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나의 어머니! 나는 지금까지도 눈을 감을 때마다 일곱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또렷이 떠올릴 수 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은 남자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도 어머니만큼 아름다운 부인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손도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을 정도로 작았는데 그 작은 손으로 어머니는 항상 남에게 부탁받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아아, 나는 이제서야 어머니가 발작한 원인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가엾은 어머니! 그처럼 무서운 과거를 지닌 어머니에게는 때때로 그렇게 무서운 악마가 덮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무렵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양아버지에게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지금에야 생각하니 후에 의견충돌이 있어 양아버지 집에서 뛰쳐나오고 결국 화해의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뭐라 해도 피를 나누지 않은 부모자식 사이에는 결여된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보기에는 별로 다르지 않은 요리지만 먹어보면 중요한 조미료가 빠져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게다가 새어머니가 계속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라도 왠지 나를 서먹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을 터였다.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상업학교에 갔던 해에 나는 양아버지와 큰 충돌을 일으키고 집을 뛰쳐나와 친구 집에 들어갔다.

나는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금니에 뭔가 낀 듯한, 먹이를 눈앞에 두고 기다려야 하는 개처럼 묘하게 답답한 기분이 드는 동안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갔지만 변호사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러나 변호사가 이 문제를 그대로 내팽개친 건 아니라는 사실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차츰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 편지는 마치 변소 화장지처럼 거무죽죽한 색을 한, 조악한 싸구려 종이봉투로, 적어도 닛토빌딩 4층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변호사가 쓸 물건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게다가 수신자명을 쓴 글씨도 어린아이가 쓴 것처럼 몹시 서툴고, 인사말에도 군데군데 뚝뚝 잉크가 번져 있다. 뒷면을 보니 발신자의 이름도 없었다.

팔묘촌에 돌아오면 안 된다. 네가 돌아와도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덟무덤신이 분노하실 것이야. 네가 마을에 돌아오게 되면, 오오, 피! 피! 피다! 26년 전의 대 참사가 다시 되풀이되고, 팔묘촌은 피바다가 될 것이야.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과장을 뒤에 남겨두고 몽유병자처럼 비틀비틀 회사를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공포와 전율의 세계로 한걸음 내디뎠던 것이다.

미야코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입으로는 일단 신타로를 위해서 변호해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점차 혼란스러워져 가는 걸 보니, 그녀 또한 뭔가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았다. 즉 이성으로는 부정할 수 있어도 어쩐지 그 밑바닥에 감정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일은 언제까지고 내 가슴에 의혹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걷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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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인지 진실인지, 이 때 상처 입은 사람은 십여 명 정도였으나 쇼자에몬의 일격으로 죽은 건 일곱 명으로 거기에 스스로 목을 베어죽은 쇼자에몬을 더하면 한 번에 여덟 명이 죽은 게 되니, 이것도 저 무참히 살해당한 여덟 패주무사의 원념이라며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그런데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지 최근 들어 이 산속 일개 외딴 마을의 이름이 전국의 신문에 실리는 일대 괴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이야말로 내가 여기에 소개하려고 하는 괴사건의 직접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다지미 가에는 저 쇼자에몬 이래 대대로 미치광이의 유전자가 있어 요조도 젊었을 무렵부터 이래저래 잔학하고 난폭한 행동을 많이 했다. 요조는 나이 스물에 오키사란 여자와 결혼하여 히사야, 하루요(春代)란 두 아이가 있었다.

그 남자는 깃을 세운 양복을 입고 발에 각반을 묶은 짚신을 신고 하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띠에는 불을 켠 상태인 막대기 모양의 회중전등 두개를 뿔처럼 꽂고 가슴에는 마찬가지로 불이 켜진 내셔널 회중전등을 마치 축시참배5)에 쓰는 거울처럼 매단 채 양복 위에 맨 허리띠에는 일본도를 차고 한손에는 엽총을 들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그걸 보고 모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기겁하기도 전에 남자가 든 엽총이 불을 뿜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 있지. 다지미 가의 선조인 쇼자에몬과 이번 요조, 두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으니 언젠가 다시 한 번 저런 무섭고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일어날 것임에 틀림없어."

팔묘촌에서는 지금도 아이가 떼를 쓰면 회중전등 뿔을 기른 도깨비가 온다고 으른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모에게 들었던 하얀 머리띠에 두 개의 회중전등을 꽂고 가슴에는 내셔널 램프를 매단 채 허리띠에는 일본도를 차고 한 손에는 엽총을 든 도깨비의 모습을 떠올리고 단번에 울음을 그친다고 한다. 그것은 팔묘촌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악몽이었다.

그리고 26년의 세월이 흘러 쇼와(昭和)6) 2×년. 두 번 일어난 일은 세 번 일어난다는 노인들의 말대로 팔묘촌에는 또다시 기괴한 살인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게다가 이번 사건에는 이전 두 사건처럼 격정적인 돌발사건이 아니라 묘하게 끈적끈적한 정체모를 살인이 계속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팔묘촌은 왠지 모르게 섬뜩한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이었다.

팔묘촌. 오오, 생각만으로도 오싹하다. 뭐라 말할 수 없이 불쾌한 이름이다. 뭐라 말할 수 없이 불쾌한 마을이다. 그리고 또한 뭐라 말할 수 없이 불쾌하고 무서운 사건이었다.

팔묘촌.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된 작년까지 그런 불쾌한 이름의 마을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하물며 그처럼 불쾌한 이름의 마을과 내가 중대한 관계가 있다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는 어렴풋이 내가 오카야마(岡山) 현 태생인 듯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카야마 현의 무슨 군, 무슨 마을 태생인지 그처럼 상세한 것은 조금도 몰랐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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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 팔묘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작품 목록

팔묘촌이란 돗토리(鳥取)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의 경계에 있는 산 속의 외딴 마을이다.

팔묘촌의 생업이란 숯 굽는 일과 소치기다. 소를 키우는 일은 최근 시작했지만 숯 굽는 일은 예부터 이 마을의 가장 주된 생업이었다.

팔묘촌, 얏츠하카무라(八つ墓村). 여기서 태어나 여기에 뼈를 묻고 대대로 오랫동안 이 이름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별 기이한 느낌이 들지 않을지도 모르나, 처음 이 이름을 들은 타지방 사람들은 다소 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뭔가 기분 나쁜 유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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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또 먹겠어요. 더 못 먹겠어요"

 하고 겨우 거절을 하면 그 편은 내가 체면이나 하는 줄 알고 자꾸 권하니 그런 딱한 노릇이라곤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한 자리에서 열 개를 계속해 집어넣었더니 지금까지라도 슈크림이라면 머리가 흔들립니다.

 "무턱대고 먹으라고만 권하는 것은 야만적이에요."

"내야 체면으로 권했지만 당신의 위 주머니도 상당히 야만적이던데."

 하고 비꼬니 내가 체면 차려 억지로 먹은 줄은 모르는 심판입니다.

차와 나 - 금붕어의 일기
금붕어는 물만 마시고 사는 동물이다.
술 먹는 친구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금붕어 종족이라고 빈정댄다. 나 자신도 거기 대하여 아무런 이의가 없이 그냥 받아 치운다.

낙랑 다방기(樂浪茶房記)
운동 부족이 될까를 경계해서 학교에서 나가는 시간을 이용해 다방까지 걸어가고 다방에서 다시 집까지 걸어가는 이 코스를 작정하고도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여행(勵行)93)의 날이 차차 줄어져 간다.

집에서 학교까지 10분, 학교에서 다방까지 20분, 다방에서 집까지 30분가량의 거리 - 이만큼만 걸으면 하루의 운동으로 족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야키니쿠라는 이름이 초라하고 속되어서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적당한 명사로 고쳐서 보편화시키는 것이 이 고장 사람의 의무가 아닐까 합니다. 말이란 순수할수록 좋은 것이지 뒤섞고 범벅하고 옮겨 온 것은 상스럽고 혼란한 느낌을 줄 뿐입니다.

명천(明川) 태가(太哥)106)가 비로소 잡아 팔았대서 왈 명태(明太)요, 본명은 북어(北魚)요, 혹 입이 험한 사람은 원산(元山)107) 말뚝이라고도 칭한다.

 수구장신(瘦軀長身)108), 피골이 상접, 한 3년 벽곡(辟穀)109)이라도 하고 온 친구의 형용이다.

배를 타고 내장을 싹싹 긁어내어 싸리로 목줄띠를 꿰어 쇳소리가 나도록 바싹 말랐다. 눈을 모조리 빼었다. 천하에 이에서 더한 악형(惡刑)도 있을까. 모름지기 명태 신세는 되지 말 일이다.

산 사람이 먹고 산 사람 대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經) 읽는 경상에도 명태 세 마리는 반드시 오르고, 초상집에서 문간에다 차려놓는 사자 밥상에도 짚신 세 켤레와 더불어 세 마리의 명태가 반드시 오른다(그런 걸 보면 귀신도 조선 귀신은 명태를 좋아하는 모양이야!).

명태란 그러고 보니 요샛날 케이크 한 상자, 과실 한 꾸러미 이상으로 이용이 편리한 물건이었던가 보다.

망치로 두드려 죽죽 찢어서 고추장이나 간장에 찍어, 막걸리 안주로는 덮을 게 없는 것이 명태다.

끝으로 군소리 한마디.

 40년 전인지 50년 전인지 북미(北美)로 이민 간 조선 사람 두 사람이 하루는 어디선지 어떻게 하다가 명태 세 마리가 생겼더란다. 오래 그리던 고토(故土)114)의 미각인지라 항용 생각키에는 세 마리의 명태를 천하 없는 귀한 음식인 듯이 보는 그 당장 먹어 치웠으려니 하겠지만, 부(否)115)! 두 사람은 그를 놓고 앉아 보기만 하더라고.

겨우 젖이 떨어졌을까 말까 한 도야지 새끼를, 속만 그러내고 통으로 푹신 고아, 육개장 하듯이 피어서 국물에 먹는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입을 대기는 비로소 처음이고, 처음이라 그런지 좀 애색했다.

하기야 연계(軟鷄)찜을 먹는 일을 생각하면 도야지 새끼를 통으로 삶아 먹는다고 별반 애색할 것은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원숭이를 꽁꽁 묶어 불 달군 가마솥 위에 달아 매 놓고는 줄을 느꿔 발바닥을 지지고 지지고 한다 치면 요놈이 약이 있는 대로 죄다 머리로 오른다든지? 할 때에 청룡도(靑龍刀)로 목을 뎅겅 잘라 가지고는 골을 뽑아 지져 먹는다는 원뇌탕(猿腦湯)이란 것에 비한다면 애저찜쯤은 오히려 부처님의 요리라고 할 것이다.

사례를 받고 광고문을 억지로 쓰는 것이 아니므로, 먹은 포도주의 상표는 쓰지 않거니와 그 효과만은 보장을 하는 것이니, 누구 나처럼 수면에 힘이 들고 일로 하여 늘 피로한 이는 시험하기를 권한다.

다만 주객은 안될 말이요, 역시 나처럼 작은 잔 한 잔으로도 알콜 기운이 몸에 퍼지는 체질이어야 한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 기운이 들도록 수박 맛을 보지 못한 나는 밖으로 나갔다. 불 같은 석양 고열(夕陽苦熱)에 비지땀투성이가 된 나의 마음은 그 청피홍심(靑皮紅心)128)을 상상하는 때 일종의 방향(芳香)129)이 어린 양미(凉味)130)를 느끼었던 것이다. 어른 어린애 할 것 없이 수박 구루마에 모여 섰다.

항아리 앞에 서서 들여다보던 나는 미구에 미각을 찌를 향긋하고도 달 양미(凉味)를 상상하고 은근히 침을 삼키던 아까의 내 그림자가 눈앞에 떠올라서 한바탕의 웃음을 마지않았다. 동시에 운명의 불가역도(不可逆睹)138)를 다시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 1928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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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용묵
소설가,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근무
출판사 <수선사> 창립
본명은 하태용(河泰鏞)1904년 평북 선천 출생, 1961년 사망. 작품세계에 적극적이지 못한 방관자적인 자세가 그의 문학적 특징이자 한계라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를 비롯해<청춘도>, <신기루>, <유앵기>, <별을 헨다> 등의단편소설과 한 권의 수필집 《상아탑(象牙塔)》이 있다.

김남천
소설가, 문학비평가
본명은 효식(植)
1911년 평남 성천 출생
1953년 북한에서 숙청
일본 유학 시절인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동경지회에 가입하였고, 1931년 제1차카프 검거 때 기소되어 2년간 투옥되기도 했으며, 1947년 월북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공장신문>, <소년행>, <남매>, <처를 때리고> 등의 단편소설과 《대하》, 《사랑의수족관》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김상용
시인, 교육자
호는 월파(月)
1902년 경기도 연천 출생
1951년 식중독으로 사망
일본 릿쿄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연구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 이화여전 교수, 강원도 지사, 이화여대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동아일보》에 〈무상〉,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고,
에드거 앨런 포 등의 영미 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일 성향의 시 3편을 써 논란이 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1934년 《문학》에 발표한 <남으로 창을 내겠오>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이 작품을 포함해 <서글픈 꿈>, <반딧불> 등27편의 시를 수록한 시집 《망향》, 수필집 《무하선생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 등이 있다.

노천명
한국의 대표 여류시인
1912년 황해도 장연군 출생
1957년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사망
본명은 노기선이나 어릴 때 홍역을 앓아 죽을 고비를넘긴 후 ‘천명(天命)‘으로 개명하였다.
진명보통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시절인 1932년 <신동아>에 <밤의 찬미>, <단상> 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친일 시를 쓰는 등 그녀의 문학 인생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 다수의 시를 남겼으며, 특히대표 작품인 <사슴>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방정환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
1899년 서울 출생
1931년 신장염으로 사망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을 제정하였고,  1923년3월 한국 최초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으며, 1928년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는등 어린이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귀먹은 집오리>, <동생을 찾아서>, <까치옷>, <만년 사쓰>, <양초 도깨비>, <사랑의선물> 등이 있다.

백신애
소설가, 본명은 무잠(武岑)
1908년 경상북도 영천 출생
1939년 위장병으로 사망
1929년 《조선일보》에 박계화(朴啓華)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꺼래이>, <적빈>, <낙오>, <악부자> 등의 단편소설이 있다.

이병각
시인, 기자
1910년 경북 영양 출생
1941년 결핵으로 사망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가 해체된 1935년 무렵부터 타계할 때까지 6년 동안 다수의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연모>, <소녀> 등의 시가 있다.

이효석
소설가
호는 가산(可山), 필명은 아세아(亞細亞)
1907년 강원도 평창 출생
1942년 뇌막염으로 요절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이국을 동경하는 엑조티시즘과 자연을 배경으로 한 원초적인 에로티시즘 성향 등이 드러난다.
주요 작품으로는 <분녀>, <산>, <들>, <메밀꽃 필 무렵>, <석류> 등의 단편소설과 《화분》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채만식
기자, 소설가, 극작가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
1902년 전북 옥구군 출생
1950년 폐결핵으로 사망
역사적, 사회적인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 풍자적인 작품을 주로 쓴 사실주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미스터 방> 등의 단편소설과 《탁류》, 《태평천하》 등의 장편소설이 있다.
그는 광복 이후에 자전적 소설인 <민족의 죄인>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반성하였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채만식을 일제시대 친일 행위자로 결정하였다.

최서해
소설가
본명은 학송(鶴松)
호는 서해(曙海)
1901년 함북 성진 출생
1932년에 32세의 나이에 요절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처녀작인 <토혈>, 데뷔작인 <고국>을 비롯해 주요 작품으로는 <탈출기>, <박돌의 죽음>, <홍염> 등의 단편소설과 유일한 장편 소설인 《호외 시대》가 있으며, 어릴 적부터 가난했던 삶은 그의 문학에 근간을 이룬다.

수박
취미에 따라서 제각기 다르기는 할 것이로되 여름 과실로는 아무래도 수박이 왕좌(王座)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맛으로 친다 해도 수박이 참외나 다른 그 어떤 과실에 질 배 없겠으나 그 생긴 품위로 해서라도 참외나 그런 그 어떤 다른 과실이 수박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천진에 가까울 만치 순한 빛이요, 연한 살이다. 아마도 자연의 제과품으로선 이 수박이 여름의 풍물 가운데선 가장 예술적일 것이다.

영리를 위하여 다량 생산을 목적하고 인공을 가하여 자연을 모독해서 조숙 시킨 것이 거의여서 수박 본래의 제맛을 다들 그대로 지니지 못했다. 심지어는 속을 붉게 만드느라고 애숭이에다가 물감 주사질로 성숙시킨 것도 없는 게 아니라니 도시 사람은 어쩌면 한 평생 수박의 제맛을 모르고 지나게 될는지도 모른다.

여름의 미각
여름은 채소를 먹을 수 있어 좋다.

시금치, 쑥갓, 쌈, 얼마나 미각을 돋우는 대상인가. 새파란 기름이 튀여지게 살진 싱싱한 이파리를 마늘장에 꾹 찍어 아구아구 씹는 맛, 더욱이 그것이 찬밥일 때에는 더할 수 없는 진미가 혀끝에 일층 돋운다.

먹는 데도 역시 그 운치가 반은 더 미각을 돋우는 것이어서 수박은 다락 위에서 꿀을 부어 한가히 먹어야 맛이 나고, 참외는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가는 원두막 안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런 것을 서울선 기껏 골랐대야 따다 두어서 익힌 속 곤 놈을 그것도 마루 위에서 밖에 앉아 먹을 데가 없으니 제맛이 돋귈 리가 없다.

오늘도 김치는 또 굶었다.

가배6)
 요즘 알베르 티보데7)의 책을 한 권 사서 《소설 독자론》의 첫 혈(頁)8)을 펼치니까 이런 글이 나왔다. 피에르 루이9)가 어떤 재미스런 콩트 속에서 희랍 문명과 근대 문명이 쾌락(그에 의하면 유일의 가치 있는 것)의 수확으로서 선물한 것을 비교해 보고, 근대인의 새로운 일락(逸樂)을 단 하나밖에는 발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담배다, 라고 결론하였다.

이런 것을 읽다가 나는 펀뜻 벽초10) 선생의 《임꺽정》을 생각했다. 임꺽정과 그의 일당이 두주로 유흥을 하는 장면은 많지마는 담배를 피우는 대목은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조 명종 전후에도 끽연의 풍속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차라고 하면, 퍽 전에 고 호암12) 선생의 글에서, 이것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유래를 읽었던 것처럼 어렴풋이 생각되기는 하지만 기억이 도무지 확실치가 못하다. 그러니까 차에 대해서도 재미난 이야기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임꺽정의 일당이 숭늉을 마셨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가배를 가장 애음(?)한 사람은 아마 오노레 드 발자크16)일 것이다.

"그는 오만 잔(杯)의 가배로 생활하고, 오만 잔의 가배로 죽었다"는 말도 있다. "나는 야반에 기상한다, 그리고 17시간 동안 원고를 쓴다" "나는 다섯 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야반으로 정오까지는 제작에 소비하고 정오로부터 네 시까지 교정을 본다" 이러한 격렬한 노동 가운데서 그의 의식을 지탱해 준 것은 45잔의 가배였다고 한다. 51세에 드디어 죽었으나 20년 동안 백 권의 소설을 썼다.

그렇다고 흥분제는 일적(一適)도 안 마신다고 손님에겐 홍차를 주면서도 자기는 백비탕(白沸湯)17)을 마시는 장개석18)의 기질은 또한 나의 본 받을 바 못 되고…….

‘냉면’이란 말에 ‘평양’이 붙어서 ‘평양냉면’이라야 비로소 어울리는 격에 맞는 말이 되듯이 냉면은 평양에 있어 대표적인 음식이다. 언제부터 이 냉면이 평양에 들어왔으며 언제부터 냉면이 평안도 사람의 입에 가장 많이 기호에 맞는 음식물이 되었는지는 알 수도 없고 또 알려고도 아니한다.

모든 자유를 잃고 그러므로 음식물의 선택의 자유까지를 잃었을 경우에 항상 애끓는 향수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우선 냉면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냉면이 우리에게 가지는 은연한 세력은 상당히 큰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선주후면(先酒後麵)25)이란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소갈비나 구워서 소주를 마신 뒤에 얼벌벌하니 고추를 쳐서 동치밋국에 말아 놓은 냉면을 먹는 맛이란 지내보지 않은 사람으론 상상할 수도 없는 기막히는 진미다.

냉면에는 꿩(雉) 이상 가는 것이 없다. 꿩볶이를 쳐서 동치밋국에 먹어 본 적이 없는 이는 냉면에 대하여 용훼(容喙)36)할 자격이 없다. 꿩은 겨울에 나는 동물이다. 냉면 맛이 겨울에 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꿩고기 쳐서 냉면을 먹어 보지 못한 겨울은 나에게 있어선 지극히 불행한 겨울이다.

전주(電柱) 하나 없는 마을! 아무 ‘바쁨’도 아무 ‘시끄러움’도 없는 듯한 봄 산촌에 끊겼다 이었다 호드기 소리가 들려를 와 잔디밭에 누워서 하늘을 처다보며 이 소리를 들을 때의 내 맘이 어떻더라 할가 슬픈 듯 애닳은 듯 하여간 울어버리고 말았네 그려.

조선의 봄! 조선의 그윽한 봄 정조(情調)! 오냐 하루쯤 배탈이 났다고 결근에 굴(缺勤屈)하고 이런 데를 꼭 한 번만 다녀오자 하는 죄 많은 음모를 자리 밑에서 하네.

산나물
먼지가 많은 큰길을 피해 골목으로 든다는 것이 걷다 보니 부평동(富平洞) 장거리로 들어섰다.

술의 생리
천하의 대장부들은 좋은 일이 있으며 좋다고 한잔, 궂은일이 있으면 또 마음이 상한다고 한잔…… 술을 생리는 지극히 복잡하다.

이러고 보면 남자들은 분명히 조물주에게서 은택(恩澤) 하나는 더 받은 셈이 되지 않나 모르겠다. 마귀가 씌워 가지고도 자기 마음에만 좋다면 그것은 그대로 그 사람의 즐거움에 틀림없을 게다.

원두막
백중(白中)79)이 되도록 모가 나가질 못하고 빽빽이 서 있는 모판이 있는가 하면 김장을 갈려고 품을 뽑고 밭을 매는 데가 있어 농촌 풍경도 얼쑹덜쑹하다.

빙수 1
"조선의 여름이란 낮에는 몹시 따가워도 저녁때의 서늘한 맛이 참말 좋아요."

더위에 시달려서 견디다 못하여 저 거리(街)에 들어가서 얼음을 먹을 밖에 없다고 열사(熱沙)의 위에 다리를 저는 사람처럼 허위허위 얼음을 구하러 가면 "오늘 기차 편에 얼음이 오지 않아서 오늘은 없습니다, 내일이나 가져오면 있지요" "날마다 기차 편에 얼음을 가져다 파니까요" 기가 탁 막힌다. 기차도 자동차도 다니지 아니하는 곳, 아주 얼음을 생각도 못 하고 온 여름을 지내는 시골을 생각하면 서울 같은 곳에서 마음대로 얼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기왓장이라고 땅바닥이 갈러지는 듯싶은 여름 낮에 시커먼 구름이 햇볕 위에 그늘을 던지고 몇 줄기 소낙비가 땅바닥을 두드려 주었으면 저으기 살맛이 있으련마는 그것이 날마다 바랄 수 없는 것이라 소낙비 찾는 마음으로 여름 사람은 얼음집을 찾아 드는 것이다.

경성 안에서 조선 사람의 빙숫집 치고 제일 잘 갈아 주는 집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종로 광충교 옆에 있는 환대(丸大) 상점이라는 조그만 빙수점이다.

슈크림
벌써 신혼이라는 그러그러한 때가 저 먼 옛날같이 되어버린 이때에 새삼스럽게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신혼 여행기를 쓰라는 명령을 받고 펜을 들게 되니 공연히 웃음만 납니다. 대체 쓸 만한 거리가 기억에 남아있어야 될 터인데 잊어버렸는지 또는 눈을 감고 여행을 했는지 좌우간 여행기가 될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여행기가 아니라 그저 생각나는 대로만이라도 쓴다면 다음과 같은 운치 없는 말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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