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년필입니다! - 만년필 사용자를 위한 입문서
박종진 지음 / 엘빅미디어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만년필 에세이 1] 내 책상 위의 만년필
사람들은 만년필을 어떻게 보관하는지 모르겠다.
전용 보관함에 한 자루씩 가지런히 넣어 두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용한 뒤에는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제자리에 돌려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책상 위의 만년필은 늘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다.
검은색, 갈색, 파란색, 붉은색, 보라색 만년필 여러 자루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 서로 겹쳐 누워 있기도 하고, 다른 펜 아래에 반쯤 깔려 있기도 한다. 글을 쓰려고 특별히 꺼내 놓은 것이 아니다. 평소 내 책상이 늘 이렇다.
책상에 앉는다고 해서 오늘은 어느 만년필을 써야겠다고 미리 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든다. 종이 한쪽에 선을 그어 보고 잉크가 잘 나오면 그대로 쓴다.
검은 잉크가 나올 줄 알았는데 남색이 나오기도 하고, 파란색인 줄 알았던 만년필에서 청록색이나 보라색 잉크가 나오기도 한다. 어느 만년필에 무슨 잉크를 넣어 두었는지 가끔은 나도 잊어버린다.
그래도 상관없다.
잉크 색을 맞추어야 할 만큼 거창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 내가 하는 일은 대개 소소하다. 종이에 한자를 몇 자 끄적여 보기도 하고,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시나 구절을 옮겨 적기도 한다. 읽던 책에서 눈에 들어온 문장을 써 놓을 때도 있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짧게 메모할 때도 있다.
글씨를 잘 쓰려는 것은 아니다. 꼭 남겨야 할 기록이 있어서 쓰는 것도 아니다. 만년필을 쥐고 종이 위에 획을 하나씩 긋다 보면 마음이 잠잠해진다.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감촉과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책상 앞의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흘러간다.
만년필은 손이 많이 가는 필기구다.
오래 쓰지 않은 펜은 처음에 잉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종이 한쪽에 줄을 여러 번 긋고, 휴지에 펜촉을 대 보기도 한다.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만년필을 가볍게 흔들거나 털어 보기도 한다.
문제는 그럴 때 생긴다.
잉크는 손가락에만 묻는 것이 아니다. 잉크를 채우다가 손끝에 묻고, 펜촉을 닦다가 손바닥에 묻는다. 마르지 않은 글씨를 무심코 짚었다가 손에 번질 때도 있다. 책상 위에 떨어진 잉크를 보지 못한 채 팔꿈치를 댔다가 나중에야 잉크가 묻은 것을 발견한 적도 있다.
오늘도 손가락 끝과 손바닥 세 군데에 잉크가 묻어 있다. 휴지로 닦고 손을 씻어도 손톱 가장자리와 피부 주름 사이에는 색이 남는다. 며칠 지나야 완전히 없어지는 자국이다.
손에 묻은 잉크야 씻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 번은 정말 기겁할 일이 있었다.
잉크가 잘 나오지 않는 만년필을 미련하게도 리클라이너 위쪽에서 털었다. 그러자 보라색 잉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두 방울이 아니었다. 작은 보라색 점들이 스트레스리스 리클라이너 밑의 카펫에 떨어졌고, 비싼 리클라이너 가죽에도 묻었다.
그 순간에는 만년필의 멋도, 잉크 색의 아름다움도, 글을 쓰는 낭만도 모두 사라졌다.
“아이고, 내가 왜 하필 여기서 털었을까.”
물티슈를 들고 정신없이 닦아냈다. 빨리 닦지 않으면 카펫과 가죽에 그대로 스며들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 서둘러 닦아냈지만, 그때의 놀란 마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다시는 만년필을 아무 데서나 털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책상 위에서 펜을 흔들 때가 있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만년필 앞에서는 나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글을 다 쓰고 나서도 만년필을 보관함에 넣지는 않는다. 방금 쓰던 자리에 그대로 내려놓는다. 다음에는 또 다른 만년필이 손에 잡히고, 그 펜도 책상 위 어딘가에 놓인다.
그러다 보면 만년필들은 다시 서로 뒤섞인다.
누군가는 정리가 안 된 책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가지런히 진열된 만년필보다, 쓰다 만 종이와 책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인 만년필이 더 익숙하다.
내 책상 위의 만년필은 감상하기 위해 늘어놓은 수집품이 아니다.
한자를 몇 자 쓰고, 시를 옮겨 적고, 생각나는 말을 끄적이는 동안 매일 손에 잡히는 생활 도구다. 잉크를 흘리고, 손을 더럽히고, 가끔은 카펫과 리클라이너까지 위협하지만, 그래도 책상에 앉으면 나는 다시 만년필 한 자루를 집어 든다.
무슨 잉크가 들어 있는지는 종이에 첫 획을 그어 보아야 안다.
어쩌면 내 하루도 그 첫 획을 그어 보기 전에는 어떤 색으로 흘러갈지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