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 통하는 녹슨 철제 계단은 폭이 좁고 경사가 급했다. 그는계단 끝까지 내려가 전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었다. 이윽고 희끄무레한 25와트짜리 백열등 불빛이 손바닥만 한복도를 가득 채웠다.
문고리에 살짝 힘을 주자 육중한 철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소리에 그녀가 깰세라 부지런히 문에 기름을 쳐둔 덕분이다. 달콤한 꽃향기가 따뜻한 공기에 섞여 얼굴을 간지럽혔다. - P7

그의 취향은 아니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기때문에 항상 틀어놓는다. 마음에 안 들어도 잠시만 참자고 생각하는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말이 없다. 그녀는 말을 하는 법이 없다.질문에 답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 P7

"이제 가봐야 해." 그가 아쉬운 듯 말했다. "할 일이 많거든."
그는 화병에서 시든 백합을 빼 들고 나서 그 옆에 놓인 병에 콜라가가득 있는지 확인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말해, 알았지?" - P8

그는 이따금 그녀의 미소가 못 견디게 그립다. 그럴 때면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론 그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그래야만 그녀의 미소를다시 볼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8

또 보자는 인사는 생략했다. 출소하는 사람은 또 보자는 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지난 10년간 얼마나 자주 이 순간을 상상했던가. 그러나 교도소를 나서자마자 그는 깨달았다. 그 상상은 언제나 자유 속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에 끝났었음을.………. 막상 자유의 몸이 되자막막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겁이 더럭 났다. - P9

하르트무트 자토리우스의 야윈 얼굴 위로 한 줄기 기쁨의 빛이 스쳤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당당하고 활기 넘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저 옛 모습의 잔영일 뿐이었다. 한때 풍성했던 잿빛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그나마 숱이 확 줄어 있었다. 구부정해진 어깨는 그가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짐작게 했다. - P17

그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집, 이 레스토랑, 이 마을, 아무 죄도없는 부모님을 그토록 괴롭힌 이 빌어먹을 마을에 남을 것이다. - P19

오후 9시 30분, 호프하임 지방경찰청 강력계 수사반장 올리버 폰보덴슈타인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를 맞아준 유일한 생명체는 집에서 기르는 개였다. 개는 반갑다기보다는 미안한 기색이었다.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게 분명했다. 뭘 잘못했는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냄새로 바로 알았다. - P27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 처음에는 경찰이, 그다음에는변호사가, 그다음에는 검사와 판사가 말해주었다.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단서도 있고 증인도 있었다. 자신의 방, 옷, 자동차에서 혈흔이 발견됐다.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 그 2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블랙홀처럼 뻥 뚫린구멍일 뿐이었다. - P39

"난 죗값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겁니다."
토비아스가 사람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은당황해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들이 좋든 싫든 그건 내 알바 아닙니다." - P48

반면 그의 아버지는 여든 노인네처럼 무기력하고 지쳐 보였다. 집과 농장 상태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삶의 폐허 뒤에 숨어 살고 있었다. 모든 살인자의 부모가 힘든 삶을 살겠지만, 알텐하인처럼 작은 마을에서 매 순간을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버텨야 했던 토비아스의 부모는 얼마나더 힘들었을까. 토비아스의 어머니가 이혼을 선택하게 된 것도 결국은 이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남편을 홀로 두고 떠났다.
분명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새 출발은 성공적이지못했다. 그녀의 아파트를 지배하던 온기 없는 공허가 그 증거다. - P75

길 왼편으로 마리아 케텔스 할머니의 작은 집이 보였다. 마리아 할머니는 사건 당일 저녁 늦게 스테파니를 봤다고 증언함으로써 유일하게 토비아스에게 유리한 증인이 될 뻔한 사람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녀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 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도 여든이 넘은 나이였으니 지금쯤은 아마 교회 묘지로 이사를 했을 것이다. - P78

이 동네에서는 좀 오래 걷는다 싶으면 먼 친척 하나쯤은 만나게돼 있고, 누구나가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개인지, 누가 누구와 어떤관계인지 훤히 다 알았다. 마을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나돌았고 사람들은 이웃의 실패, 불운, 지병에 대해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알텐하인은 좁은 분지지형때문에 개발의 바람이 비껴간 지역이다. 이주해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100년 전에 살던 사람들이 대를이으며 그대로 살고 있다. - P78

알텐하인 사람들은 그를 원치 않는다. 이 사실에는 어떤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어떻게 아버지를 혼자 둔단 말인가! 그는 부모님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다.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간 아들을한시도 저버린 적이 없는 부모다. - P79

토비아스는 교회 건물을 돌아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오른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을 감지하고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검은 머리의 여학생이 기둥 옆 가로등 아래 나무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피우고 있었다. - P79

갑자기 그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스테파니 슈네베르거였다! - P79

뭘 잘못 먹었길래 냉소적인 전과자를 식사에 초대한  걸까? 명예, 아름다움, 부를 모두 가진그녀를 기다리는 돈 많고 유머러스한 멋진 남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말이다. - P94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멜리는 혼자서 상상의나래를폈다. "토비아스는 그 아이들을 어떻게 했을까? 왜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한 걸까? 말을 했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감옥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 P107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흑단처럼 검어라... - P113

"야, 그거 기억나? 내 동생이 아버지 주머니에서 열쇠 훔쳐가지고비행기 격납고에서 내기 경주했던 거? 진짜 죽여줬지!"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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