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그런 미술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는 판화가 일찍부터있었지만 유럽에서는 15세기에야 비로소 활발히 제작돼요. 우리나라의 경우, 석가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은 제작연대가 751 년으로추정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이라고 할 수 있죠. - P376

흥미롭게도 뒤러는 생애 중요한 시기마다 외국에서 상당한 시간을보낸 독특한 이력을 가진 화가였거든요. 알프스 이북과 이남 지역을 짧으면 1~2년, 길면 3~4년씩 여행하면서 작품 세계를 다양하게발전시켜나갔죠. 이 때문에 저는 뒤러를 ‘최초의 다국적 화가‘로 평가합니다. - P378

당시는 지리적 대발견이 이뤄지던 시대였어요. 1488년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고 1492년에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했거든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속속 알려지면서 뒤러처럼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다양한 주변 세계를 직접 두루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을 거예요. - P381

지리상의 발견은 세계에 대한 관심을 크게 끌어올렸어요. 그리고 이때부터 유럽 경제는 보다 큰 단계로 도약하게 됩니다. - P381

사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시장이 확대되거나 사유 재산이 늘어난다고 해서 가능한 건 아니었어요.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이면에 ‘세계 경제 시스템의 완성‘이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1500년을 중심으로 유럽은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뻗어나가면서 소위 ‘세계 경제 시스템‘을 체계화시켰다는 거예요. - P382

아래 그림은 뒤러가 그린 풀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풀 줄기뿐만 아니라 이파리까지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려한 꽃이 아닌 잡풀을 이렇게 진지하게 그렸다는 점이 신선하죠. 특히 여기서뒤러는 아주 낮은 시점을 택했어요. 그래서 이 그림은 "마치 곤충의눈으로 그린 것 같다"는 평가를 받죠. - P388

사실 뒤러가 영향력 있는 화가로 인정받는 건 수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뒤러는 독특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저 여행만 다닌 게 아니라 여행기와 편지를 쓰고 그림까지 그리며 충실히 기록했던 거죠. - P389

물을 섞어서 그리는 수채화는 빨리 말라서 여행지의 현장감을 살리는 데 장점이 있죠. 뒤러가 남긴 여행스케치북은 그야말로 감동 그자체입니다. 다음 페이지를 보세요. 여기에 그려진 수채화들을 보고 있자면 뒤러가 수채화를 높은 예술단계로 올려놓은 화가라는걸 깨닫게 됩니다. - P390

스스로가 누구인지 고민하기 시작하다 
뒤러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도 해요. 이 관심은 바로 자화상으로 드러납니다. 뒤러는 10대부터, 정확히는 13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자화상을 그린 독특한 화가예요. - P392

특히 뒤러는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갖고 여행을 떠났기에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더욱 깊이 바라볼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러한 고민은 자화상에 반영됩니다. 다음페이지에는 뒤러의 자화상들이 실려 있어요. 이 중 맨 왼쪽은 뒤러가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입니다. - P392

르네상스 시기에는 유럽 안에서도 이렇게 문화 차이가 컸어요. 뒤러는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깊이 고민합니다. 특히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1506년에는 고향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여기서 신사로 지내지만 고향에서는 한낱 식객에 지나지 않는다네"
라고 적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예술가가 대접받는데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은 현실을 한탄한 거죠. - P398

우리나라의 윤두서도 뒤러와 고민이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정치의중심에서 밀려난 몰락한 양반에다 벼슬도 가질 수 없었으니, 평생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을까요.
뒤러와 윤두서의 자화상은 시공간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비슷하게자기를 드러낸다는 점이 제게는 아주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 P399

사실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뒤러는 예수를 그릴 자리에 자기 얼굴을 집어넣은 겁니다. 아래에서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린 예수 얼굴과 뒤러의자화상을 비교해 보세요. 정면상이라는 점 그리고 손의 위치가 많이 비슷하죠 - P400

정리하자면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화가가 지닌 사회에 대한 의무, 즉 자신이 무언가를 창작해내는 자임을  새롭게 인식한 결과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 뒤러의 삶과 예술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여기서 잘 연결되죠. - P402

결국 뒤러의 28살 자화상은 화가의 사회적 가치를 자각한 모습으로일종의 ‘화가의 독립선언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 P402

뒤러는 화가이자 과학자였고, 철학가이면서 여행문학가로도 이름을 남겼어요. 뒤러의 예술 업적 가운데 판화를 미술의 한 장르로 발전시킨 점에서 그의 뛰어난 비즈니스 감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 P403

말씀대로 가격이 저렴한 판화는 대중 친화적인 미술입니다. 유화는판화와 비교했을 때 가격이 비싸서 상류층을 위한 미술이었지요.
판화는 같은 크기인 유화에 비해 10분의 1, 때론 100분의 1 정도까지 가격이 쌌어요. 뒤러는 이처럼 값싼 미술로 알려진 판화를 미술의 한 장르로 개척해냅니다. 판화의 약점을 강점으로 역이용했다고볼 수 있어요. - P403

판화는 값이 싼 대신 많이 제작할 수 있으니 많이 팔 수만 있다면이윤을 더 낼 수 있다는 점을 알았던 겁니다. 판화를 수백 장 이상팔면 유화보다 훨씬 더 이득이라는 걸 정확히 간파했던 거죠. - P403

맞아요. 알파벳 D를 알파벳 A가 덮고 있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A와 D는 알브레히트의 ‘A‘,
뒤러의 ‘D‘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Anno Domini를 뜻합니다. Anno Domini는 라틴어로 그리스도의 해라는 뜻으로 서력기원을 의미하죠. - P407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 주장했던 사건은 아실 거예요. 이 혁명적인 주장을 담은 책이 최초로 출판된 곳은 바로 뉘른베르크입니다. 위 사진은 코페르니쿠스가 쓴 책의 표지예요. 제목이 ‘레볼루션‘, 그러니까 ‘전환‘이나 ‘혁명‘인 셈이죠.
이 같은 뉘른베르크가 배출한 최고 스타가 알브레히트 뒤러였던 겁니다. - P419

맞아요. 말을 타고 나치 깃발을 든 히틀러입니다. 뒤러가 그려낸 기사의 히틀러 버전이지요. 다소 충격적이기도 합니다만, 앞서 스티브 잡스의 초상 사진부터 히틀러 버전의 기사까지 뒤러의 이미지는현대에 와서도 다양한 각도로 새롭게 활용됩니다. 뒤러의 지대한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P420

"두려워하라!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그 누구도 내 판화를 찍어내거나 조잡한 모방품으로 만들어 팔 수 없다. 내가 이 권리를 영광스러운 황제 막시밀리안에게서 받았음을 모르는가? 들어라! 만일 그대가 악의와 탐욕으로 이를 어기게 된다면 그대의 재산이 압수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몸도 안전하지 않을 것을 명심하라.‘
" - P424

지리상 대발견이 끊임없이 이뤄지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뒤러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키워갔다. 그 관심은 여행으로 표출되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여행 중 목격한 이탈리아미술의 번영은 뒤러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도록 이끌었다. - P431

베네치아에서 판화 표절 사건이 일어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통해저작권을 획득함. → 이 관계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거상인 야코프 무거가 맺어준 것. - P431

세상에 아름다운 곳은 많아도 베네치아만 한 곳은 없다.
도시 자체가 물 위에 떠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특히 비잔티움 제국의 전통을 잘 간직한 이곳에서사람들은 동방적 분위기와 이국적 풍취에 빠져들었다.
바닷길과 운하를 통해 세계 각국의 상인과 진귀한 물건이넘나들고 모여든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 여러 문화가만나고 뒤섞인 베네치아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 성당, 이탈리아 베네치아 - P436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이탈리아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이탈리아를사람들의 흥을 돋울 줄 아는 사람은 나폴리를 선호할 것이고감상적인 사람은 베네치아를 선택할 것이다.
미셸 피에르, 「열정의 이탈리아」 - P437

이때 베네치아는 ‘인간의 모든 상행위가 집중된 곳‘, ‘부가 분수처럼넘쳐흐르는 곳‘, ‘넘쳐나는 상품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곳‘으로알려졌습니다. - P439

경제사에서는 베네치아가 플랑드르 도시들보다 한발 앞서 중세 상업 세계를 이끌었다고 봐요. 이 때문에 상업자본주의의 계보를 따질 때 아래 표처럼 베네치아를 맨 위에 두어야 할 거예요.
11세기 베네치아
15세기 브뤼헤
16세기 안트베르펜
17세기 암스테르담
상업자본주의의 시기별 중심도시 - P441

베네치아나 플랑드르 모두 늪지대이지만 바다와 연결되어 있고 도시 안은 운하로 촘촘히 짜여 뱃길이 발달했어요. 이 관점에서 보면상업 활동에는 강점을 지녔던 겁니다. 농사지을 땅이 없었던 베네치아나 플랑드르 사람들에게 상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어요. 이때문에 두 지역 모두 상업에 매진하다가 크게 성공하죠. - P446

베네치아 전체를 놓고 보면 물고기 두 마리의 입이 맞물린 듯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마주한 두 물고기 머리 사이로 큰 운하가 있어요.
이 운하를 카날 그란데라고 부릅니다. 15세기나 16세기에 형성된이런 도시 모습은 현재와 큰 변화가 없지요. - P449

바로 그겁니다. 정부 청사가 활짝 열린 형태여도 무방했던 거죠. ‘우리 베네치아는 안정된 정치를 일찍부터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내륙의 모든 도시국가는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죽도록 싸웠어요. 내부적으로도 여러 정치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고요. 베네치아에서는 이탈리아 내륙에 비하면 그런 싸움이나 내부 갈등이 없었어요. - P477

역사학자들은 베네치아 국민의 모든 이익이 딱 하나, 바로 무역에서 비롯했고 이해관계가 거의 똑같아서 싸울 일이 별로 없었다고 설명해요. - P477

정리하자면 기적이 일어나는 도시 베네치아에 대한 자신감을 호들갑 떠는 방식이 아니라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한 거예요. 당시 여러지역을 지배했던 베네치아가 지녔던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집니다.
이 점은 비슷한 일화를 묘사한 다른 그림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요. 바로 ‘산 로렌초 다리 근처에서 일어난 성 십자가의 기적‘이란 작품이에요. 오늘날 이 그림은 앞서 본 ‘산 마르코 광장의 행진‘
과 나란히 아카데미아미술관에 걸려 있죠. - P492

플랑드르 이전에 상업 세계의 대학교 역할을 할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던 베네치아는안정된 정치 환경 속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온갖 호화로운 물건들을 접하며 독특한 미술양식을 만들어나갔다. 이들이 자기 도시에 대해 느꼈던 자부심은 베네치아에서 그려진그림들에 나타난다. - P503

석호를 개간해서 만든 인공 섬. 섬 118개를 다리 400여 개로 연결함.
석호가 적의 침입을 막아줬으며 운하가 발달해 국제 상업도시로 성장. - P503

신의 머리카락은 라피스라줄리로 되어 있다.
- 고대 이집트인 - P504

변화의 빛: 야코포 벨리니 
곧 베네치아도 피렌체에서 일어난 회화의 혁신을 따라잡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베네치아 화가로 야코포 벨리니를 주목해볼 수있습니다. ‘벨리니‘라는 이름이 어쩐지 익숙하죠? 산 마르코 광장의행진을 그린 젠틸레 벨리니가 야코포 벨리니의 아들이에요. - P508

그렇다면 베네치아 화가들도 이젠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한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16세기를 전후해 베네치아 회화는 그야말로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피렌체가 원근법을 통해 회화의 혁신을 이루어냈다면, 베네치아는 다른 측면에서 회화의 혁신을 완성하는데, 바로 ‘색채‘ 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베네치아가 색채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16세기미술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 P527

역동적인 공간: 티치아노의 페사로 제대화 
이제 베네치아 미술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을 살펴봅시다.
티치아노가 그린 페사로 제대화입니다. 티치아노Tiziano는 앞서 조반니 벨리니를 잇는 베네치아 화가라고 소개해드렸습니다. 확실히베네치아 회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국제적인 명성도 대단해서 유럽 각국마다 그를 다르게 부를 정도예요.
예를 들어 영어로는 티션Titian, 프랑스어로는 티셩Titien, 독일어로는 티치안Tizian이라고 부른답니다. - P559

그 집안들이 유력 가문으로 커나가기도 했지요? 베네치아도 마찬가지였나요?
베네치아에서 일찍 성공한 상인 가문 중 일부는 귀족에 속하면서정치적으로 보다 높은 권한을 누립니다. 예를 들어 페사로 가문의남성은 성인이 되면 베네치아를 이끄는 원로원 의원에 자동 선출되었습니다. - P568

요즘이라면 선거를 꼭 거쳐야 할 텐데, 그런 과정이 필요 없는 금수저 의원인 셈이네요.
당시 베네치아는 신분제 사회였고, 원로원 의원을 배출할 집안을제한했습니다. 정해진 가문의 구성원만 국가를 대표할 수 있었죠.
페사로 제대화 속 페사로 가문의 남성은 국회의원이거나 국회의원이 될 자격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특히 눈에 띄는사람이 있지 않나요? - P568

1453년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1000년 이상 이어온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끝내버립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지배 영역을 넓혀가면서 베네치아가 다스리던 지중해의 여러지역을 속속 빼앗아버리죠. 그 결과 16세기를 거치면서 지중해에대한 베네치아의 장악력은 축소되고,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할 기회가 크게 줄어들고 만 겁니다. - P570

세상일을 한 치 앞도 알 수 없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군요.
지리 환경도 급격히 변하고 있었어요.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이희망봉을 거쳐 항로를 개척하면서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의 대서양이 문명의 바다로 거듭납니다. 베네치아가 주도했던 지중해 시대는막을 내리고 있었던 거죠. - P570

유럽 대륙의 정세도 격변하고 있었습니다. 페사로 제대화가 그려지기 두 해 전부터 독일에서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커지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죠. - P570

이 소년이 앞으로 활동할 16세기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였습니다. 이처럼 뜨겁게 변모하는 시대상황과 이에 발맞추어 다채롭게 변화하는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강의에 풀어놓으려 합니다. - P570

르네상스가 오기 전까지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받은 전통을 고수해오고있었다. 그러던 중 원근법과 유화라는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며 16세기에 이르러황금시대를 맞이한다. 그도약의 바탕에는 안료 무역과 캔버스화가 있었다. - P571

.베네치아는 안료 무역의 중심지로 좋은 안료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음.
색채 중심으로 회화 발전.
• 습한 기후로 인해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기 시작함.
강렬한 색채 표현이 가능해졌으며 생생한 붓 터치 등 표현이 다양해짐. - P571

더 읽어보기
나의 미술 이야기는 내 지식의 깊이라기보다는 관심의 폭에 기댄 결과물이다. 미술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의 최대치를 용감하게 던졌다. 그러나 논의된 시기와 지역이 방대해지면서 일정한 오류도 피할 수 없게되었다. 앞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은 성실한 수정으로 보완하겠다는 말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 책은 많은 국내의 선행 연구자들의 노고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전문서의 무게감을 독자들에게 지우지 않기 위해 각주를 달지 않았다. 책에 빛나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미술사학계의 업적에 기댄 결과다. 초고 정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제자 양정애, 송준영의 도움이 컸고, 마지막 교정 작업에는 고용수, 이샘, 박정선, 김가령, 김진주, 박원영의 도움이 컸다.
수록된 작품의 작품명과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소장처의 홈페이지 정보를 참고하되 학계에서 일반적으로통용되는 기준과 비교해 정리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경우에는 제프리 스미스의 책을 많이 참고했고,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경우에는 퍼트리샤 포르티니 브라운의 책을 기준으로 했다. - P5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