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p.
밝은 달 하얗게 빛나는 밤
귀뚜라미는 동쪽 벽에서 운다.
옥형성은 초겨울을 가리키는데
뭇 별들 어찌 저리도 반짝이는가.
흰 이슬은 들판의 풀을 적시고
시절은 어느덧 다시 바뀌었네.
가을 매미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우는데
제비는 어디로 가는가.
옛날 나와 함께 하던 벗들은
드높이 날아올라 날개를 떨치면서도,
손잡고 지내던 좋은 정리 생각지 않고
남겨진 발자취처럼 나를 버렸네.
남쪽엔 기성 북쪽엔 두성 있지만
견우성도 멍에를 메지 않는구나.
반석 같은 튼튼한 우정 진실로 없나니
헛된 명성 또 다시 무슨 이익 있으랴.

明月皎夜光 促織鳴東壁
玉衡指孟冬 眾星何歷歷
白露霑野草 時節忽復易
秋蟬鳴樹間 玄鳥逝安適
昔我同門友 高舉振六翮
不念携手好 棄我如遺跡
南箕北有斗 牽牛不負軛
良無盤石固 虛名復何益

작자불명,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중에서 <문선>


183p.
낙타털옷 사이로 이슬 스미며 새벽 찬 기운 살짝 느끼는데
비껴 있는 별들은 너무도 밝아라.
고요한 작은 다리 꿈속에서 지나는데
깊숙한 저쪽에서 가을 벌레가 운다.

露侵駝褐曉寒輕 星斗蘭干分外明
寂嘆小橋和夢過 稻田深處草蟲鳴
진여의陳與義, <이른 아침에 길을 가며早行>

明月皎夜光 促織鳴東壁
玉衡指孟冬 眾星何歷歷
白露霑野草 時節忽復易
秋蟬鳴樹間 玄鳥逝安適
昔我同門友 高舉振六翮
不念携手好 棄我如遺跡
南箕北有斗 牽牛不負軛
良無盤石固 虛名復何益

작자불명,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 중에서 <문선>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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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白露
들판 가득
흰 이슬 내리고 - P178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더니, 바람 한번 설핏 불자 가을이 발치에서 맴돈다. 입추 지나 저서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백로 지나 추석을 보냈다. 농경사회의 절기가 요즘 같은 새로운 유목의 시대에 가당키나 하겠는가마는, 때가 되면 절기에 눈길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오래도록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는 선조의 숨결때문일 것이다. - P178

밤 열시, 강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뛰는 발걸음이 가뿐하다.
한참을 뛰고 난 뒤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초사흘 밤 눈썹달이 어두운 산허리 저편으로 빛을 흘린다. 밤 날씨는 제법 차가운데,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길섶에 달맞이꽃이 한 송이 피어 있다. 여름밤을 뛰다보면 온밤을 화사하게 수놓던 달맞이꽃이다. - P179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별은 보이지 않는다. 밤안개가 내리는지우둑한 하늘 저편에서 흰빛이 몰려온다. 아니면 밤이 깊어지자 흰이슬이 하늘 가득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P180

오행五行으로 보면 가을은 금金에 속한다. 모든 기운을 죽이는숙살지기자신의 근간으로 삼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는를형벌을 관장하는 기관과 연결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수많은 관계들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것들을 매정하게가지치기를 해서 나의 근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절, 그게 가을이다. 가을이면 마음이 왠지 모르게 엄숙해지기도 하고 무겁게가라앉기도 하는 건 아마도 이런 탓일 게다. - P181

계절의 변화를 짐작조차 못하다가 뒤늦게나마 깨닫는 건 오로지자연 속에서 뭔가를 하는 덕분이다. 작은 풀잎의 색깔이 변화하는걸 보면서도 우주의 변화를 짐작하는 것은, 아마도 내 몸속에 여전히 천지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이라 풀벌레 소리가 잦아든 줄 알았는데, 발길 멈추고 희뿌옇게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어디선가 가늘고 희미하게 풀벌레가 운다. - P182

낙타털옷 사이로 이슬 스미며 새벽 찬 기운 살짝 느끼는데
비껴 있는 별들은 너무도 밝아라.
고요한 작은 다리 꿈속에서 지나는데
깊숙한 저쪽에서 가을 벌레가 운다.

露侵駝褐曉寒輕 星斗蘭干分外明
寂嘆小橋和夢過 稻田深處草蟲鳴
진여의陳與義, <이른 아침에 길을 가며早行> - P183

옛 어른들은 이른 저녁에 잠이 들어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보통새벽 네 시나 다섯 시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에 낮은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 새벽별을 보면서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네들은 언제나 별자리를 보고 천기를 짐작했다. 요즘은 밤늦도록 일을하다가 새벽이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새벽 별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어쩌다 새벽 별을 보게 되면 그 맑고 천연한 모습은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 P183

한밤중이 되어 뜰을 거닐어도 좋은 시절이 바로 백로 무렵이다.늦더위가 기승을 부린다지만 밤이 되면 제법 선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책을 읽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쯤이면 뜨락을 거닌다. 맑은 하늘에 별이 무수히 빛날 때도 있지만, 더러는 하늘 가득 흰 이슬이 내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고개를 쳐들고 계절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인다. 달빛이라도 밝을 양이면 더더욱 좋다. - P184

책을 덮고 뜰로 내려오니
달빛은 물처럼 넘실거린다.
가을 기운 서늘하게 옷깃에 가득하고
소나무 그늘 빽빽하게 땅을 덮었다.
온갖 벌레는 밤이 가기를 재촉하고
기러기 한마리에 추운 계절 시작될 것을 안다.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 번뇌 잊었으니
이 아름다운 맛을 뉘와 함께 할거나 - P184

捲卷下中庭 月色浩如水
秋氣凉滿襟 松陰密鋪地
百蟲催夜去 一雁領寒起
靜念忘世粉 誰同此佳味
문동文侗, <달빛 아래를 거닐며步月> - P185

무더위로 떠들썩했던 여름은 처서를 지나 백로에 이르면 거의 사라진다. 이제는 뭔가 고요한 생활로 진정되는 듯하다. 차분한 자세로 책을 읽고, 순선한 마음으로 달빛 아래를 거닐며, 세상의 온갖 명리와 번뇌를 잊는 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이상적 삶이다. 그럴 때 느끼는 ‘아름다운 맛佳佳‘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 P185

무더위에 처져 있던 온갖 물상들이 겨우 몸을 세우자 서늘한 가을 기운이 한해의 살림살이를 정리하라고 재촉한다. 이따금씩이라도 집 주변을 거닐어보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지 감동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그 작은 것들에 감동하는 사이, 우리는 나이를 먹고 머리는 서서히 흰빛으로 변해간다. 흰빛 이슬이 어느새 달빛과 함께 온 천지를 슬며시 적셔놓듯이.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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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6.
오늘부터 필사 시작

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
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

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
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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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9-16 1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대장정님의 필사를 응원합니다. ^^

대장정 2023-09-16 13:5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coolcat329 2023-09-16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대장정님 필사가 매우 고급진 느낌입니다. 저런 좋은 만년필로 쓰면 정자세로 글자 하나하나에 진심을 담아 쓸 거 같아요. 멋지십니다!

대장정 2023-09-16 17:41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 감사합니다.
 

둘 이상의 세대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분업의 일환으로 이타 행동을 하는 동물을 진사회성眞社會性 (eusociality) 동물이라고 한다. 개미, 꿀벌, 말벌 같은  ‘막시류‘ 곤충과 호모 사피엔스가 여기에 들어간다. - P35

"너 자신을 알라." 인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되었을 이 문장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아폴론 신전에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른 철학자가먼저 말했다고도 한다. 누구 말이든 어떤가.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되뇌어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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