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표에도 없고 지도는커녕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갤러리를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물론 지금은 아니다).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돌담 늘어선 마을을 몇 바퀴째 돌다가 렌터카 백미러에 문득 손바닥만 한 문패가 들어왔다. ‘김영갑 갤러리‘ 라고 쓰여 있었다.
- P241

"오고 싶은 사람만 오라고 이름표만 걸었지요. 용케도 찾아오셨네요. 제주 토박이도 한참을 헤매는데." 갤러리 입구에 놓아둔 나무의자에서 그는나를 맞았다. 각오했던 것보다 병색이 짙었다. - P241

그는 말을 할 때마다 오른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입을 움직이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말을 하면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발음도 정확하지 않아 듣기 어려웠지만 다 알아들은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찾아갔을 때 김영갑은 오래전에 시한부 판정을받은 뒤였다. 모든 병원치료를 중단하고 자연치유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준비하던 때였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우리에게는 루게릭병으로 더 알려진불치병이다. 10만 명 중 한두 명이 걸리고, 발병하면 길어야 5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병이다. 병인을 알 수 없어 치료약도 없다. 하루하루 말라가는 온몸의 근육을 지켜보며 죽어가는 저주 같은 병이다. 지독하고 잔인한 형벌이다. - P241

김영갑은 1957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육남매 중 막내였다. 월남 갔다 온 형님이 갖고 온 카메라를 갖고 놀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서울의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진을 찍겠다고 혼자 돌아다녔다. 제주와 처음 연을 맺은 것은 1982년이었고, 제주에 정착한 것은 1985년이었다. 루게릭병에 걸린 건 1990년대 중반이었고, 확정 판정을 받은 건 1999년 이었다. 2002년 삼달리의 폐교를 빌렸고, 2003년 6월 사진 갤러리 두모악‘을 열었다. - P241

"만일 처음부터 (갤러리) 완성을 생각했다면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오늘 하루만, 한 주만, 한 달만, 내 힘이 닿는 데까지만 해볼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온몸의 기력이 소진해 카메라를 들기는커녕 손가락 힘이 없어 셔터조차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앞뒤로 움직일 수도 없다. 잔인한 통증 때문이다. 죽을 넘기기에도 힘에 부친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하루는 너무 더디 간다."
- P243

형님이 부탁한 에어컨은 비쌌다. 갤러리를 다 감당하려면 에어컨이 커야 했다. 나는 권혁재 선배와 상의했고 각자 돈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권선배가 그 큰돈을 혼자 부쳤다. 그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선배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 P243

"비단 치마에 몸을 감싼 여인처럼 우아한 몸맵시가 가을 하늘에 말쑥하다.
빼어난 균제미에 있어서는 구좌읍 일대에서 단연 여왕의 자리를 차지한다."
- P255

"사진은 그림과 같습니다. 화가가 캔버스에 자신이 받은 인상을 옮기듯이, 사진작가도 자신의 느낌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물론 작업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화가는 캔버스에서 햇살과 바람을 마음껏 만들어내지만 사진은 그렇게 못하지요. 그래서 저는 기다립니다. 낮이고 밤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내가 상상하는 화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구름을 기다리고 햇볕을 기다리고 바람을 기다립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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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취 있는 호젓한 길이 장차 휴양림으로 개발되는 날, 넓혀지고 계단이 놓이고 지나치게 손질이 가해져서 멋대가리 없는 신작로로 변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걱정이 태산이다. 숲을 걱정하는 진심이 뚝뚝 묻어난다. 이 근심과 염려의 대상이 절물오름이었다. 그러니까 세상에 절물오름은 있고 절물자연휴양림은 없던 시절, 스스로 오름 나그네라 불렀던 제주 사내는 절물오름을 에운 숲에 휴양림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영 마뜩잖았다. 김종철 선생이 돌아간이태 뒤 절물자연휴양림이 개장했다. 다행히도 선생의 걱정과 달리 절물오름 오르는 길은 여전히 호젓하다. - P154

탐방로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 "반기문 산책로‘다. 원래는 생이 소리길이었는데 이름이 바뀌었다(생이‘는 제주어로 새란 뜻이다). 충청북도 음성 출신인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절물과 무슨 인연이 있었나 알아봤더니, 2009년 휴양림을 찾은 당시 반 총장이 생이 소리길을 걷고서 "다 좋은데 길이 네무 짧다"고 한마디 했단다. 이후 777미터였던 생이소리길은 3.6킬로미터로 들어났고, 길에 유엔 사무총장 이름을 붙였단다. 음……. 큰일 하셨다. - P155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구분하는 방법.
삼나무 잎은 끝이 뾰족하고 편백나무 잎은 끝이 뭉툭하다. - P156

민달팽이도 있었다. 지렁이인 줄 알았는데 대가리에 두 갈래로 나온 촉수가 있었다. 오래전 읽은 시구가 생각났다. 어느 시인이 맨몸의 민달팽이가안쓰러워 배추 잎사귀를 덮어줬다. 민달팽이가 잠시 멈칫거리는 듯싶더니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리더란다. 인간의 호의를 뿌리치는 민달팽이를 보고 시인은 놀랐다. 그리고 "치워라, 그늘!" 이라고 소리치는 시를 썼다(김신용, 「민달팽이」 부분), 등에 집을 짊어진 삶은 버거워도 아늑하고, 맨살로 세상과 부딪히는 삶은 위험하나 자유롭다. 치워라, 그늘! 나도 젊은 날에는 이 호기로운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 P158

곶자왈은, 말하자면 제주 천연림이다. 흔히 숨을 뜻하는 제주어 ‘곶(고지)‘과 자갈을 뜻하는 제주어 ‘자왈‘ 이 합쳐진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곶자왈은 제주 고유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도 "곶자왈이 뭐과?" 하고 되묻는 형편이다. 곶자왈은 신조어다. 제주방언을 최초로 연구한 석주명 1908~1950년 전생의 『제주도방언집에도 곶자왈이라는 낱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제주에서 곳은 숲보다 산으로, 자활은자갈이 아니라 숲으로 더 많이 쓰였다. 제주도청이 1995년 발간한 『제주어사전」도 곳을 ‘한라산 아래 펼쳐진 숲‘으로, 자왈을 ‘나무와 넝쿨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어수선하게 된 곳 이라고 정의한다. - P168

곶자왈은 의외로 1990년대 이후 화산지형을 연구한 지질학에서 출발했다. 지질학에서는 곶자왈을 ‘중산간지대에 있는 투수성이 좋은 용암류지대‘ 라고 이른다. 이와 같은 지질학의 개념이 ‘용암 암괴 위에 있는 숲이나 덤불‘ 이라는 의미로 확대됐다. 쉽게 풀이하면 곶자왈은 화산암이 깔린 숲이다. 딱딱한 용암지대 위에 오랜 세월 흙이 쌓이고 그 흙에 풀과 나무가 뿌리를 내려 숲을 이룬 지형이다. 제주 특유의 화산용암 식생지대라 정의할 수있겠다. 자갈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갈을 뜻하는 제주 방언은 자왈이 아니라 작지다. 저지리의 작지곶자왈은 자갈이 많은 곶자왈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작지곶자왈에는 유난히 작은 자갈이 많았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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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프 다운타운

밴프 다운타운을 거닐지 않고 캐나다 로키를 말할 수는 없다. 밴프다운타운은 밴프 여행의 출발점이자 꽃이다. 여행자들은 이 거리를 거닐며산악마을의 아름다운 정취를 만끽한다. 또한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볼수 있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줄 선물도마련한다. - P78

밴프 다운타운은 사계절 내내 아름답다. 여름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아래 깨끗하게 정비된 거리가 눈부시다. 가로등에 걸어놓은 화사한 꽃들은여름날의 축복을 느끼게 해준다. 아름답기로는 겨울도 뒤지지 않는다.
밴프에 함박눈이 내린 날 이 거리를 거닐면 저절로 크리스마스 캐럴이흥얼거려진다.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다운타운은 상상 속에 그려보던산타의 마을로 변해 있다. - P78

밴프는 인구가 8,300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중심거리는 밴프 에비뉴Banff Ave. 남북으로 길게 뻗은 다운타운의 중심을 관통하는 도로다. 여행자들은 대부분 이 거리를 거닐어 본다. 밴프 에비뉴를 따라 다운타운을 돌아보는 데는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아기자기한 다운타운의 매력에 빠지면 시간은 한없이 흐른다. 특히, 쇼핑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반나절도 부족하게 느껴질 것이다. - P78

다운타운에서 벗어나면 남쪽으로 보우 강이 있다. 그 강을 건너가면 페어몬트 밴프 스프링스 호텔과 노천온천탕 어퍼 핫 스프링스Upper Hot Springs,
밴프 전망대라 불리는 설퍼 산 곤돌라, 온천이 처음 발견됐던 캐이브&베이슨Cave&Basin 등이 있다. 시간이 넉넉한 여행자들은 보우 강을 따라 한가롭게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또 자전거를 타고 버밀리언 호수나 선댄스 크릭Sundance Creek을 찾아가기도 한다. - P78

밴프의 여름밤은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위도가 높기 때문이다. 오후10시를 넘겨도 거리는 환하다. 이 시각에 잠자리를 찾는 여행자는 바보다.
해질녘의 푸른 여명 아래 가로등이 불 밝히는 거리를 거닐어봐야 진정으로밴프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전에 은은한 촛불이 켜진 레스토랑에서근사한 저녁을 먹으며 하루쯤 호사를 부리는 일도 잊지 말자.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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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생각할 거리가 있다. 설문대할망은 늘 바쁘다. 한라산 따위를 뚝딱 만드는 능력의 신이라면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터였다. 그러나 설문대할망은 늘 무언가를 한다. 빨래를 하고, 자식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바느질을 한다. 한라산을 만든 것도 아수라발발타 주문을 외우거나 지팡이 한 번 휘두른 마법의 결과가 아니다. 맨손으로 직접 몸을 움직여 산을 쌓았다. 그리스의 신은 심심해서 인간을 만들었고 심심해서 인간 세상을 간섭했다. 패악질도 서슴지 않았다. 하나 우리의 설문대할망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해종일 일만 한다. 인간에게 해코지한 적도 없다. 설문대할망이 일으킨 기적은 노동의 산물이다. 제주에서는 한라산을 만든 거대 신도 부지런히 몸을 써야 한다. 설문대할망은 근면과 성실의 신이다. - P72

"당제는 매인심방(신당의 전속 무당)이 진행하고 제주는 이장이 합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의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리면 대단합니다. 제물 올리는 할망만 250명이 되고 구경꾼까지 합치면 800명이 넘어요. 할망들이 제물 올리는 석단도 자리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백주또 할망 입으시라고옷도 올리고, 옥돔도 올리고, 떡이랑 삶은 달걀도 올려요. 네 발 짐승은 절대 안 올립니다. 백주또 할망이랑 소천국 할방이 갈라섰던 이유 아시죠? 소잡아먹었다고 쫓아냈잖아요." - P74

여기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우선 이형상 1653~1733년이라는 인물을 알아야 한다. 이형상은 제주 역사를 살피다 보면 수시로 마주치는 이름이다. 이 책의 단골 출연자이기도 하다. 이형상은 1702년 제주 목사로 부임해 1년 남짓 근무했는데, 재임기간 동안 제주 구석구석을 순찰한 기록을 그림과 함께 남겼다. 18세기 초반 제주 모습을 가장 정확히 묘사했다는 탐라순력도」다. 이형상 말고도 목사 여러 명이 순력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만큼 가치를 인정받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이형상은 오름을 보고 "한라산은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오름이 별처럼 여기저기 벌리어 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인다면 연잎 위 이슬 구슬의 형국" (남환박물>이라고 묘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교조주의자였다. 유학자의 눈에는 섬 곳곳에 널린 신당과 사찰이 불온하게 비쳤다. 예부터 제주에는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이 있었다 - P76

추사는 위리안치받았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친 유배처에 가두는 형을 이른다(현재 말끔하게 복원해놓은 추사 유배지도 탱자나무 울타형을리를 두르고 있다). 형벌대로라면 추사는 가시나무 담을 쌓은 누옥에서 연금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러나 추사는 갇혀서만 살지 않았다. 앞서 적었듯이 향교를 수시로 드나들었고 멀리 제주읍성까지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면회객의 방문도 줄을 이었다. 추사의 오랜 벗이었던 초의선사는 추사때문에 여섯 달을 제주에서 머물렀고, 추사의 양자는 꼬박 1년을 곁에서 머무르며 아비를 봉양했다. 서울에서의 일상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제주에서도 추사는 사람 만나고 선물 받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름의 일상을 살았다. - P102

원악도遠惡島라는 낱말이 있다. 국어사전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가 어려운 섬‘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사전이 담아내지 못한 뜻이 있다. 원악도는 한때 제주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최악의 유배지로서 제주를 이를 때 원악도라고 불렀다. 제주가 서울에서 제일 먼 섬이므로 제주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처벌이었다. 제주로 유배를 내려오는 죄목은 대부분 역모였다. 하여 제주 유배인은 대부분 정치범이었다. 한때 제주에서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금기어였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성공은 역모를 뜻할 수 있어서였다. 제주에서 성공을 대체한 단어는 자산이었다. 지금 작산은 다 큰어른을 가리킨다. - P103

조선시대 제주는 온 나라 죄인의 유형지였다.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요, 가장 두려운 것은 뱀과 지네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라." 왕조의핏줄이었으나 제주에 유배됐던 이건 1614∼1662년이 『제주풍토기」에서 남긴 말이다. 추사처럼 왕족도 밥 타령을 했다. - P103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제주에 유배된 인물은 230명이 넘는다. 성호 이익 1681~1763년은 광해군에 반대했다가 제주에서 위리안치 형을 받았고, 이익을 제주로 내쫓았던 광해군 1575~1641년도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뒤 제주에서 위리안치 형을 받았다. 광해군은 엄격히 통제된 삶을 살다 제주살이 3년 만에 죽었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1607 ~ 1689년은 제주 유배를 마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은 여든세살에 제주로 유배 왔다. 쉰다섯 살의 추사는 견줄 바가 못 됐다. 일흔네 살에 의병을 일으켰던 면암 최익현 1833~1906년도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1861~1939년도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 P103

맛이 가장 좋을 때는 1~2월이다. 무게가 3킬로그램이 넘는 대방어도 한겨울에 올라온다. 그러나 모슬포 방어축제는 10~11월에 열린다. 아직 철이이른데 방어축제를 여는 이유를 모슬포 수협에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답변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철에는 축제를 안 해도 잘 팔리니까 제철이아닐 때 축제를 해야지요." 모슬포 방어축제는 제주를 대표하는 특산물 축제다. 축제가 열리는 사나흘 동안 20만 명이 다녀간다. 그러고 보니 추자도참조기축제도 얼마 전까지 한여름에 열렸다. 그때도 "조기 철이 아닌데 어떻게 축제를 여느냐" 물었더니 "지난 겨울 잡아서 냉동한 조기를 판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특산물 축제가 이런 식이다. 모슬포에 가면 방어를 드시라. 대신 한겨울에 드시라. - P106

풍토가 사람을 낳는 것인지, 대정은 사람도 거칠다. ‘대정 동생이‘라는 말이 있다. 동생이는 망아지라는 뜻이다. 대정 사람이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이라는 뜻으로, 비하할 때 쓰는 표현이다. 바람도 모질고 땅도 모질고 바다도 모질어서 사람도 모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대정 땅이 겪은 기구한 사연을 돌아보면 팔자라는 걸 떠올릴 수밖에 없다. - P106

사람들은 송악산을 부남코지라고 부른다. - P107

송악산익숙한 이름이지만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다. 이름처럼 소나무가 많지는 않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었다. 절울이오름이다. ‘절‘이 물결을 가리키므로, 물결 우는 오름이라는 의미다. 파도가 송악산 아랫도리 절벽과 부딪쳐 울리는 소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오름과 파도는 어울리는 쌍이 아니지만 송악산은 예외다. 오름 남쪽 아랫도리가 그대로 해안절벽을 이룬다. 앞바다 가파도에서 바라보면 송악산은 거대한 절벽처럼 서 있다. 물결 우는 오름이라. 아마도 오름 중에서 가장 시적인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 해안절벽에 밴 역사를 알고 나면 ‘절울이‘라는 이름이 가슴에 못처럼 와서박힌다. - P107

대신 칠성판 위에 두개골 하나와 등뼈 하나씩 놓고 대충 짝을 맞췄다. 한 벌의 유골이 갖춰지면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나씩 뼈를 맞춰 모두 132기의 무덤을 조성했다. 그 공동묘지가 백조일손묘조상은 백 명, 그러나 자손은 하나인 무덤, 조상은 다르지만 한날다.
한시에 같이 죽었으니 모두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도 피눈물이 난다. - P113

아름다운 풍경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고 했던가. 일제의 만행을 목격했을 때는 화가 치밀었고, 웅덩이만 덩그러니 남은 양민학살의 현장에서는 몸서리를 쳤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무덤 앞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슬픔을 품은 송악산 자락이 무너지고 있다. 파도만이 설움에 겨워 오늘도 운다. - P113

사려니라는 이름을 다시 보자. 사려니라는 낱말도 다른 제주 방언처럼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 솔아니가 사려니로 변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솔아니는 ‘숲 안‘ 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숲의 안쪽 방향을 이르는 의미가 아니라 숲 안쪽에 있어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포개져 있다. 한라산 깊은 숲에서도 안쪽 숲이니 인간이 범하지 못하는 땅, 나아가 경계 너머의 세상을 가리킨다. 제주도 안내 책자에서 사려니숲길을 ‘신성한 숲길‘ 이라고 소개하는 까닭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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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오름은 어리목 코스와 영실 코스가 만나는 교차점이자 두 코스의 종점이다. 윗세오름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붉은오름(1,740미터), 누운오름(1,711미터), 족은오름(1,698미터) 세 오름이 윗세오름을 이룬다.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어서 윗세오름이다. 한라산 동쪽 자락 해발고도 1,100미터 지점의 삼형제오름이 기준이다. 어리목에서 윗세오름까지는 4.7킬로미터 거리다. 두 시간 가까이 걸린다. 어승생악과 달리 윗세오름은 한라산 안에서도한라산에 속한다. - P30

요즘에는 오름에도 산이 많다. 산방산, 영주산, 단산, 송악산, 군산, 고근산 등등 산이라 불리는 오름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애초부터 산이었던 오름은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면서 산으로 개정된 오름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단산은 바굼지오름, 송악산은 절울이오름, 수월봉은 노꼬물오름이었다. - P42

실제로 산방산은 신의 영역이었다. 소 풀고 촐 비러(꼴 베러) 다니던 생활의 영역이 아니었다.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신성한 공간이었다. 오름을 신격화하는 여러 설화가 산방산에서 다 모인다. 군산과 고근산처럼 산방산도 금장지葬地다. 묘를 쓰면 화를 입는 땅이라는 뜻이다 - P43

굴사는 고려 말 혜일선사가 창건했고, 조선 후기에는 초의선사 1786~1866년가 굴사에서 수도했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 중이던 벗 추사 김정희1786~1856년 만나러 제주까지 내려와 여섯 달을 머물렀다. 천장 바위틈에서 똑똑 약수가 떨어지는데, 이 약수에 여신 산방덕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 P45

산방산 동굴에 살던 여신 산방덕은 마을청년 고성목의 품성에 반해 신의 지위를 버리고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여신을 탐낸 사또가 고성목에게 누명을씌워 죽인다. 남편을 잃은 산방덕은 동굴로 돌아와 바위로 변했고, 그때부터 바위에서는 물이 떨어졌다. 산방굴사 약수를 ‘산방덕이의 눈물‘이라 이르는 연유다. 약수 한 국자 떠 마시면 5년을 더 산다는데, 약수 핑계로 날마다 산방산을 오르면 5년은 더 살 것 같기도 하다. - P45

침식작용과 무관하다. 인간이 고의로 무너뜨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은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모슬포로 이전했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 모슬포 일대는 최대 7만 명이 주둔하는 군부대였다. 그 시절 산방산은 대포사격 표적지로 전락했다. 육군은 주변에 마땅한 표적이 없다는 이유로산방산을 향해 대포를 쐈다.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당시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산방산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다. - P45

제주도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고, 2007년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고, 2010년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 P47

켈파르트Quelpart. 하멜은 제주도를 켈파르트라고 불렀다. 어디엔가 있는 섬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유럽에는제주도를 켈파르트라고 표기한 지도가 있단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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