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솔 르윗전과 국립현대미술관 서도호전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는 생각을 했다
솔 르윗과 서도호는 모두 작품 제작에 있어서 어시의 대리 수행을 활용했지만, 작가의 지향점에 따라 작업보조자의 활용도와 그로 인한 예술적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현대미술에서 작가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어시스턴트를 통해 작품을 제작하는 대리 수행은 관습이 되었지만 타인의 노동을 매개로 작업물을 구현한 솔씨와 서씨의 예술관이 달라 보여 흥미로웠다.
솔 르윗은 지시문을 제공하여, 작업보조자를 실행자로 호명하여 작가의 주체성을 지우고 미술을 공적 영역의 열린 퍼포먼스로 확장시켰다.
이와 반대로 서도호는 어시스턴트의 노동을 사적으로 응축함으로써, 개인의 이주라는 실존적 경험을 물질화했다.
예컨대 솔 르윗전엔 국내 미대생 실행자 13명이 APMA Makers로서 작품에 함께 참여해, 그 결과 자신의 커리어에도 유의미한 기록으로 남게되었지만 (그리고 그 지시문이나 드로잉은 서도호의 색감이나 매체성에 비해 대단히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서도호전엔 사랑하는 딸아이와 개인서사는 있으나 참여한 어시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무엇이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고, 지향점과 활용방식이 다른 것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시스템을 통해 외연을 확장한 솔 르윗의 미니멀한 작품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거대한 달항아리 모티프 지하공간에서 비어있다는 느낌이 들고, 외려 서도호는 시스템 없는 사적 참조를 통해 개인의 감각지형을 고밀도로 수렴해 무언가 꽉 찬 느낌이 든다.
추상이란 거칠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다는 뜻 아닌가. 뜬구름은 부유하는 허적이거니와, 개념미술의 추상성이 무한대로 확장하기 전 어떤 빅뱅의 가능성을 내포한 단계다.
비유컨대솔르윗은 a2+b2=c2라는 수학공식, 그 구조 자체를 보여주었다. 기본 공식은 다양한 예제로 활용될 수 있고 그 해석의 융통성은 관객에게 부여되어있다. 그러나 일단 변수에는 아무런 구체적인 네러티브가 없기에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편 서도호는 성북동 한옥과 뉴욕 아파트와 오미 등교길 등 3^2+4^2=5^2라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다.
아이디어는 작품을 만드는 기계이고 어시는 이 기계를 작동시키는 해석자로 기능하는 솔 르윗의 시스템 속에서, 창안자인 솔 르윗이 남긴 텍스트 기호는 지시문이 되어 어시스턴트라는 타인의 신체를 거쳐 벽화로 시각화된다.
한편 작가의 지시는 명확할지라도, 수행자의 배경적 다양성, 신체 조건, 도구의 특징, 공간 조건 등등에 따라 필연적으로 미세한 어긋남이 발생한다. 고정된 기표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자크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의 시각적 구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실행자가 작품제작에 참여하긴하되, 작가와 어시스턴트는 철저히 제도적 계약으로 묶인 공적관계로 귀속된다. 이러한 방식은 작품 제작을 일종의 악보처럼 기능하게 하고, 하여 작가 사후에도 지시문만 있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새로운 수행자에 의해 재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다만 그 지시문의 특성상, 혹은 미니멀리즘의 특성상 중간 과정이 복잡하지는 않다.
퍼포먼스의 수행은 리움 티노 세갈전에서 선수, 무용수, 배우, 아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에게 의해 구현된 바 있다. 과정에 풍부하게 육화된 경험이 존재한다. 이 개념미술의 창시자가 시스템으로 무엇을 했는지 톺아보면, 대리수행을 통해 미술의 소유권을 해체하고 창조 작업을 끝없는 과정으로, 열린 퍼포먼스 예술로 승화시켜 개념미술의 외연을 무한히 확장하는걸 추구한 듯하다.
반면 서도호의 작업에는 솔 르윗식의 추상적 시스템이나 언어적 지시문이 부재한다. 그의 작업은 집, 이동, 고향 상실이라는 개인의 디아스포라 서사와사적 관계를 참조한다. 기억을 타인에게 온전히 번역할 수 있을까. 성북동 한옥이나 뉴욕 아파트에서 살았던 기억을 타인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그가 거쳐 온 공간을 다양한 매체로 물질화하는 어시스턴트는, 그런 맥락에서, 작품의 개념적 방향성을 해석하는 주체가 아니다. 솔 르윗의 가이드는 선명하고 간결하였고 해석의 주체성은 실행자에게 있었으나, 서도호의 주체성은 작가 자신에게 남겨져있다. 어시는 작가가 도달하고자 하는 완벽한 시각적 재현을 위해 바느질 등등 물리적 공정을 돕는 숙련된 장인이거나 조력자정도에 머문다
다시 말해, 작품의 개념적 해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서도호라는 개인의 사적기억을 물질화하는 물리적 노동에 참여한 이다. 이런 면밀한 통제는 예술의 보편적 외연을 좁히며 서도호는 누구나 재연할 수 있는 열린 시스템으로 나아가는 대신, 오직 자신이라는 특수하고 유일한 주체의 경험과 내밀한 감각을 오차없이 고정하는 데 집중하며, 압축하고 수렴하고영토를 내부로 응축시킨다.
아까 밥 먹어야해서 급히 마무리한 글의 끝마무리. 밥을 다 먹고 나니 아쉬워서 추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뉴욕 솔씨의 개념 미술엔 어시가 숟가락을 얹어 참여할 ‘수‘ 있는 반면, 서작가의 개인 서사에 어시가 참여할 수가 없다. 논리와 형식은 실행자가 함께해 차연을 통해 재생산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에 던져진 단독자의 밀도 높은 퍼스널 네러티브는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영화 이야기 같은 것이다. 보는 이는 자신의 체험에 기대 몰입할 수 있지만, 주인공의 경험과 완전히 같지 않다. 어시도 서도호 본인이 아닌 이상 그의 명령에 따라 대리제작할 수 있을 뿐 그가 그 물성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빚어내고자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관객도 유학, 워홀 등 엇비슷한 해외체류경험에 빗대어 추체험할 수 있지만 작가의 뇌 속에 존재하는 흙내음새와 새소리, 유년시절 학교친구와 놀았던 구체적 상황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