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 묘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는 남이 장군의 묘,  역모죄로 능지처참된 후 7일간 효수되어 있었던 까닭에 제대로 장사지낼 수는 없었으리라.  남이가 실제 이곳에 묻혔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이곳을 남이 장군의 묘로조성해놓았다. 춘천 남이섬에도 남이가 묻혀 있다는 전설을 가진 돌무더기가 있었다. - P8

白頭山石磨刀畫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앤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

남이 - P26

수령칠사란
수령의 임무를 명문화한 것으로
농상을 성하게 할 것(農桑盛)
호구를 증가시킬 것(戸口曾)
학교를 일으킬 것(學校興)
군정을 바르게 할 것(軍政修)
부역을 고르게 할 것(賦役均)
송사를 간명하게 할 것(詞訟簡)
간활을 없앨 것(奸滑息)
이상의 일곱 가지를 말한다. - P88

망원정
마포구에 있는 이 정자는 애초에 세종이 효령대군을 위해 지어준 것으로, 후에 월산대군이 넘겨받았다. 성종은 형 월산대군을 위로하기  위해 자주 이곳을 찾았다. 1989년에 복원되었다. - P90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월산대군 - P132

통명전의 샘과 못
수통을 구리로 설치했다가 대가들의 반발로 인해 철거하고 돌로 다시 만들었다. 이렇듯 소소한 것까지 반대하고 나서는 대간의 활동은 뒷날 연산군으로 하여금 왕권에 대한 강력한 문제의식을 갖게 만든다. - P140

선릉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성종의 능이다. 성종은  세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마지막 왕비인 정현왕후 윤씨만 성종 옆에 동역이강 양식으로 함께 묻혀 있다.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는 파주에, 폐비된 윤씨는 경희대학교가 있는  회기동에 묻혔다가 1967년 서삼능 자리로 옮겨졌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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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성삼문 - P126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박팽년 - P126

창 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 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가
저촛불 나와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더라

이개 - P126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쳤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진단 말가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 - P126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려더니
문의 수성 어적이 잠든 나를 깨워라

유성원 - P126

천만 리 머나먼 길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 울어 밤길 예는구나

왕방연(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영월에 두고돌아오는 길에 지었다는 시조) - P127

달 밝은 밤 소쩍새 슬피우니
시름 못 잊어 자규루에 기대었네
네 울음 소리 내 듣기 괴롭구나
그 소리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세상의 괴로운 이들에게 내 말을 전하노니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月白夜蜀魂啾
含愁情倚樓頭
爾啼悲找聞苦
無爾聲無我愁
寄語世上苦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영월 시절 단종이 지었다고 전하는 또 한 편의 시) - P127

탑골공원
탑골공원은 옛 원각사가 있었던 자리다.
불교를 숭상했던 세조는 대규모 불사를 많이  벌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공을 기울인 것은  원각사 중건이었다. 팔각정 옆에 서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보인다. - P128

광릉
세조와 정희왕후가 묻힌 곳이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곽과 석실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최초의 동역이강능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이후의 조선 왕릉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역이강능이란 동역(같은 영역,  즉 한 능호)안에 왕과 왕비가 독립된 봉분으로  조성된 능을 말한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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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문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즉위식은 근정전 앞에서도 하고 근정문 앞에서도 했는데 단종은 근정문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문 너머로 근정전이 보인다. - P8

돈의문
4대문의 하나로 서대문이라고 불렸는데 일제  때 철거되고 지금은 없다.
김종서를 철퇴로 내려친 수양대군 일당은 도성문을 모두 닫게 하고는 돈의문으로 들어가 권력을 장악했다. - P46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김종서 - P87

청령포
영월에 자리한 청령포는 동, 서, 북쪽은 물로  막히고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가로막힌 천연의 감옥이다. 단종은 이곳에 잠시 유배되었다가 곧 죽임을 당한다. - P88

둥둥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을 재촉하고
뒤돌아 보니 해는 벌써 저물고 있구나.
황천길엔 주말도 하나 없을 텐데
오늘 밤엔 누구 집에서 잘꼬.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성삼문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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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 🐦 끼
숙주 나물 10 8 ㄴ
한명 회쳐먹을 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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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의 무인석
대모산 자락에 자리한 헌릉,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가 묻혀 있다. 무력을 빌려 왕위에 오른 태종답게 호위하는 무인석의 부라린 눈이 사나워 보인다. - P8

주상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는 군사와 관련한  일은 내가 직접챙길 것이고, 그 밖에도 나라의  중요한 의논에는 참여하여 주상을 도울 것이오. - P13

옛 집현전 건물인 경복궁 수정전
왕립 학문 연구소로서 집현전은 세종이 벌이는  사업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한편,
인재 양성소 기능을 함으로써 황금 시대를 여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를 맡아했다는 등 부풀려진 면도 많다. - P42

<훈민정음 해례본> 예의편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와 집현전 학자들이 편찬한 훈민정음 해설서다. 사진의 예의편은 《월인석보》 책머리에 실려 전해 오는 것이고, 1940년경 안동의한 고가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완본이 발견되어 한글의 제자 원리가 밝혀짐으로써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 P88

동북면의 개척은내가 있어도 종서가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것이고, 또 총서가 있더라도 내가  없었으면 이룰 수없었을 것이다. - P125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吏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니,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 P126

출산이 예정된 달은 물론출산 후 100일을 쉴 수 있도록 하라.
나중엔 또 명하기를,
산모만 쉬게 하면 누가 산모를 돌볼 것인가?
남편도 산후 한 달간 쉬도록 하라. - P133

규표
방위, 절기,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 관측 기기.  세종은 규표, 간의, 혼천의 등 천문 관측 기구를 설치해 운영했고, 이를 이용해 조선만의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었으니바로 《칠정산 내외편》이다. - P140

자선당
세종 9년에 처음 지어진 경복궁 내 세자궁으로, 문종은 이곳에서 20년 넘게 지내며 군주  수업을 받았다. 세종 말년엔 병환 중인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도 했는데, 이를 위해 세종은 따로 계조당을 지어주었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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