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그런 미술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는 판화가 일찍부터있었지만 유럽에서는 15세기에야 비로소 활발히 제작돼요. 우리나라의 경우, 석가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은 제작연대가 751 년으로추정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죠. - P376

흥미롭게도 뒤러는 생애 중요한 시기마다 외국에서 상당한 시간을보낸 독특한 이력을 가진 화가였거든요. 알프스 이북과 이남 지역을 짧으면 1~2년, 길면 3~4년씩 여행하면서 작품 세계를 다양하게발전시켜나갔죠. 이 때문에 저는 뒤러를 ‘최초의 다국적 화가‘로 평가합니다. - P378

당시는 지리적 대발견이 이뤄지던 시대였어요. 1488년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고 1492년에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했거든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속속 알려지면서 뒤러처럼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다양한 주변 세계를 직접 두루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을 거예요. - P381

지리상의 발견은 세계에 대한 관심을 크게 끌어올렸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유럽 경제는 보다 큰 단계로 도약하게 됩니다. - P381

사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시장이 확대되거나 사유 재산이 늘어난다고 해서 가능한 건 아니었어요.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이면에 ‘세계 경제 시스템의 완성‘이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1500년을 중심으로 유럽은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뻗어나가면서 소위 ‘세계 경제 시스템‘을 체계화시켰다는 거예요. - P382

아래 그림은 뒤러가 그린 풀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풀 줄기뿐만 아니라 이파리까지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려한 꽃이 아닌 잡풀을 이렇게 진지하게 그렸다는 점이 신선하죠. 특히 여기서뒤러는 아주 낮은 시점을 택했어요. 그래서 이 그림은 "마치 곤충의눈으로 그린 것 같다"는 평가를 받죠. - P388

사실 뒤러가 영향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는 건 수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뒤러는 독특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저 여행만 다닌 게 아니라 여행기와 편지를 쓰고 그림까지 그리며 충실히 기록했던 거죠. - P389

물을 섞어서 그리는 수채화는 빨리 말라서 여행지의 현장감을 살리는 데 장점이 있죠. 뒤러가 남긴 여행스케치북은 그야말로 감동 그자체입니다. 다음 페이지를 보세요. 여기에 그려진 수채화들을 보고 있자면 뒤러가 수채화를 높은 예술단계로 올려놓은 화가라는걸 깨닫게 됩니다. - P390

스스로가 누구인지 고민하기 시작하다 
뒤러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도 해요. 이 관심은 바로 자화상으로 드러납니다. 뒤러는 10대부터, 정확히는 13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자화상을 그린 독특한 화가예요. - P392

특히 뒤러는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갖고 여행을 떠났기에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더욱 깊이 바라볼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러한 고민은 자화상에 반영됩니다. 다음페이지에는 뒤러의 자화상들이 실려 있어요. 이 중 맨 왼쪽은 뒤러가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입니다. - P392

르네상스 시기에는 유럽 안에서도 이렇게 문화 차이가 컸어요. 뒤러는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깊이 고민합니다. 특히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1506년에는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여기서 신사로 지내지만 고향에서는 한낱 식객에 지나지 않는다네"
라고 적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예술가가 대접받는데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은 현실을 한탄한 거죠. - P398

우리나라의 윤두서도 뒤러와 고민이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정치의중심에서 밀려난 몰락한 양반에다 벼슬도 가질 수 없었으니, 평생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을까요.
뒤러와 윤두서의 자화상은 시공간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비슷하게자기를 드러낸다는 점이 제게는 아주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 P399

사실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뒤러는 예수를 그릴 자리에 자기 얼굴을 집어넣은 겁니다. 아래에서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린 예수 얼굴과 뒤러의자화상을 비교해 보세요. 정면상이라는 점 그리고 손의 위치가 많이 비슷하죠 - P400

정리하자면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화가가 지닌 사회에 대한 의무, 즉 자신이 무언가를 창작해내는 자임을  새롭게 인식한 결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뒤러의 삶과 예술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여기서 잘 연결되죠. - P402

결국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화가의 사회적 가치를 자각한 모습으로일종의 ‘화가의 독립선언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P402

뒤러는 화가이자 과학자였고, 철학가이면서 여행문학가로도 이름을 남겼어요. 뒤러의 예술 업적 가운데 판화를 미술의 한 장르로 발전시킨 점에서 그의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 P403

말씀대로 가격이 저렴한 판화는 대중 친화적인 미술입니다. 유화는판화와 비교했을 때 가격이 비싸서 상류층을 위한 미술이었지요.
판화는 같은 크기인 유화에 비해 10분의 1, 때론 100분의 1 정도까지 가격이 쌌어요. 뒤러는 이처럼 값싼 미술로 알려진 판화를 미술의 한 장르로 개척해냅니다. 판화의 약점을 강점으로 역이용했다고볼 수 있어요. - P403

판화는 값이 싼 대신 많이 제작할 수 있으니 많이 팔 수만 있다면이윤을 더 낼 수 있다는 점을 알았던 겁니다. 판화를 수백 장 이상팔면 유화보다 훨씬 더 이득이라는 걸 정확히 간파했던 거죠. - P403

맞아요. 알파벳 D를 알파벳 A가 덮고 있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A와 D는 알브레히트의 ‘A‘,
뒤러의 ‘D‘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Anno Domini를 뜻합니다. Anno Domini는 라틴어로 그리스도의 해라는 뜻으로 서력기원을 의미하죠. - P407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 주장했던 사건은 아실 거예요. 이 혁명적인 주장을 담은 책이 최초로 출판된 곳은 바로 뉘른베르크입니다. 위 사진은 코페르니쿠스가 쓴 책의 표지예요. 제목이 ‘레볼루션‘, 그러니까 ‘전환‘이나 ‘혁명‘인 셈이죠.
이 같은 뉘른베르크가 배출한 최고 스타가 알브레히트 뒤러였던 겁니다. - P419

맞아요. 말을 타고 나치 깃발을 든 히틀러입니다. 뒤러가 그려낸 기사의 히틀러 버전이지요. 다소 충격적이기도 합니다만, 앞서 스티브 잡스의 초상 사진부터 히틀러 버전의 기사까지 뒤러의 이미지는현대에 와서도 다양한 각도로 새롭게 활용됩니다. 뒤러의 지대한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P420

"두려워하라!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그 누구도 내 판화를 찍어내거나 조잡한 모방품으로 만들어 팔 수 없다. 내가 이 권리를 영광스러운 황제 막시밀리안에게서 받았음을 모르는가? 들어라! 만일 그대가 악의와 탐욕으로 이를 어기게 된다면 그대의 재산이 압수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몸도 안전하지 않을 것을 명심하라.‘
" - P424

지리상 대발견이 끊임없이 이뤄지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뒤러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키워갔다. 그 관심은 여행으로 표출되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여행 중 목격한 이탈리아미술의 번영은 뒤러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도록 이끌었다. - P431

베네치아에서 판화 표절 사건이 일어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통해저작권을 획득함. → 이 관계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거상인 야코프 무거가 맺어준 것. - P431

세상에 아름다운 곳은 많아도 베네치아만 한 곳은 없다.
도시 자체가 물 위에 떠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특히 비잔티움 제국의 전통을 잘 간직한 이곳에서사람들은 동방적 분위기와 이국적 풍취에 빠져들었다.
바닷길과 운하를 통해 세계 각국의 상인과 진귀한 물건이넘나들고 모여든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여러 문화가만나고 뒤섞인 베네치아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 성당, 이탈리아 베네치아 - P436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이탈리아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이탈리아를사람들의 흥을 돋울 줄 아는 사람은 나폴리를 선호할 것이고감상적인 사람은 베네치아를 선택할 것이다.
미셸 피에르, 「열정의 이탈리아」 - P437

이때 베네치아는 ‘인간의 모든 상행위가 집중된 곳‘, ‘부가 분수처럼넘쳐흐르는 곳‘, ‘넘쳐나는 상품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곳‘으로알려졌습니다. - P439

경제사에서는 베네치아가 플랑드르 도시들보다 한발 앞서 중세 상업 세계를 이끌었다고 봐요. 이 때문에 상업자본주의의 계보를 따질 때 아래 표처럼 베네치아를 맨 위에 두어야 할 거예요.
11세기 베네치아
15세기 브뤼헤
16세기 안트베르펜
17세기 암스테르담
상업자본주의의 시기별 중심도시 - P441

베네치아나 플랑드르 모두 늪지대이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고 도시 안은 운하로 촘촘히 짜여 뱃길이 발달했어요. 이 관점에서 보면상업 활동에는 강점을 지녔던 겁니다. 농사지을 땅이 없었던 베네치아나 플랑드르 사람들에게 상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어요. 이때문에 두 지역 모두 상업에 매진하다가 크게 성공하죠. - P446

베네치아 전체를 놓고 보면 물고기 두 마리의 입이 맞물린 듯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마주한 두 물고기 머리 사이로 큰 운하가 있어요.
이 운하를 카날 그란데라고 부릅니다. 15세기나 16세기에 형성된이런 도시 모습은 현재와 큰 변화가 없지요. - P449

바로 그겁니다. 정부 청사가 활짝 열린 형태여도 무방했던 거죠. ‘우리 베네치아는 안정된 정치를 일찍부터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내륙의 모든 도시국가는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죽도록 싸웠어요. 내부적으로도 여러 정치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고요. 베네치아에서는 이탈리아 내륙에 비하면 그런 싸움이나 내부 갈등이 없었어요. - P477

역사학자들은 베네치아 국민의 모든 이익이 딱 하나, 바로 무역에서 비롯했고 이해관계가 거의 똑같아서 싸울 일이 별로 없었다고 설명해요. - P477

정리하자면 기적이 일어나는 도시 베네치아에 대한 자신감을 호들갑 떠는 방식이 아니라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한 거예요. 당시 여러지역을 지배했던 베네치아가 지녔던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집니다.
이 점은 비슷한 일화를 묘사한 다른 그림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요. 바로 ‘산 로렌초 다리 근처에서 일어난 성 십자가의 기적‘이란 작품이에요. 오늘날 이 그림은 앞서 본 ‘산 마르코 광장의 행진‘
과 나란히 아카데미아미술관에 걸려 있죠. - P492

플랑드르 이전에 상업 세계의 대학교 역할을 할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던 베네치아는안정된 정치 환경 속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온갖 호화로운 물건들을 접하며 독특한 미술양식을 만들어나갔다. 이들이 자기 도시에 대해 느꼈던 자부심은 베네치아에서 그려진그림들에 나타난다. - P503

석호를 개간해서 만든 인공 섬. 섬 118개를 다리 400여 개로 연결함.
석호가 적의 침입을 막아줬으며 운하가 발달해 국제 상업도시로 성장. - P503

신의 머리카락은 라피스라줄리로 되어 있다.
- 고대 이집트인 - P504

변화의 빛: 야코포 벨리니 
곧 베네치아도 피렌체에서 일어난 회화의 혁신을 따라잡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베네치아 화가로 야코포 벨리니를 주목해볼 수있습니다. ‘벨리니‘라는 이름이 어쩐지 익숙하죠? 산 마르코 광장의행진을 그린 젠틸레 벨리니가 야코포 벨리니의 아들이에요. - P508

그렇다면 베네치아 화가들도 이젠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한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16세기를 전후해 베네치아 회화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피렌체가 원근법을 통해 회화의 혁신을 이루어냈다면, 베네치아는 다른 측면에서 회화의 혁신을 완성하는데, 바로 ‘색채‘ 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베네치아가 색채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16세기미술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 P527

역동적인 공간: 티치아노의 페사로 제대화 
이제 베네치아 미술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을 살펴봅시다.
티치아노가 그린 페사로 제대화입니다. 티치아노Tiziano는 앞서 조반니 벨리니를 잇는 베네치아 화가라고 소개해드렸습니다. 확실히베네치아 회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국제적인 명성도 대단해서 유럽 각국마다 그를 다르게 부를 정도예요.
예를 들어 영어로는 티션Titian, 프랑스어로는 티셩Titien, 독일어로는 티치안Tizian이라고 부른답니다. - P559

그 집안들이 유력 가문으로 커나가기도 했지요? 베네치아도 마찬가지였나요?
베네치아에서 일찍 성공한 상인 가문 중 일부는 귀족에 속하면서정치적으로 보다 높은 권한을 누립니다. 예를 들어 페사로 가문의남성은 성인이 되면 베네치아를 이끄는 원로원 의원에 자동 선출되었습니다. - P568

요즘이라면 선거를 꼭 거쳐야 할 텐데, 그런 과정이 필요 없는 금수저 의원인 셈이네요.
당시 베네치아는 신분제 사회였고, 원로원 의원을 배출할 집안을제한했습니다. 정해진 가문의 구성원만 국가를 대표할 수 있었죠.
페사로 제대화 속 페사로 가문의 남성은 국회의원이거나 국회의원이 될 자격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특히 눈에 띄는사람이 있지 않나요? - P568

1453년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1000년 이상 이어온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끝내버립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지배 영역을 넓혀가면서 베네치아가 다스리던 지중해의 여러지역을 속속 빼앗아버리죠. 그 결과 16세기를 거치면서 지중해에대한 베네치아의 장악력은 축소되고,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할 기회가 크게 줄어들고 만 겁니다. - P570

세상일을 한 치 앞도 알 수 없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군요.
지리 환경도 급격히 변하고 있었어요.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이희망봉을 거쳐 항로를 개척하면서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의 대서양이 문명의 바다로 거듭납니다. 베네치아가 주도했던 지중해 시대는막을 내리고 있었던 거죠. - P570

유럽 대륙의 정세도 격변하고 있었습니다. 페사로 제대화가 그려지기 두 해 전부터 독일에서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커지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죠. - P570

이 소년이 앞으로 활동할 16세기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였습니다. 이처럼 뜨겁게 변모하는 시대상황과 이에 발맞추어 다채롭게 변화하는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강의에 풀어놓으려 합니다. - P570

르네상스가 오기 전까지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받은 전통을 고수해오고있었다. 그러던 중 원근법과 유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며 16세기에 이르러황금시대를 맞이한다. 그도약의 바탕에는 안료 무역과 캔버스화가 있었다. - P571

.베네치아는 안료 무역의 중심지로 좋은 안료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음.
색채 중심으로 회화 발전.
• 습한 기후로 인해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함.
강렬한 색채 표현이 가능해졌으며 생생한 붓 터치 등 표현이 다양해짐. - P571

더 읽어보기
나의 미술 이야기는 내 지식의 깊이라기보다는 관심의 폭에 기댄 결과물이다. 미술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의 최대치를 용감하게 던졌다. 그러나 논의된 시기와 지역이 방대해지면서 일정한 오류도 피할 수 없게되었다. 앞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은 성실한 수정으로 보완하겠다는 말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 책은 많은 국내의 선행 연구자들의 노고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전문서의 무게감을 독자들에게 지우지 않기 위해 각주를 달지 않았다. 책에 빛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미술사학계의 업적에 기댄 결과다. 초고 정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제자 양정애, 송준영의 도움이 컸고, 마지막 교정 작업에는 고용수, 이샘, 박정선, 김가령, 김진주, 박원영의 도움이 컸다.
수록된 작품의 작품명과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소장처의 홈페이지 정보를 참고하되 학계에서 일반적으로통용되는 기준과 비교해 정리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경우에는 제프리 스미스의 책을 많이 참고했고,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경우에는 퍼트리샤 포르티니 브라운의 책을 기준으로 했다. - P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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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삶과 작품 세계가 모두 파란만장하네요.
리멘슈나이더의 작품은 이후 사람들에게도 솔직하고 진정성 있게다가갔을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 틸만 리멘슈나이더가 보여주는 미술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 P356

북유럽 제대화의 결정판: 이젠하임 제대화 
이제 마지막으로 제대화를 하나 더 살펴보러 갑시다. 프랑스의 자그마한 도시로 발길을 옮겨볼까요? 콜마르라는 곳인데, 여기에 가면 지금까지 살핀 제대화의 세계를 총정리해줄 만한 작품을 만날수 있습니다. 바로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대화입니다. - P356

이 지방은 상황에 따라 프랑스에 속했다 독일에 속했다  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후 완전히 프랑스에 속합니다. 이젠하임 제대화도 지금 프랑스에 있습니다만 그걸그린 그뤼네발트는 독일출신작가예요. 아무튼 기차로 콜마르에가려면 일단 스트라스부르 같은 큰 도시에서 갈아타야 합니다. - P359

맥각 중독증은 맥각균에 오염된 호밀이나 보리 곡물을 섭취하면 결리는 병입니다. 밀을 주식으로 하던 유럽인에게는 아주 치명적인질병이에요. 요즘은 맥각 중독증이라 부르지만 당시에는 ‘성 안토니우스의 병‘이라고했죠. 이 병에 걸리면 손끝과 발끝이 불에 타들어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고 해요. 성 안토니우스는 이 고통스러운 병을 낫게 해줄 거라 믿어졌고요. 맥각 중독증에 걸리면 처음엔 손발이 저리다가 나중에는 괴사해 결국 사지를 절단해야만 했어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무서운 질병이었습니다. - P364

그림이 담은 
치유의 염원 이젠하임 제대화가 예수가 겪은 고통만 담아낸 건 아닙니다. 2단계모습의 오른쪽 날개엔 예수의 부활 장면이 그려졌어요.
다음 페이지를 보세요. 여기서 예수는 모든 상처가 말끔하게 치유된 모습이죠. - P369

네, 제대화를 볼 때 장소성을 고려하면 좋습니다. 앞서 본 병원용그림들이 담고자 했던 치유의 염원이라는 메시지는 병원이라는 공간 속에서 더 강렬하게 다가왔을 테죠. 저는 이처럼 당시 미술이 지닌 메시지를 작품이 놓였던 실제 공간 속에서 읽어내려는 오늘날미술사학계의 노력을 존중합니다. - P372

북유럽에서 그려진 수많은 제대화 중에서도 십자가에서 내리심, 포르티나리 제대화,
성 볼프강 제대화, 예수 성혈 제대화, 이젠하임 제대화는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 P373

누구든지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사람은이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을 차용해야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 P375

알프스산맥을 사이에 두고 제각각 다른 길을 걷던 이탈리아와 북유럽 미술은 1500년을 전후로 조화롭게 융합할 가능성을 찾습니다.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입니다.
뒤러는 이탈리아와 북유럽 미술을 조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시 미술을 한 단계 끌어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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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히어르 반 데르 베이던, 십자가에서 내리심, 1440년경, 프라도미술관, 로히어르 반 데르 베이던은 로베르 캉팽의 제자로 그 화풍을 이어받았다. 베이던의 작품은 플랑드르 양식을 유럽 전역에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했다. - P312

서로의 강점을 파악한 뒤 그 점을 배우려고 했던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시도는 처음엔 엇박자를 냈습니다. 그렇지만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각자의 특징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자기화가 됩니다.
이탈리아의 시각적 혁신과 북유럽의 섬세한 표현력을 소화한 뒤러가 보여주는 완전히 새로운 미술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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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대성당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쾰른 대성당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라인강 강변의 언덕 위에 세워진 쾰른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을 보려고 매일2만여 명의 여행객이 방문하고 있다. - P289

ㅣ다폭화의 세계: 헨트 제대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폭화에서 폭이 더 늘어나면 네폭화, 다섯폭화라고 하지 않고 다폭화라고 합니다. 아래에 보이는 헨트 제대화는 가장 대표적인 다폭화예요. - P292

이뿐만이 아니에요. 위를 보시면 교황이 세 명 보입니다. 1309년에교황이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따로 교황을 선출하는 일이 생기거든요. 이 시기를 교회 대분열 시기라고 합니다. 맨 오른쪽부터 마르티누스 5세, 알렉산데르5세,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으로 추정해요. - P299

헨트 제대화는 종교라는 신비한 주제를 다루면서 당시 현실 문제에 대한 참여의 메시지도 전해줍니다. - P300

글쎄요. 가끔 제게 이처럼 고화질 도판이 나오는 세상에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작품을 보러 갈 필요가 있는지 묻는 분들이 있어요. 그때 저는늘 이렇게 되묻습니다. 사람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만나보는 것이같으냐고 말이죠. - P308

작품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가서 눈에 담는 건 차이가 큽니다. 분명 고화질 도판이 주는 정보량은 엄청나죠. 그렇다고 실물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반 에이크 형제가 그린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그 어떤 사진이나 복제품이 주는것보다 강렬하지요. - P308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 작품 상당수는 성당을 장식하거나 채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제대 위에 놓이는 그림이나 조각인 제대화는 당시 교회 미술의 핵심이었다. - P309

종교에 있어서는 신성한 것만이 진실이며,
철학에 있어서는 진실한 것만이 신성하다.
- L. A. 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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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를 켰을 때 그림그리는 데쓸만한 나무판은 가운데 한두장뿐이다. - P246

오크나무가 그림 그리기에 좋은 나무였나요?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북유럽은 날씨 때문에오크나무가 많았습니다. 오크나무는 단단하고 밀도가 높아 잘 뒤틀리지 않아요. - P246

중세 시대 화가의 작업실 풍경, 1403년경
화가 옆에서 조수가 물감을 개고 있다. 중세 시대부터 르네상스까지 화가는 물감을직접 만들어 써야만 했다. - P249

슬슬 이쯤이면 이토록 경이로운 유화 기법을 누가 발명했는지 궁금해질 법도 한데요. 이에 대한 설은 16세기에 이미 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 전설적인 화가가 바로 지금껏 여러 번 등장한 얀 반 에이크라는 거죠. 이탈리아 화가들의 생애를 정리한 조르조 바사리 역시 플랑드르의 대가 반에이크 형제가 유화 기법을 발명했다고 자기 책 『미술가 열전』에 적었습니다. - P254

이 시기 알프스 이북에서는이탈리아의 원근법을 배우려 했고, 알프스 이남 그러니까 이탈리아에서는 플랑드르의 유화 기법을 배우려했어요. - P260

1420 년에서 1430 년 사이, 북유럽에서는 로베르 캉팽과 얀 반 에이크 같은 화가들이나타나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보여준 놀라운사실성은 유화 기법이라는 새로운 미술 매체의 등장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곧이탈리아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 P267

신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 P268

르네상스라고 하면 새로운 미술이 많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여전히 종교 그림이 지배적이었어요. 그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수준 높은 패널화들은 성당에서 제대화로 쓰였죠. 혹시 유럽에 여행 가서 성당이나 미술관에 들러 제대화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 P269

르네상스 시기에도 여전히 미술의 중심은 교회였어요. 그 가운데서도 제대화는르네상스 교회 미술의 핵심 중 핵심이었습니다. - P269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내부, 안트베르펜 
종교개혁기 안트베르펜은 일시적으로 신교 편에 선다. 이때 대성당 내부에 자리했던 미술 작품들은 우상으로 간주되어 파괴당했다. 하지만 이후복구 현재는 전통적인 고딕 성당의 내부 모습을 보여준다. - P271

안트베르펜 성모 마리아 대성당 중앙 제대의 모습 
제대 위에는 루벤스가 1626년에완성한 성모승천도가 자리한다. - P273

초기 제대화와 알타프론트의 모습 상상도 
제대 위에 놓인 손햄 파르바 제대화는 현재 영국서퍽의 성모 교회에 있고 알타프론트 그림은 프랑스 파리의 클뤼니국립중세박물관에 있다.
1330~1340년경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 P275

이 시기 북유럽에서는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즉 현대적 신앙이라고 해서개인 묵상이나 영적 수련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습니다. 이 그림 속 남성은 이런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거죠. - P282

「그리스도를 본받아」 표지, 1505년, 네덜란드 출판본토마스 아 켐피스가 15세기에 썼다고 알려진 이 책은 개인 묵상이나영적 수련을 북유럽에 널리 유행시켰다. - P282

맞아요. 바로 메로데 제대화를 후원한 기부자 부부입니다. 그런데부인이 뒤로 밀려나 있네요. 기부자가 그림을 주문하고 제작하던도중에 결혼을 한 것 같아요. 급하게 부인의 모습을 넣으려다 보니한쪽으로 몰리게 된 거겠지요.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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