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는 도시의 청소부입니다 읽었다. 원제는 워더무친쭈어바오지에 我的母亲做保洁다.

보통 교과서에서 배우는 청소는 다사오 打扫로, 개인이 방을 쓸고 닦는 행동인 반면, 바오지에 保洁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 관리하는 전문적인 위생 관리 서비스(용역)을 의미한다.

작년에 번역출간된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워짜이베이징콰이띠 我在北京快递), 가 생각나는 급속한 도시화 이면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하는 이들에 대한 논픽션이다. 둘 다 현지에선 23년에 나왔다.

두 책의 차이점은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후자는 내가 북경에서 택배를 한다로, 문학청년이 되고 싶었던 이가 사업실패하고 택배 배달을 하는 개인적 회고록이다. 전자는 나의 엄마라는 3인칭을 사용해 모녀의 두 관점이 투영되어 조금 더 거리감이 있는 다큐나 르포다. (-에 가깝다, 라는 표현으로 문장을 종결하고 싶었으나 요즘 지피티가 다듬은 어설픈 글에 너무 많이 보여서 순간 불쾌해 사용하지 않았다. AI시대의 워터마크 자기검열이다)

택배기사나 청소부나 둘 다 남의 건물을 출입하고 공공장소에서 이동해야하는 일이다. 필연적으로 타인과 조우하고 남의 시선에 민감해지며 오래 일할수록 사회의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 차이는 후자는 독서를 바탕으로 자기가 관찰자가 되었고, 전자는 딸이 엄마의 구술을 바탕으로 조금 더 해석을 첨가했다.

제도적 보호장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저임금에 숙소 환경도 열악.. 통제도 엄격하고 휴일도 없어서 대부분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 물론 그렇게 떠나는 사람들은 보통 엄마보다 젊은 사람.. 근무 조건이 아무리 나빠도 엄마가 예전에 했던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 라는 p57를 읽을 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진단한 사회문제가 생각났다. 자본주의에서의 싸움은 부자와 빈자의 싸움이 아니라, 빈자와 더 빈자의 투쟁이라는, 그 해석이 유효해서 전세계의 반향과 칸의 인정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더러운 휴지를 바닥에 그냥 버린 것을 보고 장씨 아주머니가 가로막고 한마디하자 다음날 바닥에 대변을 보는 것으로 복수당한 p218 일화는, 택배기사에서도 비슷하게 세련된 상업시설에 택배상자를 얹은 구루마를 끌고 가자 건물관리인이 막았다는 에피소드가 겹쳐 보였다. 시설을 만든 이나 시스템과 구조를 설계한 이는 모두 어디가고, 사회 취약계층끼리 다툰다.

아무리 배움이 부족하고 농촌에서 상경했어도 일을 하게 되면 서당개가 풍월을 읊듯 자기가 속한 시스템이나 거시적 경제현상의 이치에 대해서도 터득하게 된다. 석탄 채굴 산업에 대한 이해p156-7가 그렇다. 이는 저임금 노동을 하는 이들이라고 무식하지 않다는 걸 방증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영화 어디에선가, 아마 내가 남아있는 날들이었던거 같은데, 영국 엘리트 계층이 바칼로레아급으로 난해한 질문을 집사(안소니 홉킨스 분)에게 던지면서 대답 못하는 것을 보고 무시한 장면이 있었다.

택배기사에는 없는 부분은 노화로 인한 예견된 상실을 체감할 때. 노화의 흔적을 타인을 통해 발견하는 p260-261이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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