키는 현장이기도 하다. 문명은 언제어디서 창출되든 간에, 모방성이란 속성으로 인해 널리 퍼지고 받아들여져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문명교류를 떠난 역사의 발전이나 인류의 생존은 상상할 수 없다. - P15

바늘로부터 인공위성에 이르기까지, 먹는 낟알로부터 입는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간단한 춤사위로부터 복잡한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교류의 결괴물이나 혜택이 아닌 것이 없다.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이그러했고, 오늘은 물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 P15

하고 오래 살아남지만, 그러지 못하고 옹졸하게 문을 걸어 잠근 채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온 민족은 영락없이 후진을 면치 못하고 일찍 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문명교류로부터 얻은 인간의 통절한 교훈이다. 교훈은 살려야 값지다. - P17

또 우리는 이 교류의 현장을 통해서 구체적인 환경과 역사적 맥락에서 타 문명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분명타자관‘을 몸에 익혀야 한다. - P18

인골형질학적으로 그들은 종래 일본의 원주민인 죠오몬인(文人)과는 전혀 다른 집단인 야요이인(彌生人)들이 다. 죠오몬인은 남방계인종으로서 이마가 넓고 눈이 크며 턱이 넓적하나, 야요이인은 북방계 인종으로서 얼굴이 갸름하며 눈썹이 가늘다.  - P187

그런데 이 야오이인들이 다름 아닌 기원전 3~4세기에 한반도로부터 건너가 벼농사를가르쳐준 사람들로서 농경을 중심으로 한 야요이문화를 일구어놓았다. 도이가하마 해안의 인골이 이 야요이인들인 것이다.  - P187

그들이 20도각으로 향한 서북쪽이 바로 한반도에서 초기 벼농사를 가꾼 호남 일대이며, 그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구지심(首丘之心)과  영혼을 고향으로 날려 보내려는 바람 때문이었다 - P187

이처럼 한반도와 일본열도 간의 만남은 문화의 주고받음으로부터 시작했다.  - P187

이에 아직은 무학 상태에서 허덕이던 일본사람들은 이 박사들을 가리켜 ‘문인(文讀人)‘
즉 ‘글을 읽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무척 부러워하고 우대했다. - P188

그러한 사실을 실증하는 수많은 유물 중에는 이른바 ‘칠지도(七枝刀, 七支刀)‘라는 특수한 유물이 하나 있다.  그 특수성이란 유물의 문화사적 가치보다는 정치사적 의미가 견강부회되기 때문이다.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의 이소노까미신궁 (石上神宮)에는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란 보물이  ‘판도라의 궤 같은 특수상자 속에  갇혀 있다. - P190

중국 『수서(隋書)』에 보면 ‘백제‘란 이름은 ‘백가제해(百家濟海)‘, 즉100가(家)가 바다를 건너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많은사람들이 바다를 오간 데서 나온 이름이란 뜻이다. 이것은 해상왕국백제가 바다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국제적으로 교류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 P195

무령왕릉은 왕이 붕어하기 11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으며, 사후시신은 2년간 가묘(假墓) 상태에 있다가  이 무덤에 안장하는 두벌묻기법(二次葬法)을 따랐다. - P197

부여로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북방대륙문화와 마한(馬韓)으로부터 이어지는 남방해양문화가 여기서 접목되는가 하면, 가깝게는 일본과 중국의 문화가, 멀리로는  그리스-로마문화와 서역문화가 여기서 만나기도 한다.  무령왕릉이야말로 여러 문명을 한자리에서 어울리게 한 ‘문명의 집합처‘로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198

한편 나무널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세계적으로 한 종밖에 없는 일본산 금송(金松)이라는것이 밝혀졌다.  상록침엽교목인 금송은 일본 혼슈우(本州)의 저위도 지방과 큐우슈우(九州)나 시꼬꾸(四國) 등 남부지방에 만  분포하며 대체로 해발 600~1,200m의 고지대에서 자생한다. 무령왕릉의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 데는 수령 350 년 내지 600년, 직경 130cm 이상 되는 거대한 금송들이 수십 그루 사용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동북아 해상강국으로 군림하던 공주시대 백제가 중국 남조나 일본 야마또(大和) 정권과 밀접한 외교관계와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 P200

필리그리 (filigree)기법이라고 부르는 누금기법은 원래 이집트에서 발생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처 중국과 한반도까지 전파되었다. - P201

누금이란 가는 금줄과작은 금알을 늘여 붙여서 물형을 만드는정교한 세공기법이다. - P201

이에 비해 감옥은 금테두리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옥을  박는 공예기법으로서 이른바 다채장식양식(多彩裝飾樣式)으로 알려져있는데, 기원 초 그리스, 로마등지에서  유행하다가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에 전해졌다. 이 두 가지 기법이 고구려에서는 드물지만, 백제나 신라에서는 널리 이용되어 장신구 장식기법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그런가 하면 연꽃무늬 벽돌에는 앞서 말했던 고대 유럽의 팔메트무늬도 보인다. - P201

끝으로, 무령왕릉은 고대 유리제품의 진열장을 방불케 한다는 데서, 백제문화의 교류상이나 국제성을 더욱 실감케 한다. - P201

이상의 몇 가지 대표적 유물에서 보다시피 무령왕릉은 말 그대로문명의 ‘용광로‘ 이고 ‘집합‘로서 한국문명사의 영광스러운 한 장을수놓았다. 백제는 동아시아의 요로에 위치한 해상성국답게 동서남북 방방곡곡의 문화를  진취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으며, 그러한 문화적 진취성은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 P203

문명한 민족은 강한 민족이고 문명한 나라는 대국이다. 그래서 아마 다산(茶山)은 백제가 삼국 가운데서 가장  강성한 나라였다고 추단한 것 같다. 백제의 이러한 진취성은 해상국이란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해로를 통한 국제적 교류를 활성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 P203

문화현상 가운데서 종교는 전파성이 가장 강한 분야다. 특히 불교 같은 보편종교는 자연이나 혈연 구조에 기반을 둔 자연종교와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종교적 이상까지도 추구하는 노력, 즉 전파를통한 전도를 꾸준히 진행하게 된다. 이 같은 종교의 전파는 필연적으로 초보적 전달과정인 초전(初傳)과 문화적인 변용 (metamorphosis)을  수반하는  공전(公傳)의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실현된다. - P204

초전은 주로 민간에서 잠행적으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파이며, 공전은 일정한 초전과정을 거친 후  국가나 권력의 공식적인 허용, 즉 공허(公許)에 의해  공개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전파다. 따라서 종교가 언제부터 전파되었는가 하는 시원은 응당 초전에서 찾아야 하지, 공전 시기를 그 시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 무리다. - P205

즉 순도가 고구려의 불교를 창시했다는 ‘순도(順道肇麗)‘와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불교를 개척했다는  ‘난타벽제(難陀闢濟)‘, 그리고 아도가 신라 불교의 기반을  닦았다는 ‘아도기라(阿道基羅)‘가 지금까지  한국 불교의 전래과정이나 전래시조 및 전래기원에 관한 통설로 되고 있다. - P205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때 순도가 온 지 2년 후에 전도를 위해 고구려를 찾은 아도의 전기에서 고구려 불교의 초전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3세기 중반에 중국 위나라의 아굴마(我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寧)과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 바로 아도인데, 그는 5살 때 어머니의 뜻으로 출가하였다가14살 때 어머니 나라인 고구려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게 순도가 고구려에 오기 100년 전에 아도 어머니 고도령은 이미불교를 신봉하고 있어서 어린 아들을 출가시켰다고 하니, 이것은 당시 불교가 이미 유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P207

불교 전파는 초전이건 공전이건 간에 모두 북방루트(주로육로)를 통해 진행된 것이다. 한편, 다분히 초전단계에 속하는 가야불교나 동남해안 일대에 남겨진 불교 흔적들을 추적해보면, 북방루트에 앞서 남방해로를 통해서도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북방루트인 인도→ 서역 → 중국 한반도 순의 전래과정과 그 유포내용을 ‘북래설‘로, 그에 비해 남해로를 통한 전래과정과그 유포내용을 ‘남래설‘이라고 일단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북래설‘에만 치우쳐 ‘남래설‘에는 마땅한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 P211

어느 외국 학자는 상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삼국시대의 신라는 ‘로마문화의 왕국‘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동아시아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신라에 로마문화가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든다. 사실 지금까지는 신라문화가 북방대륙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다가 남방해양문화가 가미되어 발달해왔다는 것이 국내외 학계의 통설이었다 - P212

한반도 동남부 일각에서 일찍이 꽃핀 가야문화를 포용한 신라문화에는 상층문화건 기층문화건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로마문화의 흔적이 또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흔적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신라 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아직은 비교문화직인 연구가 미흡하기 때문에 확연하지는 않지만, 소재와 형식, 기법등을 감안하면, 대체로 로마문화와 공유성을 갖고 있는 것과, 로마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그리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변용·발전시킨것 등, 3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신라문화 특유의 국제성과진취성, 독창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213

기원 전후 황금의 성산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유라시아 북방 초원지대에 찬란한 황금문화시대가 열리면서 이 유목민족들의 이동에 의해 수목형 관식을 갖춘 금관이 동서 여러 곳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식은 당대 중국이나 일본의 유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유물에서도 극히 드물다.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일례다. - P214

로마세계에서는 1세기경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모자이크무늬의상감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중국에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멀리 신라까지 전해졌으니, 글자 그대로 ‘기행(奇行)‘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 P215

원래 귀걸이와 반지, 팔찌, 목걸이 같은 장신구는 그리스-로마문화에서는 필수적이나,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누금·감옥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장식품들이 당대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았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반지에서 보다시피 모양은 대체로 로마 금반지의기본형식인 마름모꼴을 취하나,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같은 고분에서 출토된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로마나 시베리아에서 유사품이 발견되기는 했으나, 훨씬 화려하고 개성 있게 꾸며졌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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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孔枝泳
책장 둘러보다 수도원기행2권이 눈에 띄어

읽은 책은 에세이 4 권밖에 읍다.
소설은 겉장도 넘겨본적 읍다.
수도원 기행1,2,
지리산 행복학교, 시인의 밥상


꽁지작가
1963.1.31. 서울출생
서울여중, 중앙여고, 연세대 영문과

공지영의 책은 몇 권 읽지도 안했고 가지고 있는 것도 몇 권 없다.
에세이집 5권 소설 1권
소설1권 봉순이언니, 애들 독서머시기 땜에 구입
공지영의 소설이 유명하고 잘 나간게 많지만 난 진짜 한권도 읽지 않았다.
그 유명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영화조차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볼, 시간이 없을꺼 같다

곡부 공씨 曲阜孔氏

역사적으로 유명한 분은 모르겠다. 네이버 찾아봐도 눈에 띄는 분은 찾을수 없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가 8명이라니 그럴수밖에 없다.
현대적으로 공유, 공효진, 공지영, 공선옥, 공병호...

세거지 부산 기장군

(나무위키)
공자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한족계이다. 흔히들 ˝공자님 공씨˝라 부르는 한자가 이것이다.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하며, 곡부 등 12개의 본관이 있었고, 그 중 창원(昌原)을 대본으로 하였으나 1794년 정조의 명에 따라 곡부로 일원화하였다. 인구는 2015년 기준 91,869명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2000년 기준 2,680호(戶)에 8,939명[남 4,628, 여 4,311]이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다고 되어있는데 5 년만에 인구수가 그 10배가 되었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가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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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억하고 있다! 그날 저녁에도 내기 경주를 하러 가고 있었다.
스테파니는 다른 사람들이 차에 타지 못하도록 일찍 출발하자고 그를졸랐다. 외르크의 아버지인 루츠 리히터는 전기기술자로 70, 80년대에는 군 비행장에서 일했었다! 토비아스는 어렸을 때 다른 애들과 함께 외르크의 아버지를 따라가 황량한 비행장에서 놀았던 걸 아직도기억하고 있다. 커서는 몰래 들어가 자동차 내기 경주와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라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 P205

"나 백설공주를 지켜주지 못했어." 그의 쉰 목소리는 긴장한 탓에불안정했다. "하지만 너는 내가 지킬 거야."
그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뭔가 위협적인 존재라도 있는 것처럼 자꾸 숲길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멜리는 오싹한전율을 느꼈다. 순간 머릿속의 퍼즐 조각들이 단번에 하나로 맞아떨어졌다.
"네가 봤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본거지?" 아멜리가 낮은목소리로 말했다. - P206

나디야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토비아스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 대고 속삭였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어차피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 P210

그가 코지마와 그녀의 동행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여종업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지금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채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코지마가 다른 남자와 앉아 있다. 그녀가 느낌표 세 개만큼이나 만나고 싶어했던 바로 그 남자다. 보덴슈타인은 숨 쉬는 데 집중하려 애썼다. 당장 그 남자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낮짝을 후려칠 수만 있다면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격한 자기 절제와 정중한 예절을 교육받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서 있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면의 관찰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두 남녀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파악하느라 바빴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깊은 눈빛을 주고받는등 드러내놓고 친근감을 표시했다. - P289

아멜리에게 절망이 엄습했다. 마구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티스를깨우고 싶지 않았다. 티스의 머리 무게 때문에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종잇장 같은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저 소리!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콸콸콸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기서 나가면 다시는 물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전에는반이나 남은 콜라를 김이 빠졌다며 쏟아 버리곤 했다. 지금 여기에김빠진 콜라 한 모금만 있다면! - P402

그는 과연 자신이 지금 얼마나 얇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지 알까?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그의 등 뒤에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레고어 라우터바흐가 저 살고 보자고 발설한 거액의 뇌물 수수를 비롯해 셀 수없이 많은 죄목이 그를 얽어매고 있었다. 테를린덴은 아직이 사실을 모르지만, 그가 수년간 고수해온 침묵과 은폐의 정치가 어떤 심각한 결과를 낳았는지 차츰 깨달아가고 있을 것이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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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 통하는 녹슨 철제 계단은 폭이 좁고 경사가 급했다. 그는계단 끝까지 내려가 전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었다. 이윽고 희끄무레한 25와트짜리 백열등 불빛이 손바닥만 한복도를 가득 채웠다.
문고리에 살짝 힘을 주자 육중한 철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소리에 그녀가 깰세라 부지런히 문에 기름을 쳐둔 덕분이다. 달콤한 꽃향기가 따뜻한 공기에 섞여 얼굴을 간지럽혔다. - P7

그의 취향은 아니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기때문에 항상 틀어놓는다. 마음에 안 들어도 잠시만 참자고 생각하는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말이 없다. 그녀는 말을 하는 법이 없다.질문에 답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 P7

"이제 가봐야 해." 그가 아쉬운 듯 말했다. "할 일이 많거든."
그는 화병에서 시든 백합을 빼 들고 나서 그 옆에 놓인 병에 콜라가가득 있는지 확인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 알았지?" - P8

그는 이따금 그녀의 미소가 못 견디게 그립다. 그럴 때면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론 그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그래야만 그녀의 미소를다시 볼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8

또 보자는 인사는 생략했다. 출소하는 사람은 또 보자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지난 10년간 얼마나 자주 이 순간을 상상했던가. 그러나 교도소를 나서자마자 그는 깨달았다. 그 상상은 언제나 자유 속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에 끝났었음을.………. 막상 자유의 몸이 되자막막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겁이 더럭 났다. - P9

하르트무트 자토리우스의 야윈 얼굴 위로 한 줄기 기쁨의 빛이 스쳤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당당하고 활기 넘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저 옛 모습의 잔영일 뿐이었다. 한때 풍성했던 잿빛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그나마 숱이 확 줄어 있었다. 구부정해진 어깨는 그가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짐작게 했다. - P17

그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집, 이 레스토랑, 이 마을, 아무 죄도없는 부모님을 그토록 괴롭힌 이 빌어먹을 마을에 남을 것이다. - P19

오후 9시 30분, 호프하임 지방경찰청 강력계 수사반장 올리버 폰보덴슈타인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맞아준 유일한 생명체는 집에서 기르는 개였다. 개는 반갑다기보다는 미안한 기색이었다.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게 분명했다. 뭘 잘못했는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냄새로 바로 알았다. - P27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 처음에는 경찰이, 그다음에는변호사가, 그다음에는 검사와 판사가 말해주었다.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단서도 있고 증인도 있었다. 자신의 방, 옷, 자동차에서 혈흔이 발견됐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그 2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블랙홀처럼 뻥 뚫린구멍일 뿐이었다. - P39

"난 죗값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겁니다."
토비아스가 사람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은당황해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들이 좋든 싫든 그건 내 알바 아닙니다." - P48

반면 그의 아버지는 여든 노인네처럼 무기력하고 지쳐 보였다. 집과 농장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삶의 폐허 뒤에 숨어 살고 있었다. 모든 살인자의 부모가 힘든 삶을 살겠지만, 알텐하인처럼 작은 마을에서 매 순간을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버텨야 했던 토비아스의 부모는 얼마나더 힘들었을까. 토비아스의 어머니가 이혼을 선택하게 된 것도 결국은 이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남편을 홀로 두고 떠났다.
분명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새 출발은 성공적이지못했다. 그녀의 아파트를 지배하던 온기 없는 공허가 그 증거다. - P75

길 왼편으로 마리아 케텔스 할머니의 작은 집이 보였다. 마리아 할머니는 사건 당일 저녁 늦게 스테파니를 봤다고 증언함으로써 유일하게 토비아스에게 유리한 증인이 될 뻔한 사람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녀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 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도 여든이 넘은 나이였으니 지금쯤은 아마 교회 묘지로 이사를 했을 것이다. - P78

이 동네에서는 좀 오래 걷는다 싶으면 먼 친척 하나쯤은 만나게돼 있고, 누구나가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개인지, 누가 누구와 어떤관계인지 훤히 다 알았다. 마을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나돌았고 사람들은 이웃의 실패, 불운, 지병에 대해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알텐하인은 좁은 분지지형때문에 개발의 바람이 비껴간 지역이다. 이주해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100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대를이으며 그대로 살고 있다. - P78

알텐하인 사람들은 그를 원치 않는다. 이 사실에는 어떤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아버지를 혼자 둔단 말인가! 그는 부모님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다.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간 아들을한시도 저버린 적이 없는 부모다. - P79

토비아스는 교회 건물을 돌아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오른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을 감지하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검은 머리의 여학생이 기둥 옆 가로등 아래 나무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피우고 있었다. - P79

갑자기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스테파니 슈네베르거였다! - P79

뭘 잘못 먹었길래 냉소적인 전과자를 식사에 초대한  걸까? 명예, 아름다움, 부를 모두 가진그녀를 기다리는 돈 많고 유머러스한 멋진 남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말이다. - P94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멜리는 혼자서 상상의나래를폈다. "토비아스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했을까? 왜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한 걸까? 말을 했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감옥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 P107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흑단처럼 검어라... - P113

"야, 그거 기억나? 내 동생이 아버지 주머니에서 열쇠 훔쳐가지고비행기 격납고에서 내기 경주했던 거? 진짜 죽여줬지!"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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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서울)역에서 경원선을 타고 철원에서 하차해 금강산전철을 갈아타면내금강에 갈 수 있습니다. 매년 5월부터 10월까지는 직접 연결해주는 기차가 따로 있고, 일요일·공휴일 전날 밤 10시에 떠나는이등·삼둥 침대차는 새벽 6시에 내금강역에 도착합니다. 역에서 장안사까지는 걸어서 20분,승합버스로 5분 걸립니다. - P237

가마 타고 금강산 구경 가는 양반들
단발령에서는 40리 밖의 금강산 1만2천 봉우리가 서릿발처럼 하얗게환상적으로 피어올라 사람들은 이 고갯마루에 오르는 순간 너나없이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 돼 거기서 살고 싶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곤 했단다. 그래서 단발령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겸재 정선 이래로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일러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이라는 것이 하나의 화재(畵材)가 되었다. - P238

"금강산은 돌이 만가지로 재주 부리고 물이 천가지로 재롱 부리며만든 자연의 조화입니다. 같은 금강산이라도 안팎이 달라시, 내금강은 은은하고 얌전하고 밋밋하고 우아하고 수리하여 안 내(內)자를 쓰고, 외금강은 웅장하고 기발하고 기세차고 당당하고 씩씩하여 바깥 외(外) 자를 씁니다. - P242

리정남 선생과의 대화 속에서 항시 느끼게 되는 것은 내가 대강을 물으면 그는 교과서적 지식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느낌과 기분이중요하다면 그는 사실과 지식이 더 중요했다. 이것이 우리 둘의 성격차이인지 남과 북 ‘학자‘의 성향차이인지는 아직 단정짓지 못하겠지만 남과 북 지식인상을 말할 때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 P246

나는 하나의 전통이 민속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될 때 그것은 이미 죽은전통이 되고 만다고 생각한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옹기종기 어우러져 다정다감한 정취를 이루어낸 우리의 농가 표정은 이제 남이고 북이고 민속촌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이 되고 말았으니 그런 환경, 그런 건축과 함께나누던 정서는 이제 박제화된 민속으로 사라져버린 셈이다. 표정도 운치도 없이 늘어선 탐거리 북한 농가에서 그래도 인간적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집집마다 성글게 엮어올린 울타리로 완두콩이 푸르게 뻗어올라주황빛 예쁜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 P249

그리하여 졸옹(翁) 최해(崔瀣, 1287~1340)는  금강산으로 떠나는 어느 스님에게 드리는 글에서 금강산에 유람 가는 사람들 때문에 이곳 백성들이 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며, 자신은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금강산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가는 사람들을 말리고 싶다며 그곳 주민들이한탄하는 소리를 이렇게 전했다.
"저 산은 어찌하여 다른 데 있지 않고 여기에 있어 우리를 이렇게고생시키는가!" - P230

세상사엔 언제나 이런 올바른 생각과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삶의 용기와 희망을 말하게 된다. 그런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자신의 소신을 굽힘없이 펼 수 있고 또 그런 목소리가 한 시대의 기류를 형성한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더이상 외롭지 않고 세상의 흐름이 그쪽으로 바뀌게되어 있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진보적 지성의 가치라 할 것인데, 고려말이 되면 졸옹 최해나 근재 안축 같은 이의 소견은 넓어지고 마침내 조선왕조의 등장과 함께 그런 병폐는 사라지게 된다. - P251

그리고 세상사는 참으로 묘하고 묘해 그렇게 큰소리치던 불교의 세상이 끝나니, 금강산 유람을 위한 고관. 양반들의 행차에 가마 메는 고역은중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도 업(業)이라고 할 것인가. - P251

잎새마다 태고의 기운을 드리운 거무충충한 전나무들이 짓궂게 가리고 싸건마는 그대로 비집고 나오는 금강의 향기와 빛깔은 걸음걸음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 P254

못 보던 산의 모습 처음 보는 돌의 모습, 다른 데 없는 계곡소리, 여기서만 듣는 냇물소리 금강산의 특유라 할 ‘미(美)의 떼거리‘가 부쩍부쩍 사람에게로 달려들 적에는 도리어 어떻게 주체해야 옳을지를모릅니다. (일부 현대문으로 개고) - P254

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 P262

남효온이 전하는 이 전설은 당시 형식에 치우쳐 사치를 일삼은 교종(敎宗)의 행태에 대한 비판과 선종(禪宗)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전설은 울소의 생김새나 삼불암과는 결합되어있지 않다. 훗날 나옹화상이 삼불암을 조성하면서 이 울소의 전설은 삼불암과 연계하여 재창조되었다. - P266

부처는 석가. 아미타・미륵으로 현재.과거 · 미래의 구원을 상징하고,양 보살은 중생의 제도를, 60불은  법계의 장엄함을 나타낸다 - P266

이 전설 또한 불교의 물질적·형식적 숭배보다 마음과 도덕 수양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 P268

장안사에 원나라 기황후가 후원한 것이나 김동사의 사치스러움은 바로 이 시절 불교의 한 병폐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 P269

이때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고 나온 이가 바로 나옹화상이었다. 나옹은 20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무상을 느끼고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燕京, 오늘날의 뻬이징)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의 가르침을 받고,  원나라 순제로부터 금란가사받을 정도로 지극한 예우를 받은 큰 스님를이었다. - P269

1358년에 귀국한 나옹은 여러 사찰을 순력할 때 금강산 장안사에 들어와 한때를 보냈는데 그때의 전설이 이 삼불암에 서려 있다. 1371년 나옹은 왕사(王師)에  봉해져 불교계를 이끌면서 당나라의 고승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염불은 곧 참선"이라는 유명한 명제를 내놓게 되었다. - P271

나옹의 이런 노력은 당시 구산선문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려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1301~82)의  노력과 함께 고려말 불교를 지탱한 양대지주로 이후 조선불교와 현대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나옹 같은 고승도 어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삼불암의 조각은 당시로서는 김동을 물리치는 명작이라는 전설까지 낳았지만 그 실체를 보면 여지없는 고려말의 퇴락한 시대양식을 반영하고있다. - P271

장안사와 표훈사의 갈등
삼불암의 전설은 물질적·형식적 숭배보다 마음과 도덕의 수양으로서의 불교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의 행간을 읽으면 장안사와 표훈사의 세력다툼이 심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 P272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누나.
지금 꿈 이야기 하는 두 사람
그 역시 꿈속의 사람인 줄 뉘 알리오. - P280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 P280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집 같고
고금의 호걸들은 하루살이 같네.
청허한 베갯머리에 흐르는 달빛
끝없는 솔바람만 한가롭구나. - P280

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鷄
一窓明月清虛枕
無限松風韻不齊 - P280

소나무 소나무 잣나무 잣나무 바위 바위를 돌아서니
산산물물 가는 곳곳마다 신기하구나.
松松栢栢巖巖廻山山水水處處三 - P284

표훈사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은 판도방이었다. 절집의 본전은 각각 모신 부처님에 따라 대웅전(석가모니) · 극락전(아미타불) · 대적광전(비로자나불)등으로 부르고, 부속건물은 명부전(지장보살) · 관음전(관세음보살) · 산신각(산신님) 등으로 부르지만, 누마루는 만세루, 살림채는 심검당(尋劒堂), 스님방은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 P284

그런 중 손님이 묵어가는 방을 선불장(選佛場) 또는  판도방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막바로 내거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운치있게 청류헌(淸流軒). 침계루(林溪樓) 하며 그 풍광에 걸맞은 당호를 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방‘이라고 써놓은 것은 요즘 말로 치면 ‘객실(客室)‘이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는 하도  찾아와 묵어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거두절미하고 ‘여관방‘이라고 써놓은 셈인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크게
신경질적으로 달아놓았다. 이 판도방 현판 하나로 나는 금강산 유람객에게 있어서 표훈사의 위치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다. - P284

그렇구나! 이제 알겠다! 예부터 내금강에 들어오다보면 단발령에서머리 깎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고, 또 저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저절로 큰절을 두어번 하게 되어 배재령(拜再嶺)이라고 했단다. - P287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임금이 되고서 금강산에  왔을 때 저 고갯마루에 당도하자 멀리서 법기보살(法起菩薩, 담무갈이라고도 부름)이 그의 권속1만 2천을  거느리고 나타나 광채를 방사하기에 황급히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전한다. - P287

그때 절한 지점을 배점(拜岾, 배재령)이라고 했고,  법기보살이 빛을 발한 곳을 방광대라 이름짓고는 거기에 정양사를 지었다. 그리고 방광대너머 보살 닮은 봉우리를 법기봉(法起峰)이라 이름짓고는 표훈사  반야보전엔 법기보살을 모셔놓되 동북쪽법기봉을 향하게 했다는 것이다. - P287

금강산 한복판에 정양사가 있고 절 안에헐성루(歇惺樓)가 있다. 가장 요긴한 곳에 위치하여 그 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참모습과 참정기를 볼 수 있다. 마치 구슬굴 속에 앉은 듯 맑은 기운이 상쾌하여 사람 뱃속 티끌까지 어느 틈에 씻어버렸는지 깨닫지 못한다. - P292

겸재의 강력한 지지자로 당대의 감식안이었던 이하의 말을 빌리면 "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전신(傳神)수법에  가까웠다"며 초상화를 그릴 때겉모습만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 리얼리티의 정신까지 그리는 자세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옛사람들은 이형사신(以形寫神), 즉 ‘형상에 기초해 정신을 그린다‘고 했다. - P296

나의 벗 정선은
주머니에 붓이 없어
때때로 그림 흥이 일어나면
내 손의 것을 빼앗지.
금강산에 갔다온 후
휘둘러 그리는 것 더욱 방자해. - P296

吾友鄭元伯
囊中無畫筆
時時畫興發
就我手中奪
自入金剛來
揮洒太放恣 - P296

우리가 막연히 생각할 때는 진경산수란 직접 사생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정작 겸재의 진경산수가 보여준 미학은 이처럼 사생을 뛰어넘은 고차원의 형상미였던 것이다.
지금 금강산 처녀들이 겸재의 금강전도를 보면서 "맞긴 맞는데 아닌데요"라고 말한 것은 미술사 용어를 쓰지 못했을 뿐이지, 이형사신과이형득사의 미학을 증언한 셈이었다. - P297

그렇다면 내가 정양사에서 찾고자 했던 물음의 정답을 바로 찾은 셈이었다. 나는 정양사에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내단장에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능파루에서 일어나면서 나는 그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금강산 처녀들은 내가 맘껏 쥘 수 있도록 손을 반듯이 길게 펴주었고, 여군은 그쪽에서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
2001, 1. - P297

이상수의 동행산수기
만폭동 금강대 너럭바위에서 나는 금강산 가면 꼭 꺼내 읽겠다고 적어온어당 이상수의 「동행산수기」의 만폭동부분을 펴들었다.

물은 본래 그러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 모든 변화는 다 돌을 만난 때문이다. 돌이 가로세로로 뽐내면서 물한테 굳이 맞설 적마다 곧 중대한 정세를 조성하게 되어 서로 힘으로 싸워지지 않으려고하니 드디어 백가지 기변을 일으키며 가는 것이다. 급히 떨어지는 데를 만나면 노하여 폭포가 되고, 우묵한 데에 가서는 깊고 넓게 고여말갛게 되어 쉬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겨우 국면을 수습하고 나면앞으로 또다시 새 싸움이 벌어져서 시내는 문득 털이 꺼칠해지고 잎이 돋쳐 성난 표정을 짓는다. 이런 때 계곡 양옆으로 벌려선 산봉우리들은 몸을 솟구쳐 고개를 내밀고서 그 승부를 내려다보고 있다. - P303

감격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겐 만폭동 같은 아름다운 동천(洞天)이 있고, 양봉래의 ‘봉래풍악 원화동천‘ 글씨,  겸재의 만폭동 그림, 어당의「동행산수기」 문장처럼 그 아름다움을 인문정신으로 구현한 빼어난 문학과 예술이 있다.
그것이 어디 보통 문화유산이더냐! - P307

천개의 바위는 아름다움을 다투고
만개의 골짜기는 흐름을 경쟁하네.

千巖競秀
萬壑爭流 - P311

나는 청산이 좋아서 들어가는데
녹수야 너는 어이해서 밖으로 나오느냐.

我向靑山去
綠水爾何來 - P311

숲에는 안정된 가지가 없고
내에는 평온한 물결이 없네.

林無靜枝
川無停波 - P311

뭇 봉우리들은 조용히 말하고자 하는데
정양사 누대에선 종이 울리네.

衆峰悄慾語
鐘動正陽樓 - P312

형법 가운데는 산림에 숨어들어 나무를 베고 돌을 깨뜨리는 것에다 일정한 형벌을 가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속된 선비가 명산을 더럽힘에도 불구하고 법이 이를 금하지 않음은 웬일인가. 청산(靑山) 백석이 무슨 죄가  있다고 까닭없이 그 얼굴에 자자(刺字)를 가하고 그  살을  째놓는가. 아! 진실로 어질지 못한 일이로구나!
- P315

그리고 이상수는 하늘에 대고 왕계중(重)의 영원기(記)에 나오는 말을 외쳤다.

폐하께 원하옵건대 신(臣)으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천하를 돌게 하시되 신에게 먹 만 섬을 내리시고 또 달 같은 도끼를 더 주시와 명승지를 지나다가 쓸 만한 시문만 남겨두고 나머지 제명은 모조리 도끼로 패고 먹으로 뭉개버린 후 찬 샘물로 3일간씩 씻어 산천의 치욕을온통 풀어주게 하옵소서. - P315

이상수의 이 발원은 오늘의 나에게도 그대로 통하니 나는 금강산 산신령께 이렇게 빌고 싶다.

통일이 되거든 산신령께선 내게 1만 톤의 컴프레서와 1억 톤의 접착돌가루를 내리셔 저 못된 글발과제명을 땜빵하여 산천을 성형수술케 해주시옵소서. - P315

내가 이 불상에 대해 본 기록으로는 오직 육당 최남선이 『금강예찬』을쓰면서 "전문학자들의 고찰을 청하고 싶다"며 "이 파안일소(破顔一笑)할것 같은  입초리에선 비지(悲智,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와 도를  깨닫고자 하는 지혜)가 뚝뚝 떨어질 듯하다"는 격찬과 함께 혹시 비로자나불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본 것이 전부다. - P345

나는 여기서 이 마애불을 전문적 학구적으로 더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불상을 왜 묘길상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그 연원을 확실히해둘필요를 느끼고 있다. 이 불상은 결코 묘길상일 수가 없다. 묘길상이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별칭인데 이 마애불은 보살상이 아니라 명백히 부처상인 것이다. - P346

식산 이만부는 금강산에서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은 어떤 비유로도 다 묘사할 수 없는 산이다. 차라리 내 몸에금강산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만 못하니 그 산의 편안하고 중후함을 취하여 인(仁)의 표본으로 삼고, 그 유창하고 통달함을 취하여 지知)의 표본으로 삼고, 그 험준하고 단절됨이 명쾌하고 시원한 점을취하여 의의 표본으로 삼고, 그 존엄하고도 태연함을 취하여 덕(德)의 표본으로 삼고, 그 어떤 사물, 그 어떤 정경도 없는 곳이 없음을 취하여 도(道)의 표본으로 삼고, 그 빛나고 찬란함을 취하여 문장(文章)의 표본으로 삼는다면  비로소 금강산을 대하는 도리를 얻게 될것이다. - P350

이 이상의 금강예찬이 있을 수 있을까.

아! 위대하여라 금강산이여.
아! 자랑스러워라금강산이여.
나는 금강을 다시 예찬하노라.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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