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야 할 ‘나쁜 소문’

A씨에게

기면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저,박수지 역

세상에는 자신을 꼭 닮은 사람이 반드시 세 명은 있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의 진위는 잠시 제쳐두고 시시야 가도미鹿谷門는 그 남자를 만나기까지 그 정도로 자신과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미로관의 살인』은 시시야 가도미가 지금의 필명으로 발표한 첫 번째 소설로, 말하자면 추리소설가 데뷔작이다. 1988년 9월에 간행되었으니 벌써 만 4년이 지났다.

휴가 교스케의 첫 작품 『너희는 그 짐승의 이름을 부르지 말지어다』는 그해 초에 출간되었다.

현실에서 ‘미로관 살인사건’이 일어난 건 1987년 4월이니 벌써 5년 반 전의 일이다. 이제 와서 그 사건과, 그것을 ‘재현’한 소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마음은 없었다.

"며칠 전부터 이쪽 귀가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돌발성 난청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대신 가주셨으면 해서요. 저 대신 그 모임에 참석해주세요."

"제가 대리로 출석해도 되는 겁니까?"

"조건이 맞는 몇 사람을 초대해서 1박 2일을 함께 보내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그것뿐인데 참가자 한 사람당 무려 200만 엔이나 사례금을 준다고 해서."

"그렇게 외진 곳에 세운 건물치고는 상당히 훌륭한 저택입니다. 집주인이 취미로 수집한 진기한 가면을 전시해놓았는데 건물 자체도 상당히 특이합니다. 가면관假面館인지 기면관奇面館인지,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더군요."

그는 때때로 그 꿈을 꾼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은 그 끔찍한 꿈을.

첫 느낌은 캄캄한 암흑이다.

뭐랄까, 몹시 무기적無機的이고 지독하게 냉혹한, 살아 있는 인간과는 동떨어진 느낌의 그 얼굴을 보고…….

악마.

여기가 정말 도쿄일까? 이렇게 깊은 산골 구석도 도쿄 도라고 부르나?

사실 도쿄는 넓다. 23구區 말고도 많은 시市가 있고, 군郡과 촌村도 있고, 외딴섬까지 있다. 그런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오늘 이런 산속의 외진 곳까지 올 줄이야…….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도쿄라고 하면 여하튼 대도시를 떠올리기 마련이고 도코 역시 그랬다. 대학 진학을 위해 3년 전에 상경하고 나서도 그런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쿠타마나 히노하라촌 같은 지명을 들어도 그게 자신이 아는 시골이나 산촌이라는 풍경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벌써 4월인데도 마치 한겨울처럼 추웠다. 오는 도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도착해보니 건물 지붕이며 숲의 나무들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아아, 긴장된다.

……아아, 진짜. 너무 긴장된다.

"니즈키 씨를 위해 준비한 가면입니다. 회장님이 계실 때는 반드시 착용하십시오. 회장님께 민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노면能面*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가는 눈. 구부러진 눈썹을 앞으로 모으고 코 아래에는 옅은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귀공자 가면 같기도 하고 ‘젊은 남자’ 노면 같기도 했다.

* 일본의 전통 가무극인 노(能)의 가면. 남자, 여자, 노인, 신령 등 다양한 모습이 있다.

"가면 컬렉션룸입니다. 저택의 첫 주인인 가게야마 도이치 님이 동서고금의 다양한 가면을 수집하는 게 취미였다고 들었습니다."

"달리 적당한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수상한 단체의 위험한 집회 같은 거 아니니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그 이모가 하쿠산에 있는 가게야마 집안 본가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오늘 이 일도 원래는 이모의 일인데, 일주일 전인 지난달 27일에 갑자기 그녀가 도코에게 연락을 했다.

가게야마가 대답했다. 가면으로 가려져서 표정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막연하게 예상했던 위압적인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온화하고 다정한 인상까지 받았다.

"본인의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할까."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열릴 그 모임의 성격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분명해졌다. 일본 땅이 아무리 넓다지만 과연 이런 기묘한 모임이 또 있을까? 도코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오늘 모임에 있어서 여러분이 지켜주셔야 할 규칙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가면입니다."

다행히 의심하는 눈치는 안 보였지만, 지금부터 내일 오후에 해산할 때까지 계속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아사카에 사는 신인 작가 휴가 교스케로 행동해야 한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적잖이 불안했다. 그나마 ‘반드시 가면을 써야 한다’는 규칙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창문 자체에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지만 문제는 그 바깥쪽이었다. 굵은 쇠창살이 세로로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마치 감옥처럼.

이곳은…… 이 저택은, 그렇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관’인 것이다. 과거에도 시시야가 관련되었던 몇 개의 관…… 십각관, 수차관, 미로관, 시계관, 흑묘관과 마찬가지로 그 나카무라 세이지의 손으로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7년 전의 쓰노지마 섬의 ‘십각관’ 사건 이후로 친구가 된 가와미나미 다카아키가 재작년에 단독으로 쳐들어간 구마모토의 ‘암흑관’. 그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저택에서 한 기이한 ‘체험’ 속에서 그가 목격했다던 기괴한 가면 이야기였다.

문에 자물쇠가 없었다.

손잡이와 일체형의 실린더 열쇠는 물론이고 문고리 하나 달리지 않았다.

호텔 객실이 아니니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창문의 쇠창살이나 마치 감옥 같다는 휴가의 말을 생각하면 문에 자물쇠가 없다는 건 역시 이상했다.

"저 안 깊은 곳에 주인의 침실이 있습니다. 안채에는 방이 두 개 있는데 앞쪽을 ‘대면對面의 방’, 뒤의 방을 ‘기면奇面의 방’이라고 부른다지요. ‘귀신의 가면’의 귀면鬼面이 아니라 ‘기이한 가면’의 기면奇面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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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따금 깊이 생각해본단다. 그리고 난 사상가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되었어. 사물들의 이치를 철저히 따져볼 필요를 느끼는 사람에 대해서는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의 화살이 돌아갈 뿐아니라 몽상가로 분류되어버리기 때문에, 또 이런 편견이 사회에서 통념이 되어 있으므로, 불행히도 난 퇴박을 당하기일쑤였다. 이런 생각들을 나 자신 안에 꼭꼭 숨겨두지 못한 불찰 때문이겠지. - P147

사고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은 전혀 없단다. 동시에 데생을 하고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말이지. - P147

테오야, 나라면 차라리 팔이나 다리, 머리가 어떻게 몸에 붙어 있는지를 생각하겠다. 내가 예술가인지 아닌지, 아니면그럭저럭 괜찮은 예술가인지, 그런 문제를 묻기보다는 말이야. - P147

너 역시 네 자신의 문제 속에 함몰되기보다는 질척한 시골길 위의 하늘과 반짝이는 테두리의 회색 구름을 생각하겠지. - P147

무언가를 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단다. 계속 단련하며 숙달에 이르는 중이니, 발전하지 않을 수 없겠지.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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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속눈썹 사이로 자연을 보았을 때 얻게 되는 신비한 무엇이 이 습작들 속에 존재한다는 거야. 사물의 형태들이 색채의 조각들로 단순화된다는 말이지. - P129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다양한 습작들의 색채와 분위기에서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낄 따름이야. - P129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살아 있을 날이 어쩌면 그리 많지 않을지모른다는 사실이야. - P129

냉정한 머리로 추론하고 반성해보면 물론 알 수 있지. 이런 문제에 대해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음을. - P129

또 다른 하나는 비가 그친 뒤 농장의 모습을 담은 습작이야. 벌써 만물이 구릿빛을 띠고 있단다. 오직 이 시기에만 볼 수있는 광경, 뒤프레의 그림 앞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정경이지. 너무나 아름다워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런 풍경이야. - P133

밖에 나가 있는 동안 아주 근사한 인물 몇 명을 보았단다. 간소한 표정이 매우인상적이었지. 예컨대 한 여자의 가슴에서는 관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고된노동의 흔적이 드러났어. 간혹 늙거나 병든 사람을 보면 동정심이 일지만, 때론 존경심이 생기기도 하지. - P135

‘이상하다‘거나 ‘묘하다‘고 표현했을 그런 분위기를 종종 띠곤 해. 돈키호테에 나오는풍차나 낯선 형태의 도개교가 쉴새없이 모양이 변하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환상적인 윤곽을 드러내고 있어. 이런 마을은 저녁 시간이면 물이나 진창, 혹은 연못 위로 불이 밝혀진 창문들이 반사되어 이따금 대단히 유쾌한 모습을핀단다. - P137

얼마나 큰 평화와 공간과 정적이 이곳의 자연에 존재하는 걸까. - P137

이곳에선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일치한단다. 즉 평화가 깃들어있다는 말이지. - P137

이곳에서 나만의 장소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어. - P137

다가오는 사건들은 미리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영국 속담이 있지. - P137

이건 내가 어제 너를 위해 스케치한 밭과는 아주 다른 밭이야. 그런데 여기서 묘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단다. 늘 똑같은 밭인데도, 같은 소재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대가들의 경우처럼 다양한 모습을 띤다는 사실이야. 즉 같은 소재라도 그림이 다르다는 말이지.  - P139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원하느냐 하는 거야. 일종의 내면의 혁신을 시도한다고나 할까. 고정관념을 결연히 떨쳐버리는 거란다. 괜찮겠지. 우린 해낼 수 있을 거야! - P139

라는 말했지. "난 예술가답게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라고. 즉 솔직하고 숨김없는,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삶을 살고 싶다는 말이야. 아니, 어린아이처럼 사는 게 아니라 예술가다운 열의를 갖고 산다는 거지. 삶이 어떤식으로 전개되든 난 거기서 무언가를 발견할 테고, 또 최선을 다할 거야. - P145

틀에 박힌 행동과 상투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은 모든 걸 알고 모든 게 자기 생각대로될 거라 믿는다면 그는 정말이지 잘난 체하는 우스꽝스런 사람일 거야. 세상만사에는 늘 무언가 아주 선한 것만있는 게 아니라 악한 것도 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느낄 수 있지. 우리를 넘어서는 무한한 것, 우리자신보다 훨씬 크고 강한 무언가가 있음을. - P145

자신이 작다는 사실을 못 느끼는 사람, 자기가 단지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야. - P145

만일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주입받은 어떤 개념들, 즉 체면을 차린다거나 일정한 행동 방식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기를 포기한다면 무언가를 잃게 되는 걸까? 나 자신의 경우,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잃게 되건 말건 별 관심이 없단다. 이런 형식이나 개념들은 정당하지 않을 뿐더러 흔히 치명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그저 경험알고 있을 따름이야. - P145

결국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지. 우리의 삶이 그토록 큰 신비임에 비해 ‘예의범절‘ 의 체계는 지나치게 편협한 것이 분명해. 나로 말하면 이 체계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어버렸단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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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카에다
사우디 왕국과 결전을 불사하다. - P133

19명의 9·11 테러 주동자 가운데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카테고회빈 라덴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 - P136

미국이 가장 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포돼 쿠바에 있는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내수용소로 보내진 포로들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인이 가장 많다는 사실을 이 나라 미디어는 굳이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 P136

중동의 패권을 위한
31세 젊은 왕세자의 행보 - P139

석유는 돈이고 돈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현실에서 세계가 원하는 것을 사우디아라비아가 가지고 있는 한 이나라는 여러 국제기구에서 여전히 외교적 중량감을 잃지 않을 것이다. - P147

석유에서 벗어나려는 도박 - P150

세계가 석유로부터 점차 몸을 돌리고 있는 바로 이때 정작 자국의 석유 소비는 점점 느는 추세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생산하는 석유의 4분의 1을 자국 내에서 소비하는데, 이는 곧 정부가 얻을 수 있는 수입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태워 버리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 P154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에서여섯 번째로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인데 전력의 70퍼센트를 에어컨을 트는 데 쓰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조언 하나. 혹시 한여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갈 일이 있다면 겉옷은 꼭 챙겨 가시라.
호텔이 너무 춥다. - P154

미국, 중국, 이스라엘과의 관계 - P156

그런데 안보 면에서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20m맺고 있어도 중국과의 경제적 끈은 더욱 단단해질 것 같다. 중국은 이곳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팔았으며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의 원유수입을 급속도로 늘렸다. - P157

"국가 자본주의라는 중국 모델에 대다수 아랍지도자들은 매료됐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별개로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다수 이 지역 정부들이 추구하는 것이어서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성공한 모델로 칭송받고 있지요." - P157

석유시대의 종말, 이 나라의 운명은? - P160

개혁이 이행되지 않고 세계 또한 석유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새로운 세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과연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 모래? - P161

이 나라의 지도자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경제, 그리고  유능한 군대를 건설해야 한다. 
아직은 그검은 물질로 세계 경제의 바퀴가 잘 돌아가도록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싸워줄 수  있겠지만 이곳의 태양광 패널을 지켜주기 위해 싸워줄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향해 우리는 점점 더 다가가고 있다. - P161

영국,
지리에서 파생된 분리의 정서가 남아 있다 - P162

"영국인들이 오고 있다! 영국인들이 오고 있다!"
-- 폴리비어(미국 독립혁명 당시의 우국지사) - P163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발생한 대학살도 유럽 본토만큼 영국을 크게뒤흔들지는 못했다. 계량화하는 게 쉽진 않지만 이러한 분리의 정서>가 브렉시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 P164

지리적 분리가 만든 발전의 차이 - P164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이뤄진 이두대륙간 충돌에의해 만들어진 선을 따라 그로부터 한참 뒤인 서기 122년에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성벽을 쌓게 된다. - P165

한마디로 이 나라는 현대화된나라다. 이 나라가 이 같은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오랜 시간과 그만큼 많은 〈피〉가 필요했다. - P169

침략자들의 싸움터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기까지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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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중인 인물을 그리고 싶다는 유혹은 늘 있게 마련이지. 동작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누가 봐도전자는 더없이 ‘매력적인‘ 소재임이 분명하니까. - P96

그렇다고 이런 ‘매력‘이 진실을 은폐해서는 안 되겠지. 삶에는 휴식보다 고된 노동이 더 많다는 게 진실이니까. 이런 내 생각을 너도 이해할 거야. 난 진실의 편에서 작업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P96

반 고흐는 1883년에도 데생을 많이 그렸다. 인물 습작과 헤이그의 거리 풍경을 담은 이 그림들은 그가 예나 다름없이 소박한 소재들에 매료당했음을 증명해준다. 이 해 여름에 그는 토탄 캐는 사람들과 감자 캐는 사람들의 습작에 몰두한다. 간혹 수채화나 유화를 내놓기도 했지만, 채색화를 그리려면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데생에 대한 그의 집착은 여전했다. - P99

이 해 가을 시엔과 결별한 뒤 그는 드렌터라는 벽지로 가서 일종의 예술가 마을을 만들 생각을 한다. 반고흐는 황량한 이 지방 풍경에 매료당했지만 자신이 품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오히려 그는 수개월 동안 고독과 박탈감을 견뎌야 했으며, 테오의 송금이 지연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그 후 파리에서 화상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동생 테오와 합류할 생각을 잠시 해보지만 결국 뉘에의 작은 마을에 사는 부모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 P99

수채화에 대해 휘슬러whistler가 한 몇 가지 흥미로운 말이 있어. "수채화는 악마적인 무엇이다"라든지, "그래, 난 이걸 두시간 만에 그렸지. 하지만 이런 걸 두시간 안에 완성하기 위해 수년간 일해야 했어." - P102

난 어떤 특정한 스케치를 완성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기보다는 더 높은 수준의 지식과 일반적인 기술을 습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 P102

새로운 난관들이 생겨난단다. 그러면 이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싸워야하지. - P102

[1883년 3월 11일]
종종 나 자신이 엄청난 부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단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만의 일을 찾았기 때문이야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내 마음과 영혼을 바칠 수 있고 삶에 의미와 영감을 주는 그런일 말이다. - P105

예술이란 인간을 항구로 실어가는 강력한 조류 같은 것이라는 어떤 확신이야. - P105

네게 장담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일이 점점 더 즐거워진다는 거야. 그 때문에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더 큰 내면의 온기가 느껴진단다. 그래서 또 널 생각하게 돼.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건 네 덕분이니까. 어떤 치명적인방해물, 즉 직접적인 속박 없이 말이다. 때론 난관이 자극이 되기도 하지. 이제 일에 더 큰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가 왔단다. - P110

나의 이상은 더 많은 모델들과 함께 일하는 거야. 날씨가 춥거나 일거리가 없거나 배가 고픈 날, 내 아틀리에가 이 불쌍한 사람들 모두에게 피난처가 되어줄 수 있었으면 해. 이곳에 오면 온기와 먹고 마실 것이 있고 돈도 몇 푼벌 수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지금은 이 일이 아주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언젠가는 더 확대되기를 바란다. - P110

이렇게 해서 구도가 잡히면 인물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지. 그러려면각 인물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단다. 실제로 나는 이 안에 있는 인물을 모두 연구했어. 그림은 목탄과 산악 연필, 인쇄 잉크로 그렸지. - P116

[1883년 7월 29일~30일]
어제와 그제, 로스다위넌 부근으로 산책을 나갔었지. 마을에서 출발해 바다쪽으로 가며 넓게 펼쳐진 밀받을 보았어. 브라반드의 밀밭만큼 아름답지는 않아도 아직 추수를 하거나 씨를 뿌리고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있더군. 올해 이런 풍경들을 모두 놓치고 말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때로 무언가 다른 소재가필요하다고 느끼곤 했지. - P126

최근 들어 자연과 정적이 그토록 호소력 있게 다가온 적이 드물었지. 이런 장소에서야말로 우리는 소위 말하는 문명 세계를 완전히 떠나 그 모두에 완전히 등을 돌릴 수 있단다. 때론 그저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런 장소가 필요해. 너도 나와 함께 여기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단다. 도비니의 첫 작품들이 탄생한 시대의 스헤베닝언을 상기시키는 그런정경 속에서 갖게 되는 느낌을 너도 공유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자연 환경은 강력한 힘을 지닌 것 같아. 진짜 남자다운 일을 떠맡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거든.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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