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두 검사> 보았다. 1937년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교도소 반국가체제 정치범을 면회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임용된지 석 달 된 젊은 검사의 잉기다. 2025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프랑수아 샬레상 수상작이다.


이 영화를 보고 이동진이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칸 영화제 수상작의 공통분모는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원어는 황금대추야자상)을 탄 작품에는 응축된 각본을 속사포처럼 뱉어내는 독백신이 있어 정서을 정밀하게 묘사하는데 화자의 분노는 감정을 오래 축적한 결과라는게 상황 속에서 드러난다.


최근 4개년도만 생각해봐도 22년 75회 슬픔의 삼각형에서 칼(해리 디킨슨)이 모델 여친의 페이 미루기에 대해 화 내는 장면, 23년 76회 추락의 해부에서 잔드라가 남편의 실패에 대해 화 내는 장면, 24년 77회 아노라에서 마이키 매디슨이 아들과 엄마에게 화 내는 장면, 25년 7회 그저 사고였을 뿐에서 납치범 처리에 대해 옛 동료들과 싸우는 장면 등이 있다. 특정 계기가 있어서 폭발한 것이지 사실 이전부터 이어진 일련의 사건이 밑바탕에 깔려 있고 한 가지 사실을 말하면서 그보다 더 큰 메타담론, 네러티브, 어젠다를 다룬다. 이런 중의적 대화는 작게는 브래드 버드의 아이언 자이언트(1999)에서도 확인된다. 엄마와 아이가 테이블 위에서 대화를 하지만 아이와 로봇의 대화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두 검사>에서도 검찰총장와 주인공 알렉산드르 코르네프 신임감찰검사 대면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러시아 실력이 그정도로 좋지는 않아 청취에 살짝 놓치는 부분도 있었지만 원어도 상당히 잘 다듬은 좋은 문장이다.


이동진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가? 캐릭터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의 인터스텔라 리뷰 때 처음 느끼기 시작했는데 영화를 인물 중심으로 분석한다. <두 검사>는 크게 오프닝-교도소 면회-기차 이동-검찰총장 독대-기차 이동-엔딩으로 여섯 신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교도소에서 기다리는 것과 검찰총장을 위해서 기다리는 것은 권력자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모스크바로 기차 이동할 때는 전쟁 때 왼다리 잃은 상이군인과 하층민들과 함께 삼등칸에 탄다. 상이군인은 레닌을 만났던 일을 말하고 공산주의의 정의에 대해 말하지만 주인공은 피곤해서 잠에 든다. 교도소에서는 존경하는 옛 원로당원의 설교를 듣고, 모스크바에서는 존경하는 검찰총장에게 자기가 설교를 한다. 기차를 타고 브랸스크로 돌아갈 때는 엔지니어와 함께 좋은 1등칸에서 타고 술을 마셔 잠이 든다. 교도소와 검찰청에서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 수 있고 웃고 있는 기회주의자가 보이고 문이 많고 최종 결정권자 아래 억압적인 비서들이 있다.


어떤 인물이 이런 상황 속에서는 A인데 다른 상황 속에서는 -A다, 여기서 무엇을 드러낸다, 이런 식의 구조적 분석과 맥락적 사고를 이동진은 좋아하는 것 같고 그래서 <두 검사>에도 만점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칸느는 잘 다듬은 중의적 속사포 각본을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주인공 알렉산드르 코르네프 역의 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는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배우 중 가장 특이한 코를 갖고 있다.


얼굴은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의 토비 맥과이어가 생각나는데


코는 중간이 움푹 들어가 입면이 여럿 보이는 조각적 코다. 에곤 쉴레의 조형성 같기도 하고 프란시스 베이컨의 살점을 닮기도 하다. 보면 좀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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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이나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를 보는 것이 더 흥미로운 콘텐츠가 있다. 최근 개봉 영화와 국현미 전시를 보고 커넥팅 닷으로 연결해 옛 다큐영화 예시도 함께 들고와 생각해본다. 작품에 몰입하다 한 발자국 떨어져 무대와 그 주변을 보는 소격효과를 준다. 감상하는 주변과 제작도 감상의 일부가 된다.

1. 극장의 시간들(2026)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 감독의 옴니버스식 단편영화 세 편이다. 재작년 2024년에 이명세 감독와 심은경을 오랜만에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옴니버스 4편의 더킬러스처럼 느슨한 테마를 공유한 채 감독 스타일대로 재해석한 단편모음이다. 극장 뒷편 영사실과 CCTV로 보는 극장전경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나오며 세 감독 모두 씨네큐브 광화문의 관객석 신을 연출에 포함하여 극장의 의미를 묻긴하나 개중 특히 윤가은 감독이 소격효과를 잘 사용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이어 청소년을 자연스럽게 화면에 담는 윤가은 감독은 우리집 우리들 세계의주인으로 진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극장의 시간들에 수록된 <자연스럽게>에서는 고아성 배우를 7명의 초등고학년 배우를 데리고 성북구에서 영화를 찍는 감독으로 연출한다. 처음에 영화라고 생각했던 도입부 삼삼오오 꺄르르꺄르르 워킹장면에서 카메라가 흔들리고 컷! 하는 디렉팅이 들어오더니 감독은 거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고아성은 윤가은의 페르소나며 아이들에게 디렉팅하고 소불고기 정릉점에서 점심 먹고 자연스러운 청소년 연기란 무엇인지 아역배우들에게 물으며 관객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전한다.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는 아이들. 카메라가 없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아이들. 그런데 카메라를 두고 찍어야 하는 감독. 테이크가 아닌 상황에서만 감독이 원하는 톤이 나오는데 인위적인 디렉팅에선 그 자연스러움이 묻어나지 않는 패러독스. 마지막 관객장면에서 한 번 더 소격효과를 주었다.

2. 국현미 데이미언 허스트에서 다이아몬드 8천여개 18세기 해골과 눈이 불쌍한 2번째 희생자 상어시체와 잘린 소머리와 파리떼를 지켜보며 사진 찍는 수많은 군중을 본다. 사진 촬영하는 이들마저 전시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듯 하다

3. 2016년에 러시아 영화감독이 평양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다큐로 찍고 싶었는데 검열때문에 보여주고 싶은 것만 찍게하는 통에 촬영장 메이킹영상을 몰래 찍어 북한 영화판의 모습을 드러냈다.

첨언하면 극장의 시간과 슬라이드스트럼뮤트에 문상훈이 단역으로 등장한다. 광화문 씨네큐브 극장에 십분 이상 늦어서 입장을 거부당하는 반차낸 직장인으로 마라삼계탕이라는 희대의 괴식을 먹을 계획이 있었다.
슬스뮤에선 공연무대 사회자였다
어젠 빠더너스 채널에서 홍콩 필름마켓 2박3일 가서 영화 네 다섯 편을 보며 좋은 코미디영화를 수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브이로그가 올라왔는데 칸까지 가봤다는 것과 영화에 관심있는걸 처음 알았다.
뉴미디어 유투브로 얼굴을 알렸으나 레거시미디어에도 관심이 있구나. 그런데 옛날에도 단역배우들은 모두 영화과 연기과 졸업생이 아니고 알음알이로 영화판에 들어와 먼저 시장성을 입증하고 커리어를 쌓았다. 독특하지만 틀린 길은 아니고 자기 자신이 길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문상훈 캐릭터는 현봉식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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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반양장) 창비청소년문학 95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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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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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최종태 전시관은 못 참지



진중한 무언의 장송곡을 닮은 서소문성지박물관의 그 최종태의 작품이라면



대전 쿨타임이 많이 찼다


카이스트 미술관도 가야하고, 대전시립도, 그 옆의 이응노 상설전도


@daejeon_museumofart님의 이 Instagram 게시물 보기: https://www.instagram.com/p/DWkbRtbD6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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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번거로운 설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이야기를 전해본다.

서양과 동아시아 언어, 음식의 차이도.


아래 일본테레비방송 썸네일은 강한 봄바람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하루 노 아라시라 읽고 봄춘春+의+일본재정의한자 아라시 산 아래 부는 강한 바람嵐의 합성어다.


그 아래 한자"被害相次ぐ"를 보고 "피해상이 계속된다"라고 읽길래


아니다 히가이+아이쯔구(피해+상차)다라고 설명했더니


피해상+계속 차(차례할 때 다음 차次) 아니냐 네이버사전에 찾아봤더니 없다고해서


相次ぐ의 상相은 서로 상(상부상조) 혹은 바탕 상(진행상)이고 이렇게 붙여쓴다 부연했고


이에 그럼 관상은 무엇이냐 관상은 보는 거 아니냐 피해상도 보여지는건데 라고 되물어


형상과 모양을 이르는 상은 狀이며 피해상황狀況, 복구상황을 줄여서 피해상被害狀, 복구상復舊狀을 쓸 수 있고


관상觀相은 사람의 본바탕을 본다는 뜻이며


코끼리 상象 혹은 모양 상像을 사용해 형상(形象/形像)을 쓰지만 초상(肖像)처럼 사람 인 변을 써야 더 이미지에 가깝다고 하니 


한자사전의 相풀이에 모양형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더 적합한 어휘가 있다, 그러나 나도 사실 잘 모르겠으니 주어진대로 쓰자고 했다. 동아시아 한자는 굳어진대로 쓰는 것이다고 손을 털었다.


그런데 이 일화를 몇 시간이 지나 밥 먹으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직접 빚은 간장과 직접 담근 김치를 사용하는 정말 맛있는 한식 밥상이었다.


손님들이 비법이 뭐냐 주인에게 물어봐도 답은 해주는데 별 영양가가 없었다. 같이 숟가락을 뜨던 다른 사람이 그 레시피를 따라해도 어차피 집에서 이 맛을 못 낸다고 했다.


흑백요리사2에서 선재스님이 안성재 셰프에게 극찬을 받은 비법은 직접 담근 장에 있었다. 양적 훈련을 받은 파인다이닝 요리사가 따라해도 시판 양념을 사용하는 이상 그 맛의 오묘한 깊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화려한 칼질은 묵은 장 앞에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김치 버무리고 장 담그는 비법은 마치 서예처럼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하다보면 어떻게 되고 경험적 노하우가 쌓이는데 말로 전하기 어렵고 과학적 통계를 내기도 어렵다.


르꼬르동 블루에서 아무리 레시피를 데이터화하고 계량화하려고 해도 한식은 그렇게 하지 못해 엄마 손맛, 할머니 손맛은 늘 비밀로 남는다.


밥을 우물우물 씹고 이 대화를 들으면서 이런게 서양이 바라보는 동아시아 글자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한자어휘를 설명하기 어려운지도. 왜 이 상은 되고 저 상은 안되는지 설명하는게 복잡한지도.


유럽어는 문법을 기준으로 표준화, 레시피화가 되기에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고

동아시아어는 거의 전적으로 개별 사례에 천착하기 때문에 경험적 학습이 핵심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유럽어는 대개 그리스로마의 뿌리에서 출발해 알파벳을 공유한다. 초심자에게 전미래니 미래완료니 대과거니 미완료니 하는 문법이 어려워보이지만 로망스어는 시스템 안의 변주다. 프랑스어를 배우면 스페인어를 안 하는건 사실 게으른 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친연성이 높다.


그런데 동아시아는 다르다. 서양인이 보기엔 모두 한자를 쓰는 듯이 보인다. 한국은 한글을 쓰지만 한자가 기반이니 마치 알파벳을 쓰지만 내용은 아랍어에서 온 튀르키예어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經濟는 한국어로 경제, 중국어로 찡찌, 일본어로 케이자이, 광둥어로 껭자이, 베트남어로 낀 떼니 다르지만 유사한 발음이고 간체经济, 약자経済, 번체의 차이가 있긴 있으나


대개 발음이 ㄱ-ㅈ로 이어지는게


마치 유럽언어에서 같은 그리스어 어근의 이코노미(οἰκονομία)를 강세와 표현만 살짝 바꿔서 읽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스페인어: economía

이탈리아/포르투갈어: economia

프랑스어: économie

루마니아어: economie

독일어: Ökonomie

덴마크, 노르웨이어: økonomi

러시아어: экономика

폴란드어: ekonomia

크로아티아어: ekonomija

처럼

이런 어형적 유사패턴, 문법적 유사패턴을 보면 EU의 언어는 수는 맣으나 계통별로 방언같다. 시스템, 즉 표준화된 레시피 학습이 관건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데 한자는 그렇지 않다. 개인이 알아서 선인들이 빽빽하게 심어놓은 고전의 숲을 헤쳐나간다.


글자가 겉보기에 통일되어 보여도 유럽보다 훨씬 더 변주가 많고 지역적 다양성이 많다. 어떤 어휘는 서로 공유하고 있으나 자신의 나라 혹은 지역에서만 쓰는 어휘도 많고 발음도 까탈루냐어와 체코어의 간극같은 동베이 방언과 쿤밍의 방언의 간극이 있다.

알파벳을 배우고 상, 태 등의 문법에 익숙해지고, 로망스어군의 다양한 시제표현, 독일어군의 분리/비분리전철과 관사, 슬라브어군의 이동왕래발착동사와 어근 같은 것을 하나 습득하면 해당어군의 다른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것과는 한자는 다른 것 같다.


물론 한국인이 일본어의 경어표현이나 어미를 배우는 것은 중국인이나 서양인보다 쉽고, 한자를 아는 일본인이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우나 겉모양만 읽을 수 있지 그 정확한 표현은 잘 몰라 찾아봐야하는 상호 교환이 안되는 한자어가 많다. 


예컨대 일본어로 質入(시치이레)는 질입이지만 한국인도 중국인도 한자만 보고 무슨 말인지 모른다. 한국어로는 저당잡히다는 뜻이고 중국어로는 디야抵押인데, 한자는 저압이다. 


그러니까 한중일 세 명이 같이 있을 때 일본인이 질입質入이라고 한자를 쓰니 중국인이 한국인에게 이거 抵押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면 한국인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서예를 배우는 이는 스승의 가이드는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쓰이는 단어, 저런 상황에서 쓰이는 단어, 이런 획수 저런 획수 이런걸 계속 써보면서 알아서 배운다. 많은 고전의 예시를 통해 스스로 터득한다.


마치 장을 담그는 이가, 사찰음식을 하는 이가, 습도, 햇빛노출정도, 관리법 등 수많은 변수를 매일의 상황 속에서 체득하는 것과 같은데 행동으로 배운 걸 말로 전하기 어렵다.


그 결과 동아시아 어휘를 남에게 쉽게 구조적으로 설명하기는 난해하고 배우는 자는 아리송하다. 서양어만큼의 깔끔하고 체계적인 문법은 없고 평생 다 못 읽는 고전원문의 케이스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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